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부모나 집에서의 생활, 그 익숙한 거리의 삶과 철저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브루클린이나 브롱크스에 있는 집이라면 지긋지긋한 친구 대여섯 명이 시티칼리지 지하 식당에 모여 앉아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끝없이 토론하고 토론했다. 이 지하 식당과 카페에서 최초의 교육이 내게 뿌리를 내렸다. 이곳에서 포크너는 미국이고, 디킨스는 정치이고, 마르크스는 섹스이고, 제인 오스틴은 문화라는 개념이고 나는 게토 출신이고, D. H. 로런스는 선지자임을 배웠다. 바로 이 식당에서 문학에 대한 내 사랑에 이름이 붙었고 정신의 삶을 꽃피우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사상 때문에 180도 바뀌는 사람들을 발견했고 지적인 대화가 그 무엇보다 관능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지성에 굶주린 우리의 에너지가 그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적인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다. 우리는 사상이나 개념을 하나씩 배우면서 그제야 자기가 누구이고 타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발 딛고 설 땅을 찾았으며 우주에 설 자리가 생겼다. 시티칼리지에서 우리는 내면의 사색과 정신의 명료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의식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4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간다는 게 곧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조리 있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강의 몇 개를 듣던 몇 달 사이에 내 문장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엄마가 모르는 단어가 섞여들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엄마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가 따라오지 못하는 논리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의견을 내뱉지도 않았다. 이런 변화가 엄마를 돌아버리게 했다. 내가 세 단락 안에 결론 낼 수 없는 문장을 입 밖에 내기 시작하면 엄마의 얼굴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섬뜩하게 변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0

이제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고 우린 단 한 번도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항상 서로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싸움은 폭풍처럼 집 안을 뒤흔들고 벽에 칠해진 페인트에 금이 가게 하고, 바닥의 리놀륨 장판을 찢어지게 하고 창 유리를 덜컹이게 했다. 우리에겐 단 한 번도 휴전이 없었고, 대재앙이 닥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1

"너 그 남자 맛봤지? 그랬지?" 이 문장은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었다. 이 말은 나의 신경종말을 자극했다. 억압의 멜로드라마, 악의에 찬 수동성, 힘의 부재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이 저 문장에 압축되어 있었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면 우리는 이름은 없지만 떡하니 존재하는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서로를 마주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4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어느 누구도 유예된 만족과 희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고통받고 싶어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8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8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 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4

이제 내 세계에는 소파에 누워 있는 여인과 창문에 매달린 소녀밖에 없다. 고립이 우리를 이 안에 봉인해버렸고 그 안에서 나는 예전과 같은 열렬한 집중력으로 인생의 모든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렇게 극단적인 집중과 고집스러운 차단이 우울의 증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우리는,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상실감이라는 필연의 조건에 처한, 나른함과 무기력 안에서 불안해하는, 연민과 분노 안에서 하나로 묶인 여자들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권력자들이 있었다. 최고 권력자들은 명석하고 저명한 정교수들이고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똑똑한 젊은 청년들로 그들의 제자, 귀염둥이, 아들, 지적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교수와 제자 들은 문명사회의 연줄과 인맥의 세계에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사업이 성장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공을 들인다. 그 사업이란 대학교 영문학과라는 세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7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0

사랑은 육지의 대부분을 덮어버리는 늪이라 할 수 있었다. 불행하고도 평화로운 고독이라는 단단한 영역에서 한 걸음만 걸어 나오면 늪이 그 땅을 뒤덮어버렸다. 남자와 자는 건 결핍감 안에서 익사되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내 연애에서 주파수를 변형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1

지금 와서 보면 이렇다. 우리는 방을 하나씩 단장하면서 서로의 거리를 넓혔고, 외로움을 쟀고, 실패를 완수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7

