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웨스트사이드는 예술가와 지식인이 득실대는 공동주택이 기다란 직사각형처럼 모여 있는 곳으로, 그런 풍요가 맞은편 이스트사이드에는 돈과 사회적 지위로 비춰지며 이 도시를 화려하고도 고통스러우리만치 짜릿한 곳으로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세상의 맛을, 진짜 세상의 맛을 알았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얼른 나이를 먹는 것, 그러면 뉴욕은 내 세상이 될 참이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5

어른이 되어 나는 시내로 이사를 왔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에 갔지만 학위가 미드타운의 직장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예술가와 결혼했지만 우리는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살았다.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14번가* 윗동네에서 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류 회사의 문 따위는 열리지 않았고, 휘황찬란한 세상도 내내 멀기만 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8

색감, 질감, 풍요—화려함, 재미, 유쾌함—에 대한 촌뜨기 같은 불편감은 내 불안의 근원이다. 내가 평생 넉넉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건 ‘물건’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19

이런 여정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시공간의 성격이 자꾸만 바뀌었고 ‘시간’이란 개념도 증발해버렸다. 거리는 기다란 리본처럼 한없이 펼쳐졌고 우리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확장되어 어린 시절에 그랬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빠듯하고 언제나 촉박한, 정서적 안정을 위한 덧없는 척도일 뿐인 지금의 시간과는 달리.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1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대체 불가능한—본질적인—자아라는 개념에 교육까지 받은 고도의 지성을 이토록 쏟아부은 적은 역사상 없었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2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금과옥조로 삼았던 우정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내려왔을 이상을 구현한 것이었다. 감수성 충만한 이들이 영혼의 교감을 갈구하던 시대에 살았던 콜리지는 우정 속에서 그 이상을 실현해보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괴로워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3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대체 불가능한?본질적인?자아라는 개념에 교육까지 받은 고도의 지성을 이토록 쏟아부은 적은 역사상 없었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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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 2000만 단어로 이루어진 현대미국영어말뭉치Corpus of Contemporary American English에서도, 2015년 같은 최근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는데도, 남성대명사와 여성대명사의 비율이 2 대 1이다.36 이렇게 젠더 데이터 공백으로 가득한 말뭉치로 훈련된 알고리즘은 정말로 남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97

‘기술에 무지한 여자’가 아니라 ‘여자에 무지한 기술’ — 여자에 무지한 기술업계가 만들고 여자에 무지한 투자자들이 후원한 — 이 문제일 가능성은 없는가?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07

BI노르웨이경영대학이 내린 결론이다. 그들은 성공적인 지도자의 자질로 5가지 — 감정적 안정성, 외향성,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 친절성, 양심성 — 를 꼽았다. 여자는 이 5가지 중 4가지에서 남자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08

투자 유치 시에 여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문제는 "패턴인식"이다.13 패턴인식은 데이터에 기반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옛날에 잘됐던 뭔가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멋있게 포장한 말일 뿐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 ‘하버드대학교를 중퇴했고 평소 후드티를 입고 다니는 백인 남자 설립자’일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14

기술업계에서 남자가 디폴트 인간이라는 암묵적 전제는 여전히 건재하다. 애플은 2014년에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건강 감시 시스템을 출시했을 때 "포괄적인" 건강 추적기를 자랑했다.15 그것은 혈압, 걸음 수, 혈중알코올농도, 심지어 몰리브덴 — 이건 나도 뭔지 모른다 — 과 구리 섭취량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여자들이 지적했듯이 중요한 기능 하나를 빠뜨렸다. 바로 생리주기 앱이었다.16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16

인공지능 시리는 처음 출시되었을 때 사창가나 비아그라 밀매상은 찾아도 낙태 클리닉은 찾지 못했다.17 당신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는 도와줄 수 있었지만 당신이 강간당했다고 말하면 "나는 ‘강간당했다’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18 이는 개발 팀에 여자 팀원만 충분히 있었다면, 젠더 데이터 공백이 없는 팀이 만들었다면 잡아낼 수 있었던 기초적인 오류였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17

남성 디폴트는 특히 운동 관련 기술에 많은 듯하다. 가장 기본부터 시작하면, 러닝 머신의 열량 계산기는 원래 아무한테도 안 맞긴 하지만 적어도 여자보다는 평균 남성에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 계산법이 남성의 평균 몸무게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운동기계에 내장된 열량 계산기는 몸무게 70kg인 사람이 디폴트로 설정되어 있다). 몸무게 설정을 바꾸더라도 남성 평균 열량 소모량을 기준으로 한 계산법은 남는다. 여자는 대개 남자보다 지방이 많고 근육 분포도가 낮으며 근섬유 비율도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평균적인 남성은 자신과 몸무게가 같은 여성보다 8%의 열량을 더 소모할 거라는 뜻이다. 러닝 머신은 이 점을 반영하지 않는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18

