영원회귀의 신화 신화 종교 상징 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 / 이학사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과 속>과 더불어, 엘리아데를 이해하는 가장 유익한 입문서 중 하나다. 엘리아데가 개진한 종교학 방법론은 이제 학계에서는 고전적인 것이 된지 오래다. 한때 엘리아데는 가장 잘 팔리고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하나였다. 그의 학술서뿐만 아니라 그가 학술서를 집필하는 짬짬이 선보였던 소설들까지도 열광의 대상이 됐던 시기가 있다. 그저 국내에서 일회적으로 그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엘리아데의 생각을 엿보고 공명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전세계적인 열풍이었던 적이 있다. 그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이른바 엘리아데 신드롬의 기원이 된 책이 바로 <영원회귀의 신화>다.

이 책이 처음 프랑스에서 나왔을 때 학문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독서대중에게도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인 방법론을 일종의 모형처럼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인기는 한동안 사그라질 줄 몰랐었다. 지금도 상상계 일반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  <영원회귀의 신화>는 필독서로 군림하고 있다. 루돌프 오토의 <거룩한 것의 의미> 같은 책의 딱딱함과 차별되는 부드러움이 이 책의 장점이다. 게다가 이런 적은 분량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룬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역사에 관한 종교학자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학술서의 꼬리표를 단 책들이 주는 부담감을 이 책에서는 느낄 수 없다. 좀 지칠 만하면, 독자의 관심을 잡아끄는 신화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종교학 책들을 읽는 재미는 그런 데 있을 것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영원회귀의 신화>의 한국어본은 두 종이다. 하나는 엘리아데 밑에서 종교학 공부를 했던, 한국 종교학계의 거목인 정진홍 교수가 오래 전에 번역했던 <우주와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판을 저본으로 삼은 이 <영원회귀의 신화>라 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루마니아 태생의 뛰어난 인문학자 중 단연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한 인물이다. 루마니아의 동방 전통은 서구 지성계에 나름의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인맥주의과는 무관하지만. 이오네스코, 에밀 시오랑 등이 모두 루마니아 태생이다. 인접한 불가리아의 크리스테바 같은 인물도 동유럽 지식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고. 아무튼 한국어판 <영원회귀의 신화>는 일독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정진홍 교수의 <우주와 역사>도 좋은 번역본이었다. 활판식자로 인쇄되어 고르지 않은 인쇄감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번역 자체는 문제가 없었고 아주 좋았다. 엘리아데는 코스모폴리탄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탄트리즘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 머물며 요기(요가수행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엔 전세계의 최고 지성들을 흡수하는 미국의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과거 <우주와 역사>는 그런 미국생활 중에 프랑스에서 발표한 것을 다시 손질해 발표한 책이다. 그래서 최종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글쓰기가 대중 지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난해한 학술서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술하게 씌어졌다는 말도 아니다. 맘잡고 읽어내려가면 충분히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열려 있다는 말이다.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지식인의 글에서 여전히 얻을 수 있는 보화가 그득하다. 그의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형태론>(한길사)과 <종교사 개론>(까치글방)은 같은 책이다. 전자는 엘리아데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대표적인 국내학자 중 하나는 이은봉 선생의 번역이고, 후자는 이재실이란 그르노블 대학 유학파의 번역이다. 전자는 독일어판을 옮긴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판을 옮긴 것이다. 특히 후자에는 국내에서는 거의 만나보기 힘든 조르주 뒤메질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성과 속>은 이은봉 번역판(한길사)과 이동하 번역판(학민사)이 나란히 존재한다. 물론 저작권 문제로 시중에는 하나의 책만 돌겠지만, 이렇게 엘리아데의 책들은 여러 번역판본이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엘리아데의 소설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벵갈의 밤>(세계사)와 그밖의 다른 소설 한 권이 전부다. 예전에 나왔던 <금지된 숲>과 같은 작품은 아직 재출간되고 있지 않다. 엘리아데의 소설이 의미 있다. 왜냐하면 그의 내적인 세계가 창작과 학술 영역에서 어떻게 공명하는지 모여주는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상상력에 따라 창조한 세계가 실제 학술 영역을 탐구하는 동안(이를테면, 필드워크를 하는 동안) 실제로 존재하고 그 현상이 딱 맞아떨어지는 놀라운 경험한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성의 감흥이 어떻게 판이한 두 영역을 넘나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그의 소설작품에 나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사상을 소설로 표현되는 것은 드물지 않다. 사르트르 같은 이의 철학도 소설로서 더욱 쉽게 대중적인 지명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여진 사실이다. 메를로퐁티 같은 현상학자도 자신의 철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창작을 하는 것이란 생각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메를로퐁티가 소설을 썼다면, 정말 그가 문학작품을 남겼다면 얼마나 흥미로왔을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된다.