우리가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9

아파트처럼, 가구처럼, 거리처럼, 자주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네티는 항상 그곳에 붙박이처럼 있는 존재였다.(엄마와 네티의 싸움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에도 심리적인 분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준 일이었다.) 결혼한 다음부터 네티는 종종 내 생각 끝에 찾아와 매달려 있었고 특히 스테판과 사랑을 나눌 때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네티가 내뿜는 힘을 더 예민하게 더 불편하게 감지했다. 네티는 공기 속에서 불현듯 나타나 나에게 묻는 듯했다. ‘힘들게 배운 기술을 전부 전수해줬더니 고작 이 사람이야?’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8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얼마 동안 이렇게 껄끄러움 없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출신과 태생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오는 조용한 이해와 다정함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사랑을 나누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은 우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의 몸을 팔다리로 감은 채 얼굴을 마주하고 잤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6

우리는 침묵한다. 우리가 침묵하는 건 바깥 거리의 소음이 훨씬 더 듣기 좋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우리가 적어도 브롱크스에 있진 않다는 사실을, 맨해튼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엄마와 내게 브롱크스에서 맨해튼까지의 거리,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지하철역 몇 개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난했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방은 옛날 그 방을 빼닮았다. 그날의 햇빛, 사위어가는 여름 햇빛은 홀연 전실에서 우리 위로 떨어지던 수척한 햇살을 흐릿하게 각색한 것 같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7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둬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 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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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뒤적거려 보려고 맨 위에 있는 것을 뽑으려 하던 그는 어떤 말 울음 같은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에두아르가 웃는 소리가 층계 아래쪽까지 들리고 있었다. 비브라토가 섞인 날카롭고도 폭발적인 웃음, 완전히 꺼지기 전에 공기 중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어떤 미쳐 버린 여인이 터뜨리는 이상야릇한 폭소처럼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72

이 괴성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상황 자체였다. 이날 저녁 에두아르는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기다란 부리가 달린 새 대가리 형태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살짝 벌어진 부리 사이로 두 줄의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있어서, 마치 웃고 있는 육식 조류처럼 보였다. 그리고 붉은색 계통으로 칠해져 그 거칠고도 공격적인 양상이 강조된 이 마스크는 에두아르의 얼굴을, 눈알을 뒤룩거리며 웃는 듯한 두 눈구멍을 제외하고, 이마까지 온통 덮고 있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73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였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였다.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그러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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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충격을 받은 듯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했다. 나는 두 사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느꼈다. 네티를 느끼고 신부를 느꼈다. 내가 그 가슴이고 내가 그 손이었다. 나는 네티의 쾌락이고 고통이었다. 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약한 떨림은 후들거림이 되고 곧 사시나무 같은 세찬 떨림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0

자전거를 타면 기분만큼은 더 자유롭고 용감해졌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똑똑한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거리는 내가 익히 아는, 내 것이었다―거리는 인간들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 사람들의 지혜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원은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이 내가 느끼는 공원의 이미지를 그대로 나타내준다. 나는 원초적 자연이 살아 있는 정글을 모방하여 신중하게 조성한 도시의 풍경에서 야생적이고 원초적인 세계를 엿보았다. 그곳에 있는 나는 그 세계의 반대였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수다 떠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없던 어린 유대인 소녀일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2

도시 소녀인 우리도 따뜻한 봄날 오후가 되면 평소보다 자전거 속도를 내어 멀리까지 내달리곤 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바람과 자극은 우리 안에서 막 꽃피기 시작한 그 아릿한 감각과도 닮아 있었다. 빛과 속도가 우리를 환희로 채운다. 평소보다 더 세고 거칠게 페달을 밟는다. 달콤하면서 겁도 조금 난다. 깜짝 놀란 몸의 감각들이 일순간에 폭발할 것 같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2

일종의 비애, 슬픔과 무력감. 문득 의자에 묶여서 페이즐리 무늬 침대보 위의 엄마와 신부를 바라보던 다섯 살의 리처드가 떠올랐다. 아이는 그날 밤 이후로 현명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엄마가 힘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굴욕과 부끄러움을 교환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자기가 아는 것을 실험해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2

그림의 의미가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품에 힘을 주는 건 집중력이구나.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내 안의 직사각형 공간 속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사고가 명징해지고 언어가 풍부해지고 지성이 작동을 개시한다. 외로움, 불안, 자기연민으로 가득했던 내면의 공간이 놀데의 꽃을 보며 점점 확장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3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구멍만큼 좁아지기도 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 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4

