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드와 누르가 카불을 떠나 북쪽의 판즈시르로 가서 아마드 샤 마수드 사령관 밑에서 지하드에 참여했을 때, 라일라는 두 살이었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195
늘 그런 식이었다. 두 사람 다, 시치미를 떼고, 의무적인 질문에 형식적인 답변을 했다. 열기라곤 하나도 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낡고 지겨운 일종의 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198
그런데 어느 날 밤, 라일라는 거리 아래쪽에서 자그만 플래시 불빛이 비치는 걸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재빨리 자신의 플래시를 찾았지만 작동이 안 됐다. 라일라는 손바닥으로 플래시를 쿵쿵 치면서 닳아버린 전지를 욕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다. 안도감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그 아름다운 노란 눈이 깜빡깜빡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04
이 방은 라일라와 타리크가 숙제를 하고, 카드로 탑을 쌓고, 서로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던 방이었다. 비가 오면, 그들은 창턱에 기대어 오렌지 맛이 나는 따뜻한 환타를 마시며 굵은 빗물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12
타리크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라일라는 이 점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우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말을 하고 싶은 충동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라일라는 그녀의 오빠들도 이랬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라일라는 남자들이 태양을 대하는 것처럼 우정을 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때, 그것의 광채를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 태양.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16
이따금 라일라는 수심에 잠긴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재앙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느꼈다. 가능성의 부정, 희망의 좌절.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엄마의 상실감을 실제로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존재로 느낀 적이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에게 아마드와 누르는 언제나 말로만 듣던 사람들 같았다. 우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왕들처럼 말이다. 피와 살을 가진 진짜 사람은 타리크였다. 그녀에게 파슈토어로 욕을 가르쳐주고, 소금에 절인 클로버 잎을 좋아하고, 음식을 씹을 때면 인상을 쓰며 낮은 신음 소리를 내고, 왼쪽 쇄골 밑에 만돌린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옅은 핑크색 반점이 나 있는 타리크는 진짜였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 옆에 앉아서 아마드와 누르의 죽음을 열심히 슬퍼했다. 그러나 진짜 오빠는 라일라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28
라일라는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이며 자신은 샤히드(순교자)가 되지도 않았고 이처럼 살아 있으며, 희망도 있고 미래도 있다는 걸 엄마가 알아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자신의 미래가 오빠들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죽을 때도 그녀는 그들에 가려 미미한 존재일 터였다. 엄마는 오빠들의 삶을 보관한 박물관의 큐레이터였 고 라일라는 그곳을 찾은 방문객일 뿐이었다. 그녀는 오빠들의 신화를 위한 피난처에 불과했다. 그녀는 엄마가 그들의 신화를 기록하는 데 필요로 하는 양피지일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31
라일라는 엄마가 바비에게 언젠가, 신념이 전혀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거울을 들여다보면, 삶에 대한 그의 무한한 신념이 자신을 마주 쳐다볼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47
라일라가 열한 살이 되기 3개월 전인 1989년 1월, 어느 춥고 흐릿한 날이었다. 그녀는 부모와 하시나와 함께 마지막 소련군이 도시를 떠나는 걸 보러 갔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51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아니 몇 주 동안, 라일라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기억하려고 해봤다. 불타고 있는 박물관을 뛰쳐나가는 예술품 애호가처럼, 그녀는 표정, 속삭임, 신음 등 잡을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잡으려 했다.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지 못하게 잡으려는 거였다. 그러나 시간은 불길 중에서도 가장 용서를 모르는 것이어서, 그녀는 결국 모든 걸 구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저 아래에서 느껴지던 굉장한 첫 고통. 양탄자 위를 비추던 비스듬한 햇살. 성급하게 드러난 그녀의 발꿈치가 그의 서늘하고 딱딱한 다리에 닿던 감촉. 그의 팔꿈치를 감싸던 그녀의 손. 뒤집어진 만돌린 모양의 반점이 그의 쇄골 밑에서 붉게 빛나던 모습. 그녀의 얼굴 위에 떠 있던 그의 얼굴. 그녀의 입술과 턱을 간질이던 그의 검은 고수머리.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믿기지 않는 그들의 대담함과 용기. 고통과 섞이던 낯설고 표현할 수 없는 쾌감. 타리크의 얼굴에 어리던 무수한 표정. 불안, 부드러움, 미안한 마음, 당혹감, 하지만 대부분, 굶주린 표정.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296
"하루 종일, 카불에 관한 한 편의 시가 머리에 떠돌더구나.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전에는 전체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두 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310
라일라는 발밑으로 책들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때 거대한 소리가 났다. 그녀의 뒤에서 하얀 빛이 번쩍였다. 그녀의 발밑이 기울어졌다. 뭔가 뜨겁고 강력한 것이 뒤에서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샌들을 벗겨냈다. 그리고 그녀를 들어올렸다. 이제 그녀는 비틀리고 돌아가며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이 보였다. 그 다음에 땅이 보이고 다시 하늘이 보이고 다시 땅이 보였다. 불이 붙은 커다란 나뭇조각이 날아갔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들도 날아갔다. 하나하나가 주위에서 날아가고 겹겹이 튀어 오르고 햇볕을 받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작고 아름다운 무지개들……. 라일라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과 팔 위로 먼지와 작은 돌과 유리가 쏟아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건 근처에서 쿵 소리를 내며 뭔가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피로 범벅이 된 물체. 짙은 안개 속으로 보이는 금문교의 끝이 그 위로 보였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314
대신, 그녀는 무릎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마음이 날아가도록 했다. 그녀는 그것이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 날아가게 했다. 푸른 보리밭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천 개의 사시나무 씨가 공중에서 춤추고, 바비는 아카시아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타리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낮잠을 자고, 그녀는 시내에 발을 담그고, 햇볕에 하얘진 바위로 된 불상들의 눈길 밑에서 좋은 꿈을 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335
하지만 마리암은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마음의 먼 구석에 갇혀 그러한 세월을 살았다. 희로애락과 꿈과 환멸을 초월한 메마른 불모의 땅에서 말이다. 그곳에서 미래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는 사랑이라는 것이 해로운 착각이요, 그것의 공범인 희망은 믿을 수 없는 환상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독성이 있는 그 쌍둥이 꽃들이 메마른 땅에서 돋아나기 시작할 때마다 마리암은 그걸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녀는 그것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뽑아서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알라딘 eBook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중에서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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