각설하고,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의 신화>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엉성하게 접근한다면 오해를 불러올 책이기도 하다. 엘리아데는 엄밀한 학문적 방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학적 방법론을 "종교현상학"이라 한다. 이를테면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사람,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라는 관용구를 세계 각지의 다양한 종교현상을 들춰봄으로써 설명하는 이 책은, 인류역사의 원형을 밝히는 일종의 실험적인 저작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반면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만 그 비밀스런 세계의 전모를 드러낸다. 적은 분량으로 방대한 인류사의 한 면을 통시적으로 觀하려는 그의 야심찬 손길이 경이롭기만 하다. 그를 "종교사가"로 부르는 것도 그의 탐구가 공시적인 범위보다 통시적인 범위에서 진행되곤 하기 때문이란 점을 참고로 밝혀두고 싶다.

엘리아데의 다른 책들을 읽기 위해서 <영원회귀의 신화>와 <성과 속>을 먼저 집어들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적 심성이 매말라버린 시대에 여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잔한 기미는 띤 것은 이미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도 종교에 몰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부정적인 것일까. 종교에 관한 관심이 이제 생활과 일상 속으로 밀착해 들어온다. 종교적 심성을 지닌 종교적 인간의 뿌리를 탐사하는 데 이만한 도구가 있다는 건 참 위안이 된다.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를 읽고 나서, 엘리아데의 종교학 방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서책을 보려 한다면, <이미지와 상징>(까치글방)과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문학동네) 등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제목이 죽이지만, 자료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독서에는 다소 장애가 될 것이다. 완벽하게 조리되어 잘 익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지와 상징>은 그가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개진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몇 가지의 테마 별로 아주 맛깔스럽게 요리하고 있어 누구의 입맛에도 잘 맞으리라 생각된다. 엘리아데 책들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많다. 이학사에서는 시카고대학에서 그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몰두했던 <세계 종교 사상사> 3권을 번역 중이다. 그리고 조만간 엘리아데의 테마별 성찰이 돋보이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간>이란 책도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엘리아데의 다양한 글을 풍요롭게 접할 수 있는 마당이 아주 널직하게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를 읽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반어적인 의미를 알고 싶으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 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마치 수호지에 등장하는 반금련의 이야기만을 따로 뽑아낸 본격 성애 문학 -_- <육포단>처럼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의 절세 미녀인 레메디오스의 이야기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레메디오스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기 위해 낡은 지붕위로 올라갔다가 그녀와 이야기까지 하던 도중 지붕이 무너져 추락해 죽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남자는 결국 레메디오스가 목욕이 끝나자마자 죽었다. 소설의 작가 마크 빌라는 이 레메디오스를 바라보는 수많은 남자들 중의 한 명이 되어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마르케스의 소설이 주는 정치적 메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바라보는 시점의 거리에 따라 한 여인이 얼마나 다양하게 조명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그 소설적 형상화에만 그의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성애문학은 아니다. 오히려 심리소설에 가깝다고 할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또한 마르케스의 그것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으로 설정되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 마콘도에 미치는 파장을 묘사했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출발한 소설이 마찬가지로 짊어져야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마크 빌라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정과 그 흐름에 대해서만 천착하는 작가인 것이다.

이러한 시점이 '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는 낡은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최근까지도 기존의 평론가들에게 이 소설이 그렇게 폄하되었고 악평을 받았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심리소설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도 이처럼 독특한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행간에서 묻어나오는 작가의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동경과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성찰들은 단순히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애타는 심적상태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성별을 초월하여 독자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건 전환의 국면마다 효과적인 복선을 도입해 작은 노력으로도 커다란 반전을 곳곳에 숨겨놓은 재주는 이 작가의 역량이 명백히 과소평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지금껏 남미 문학의 거장이라 불려왔던 마르케스에서 출발했지만 마크 빌라는 청출어람으로 그를 능가하고 있다.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감각의 박물학 > 복수보다 즐거운 유희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수보다 즐거운 유희

-마르께스에 대한 단상.


