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부모나 집에서의 생활, 그 익숙한 거리의 삶과 철저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브루클린이나 브롱크스에 있는 집이라면 지긋지긋한 친구 대여섯 명이 시티칼리지 지하 식당에 모여 앉아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끝없이 토론하고 토론했다. 이 지하 식당과 카페에서 최초의 교육이 내게 뿌리를 내렸다. 이곳에서 포크너는 미국이고, 디킨스는 정치이고, 마르크스는 섹스이고, 제인 오스틴은 문화라는 개념이고 나는 게토 출신이고, D. H. 로런스는 선지자임을 배웠다. 바로 이 식당에서 문학에 대한 내 사랑에 이름이 붙었고 정신의 삶을 꽃피우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사상 때문에 180도 바뀌는 사람들을 발견했고 지적인 대화가 그 무엇보다 관능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지성에 굶주린 우리의 에너지가 그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적인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다. 우리는 사상이나 개념을 하나씩 배우면서 그제야 자기가 누구이고 타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발 딛고 설 땅을 찾았으며 우주에 설 자리가 생겼다. 시티칼리지에서 우리는 내면의 사색과 정신의 명료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의식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4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간다는 게 곧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조리 있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강의 몇 개를 듣던 몇 달 사이에 내 문장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엄마가 모르는 단어가 섞여들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엄마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가 따라오지 못하는 논리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의견을 내뱉지도 않았다. 이런 변화가 엄마를 돌아버리게 했다. 내가 세 단락 안에 결론 낼 수 없는 문장을 입 밖에 내기 시작하면 엄마의 얼굴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섬뜩하게 변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0
이제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고 우린 단 한 번도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항상 서로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싸움은 폭풍처럼 집 안을 뒤흔들고 벽에 칠해진 페인트에 금이 가게 하고, 바닥의 리놀륨 장판을 찢어지게 하고 창 유리를 덜컹이게 했다. 우리에겐 단 한 번도 휴전이 없었고, 대재앙이 닥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1
"너 그 남자 맛봤지? 그랬지?" 이 문장은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었다. 이 말은 나의 신경종말을 자극했다. 억압의 멜로드라마, 악의에 찬 수동성, 힘의 부재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이 저 문장에 압축되어 있었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면 우리는 이름은 없지만 떡하니 존재하는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서로를 마주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4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어느 누구도 유예된 만족과 희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고통받고 싶어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8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8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 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4
이제 내 세계에는 소파에 누워 있는 여인과 창문에 매달린 소녀밖에 없다. 고립이 우리를 이 안에 봉인해버렸고 그 안에서 나는 예전과 같은 열렬한 집중력으로 인생의 모든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렇게 극단적인 집중과 고집스러운 차단이 우울의 증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우리는,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상실감이라는 필연의 조건에 처한, 나른함과 무기력 안에서 불안해하는, 연민과 분노 안에서 하나로 묶인 여자들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권력자들이 있었다. 최고 권력자들은 명석하고 저명한 정교수들이고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똑똑한 젊은 청년들로 그들의 제자, 귀염둥이, 아들, 지적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교수와 제자 들은 문명사회의 연줄과 인맥의 세계에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사업이 성장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공을 들인다. 그 사업이란 대학교 영문학과라는 세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7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0
사랑은 육지의 대부분을 덮어버리는 늪이라 할 수 있었다. 불행하고도 평화로운 고독이라는 단단한 영역에서 한 걸음만 걸어 나오면 늪이 그 땅을 뒤덮어버렸다. 남자와 자는 건 결핍감 안에서 익사되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내 연애에서 주파수를 변형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1
지금 와서 보면 이렇다. 우리는 방을 하나씩 단장하면서 서로의 거리를 넓혔고, 외로움을 쟀고, 실패를 완수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7
우리가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9
아파트처럼, 가구처럼, 거리처럼, 자주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네티는 항상 그곳에 붙박이처럼 있는 존재였다.(엄마와 네티의 싸움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에도 심리적인 분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준 일이었다.) 결혼한 다음부터 네티는 종종 내 생각 끝에 찾아와 매달려 있었고 특히 스테판과 사랑을 나눌 때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네티가 내뿜는 힘을 더 예민하게 더 불편하게 감지했다. 네티는 공기 속에서 불현듯 나타나 나에게 묻는 듯했다. ‘힘들게 배운 기술을 전부 전수해줬더니 고작 이 사람이야?’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8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얼마 동안 이렇게 껄끄러움 없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출신과 태생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오는 조용한 이해와 다정함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사랑을 나누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은 우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의 몸을 팔다리로 감은 채 얼굴을 마주하고 잤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6
우리는 침묵한다. 우리가 침묵하는 건 바깥 거리의 소음이 훨씬 더 듣기 좋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우리가 적어도 브롱크스에 있진 않다는 사실을, 맨해튼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엄마와 내게 브롱크스에서 맨해튼까지의 거리,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지하철역 몇 개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난했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방은 옛날 그 방을 빼닮았다. 그날의 햇빛, 사위어가는 여름 햇빛은 홀연 전실에서 우리 위로 떨어지던 수척한 햇살을 흐릿하게 각색한 것 같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7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둬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 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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