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의 격렬한 비판과 대중문화로의 계획적인 전향은 많은 지식인에게 그야말로 배반과도 같았다. 신성모독을 추문으로 바꾼 것은 손택이 문화에 대한 이런 새로운 해석의 선지자로 앙토냉 아르토, 존 케이지, 프랑스 이론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뿐 아니라프리드리히 니체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까지 언급했다는 사실이었다.
손택의 에세이는 동료들의 무지에맞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는 "라우션버그의 그림이발산하는 감정(혹은 감각)은 슈프림스의 노래가 발산하는 감정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단언한다. 재스퍼 존스의 그림이나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도 비틀스의 음악처럼 이해하기쉬울 수 있으며, 우월감 없이 복잡하고 감각적인 심미적 경험으로 즐길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감수성을 반영하는 그림과영화, 음악의 현대 아방가르드 경향은 손택에게 "세계, 세계에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새롭고도 개방적인 방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름다움, 스타일, 취향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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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은 문학과 영화학, 문화사 같은 분야의 논문에 정통했지만, 그의 에세이적인 글쓰기는 학술적 글쓰기와 기본적으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손택은 작가의 삶과 학자의 삶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는 "학문적 삶이우리 세대 최고의 작가들을 파괴하는 것을 목도했던 것이다.
이 발언 뒤에 상처받은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건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동시대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손택이 학계에서 실패를 맛본 것은 반학문적인 삶에 대한 바람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 여전히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대학 세계에 속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 P147

당시 손택에게 글쓰기란 진정한 도전, 심지어 고문이었다.
손택은 말한다.
"막 타자기로친 원고는, 완성되는 즉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이것은반드시 묻어버려야 하는 방부 처리된, 인쇄된 시체다."
본인이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손택은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압박해야 했다. 그의 작품은 매우 집중적인 단계에 접어들어완성됐다.
"저는 압박감이 쌓여서 글을 써야 할 때, 그리고 제머릿속에서 뭔가가 숙성돼서 그걸 써 내려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충분히 느껴질 때, 글을 씁니다." 게다가 손택은 초고를 거의 열 번은 고치고 또 고치는 성향이 있었다. - P149

1964년 4월 초, 스트로스의 요청에 의해, 손택은 이미 발표한 에세이 목록과 아직 계획 단계에 있던 글의 개요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미켈란젤로안토니오니, 체사레 파베세, 장뤼크 고다르에 관한 에세이와해석, 캠프, 스타일, 새로운 감수성, SF영화에 관한 글을 위한아이디어, 그리고 침묵의 미학과 포르노그래피 문학에 관한에세이의 초안이 담겨 있었다.
이 글들은 "그의 다음 한두 작품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 책들이 바로 유명한 에세이집「해석에 반대한다』 (1966)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1969) 이다. - P155

하지만 손택의 결정적인 한 수는 캠프를 하위문화의 지위에서 끌어올려, 캠프가 진지한 고급문화이며 느낌과 의식이라는아방가르드의 양극단과 동등한, 심미성을 경험하는 제3의 길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다다이즘이나 르네상스 같은 고유명사처럼 에세이 전반에서 ‘캠프Camp‘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음으로써 체제전복적인 감수성을 공식적으로스타일의 지위로 고양시킨다. "그리고 위대한 창조적 감수성가운데 세 번째가 캠프다. 캠프는 실패한 진지함, 극적으로 과장된 경험의 감수성이다. 캠프는 전통적 진지함의 조화도, 극단적 감정 상태와 완전히 동화되는 위험성도 거부한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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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이 1948년에 『파르티잔 리뷰』에 실린 라이어널 트릴링의 글을 읽었을 당시, 이 잡지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트릴링이 비공식 대표로 있는 좌파 집단인 이른바 뉴욕지성계New York Intellectuals의 동인지나 마찬가지였다. 『파르티잔 리뷰와 같은 잡지가 찬양하는 예술 이념은 완전히 새로운시작으로서 하이모더니즘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에 가까울 만큼 근본적인 형식주의였다. 트릴링이 예술과 운」에서 주장한바를 말하자면, 사회는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소설을 필요로 하고, 이상적인 독자는 오직 현실과 환상에 대한 문학적변증법을 통해서만 도덕적 성숙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수전 손택은 트릴링의 글이 현대소설을 위해 끌어들이고자 했던 부류의 독자상에 딱 들어맞는인물이었다. 손택이 우연히 발견한 이 에세이에, 성숙해지고자하는 열망에 사로잡힌 문학소녀보다 더 잘 어울리는 독자는없었을 것이다. - P62