오늘은 창창한 날, 예감이 좋은 날이다. 어딜 가건, 무엇을 보건, 내 눈이 무엇을 보고 내 귀가 무엇을 듣건 간에 내 안의 공간이 넓게 열리며 빛이 가득 들어온다. 나는 생각하고 싶다. 아니, 그러니까 오늘은정말로 생각을 하고 싶다. 그 욕망이 ‘몰입’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엄마를 만나러 간다. 거의 날아갈 듯 몸과 마음이 가볍다. 나는 날고 있다! 엄마에게도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이 긍정의 기운을 나눠주고 싶다. 불타오르는 생의 환희, 살아 있음에서 오는 행복감을 심어주고 싶다. 그래도 엄마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가 아닌가. 이 순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엄마까지 사랑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내 안의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벽이 무너진다.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천천히 침을 꼴깍거리며 중얼거린다.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참 딱 적당할 때 적당한 말을 할 줄 안다니까. 놀라워. 그것도 재능이야. 숨통을 콱 막히게 해."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지금 비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지금 나를 나자빠지게 했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한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해. 여지껏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어!"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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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알라딘 eBook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중에서 - P9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중에서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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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 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2

커너 부부가 있다. 서로 미워하는 듯하지만 닫힌 문 안에서 성적 쾌락에 몸을 떠는 부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지만 침대를 문도 없는 방에 놓고 순결하게 사는 부부. 아래층에는 아수라장 같은 집에서 거실로 도피하는 남편과 반쯤 미친 몽상가 아내가 있다. 위층에는 병영 막사처럼 말끔한 집에 가정의 중심인 남편과 야무지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가 있다. 이런 차이들이 내게 특별히 각인되지는 않았다. 여자들 간의 차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결정적인 무언가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 입력된 사실은 커너 아줌마나 우리 엄마나 낭만적인 감정을 유난히 소중히 여겼고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여자였다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9

4월의 흐린 오후였다. 회색 하늘이지만 기온은 적당히 따뜻하고 공기에는 새봄의 달콤한 향내가 가득하다. 정확히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왠지 들뜨고 설레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종류의 날씨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일〔1943년 4월 19일 폴란드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대항해 일으킨 대규모 무장투쟁〕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1

엄마가 바라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절대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엄만 그것들을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 불가결한 무언가로 여긴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지금 당장 마셔야만 한다. 엄마가 ‘해야겠다’고 한 욕구는 반드시 채워져야 하고 지금 당장 입술로 가져갈 수 있는 김 나는 음료가 손에 쥐여지기 전까지는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할 리 없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2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엄마를 곁눈질로 흘깃 본다. 나만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엄마도 낙관에서 비관으로 갑작스럽게 우회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나와 똑같이 겪고 있는 것 같다. 뺨에 잠깐 동안 생기가 돌았다가 눈은 놀란 듯 커지고 입꼬리는 밑으로 처진다. 나는 궁금하다. 엄마가 나를 볼 때도 같은 걸 볼까. 그날의 분위기는 위험할 정도로 꺼림칙해지기 시작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7

이런 순간엔 우리가 모녀라는 게 마치 외계인이 전달한 메모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불운한 운명(엄마는 과부 나는 이혼녀다)을 타고난 무능력한 두 여자, 스스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실체를 꾸릴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쇼윈도 앞에 서면 ‘행복한 가정’이란 건 내 안에서도, 엄마 안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한 조각 환상처럼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8

레이스 뜨기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곁에 두는 사람, 불안하거나 편안하거나 희망에 차거나 긴장하거나 기분이 들뜰 때나 가라앉을 때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있는 한결같은 친구라 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5

엄마의 비애는 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 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 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 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8

내 공상은 대체로 ‘이렇게 가정해보자’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에는 이 구차한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줄 이야기가 이어지기보다는 ‘대의’를 품은 상상들이 뒤따랐다. 이런 식이었다.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 안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그것이 미숙한 십대 작가가 떠올릴 수 있는 첫 문장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9

만약 샤피로 아줌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어두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 입에서 이 말들이 나왔을 땐인정 넘치게 지독하고,후덕하게 짜증스럽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4