마르께스에게 바쳐진 헌사 중 최고의 것은 쿤데라의 입을 빌어야 했다.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지엽말단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마콘도에서 아이들은 양탄자를 타고 다니면서 날아다닌다. 나는 것이 필요하면 나는 것을 꿈꾸면 된다. 비행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꿈꾸면 된다. 마콘도는 가난한 땅이다. 그래서 신화도 많고, 전설도 많고 방귀 소리도 크다. 거기에 돼지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엄청난 방귀로 꽃들을 질식시켜 죽여 버리는 거대한 사나이가 있다 해도 따지지 말 일, 송아지 한 마리와 쉰 개의 오렌지, 8리터의 커피와 30개의 날계란, 두 마리의 돼지와 한 다발의 바나나, 네 상자의 샴페인을 먹어치우는 여자가 있다 해도 따지지 말 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수도 있고, 한 여인이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도 그곳에서는 극한을 향해 과장된다. 중요한 건 표현과 현실의 일치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즐겁자는 것. 그것이 게임의 논리요 언어의 논리가 아닌가. 생각해보시라 아무리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겠는가.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을 정도로 붐비는 곳이 있다는 말인가. 해서 하는 말인데 즐겁자는 게 말이니 따지지들 마시길.


극한의 아름다움, 그 강철의 무지개 앞에서 죽음이나 삶도 무게를 잃어 버린다. 마콘도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열락의 신음은 무덤 속의 유골마저 놀라움에 떨게 한다. 그런 강렬한 매혹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몸, 탕진을 예감하며 떠는 몸, 죽음을 예감하며 한 사나이가 미녀 레메디오스의 아랫배에 손을 집어 넣는다. 이럴 때 에로티즘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 에로티즘은 지긋지긋한 개체성을 탈피해 어떤 합일과 섬광의 순간을 꿈꾸지만 그게 될 법한 일인가. 나는 너라구?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나는 지긋지긋하게 나다. 아닌가? 대체 어떤 탁월한 수단과 방법으로 네가 나이며, 내가 너란 말인가? 하기야 개체가 제 윤곽을 허무는 일도 있긴 하겠다. 가령 죽음 같은 거 말이다. 세상이 내 허물어진 몸에 확, 침투해서 비로소 내가 세상이 된다. 그런데 나는 없다. 그때 난 죽었으니까. 암만 생각해도 내가 네

가 되는 경우를 알지 못하겠다. 약의 힘을 빌기도 어렵고.


<진정한 기억은 기억의 환영 같았다. 반면에 거짓스러운 기억은 너무도 그럴 듯해서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았다.> 라는 마르께스의 구절은 곱씹을 만하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말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유전될 뿐 진화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가 욕망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조작할 수 있는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까지는 인간은 아랫도릴 싸쥐고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대체 역사는 발전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늙지 않는 욕망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은 아닌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욕망과 함께 순환하는 땅은 마콘도이다. 마콘도, 낙원의 땅, 저주의 땅, 대홍수의 땅, 전쟁과 살육의 땅, 위대한 어머니의 땅. 


욕망이란 렌즈를 통해서 본 미래는 뻔하다. 기껏 날아보았자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다. 욕망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안해냈다면 그는 대단한 히트상품을 발명한 셈. 어떤 고약한 신이 욕망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도 않으면서 영생만을 준다면 그보다 지독한 테러는 없을 것이다. 욕망을 좌지우지하고 그것을 제멋대로 주물러 가지고 놀 수 있는 막강한 힘과 함께 영생을 주지 않는다면 영생은 감옥이다. 담배는 수백 보루가 쌓여있는데 불이 없는 감옥처럼 끔찍한 감옥이 있을까. (인생이 짧은 건 그나마 다행이잖은가.)


프랑스의 한 출판사는 마르께스에게 물었다. 그는 유머스럽게 대답했다.

- 당신 최대의 미덕은?

