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9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04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18

그래서 우리는 재작년부터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2

영화 속에서 외계인의 언어, 시제에 얽매이지 않는 원형적인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고 나자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된 루이스 뱅크스 박사처럼, 갑자기 내 눈앞으로도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 나타났다. 이 비슷한 시각에 딱 한 시간만 먹자고 술집에 들어갔다가 새벽 서너 시까지 신나서 술을 마시고는 울다시피 출근했다가 기다시피 퇴근해서 기절하는 우리의 많은 과거들과 미래가 생생하게 보였다.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6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걷는 것이다. 집까지. 여기서부터 집까지는 지하철역 두 정거장 거리. 조금 아쉽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걷기는 많은 것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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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고, 술 좋아하고, 웃기고. 술친구 삼합이 다 갖춰졌네.
주변에 그런 삼합형 술친구들이 몇 있어서 바로 느낌이 왔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8

술꾼들끼리의 밥 먹자는 약속은 결국 술 먹자는 약속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술은 원래 밥과 곁들여 먹는 기본 반찬이니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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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을 꺼리는 투쟁적인 분파들을 만난다. 북아일랜드에서 구교도와 신교도는 ‘민족주의자’와 ‘왕당파’라고 완곡하게 표현된다. ‘종교’라는 단어 자체는 검열을 거쳐 집단이라는 말로 바뀌어 ‘집단 간 전쟁’으로 표현된다. 이라크는 2003년 영국과 미국에게 침략당한 후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간 내전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은 명백히 종교 갈등이다. 하지만 2006년 5월 20일자 〈인디펜던트(Independent)〉 지는 일면에서 그것을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라고 불렀다. 여기서 ‘인종’이라는 말도 완곡어법에 해당한다. 우리가 이라크에서 보는 것은 ‘종교 청소’다. 인종 청소라는 말은 원래 구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을 언급할 때 쓰인 것인데, 당시에도 동방정교회 소속의 세르비아인, 가톨릭계인 크로아티아인, 이슬람계인 보스니아인이 관여된 종교 청소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67

늘 그렇듯이 종교는 으뜸패다. 어느 미술 동호회가 인상주의나 초현실주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각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법원에서 변론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한 교파가 똑같은 필요성을 주장하자 한 나라의 최고 법원은 그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것이 종교가 부적으로서 지닌 힘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69

나는 신 가설을 더 방어할 수 있는 형태로 정의할 것이다. 즉 그것은 "우주와 우리를 포함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지성이 있다"라는 가설이다. 이 책은 그 가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견해를 옹호할 것이다. 즉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라는 견해 말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그것은 유해한 망상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89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변화가 왜 진보라고 가정되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정은 널리 받아들여져 있다. 그 가정에 자극을 받은, 《내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유》의 저자 이븐 와라크(Ibn Warraq)는 재치 있게도 다음에는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어 무신론이 될 것이라고 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91

물론 포교를 자선 단체의 존립 근거로 삼는 행위는 완전히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 더 큰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교회가 비과세의 헌금을 긁어 들이고 이미 먹고살 만해진 텔레비전 복음 전도사들이 지겨울 정도로 번지르르해지는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627202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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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오비에도에서 티그레 후안상(賞)을 수여하게 될 심사 위원들이 이 소설을 읽는 사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조직에게, 고급 의상에 손톱까지 깔끔한 자들에게, 〈발전〉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자들에게 매수당한 무장 괴한들이 세계 환경 운동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저명한 인물이자 아마존의 열렬한 옹호자를 살해했다.

사랑하는 친구, 치코 멘데스. 늘 과묵하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활동하던 당신에게 이 책을 전하지 못하지만 감히 나는 티그레 후안상이 당신에게 주는 상이자 하나뿐인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신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오.

루이스 세풀베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1

나의 친구 미겔 트센케,

아마존 강의 위대한 수호자이자

난가리트사 강 상류에 사는 숨비 수아르 족의

옹호자인 그에게 이 책을 바친다.

밀림의 밤을 보내던 어느 날 밤, 그는 마술이

철철 넘쳐흐르는 언어로 환상적인 미지의

세계에 대해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적도의 에덴동산에서 멀리 떨어진

또 다른 국경에서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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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서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맞으며 해가 바다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벨루가 보드카*를 홀짝홀짝 마셨다.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면서 추운 날에 마시는 독한 보드카 한 모금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86

엷은 취기가 몸 전체에 번지는 동안 하늘과 바다 위로 밤이 찾아왔다. 바다는 검은 유약을 바른 도기처럼 빛났고, 하늘은 누군가 허공으로 내던진 목걸이가 구름에 부딪히며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진 보석 알 같은 별들로 빛났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87

오, 들렸다! 달그락달그락과 리듬은 비슷하지만 훨씬 맑고 쨍한 소리. 들어봤지만 들어본 적 없는 소리. 술이었다.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배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동요에 따라 흔들리며 좌우앞뒤에 놓인 술병들과 살짝살짝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커다란 벽 세 면을 둘러싸고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장대하고 맑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0990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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