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7
1969년 10월 30일 아침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늪에 누워 있었다. 자칫하면 소리 없는 늪이 삼켜버려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으리라. 죽음을 속속들이 아는 늪으로서는 비극도 죄도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 마을 소년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낡은 망루를 찾았고 세 번째 스위치백 선로에서 체이스의 청재킷을 발견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18
계단에 올라가 기다리려고 돌아선 순간 카야의 가슴에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혔다. 카야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중엔 언니 오빠들 나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에 갇힌 토끼들처럼 비좁고 조잡한 판잣집에 바글바글 끼어 살았다. 참나무 밑 판잣집 차양문은 부릅뜨고 노려보는 눈알 같았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1
육지다운 육지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 계속 항해했고, 악명 높은 습지는 반란 선원, 조난자, 빚쟁이, 전쟁이나 세금이나 법을 피해 도망친 떨거지들을 그물처럼 건져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4
카야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계단에 앉아 오솔길만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카야는 갈까마귀 날개처럼 새까맣고 숱 많은 생머리에 까맣게 탄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26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모범이라도 보이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다가 주먹으로 때리고 결국은 제 분을 못 이겨 손등으로 철썩철썩 갈겼다. 그렇게 언니들과 오빠는 한 사람씩 사라졌다. 카야는 훗날 언니 오빠의 나이도 잊고 진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건 미시, 머프, 맨디라는 애칭뿐이었다. 포치의 매트리스에는 언니들이 두고 간 양말들이 쌓여 있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1
"카야, 조심해, 꼭. 누가 와도 절대 집 안에 들어가지 마. 널 잡아갈 수도 있어. 습지 깊은 데로 도망가서 덤불에 꼭꼭 숨어. 발자국 지우는 거 잊지 말고. 오빠가 가르쳐줬잖아. 너도 아버지를 피해서 숨을 수 있어."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3
초승달이 발한 빛이 판잣집에 닿자 카야는 포치에 있는 잠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울퉁불퉁한 매트리스에는 엄마가 알뜰시장에서 사준 파란 꽃무늬 홑청이 덮여 있었다. 평생 처음 혼자 맞는 밤이었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5
카야는 쓰러지듯 계단에 주저앉아 습지를 그린 엄마의 수채화들이 시커멓게 불타 잿더미로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해 질 녘까지 앉아 있는 사이 단추들이 호박처럼 노랗게 빛났고, 엄마와 지르박을 추던 추억들도 불길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알라딘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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