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상처가 나면 꼭 소금물에 담그고 여러 가지 고약을 섞은 진흙을 발라주었다. 부엌에 소금이 다 떨어져서 카야는 다리를 절며 숲으로 가 썰물 때면 염도가 높아지는 후류後流에 발을 담갔다. 냇가에는 소금 결정이 들러붙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카야는 습지의 소금물에 발을 담그고 땅에 주저앉아서 끊임없이 입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렸다. 열려라, 닫혀라, 열려라, 닫혀라,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가, 씹는 동작을 했다가, 입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시간가량 지나자 검은 진흙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팔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졌다. 카야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흙에 살며시 발을 쑤셔 넣었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했고 독수리 울음소리를 들으니 힘이 났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7

카야는 일주일 내내 하루에 두 번씩 웅덩이를 찾았고, 크래커와 쇼트닝으로 연명했다. 그동안 아빠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여드레째가 되자 발목을 돌려도 뻣뻣하지 않았고 통증도 가라앉았다. 발을 조심하면서 살짝 지그 춤을 추어보았다. 그리고 꺅꺅 환호성을 올렸다. "내가 해냈어, 해냈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9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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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싼 소택지의 짭짤한 아지랑이가 메인스트리트 너머 크게 파도치는 바다 안개와 뒤섞였다. 습지와 바다가 손잡고 마을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다.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금이 간 시멘트에 구멍이 뿡뿡 뚫린 일차선 도로뿐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9

피글리 위글리 식료품점 옆에 있는 술집인 도그곤 비어홀에서는 종이를 배 모양으로 접어 구운 핫도그, 매운 칠리, 튀긴 새우를 담아 팔았다. 점잖은 여자나 아이들은 술집 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지만 포장판매 창이 따로 나 있어 길에서 핫도그와 네히콜라(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백인 일행은 코카콜라를, 그들과 멀리 떨어진 흑인 일행은 네히콜라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를 주문할 수 있었다. 유색인은 정문 출입은 물론, 창밖에서도 음식을 살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0

맨발에다 어느새 짧아진 멜빵바지를 입고 선 카야는 습지의 오솔길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섰다. 입술을 깨물며 집으로 달음질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장 보고 돈 계산하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허기에 등을 떼밀려 메인스트리트로 올라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피글리 위글리 식료품점을 향해 걸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1

피글리 위글리 안으로 들어간 카야는 다양한 그리츠들을 살펴보다 거칠게 갈린 노란색 가루 한 봉지를 집어들었다. ‘이 주의 특선상품’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3

카야는 가게에서 뛰쳐나와 최대한 빨리 습지 오솔길 쪽으로 걸었다. 엄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마을에서는 절대로 뛰면 안 돼. 네가 뭘 훔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카야는 모랫길에 닿자마자 너끈히 1킬로미터를 내리달았고 나머지는 빨리 걸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4

며칠 지나자 그리츠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덩어리가 생겼다. 그다음 주에는 등뼈를 사서—빨간 딱지가 붙은 걸로—그리츠와 무청을 함께 넣고 끓였는데 맛이 좋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5

아버지와 카야는 같은 판잣집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고, 며칠씩 얼굴을 못 보는 날도 많았다. 웬만해서는 말도 하지 않았다. 카야는 꼬마 살림꾼이 되어 제 몸을 건사하고 아버지의 저지레를 치웠다. 아버지의 식사를 차려줄 만큼의 요리 솜씨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어차피 아버지는 밥때 맞춰 들어오지도 않았고—잠자리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줍고 바닥을 쓸고 설거지를 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돌아올 때 깔끔한 판잣집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5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가을의 달은 카야의 생일을 위해서 빛난다고. 그래서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어느 날 못 위로 둥실 떠오른 탐스러운 황금빛 보름달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나 이제 일곱 살이 됐나봐." 아버지는 생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케이크 따위는 턱도 없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얘기도 일언반구 없었다. 실제로 아는 게 별로 없었던 카야는 무서워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6

수렁을 밟고 우뚝 선 버려진 소방망루의 썩은 다리를 타고 안개가 촉수처럼 피어올랐다. 깍깍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뿐 숨 막히게 조용한 숲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48

이건 또 다른 얘기였다. 카야는 몹시 배가 고팠다. 아침 식사로는 그리츠를 끓여서 다 떨어진 소금 대신 소다크래커를 부숴 넣어 먹었다. 카야가 이미 터득한 인생의 진실은 소금 없이는 그리츠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치킨 파이는 살면서 몇 번 먹어보지 못했지만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운 황금빛 파이 껍질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동그란 원처럼 충만한 그레이비 맛도 입 안 가득 느껴졌다. 위장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바람에 카야는 자기도 모르게 팔메토 잎사귀 사이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57