-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능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쿨에이드중독자 > 몇 가지 의문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이몬드 카버 원서가 도착했다. 이번에 나온 문학동네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은 카버의 초기 단편집이다. 내가 처음 접한 카버의 책은 지난 95년도 출간된 집사재 판이었는데,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단편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당연히 문학동네 판을 소장 욕심으로 사들인 뒤 당장 찾아보았던 것은 그 단편인데, 목차에 따르면 실망스럽게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읽다보니 '목욕'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같은 캐릭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의아스럽게도 결말이 뚝 잘린 것처럼 되어 있었지만.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집사재 판을 사들여서 비교해본 결과 군데군데 문장이 바뀌고 줄어들고 결말 부분은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끊겨 있었다. 이 자식들.. 이 자식들이! 설마 마음대로 작품을 줄이고 재단했단 말인가. 나는 열이 올라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마존에서 난생 처음 원서를 주문해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으나 책은 한참이나 오지 않고 등록된 내 카드만 긁어댔다. (배송료, 책값등이 한 권 한 권 발송될 때마다 긁히면서 문자메시지로 전송되어 왔다. 속 쓰리게스리) 오늘 아침 도착한 무지막지한 종이 박스안에는 단단히 포장된 카버의 처녀 단편집,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와 문제의 단편집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그리고 단편 선집 'where I'm calling from' 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득달같이 읽어본 결과.. '목욕'이라는 그 제목은 오역이 전혀 아니었다. 원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도 'The Bath'로 수록되어 있었고, 내용 역시 문학동네 판처럼 결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집사재 판은 뭐지? 그럼 그 자식들이 작품을 마저 썼나..? 내 머리는 알쏭달쏭한 질문들로 가득했는데, 후기에 출간된 선집 'where I'm calling from'을 보니, 'A Small, Good Thing' 이라는 단편이 또한 같은 구조, 같은 내용, 같은 캐릭터로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내가 집사재 판에서 읽은 그 단편 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범인은 카버! 자신이었단 말인가. 결국 나의 의문은 내가 무시하고 읽지 않은 집사재 판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설에 친절하게도 설명되어 있었다. (아마존에서 주문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읽었더라면!)

인용 :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중

초기 단편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하는 이야기'와 후기 단편선집 '대성당'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에 수록된 '목욕'과 후자에 수록된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을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적으로 전자는 짧고 후자는 길다. 중간까지 내용은 거의 같다. 생일날 아침에 스코티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차에 치여 입원한다. 양친은 병원으로 달려가서 아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주문해둔 케이크를 찾으러 제과점에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며칠 뒤 아이는 죽어버리고 부부가 슬픔을 참고 있을 때, 케Ÿ?찾으러 오지 않은 것에 화가 난 제과점 주인의 전화를 받는다. 아이가 죽은 것을 모르는 그는 심술궂게 자신을 밝히지 않고, 스코티에 관한 일이요, 라는 말을 반복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했던 전자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후자의 단편에서 부부는 제과점을 떠올리고 분노에 차 쳐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 따끈따끈한 결말이 펼쳐진다. 더 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자제하자.

(그런데 왜 집사재 판은 다른 단편은 초기 단편 그대로 실어놓고, 이 단편은 후기 개작본을 실었을까. 역자가 비교해보고 같은 소설이니까 완성도 있는 것을 싣자고 한 것일까. 헷갈리게 스리)

이 무지몽매한 의문 때문에 내가 사들인 원서 세 권과 문학동네판 두 권, 집사재 판 1권에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이처럼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개작하여 중복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억울하냐고? 아니. 레이몬드 카버는 내가 생각한 대로 천재였다. 원서를 펼쳐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원래 위대한 문학작품은 쉬운 언어로 되어 있는 법이거던.

(원서가 쉬운 단어,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데 흥분한 상태)

첨언. 특히 난 저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가 좋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처음으로 '이런 소설은 절대 쓸 수 없어'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어, 이렇게 쓰면 잘난 척 같잖아.. 키킥. 그게 아니오.. 감탄일 뿐이오) 군더더기 없고, 인간미 넘치는.. 원서에서도 그 느낌이 그대로라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처:http://blog.naver.com/th3030/120003995291