엄마는 이내 조용해진다. 엄마는 작년인가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태도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허공을 바라본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아득한 표정 속에 홀로 머문다. 그러나 이번의 혼자는 내게 무척 익숙한 그 혼자, 얼굴을 냉소적이고 불행한 가면으로 만들어 그 뒤에 숨거나 당신의 아픔과 실망을 하염없이 헤아리고 있을 때의 혼자와는 다르다. 이 혼자에는 슬픔이 아닌 온화함이 깃들어 있다. 호기심과 흥미는 있어도 자기연민은 없다. 엄마의 눈이 가늘어진다는 건 엄마가 이미 아는 것을 조금 더 명확히 보고 싶어한다는 것, 이제껏 살아온 삶에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의미다. 엄마는 진실을 알려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엄마는 나직하게 말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6

엄마는 원시적인 상실감에 완전히 소진되어 모든 슬픔을 안으로 흡수했다. 모두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되었다. 아내의 슬픔, 엄마의 슬픔, 딸의 슬픔을 완전히 독차지했다. 비탄은 엄마를 가득 채웠고 또 엄마를 비우기도 했다. 엄마는 핏줄이고 도관이고 발현이었다. 그 놀라운 유동성, 감각적이고 까다로운 가변성은 이제 엄마의 것이었다. 엄마는 헝겊 인형이 되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초점 잃은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고 반쯤 열린 입에선 혀가 나와 있고 팔은 축 늘어져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짝 긴장하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눈은 날카로워지고 이마는 땀으로 젖고 목에선 불거져 나온 동맥이 펄떡거린다. 2분 후에는 다시 헝겊 인형처럼 쓰러져 소파 위에서 몸부림치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다. 피부는 분필처럼 퍼석해진 채 눈은 질끈 감고 입은 꾹 다문다. 그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진다. 며칠이 간다. 몇 주가 지난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8

"하지만 이 책에 배울 것 하나 없다고 말하지는 마. 알맹이라곤 없는 책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책에도 그렇게까지 나쁘게 말할 건 없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우리 모두를 업신여기는 것밖에 안 돼." 내 말을 들어보라.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롭다니. 이 모든 지혜를 10분 전에 얻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0

남편을 여읜 처지는 엄마를 더 고귀한 인간 존재로 승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서 회복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부엌일하던 시절에는 가져본 적 없던 당신의 타고난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후 30년을 한결같이 바로 그 진지함에 헌신했다. 지치지도 않았고 지루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지함이 가져다준 낙을 유지할 새로운 방법들을 끊임없이 찾아냈고 영락없이 그걸 당신 것으로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3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엄마의 절망 안에 푹 담겨 있다 나오면서 진해지고 의기양양해지며 자못 흥미롭고도 위험한 것이 되었다. 엄마의 고통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 내가 거주하는 국가, 내가 바짝 엎드려 따라야 하는 법과 규칙이 되었다. 나를 지휘하고 통솔하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하게 했다. 나는 끊임없이 엄마에게서 벗어나기를 갈구했지만 엄마가 방에 있을 때면 한 시도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엄마의 퇴근을 두려워하면서도 엄마가 귀가하면 잠시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의 존재가 내뿜는 불안은 내 허파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물리적으로 심장이 조여들었고 가끔은 쇠갈고리가 골을 파고드는 느낌까지 들었다). 욕실 문을 잠그고 혼자 숨어서 엄마를 대신해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금요일이면 꼬박 이틀간 이어질 게 뻔한 눈물과 한숨, 불씨가 꺼져도 식식거리며 새어 나오는 연기 같은 엄마의 우울증이 공기 중에 내뿜는 묘한 책망의 기운에 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죄책감 속에서 일어나 죄책감 속에서 잠들었고 주말이면 죄책감이 점점 더 쌓여가다 얕은 열병에 걸린 상태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4

묘지를 찾으면 엄마는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져 드디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낡아빠진 헝겊 인형 꼴이 되어 있다. 나는 어땠을까? 혼이 나가 입도 뻥긋 못하고 그저 몇 시간 전의 공포에서 살아남았음에 감사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5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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