버스 앞쪽에서 아이들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듯 읊조렸다. "미스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점심 때 본 여자애들, 키큰말라깽이금발과 동그랗고통통한얼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 숨어 살았니, 습지 암탉아? 모자는 어디에다 두고 왔니, 늪 시궁쥐야?"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3

카야는 살면서 단 하루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가리를 관찰하고 조가비를 모으는 생활만으로도 배움은 충분했다. "나는 벌써 비둘기처럼 우는 법을 아는걸." 카야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 애들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좋은 구두를 신고 다니면 뭐 한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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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7

1969년 10월 30일 아침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늪에 누워 있었다. 자칫하면 소리 없는 늪이 삼켜버려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으리라. 죽음을 속속들이 아는 늪으로서는 비극도 죄도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 마을 소년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낡은 망루를 찾았고 세 번째 스위치백 선로에서 체이스의 청재킷을 발견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8

계단에 올라가 기다리려고 돌아선 순간 카야의 가슴에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혔다.
카야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중엔 언니 오빠들 나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에 갇힌 토끼들처럼 비좁고 조잡한 판잣집에 바글바글 끼어 살았다. 참나무 밑 판잣집 차양문은 부릅뜨고 노려보는 눈알 같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1

육지다운 육지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 계속 항해했고, 악명 높은 습지는 반란 선원, 조난자, 빚쟁이, 전쟁이나 세금이나 법을 피해 도망친 떨거지들을 그물처럼 건져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4

카야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오솔길만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카야는 갈까마귀 날개처럼 새까맣고 숱 많은 생머리에 까맣게 탄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6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모범이라도 보이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다가 주먹으로 때리고 결국은 제 분을 못 이겨 손등으로 철썩철썩 갈겼다. 그렇게 언니들과 오빠는 한 사람씩 사라졌다. 카야는 훗날 언니 오빠의 나이도 잊고 진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건 미시, 머프, 맨디라는 애칭뿐이었다. 포치의 매트리스에는 언니들이 두고 간 양말들이 쌓여 있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1

"카야, 조심해, 꼭. 누가 와도 절대 집 안에 들어가지 마. 널 잡아갈 수도 있어. 습지 깊은 데로 도망가서 덤불에 꼭꼭 숨어. 발자국 지우는 거 잊지 말고. 오빠가 가르쳐줬잖아. 너도 아버지를 피해서 숨을 수 있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3

초승달이 발한 빛이 판잣집에 닿자 카야는 포치에 있는 잠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울퉁불퉁한 매트리스에는 엄마가 알뜰시장에서 사준 파란 꽃무늬 홑청이 덮여 있었다. 평생 처음 혼자 맞는 밤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5

카야는 쓰러지듯 계단에 주저앉아 습지를 그린 엄마의 수채화들이 시커멓게 불타 잿더미로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해 질 녘까지 앉아 있는 사이 단추들이 호박처럼 노랗게 빛났고, 엄마와 지르박을 추던 추억들도 불길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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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자체는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는 달리 실제로 기름이 흐르는 땅이다. 또한 옥수수와 포도주의 땅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우유가 흐르지도 않고 봄철에 거리가 신선한 달걀로 뒤덮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 전역에서 뉴베드퍼드보다 더 귀족적인 저택과 초목이 무성한 공원과 화려한 정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한때는 화산암 찌꺼기로 뒤덮인 척박한 불모지였던 이곳에 그런 초목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을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898084 - P136

유일한 예외는 세일럼이다.
그곳 아가씨들은 숨결에서 사향냄새가 나기 때문에, 그들의 애인인 선원들은 세일럼으로 돌아올 때면 청교도가 사는 해변 대신 향기로운 몰루카로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해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898084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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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책을 보면서 죽은 이에 대해 생각한다. 서가에 꽂힌 압도적인 양의 책, 지독하게 읽으면서 이 생을 건너간 사람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7306

책은 그것을 사서 읽는 사람의 문신文臣 같다. 문신들은 언뜻 주군을 섬기는 것 같지만 저마다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며 등을 민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7306

서가書架는 어쩌면 그 주인의 십자가十字架 같은 것은 아닌지. 빈 책장을 바라보자면 일생 동안 그가 짊어졌던 것이 떠오른다. 수많은 생각과 믿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생의 목표와 그것을 관철하고자 했던 의지, 이끌어야 했던 가족의 생계, 사적인 욕망과 섬세한 취향, 기꺼이 짊어진 것과 살아 있는 자라면 어쩔 도리 없이 져야만 했을 세월.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7306 - P135

바깥에서 자물쇠로 문을 잠근 채 하루 한 끼의 공양만을 받아들이며 목숨 걸고 용맹정진한다는 불가의 무문관無門關수행. 그 엄격하다는 불자의 수련도 이 먹을 것도, 온기도, 누군가 찾아와준 흔적도 없는 지하의 삶보다 절박하지 않을 것 같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7306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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