기술 개발자들은 목표 소비자의 대다수가 여성일 때조차도 여성을 잊어버린다. 미국은 65세 초과 인구의 59%, 독거인의 76%가 여자다. 이들은 낙상 감지기 같은 기술을 훨씬 더 많이 필요로 할 잠재소비자다.24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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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 가설plough hypothesis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덴마크의 경제학자 에스테르 보세루프Ester Boserup다. 쟁기 가설이란 역사적으로 쟁기를 사용했던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만큼 성평등 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괭이나 호미처럼 손으로 쥐는 도구를 사용하는) 이동 농업*이 (대개 말이나 소처럼 힘센 동물이 쟁기를 끄는) 정착 농업보다 상대적으로 여성 친화적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다. 여성의 접근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1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62

그러나 쟁기 농업과 이동 농업 간의 상대적 여성 친화성 차이는 사회적 성역할의 결과이기도 하다. 괭이질은 시작하거나 중단하기가 쉽다. 즉 자녀 돌봄과 병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힘센 동물이 끄는 무거운 도구(쟁기)는 그렇지 않다. 또 괭이질은 노동집약적인 반면 쟁기질은 자본집약적인데10 여자는 돈보다 시간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 그 결과 쟁기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남자가 농업을 지배하고 이것이 다시 남자가 권력과 특권을 갖는 불평등한 사회를 낳는다고 보세루프는 주장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64

연구자들이 일을 "주된" 활동과 "부차적" 활동으로 나누는 데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부차적 활동에 대한 데이터는 아예 수집하지 않기도 하며 수집하더라도 노동력 수치에 반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남성 편향이 여성의 유급 노동을 지워버리는 예다.17 여자들은 자신의 유급 노동을 부차적 활동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무급 노동에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급 노동에 쓰는 시간이 적다는 뜻은 아니다. 그 결과 노동력 통계에서 상당한 젠더 데이터 공백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18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67

여자는 가난한 농부나 소규모 농부가 많고 자신이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닐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27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70952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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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을 타고 홀로 숲에서 나온다. 열일곱살, 흩뿌리는 3월의 찬비, 마리는 프랑스 사람이다.
1158년, 세상에는 사순절 후반의 고단함이 깃들어 있다. 곧 부활절이 올 테고, 올해 부활절은 이르다. 들판에서는 씨앗들이 더 자유로운 공기 속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거무스름하고 차가운 흙 속에서 몸을 푼다. 그녀는 이 수녀원을 처음 보는데, 습한 계곡의 언덕마루에 희끄무레하고 냉담한 자태로 서 있고, 바다에서 끌려온 구름은 언덕을 휘감은 채 끊임없이 비를 뿌리고 있다. 이곳은연중 대부분 습한 땅에서 싹을 틔우는 식물들로 뒤덮여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빛깔이고 양과 되새와 도롱뇽이 천지에 깔렸으며 연약한 버섯이 비옥한 토양을 뚫고 나오지만, 지금은 늦겨울이라 모든 것이 회색이고 온통 음지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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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루이 포랭Jean-Louis Forain의 줄타기 곡예사는 19세기 파리 야외서커스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그림의 주인공인 곡예사는 장대를 쥐고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모습이다. 이 공연을 위해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오래도록 홀로 줄 타는 연습에 매진했을 터이다. 멋지게 성공하기보다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다쳐서 울컥하는 때가 더 많았으리라. - P4

그러나 그림 속 여인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온 신경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듯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환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것, 그동안 연마한 기술을 성공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줄 위의 삶에서 더 만족스러운 ‘내‘가 되는 것, 이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같다. 시끌벅적한 공연장에서 아주 고요히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더 높은 하늘에 닿는다면, 그 희열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그 짜릿함을 위해 그녀는 분명 내일도 적막 넘치는 연습실로 돌아가겠지. 세상의 소음에서 소외되어 홀로 반듯하게 솟구친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없는 숭고함이 느껴진다. - P6

줄 위의 숭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썼다. 줄타기 곡예사의 그녀는 특별하지 않은 이가 고귀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기 선택에 충실한 삶, 자기만 아는 희열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그만 내려올 마음이 아니라면 계속되는 불안과 불만에제 발을 묶어두기보다 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빠져드는 편이 더 숭고한 결정이었다. - P7

나의 줄타기는 현재 진행중이다. 그러나 용케 내면의 중심을 잡고서 있다. 책을 펴내는 지금, 책을 쓰기 전만큼 타인의 말과 세상의 정답에 요동치지 않는다. 여전히 한 걸음 한 걸음 조마조마한 길이지만 여기에 나의 기쁨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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