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물은 단단한 돌도 먹어치우나니.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시를 짓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하자. 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눈만 먼 것이 아니라 이해력마저도 뿌연 상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비비 꼬인 추론을 통해, 이런 빗속에서는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음식이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 그 전제가 틀렸으며, 따라서 결론 역시 틀린 것이 분명하다고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 P623
그들은 서로 붙잡고 줄을 섰다. 맨 앞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여자가 섰고, 그 다음에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볼 수는 없는 사람들이 섰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그녀의 남편,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의사가 섰다. 그들이 택한 길은 도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사 아내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 뒤따르는 사람들을 그곳에 두고, 혼자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 P625
그녀는 일행을 보았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사람들을 실망시킨다면,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것, 특히 사람이기를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 역시 눈이 멀어야 했다. 물론 그들은 아직 사람이기를 포기할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이제 엄마를 찾지 않는 사팔뜨기 소년도 조건에 익숙해지는 사람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P639
젠장, 난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상황의 힘과 특성이 사람의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제기랄, 하고 내뱉는 군인을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그후로 내뱉는 욕설들은 무례하다는 지탄을 면제받게 된다. 그보다 덜 위험한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그런 지탄을 받겠지만. 젠장, 난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 P645
그녀는 조금씩 감각을 회복했다. 뱃속에서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몸에 살아 있는 다른 기관은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기관들도 틀림없이 존재했지만, 존재한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 그래, 그녀의 심장만은 큰북처럼 울려댔다. 어둠 속에서 맹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 P651
모든 어둠 가운데 첫 어둠, 즉 자신이 만들어진 자궁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일을 그만둘 마지막 어둠에 이를 때까지. - P652
정신은 스스로 창조해 낸 괴물에 굴복할 때 망상을 겪게 되는 것이니까. - P654
이제 그녀는 세련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물로 번들거리는 젖가슴을 드러낸 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득 차 있는 봉투들은 너무 무거워서 그녀는 그것을 자유의 여신의 깃발처럼 들어올릴 수도 없었다(으젠느 들라크르와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옮긴이). - P662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 P667
그들은 자기가 돌이 된 꿈을 꾸고 있었다. 돌이 얼마나 깊은 잠을 자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다. 시골에 나가 산책만 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돌들은 땅에 반쯤 묻힌 채 누워 잠을 자면서 깰 때를 기다리고 있다. 돌이 깨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누가 알겠냐만. - P669
개들이 그렇게 많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일부는 이미 하이에나를 닮아가고 있었다. 개의 몸에 박힌 점들은 꼭 부패한 자국처럼 보였다. 개들은 꼬리를 안으로 말고 뛰어다녔다. 그들이 뜯어먹은 시신이 살아나, 방어할 수 없는 자들을 뜯어먹은 수치스러운 일을 추궁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 P686
다른 사람들은 시력을 잃었는데 나는 내 시력을 잃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 - P713
그러나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해 통증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 그때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동물적 측면이 가장 분명하게 부각된다. - P718
그들이 진흙과 배설물로 뒤덮인 신발을 신고 안으로 들어간다면, 천국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뀔 것이다. 능력 있는 권위자들의 말에 따르면, 저주받은 영혼들이 고약하고, 구리고, 구역질 나고, 유독한 악취를 견뎌야 하는 또 하나의 장소가 바로 지옥이다. 그 악취에 비하면 불타는 화젓가락, 역청이 펄펄 끓는 솥 등 주물이나 주방과 관련된 물건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P767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 P782
의사만 한마디했다, 내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주의깊게 볼 거야, 마치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방금 그들의 영혼이라고 했소,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물었다. 아니면 그들의 마음일 수도 있고요, 이름은 상관없습니다. 바로 그때, 마치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놀라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 P784
그들은 온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여자를 끌어안는다. 쏟아지는 비 아래 미의 세 여신이다. - P800
아니오, 난 그럴 힘도 없는 나이요, 설사 내가 젊어서 힘이 있다 해도, 나는 그런 신속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사람은 못 되는 것 같소, 작가란 삶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인내나 얻는 사람이오. - P828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 P837
조직이 있어야지, 인간의 몸 역시 조직된 체계야, 몸도 조직되어 있어야 살 수 있지, 죽음이란 조직 해체의 결과일 뿐이야. - P841
스스로를 조직해야지, 자신을 조직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눈을 갖기 시작하는 거야. - P841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 P847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희망은 얘기 안 했구려. 그게 뭔데요.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 - P8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