- 역사상 최고소설, <돈키호테> -

중세 말 17세기 기사계급의 몰락을 풍자적으로 그린 <돈키호테>가 역사상 최고의 소설로 뽑혔다고 영국 BBC방송이 2002년 5월 7일 보도했다. 노르웨이의 노벨 연구소와 북 클럽스가 세계 50여개국 출신 100명의 유명작가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스페인 출신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50%가 넘는 득표율로 이 같은 영예를 안았다고 방송은 전했다. 세르반테스는 문학에 맞는 문체를 완성했으며 돈키호테는 세계문학의 첫번째 위대한 소설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번 설문에 참가한 작가는 살만 루슈디(인도)와 노먼 메일러(미국), 밀란 쿤데라(체코),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등 거장들이다. 노벨 연구소 등은 이들 작가에게 세계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소설 10편씩을 꼽아달라고 부탁했으며 이를 토대로 최고작품 및 100대 작품을 선정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가운데 가장 많은 4편의 작품이 올랐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영국)와 프란츠 카프카(체코), 톨스토이(러시아)가 3편으로 뒤를 이었다. 이밖에 구스타브 플로베르(프랑스)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호머(고대 그리스), 토마스 만(독일), 버지니아 울프(영국) 등도 2편씩 포함됐다.

아래는 노벨연구소가 세계적인 작가에게 의뢰하여 선정한 100대 작품목록이다.

- 그리스 -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디세이>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 <메데아>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이탈리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베르길리우스, <아에네이드>
단테, <신곡>
보카치오, <데카메론>
지아코모 레오파르디의 '시집'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고백>
엘자 모란테, <이야기>


 

 

 

 

- 프랑스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몽테뉴, <수상록>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
스탕달, <적과 흑>
발자크, <고리오 영감>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감정교육>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루이-페르디낭 셀린, <밤의 끝으로 여행을>
알베르 카뮈, <이방인>
사무엘 베케트, <삼부작 : ­몰로이 · 말론 죽다 · 이름붙일 수 없는 것>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 영국 -

초서, <켄터베리 이야기>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리어왕> <오델로>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의견>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조지 엘리어트, <미들마치>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찰스 디킨즈, <위대한 유산>
로렌스, <아들과 연인>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버지니아 울프, <델러웨이 부인> <등대로>
조셉 콘라드, <노스트로모>
조지 오웰, <1984>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
살만 루시디, <한밤의 아이들>

 

 

 

 

 

 

 

- 아일랜드 -

<니알의 사가(saga)>
할도어 렉스네스, <해방된 민중>

- 독일 -

괴테, <파우스트>
토마스 만, <붓덴부르크 일가> <마의 산>
카프카, '단편', <심판> <성>
되블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파울 첼란의 '시집'
귄터 그라스, <양철북>



 

 

 

 

- 러시아 -

고골리, <죽은 혼>
레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외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안톤 체호프, <단편선>

 

 

 

 

 

 

 

- 포르투갈 -

페르난도 페소아, <근심의 書>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 스페인 -

로르카, <집시의 노래>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 미국 -

허만 멜빌, <모비딕>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에드가 앨런 포, <단편전집>
월트 휘트먼, <풀잎>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 <음향과 분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랄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토니 모리슨, <당신>

 

 

 

 

 

-북유럽 -

안데르센, <동화집>(덴마크)
입센, <인형의 집>(노르웨이)
크누트 함순, <굶주림>(노르웨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말괄량이 피피>(스웨덴)

 

 

 

 

- 아시아 -

루쉰, '소설집'(중국)
<마하브하라타>(인도)
발미키, <라마야나>(인도)
칼리다사, <사쿤탈라>(인도)
시키부 무라사키, <겐지 이야기>(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일본)


 

 

 

 

- 아프리카 -

타예브 살리흐, <북쪽으로 가는 계절>(수단)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은 무너진다>(나이지리아)

 

 



 

 

 

- 라틴아메리카 -

후안 룰포, <페드로 마라모>(멕시코)
보르헤스, <단편집>(아르헨티나)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콜롬비아)
호아오 귀마레스 로사, <오지에서의 곤경>(브라질)


 

 

 

 

- 아랍권 -

<길가메쉬 서사시>(메소포타미아)
<천야일야>(페르시아)
<욥기>(이스라엘)
자랄 앗-딘 루미, <마트흐나위>(이란)
세이크 무스하리프 웃-딘 사디, <과수원>(이란)
나지브 마흐푸즈, <우리 동네 아이들>(이집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