토마스 만은 어린 방문자들에게 프란츠 카프카나 레프 톨스토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고, 대신 고등학교 교과과정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 물었다. 숫기 없는 수전은실망했고, 당황스러웠으며, 침울해졌다. 그 위대한 작가가 자신에게서 막 탄생하려는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흥미로운 미국인 고등학생 소녀만을 보았던 것이다. 40년이 지난 후 뉴요커에서 당시의 일을 설명할 때조차, 손택은 조숙한 10대 자아의 열성을 우스갯소리로 넘기지 못했다. 손택에게 만과의만남은 평생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 - P67

1948년 12월, 열여섯 번째 생일을 목전에 두고 손택은 노스할리우드고등학교를한 학기 앞당겨 졸업했다. 손택이 나중에 말한 바에 의하면, 교장이 직접 여기서는 더 배울 것이 없으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조기 졸업을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마침내 손택은 핼리버턴을 비롯한 동료들과 진정한 여행을 위한 정신의 여정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P67

수전 손택은 주간지 『콜리어스에서 시카고대학교와 그곳의 학부 교육과정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시카고대학교의 교육과정은 위대한 고전에 기초해 마련돼 있었고, 선택과목이 없었다. 위대한 고전이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작품을 강조했던 20세기 초 지식인들이편찬한 문학, 철학, 역사, 과학 고전 100여 권의 목록이었다. - P71

시카고대학교에서 손택을 가르친 또 다른 교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동년배인 레오 슈트라우스였다. 슈트라우스는 독일 헤센주 키르히하임 출신으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한 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1949년부터 시카고대에서 정치철학과 학과장을 맡았고, 곧 미국 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대부분의 근대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슈트라우스는 정치철학의 신보주수의 운동을 정립했다.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워싱턴 정계의 중추를 장악하며 부시 2기 행정부의 막후 인물이 됐다. 슈트라우스의 세미나와 강의는 시카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지위를획득했다. 그를 따르던 팬클럽 무리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 지식인, 정치인도 있었다. - P76

하지만 어린 수전 손택에게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의심의여지 없이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수사학자 중 한 명인 작가겸 문학연구가 케네스 버크 였다. 손택은 종종 버크가 텍스트를 분석하는 탁월한 방식에 관해 열띤 감탄을 내뱉곤 했다.
한 세미나에서 버크는 거의 1년 동안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승리victory)를 글자 하나, 장면 하나 건너뛰지 않고 꼼꼼히분석했다. 손택은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에도 힘주어 말했다.
"저는 아직도 버크의 가르침대로 글을 읽습니다."
버크의 꼼꼼한 강독의 목적은 의사소통의 극적이고 과장된 측면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인간 갈등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의 문학비평은 형식주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문학의 목적을 사회에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삶에가치 있는 도움을 주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손택 자신도 나중에 변화를 불러오는 언어의 힘을 믿게 됐다.
손택이 에세이와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은 언제나 현재적 현상을 모호함이 없는 명료한 언어로 사고하고 설명해내는 것이었다. - P77

타우베스가 손택이 논쟁을 즐기는겁 없는 논객이 되는 데 일조했음은 분명하다.
손택은 타우베스로부터 역설을 사고의 본질적 요소로 보는 법, 그리고 모순을 지적인 자유를 제한하기보다 오히려 열어주는 특징으로여기는 사고방식을 배웠다.
타우베스처럼 손택도 문화의 좁은측면을 상세히 분석하는 대신, 거시적인 관점에서 문화적·역사적 연관성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 P85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경험했지만, 인생 대부분을지방 소도시에서 보낸 그는 이제 자립과 익명성에서 오는 해방감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가 파리에서 보낸 일상은 이랬다.
"열한 시에 다락방에서 깸. 점심은 저렴한 작은 식당에서.
오후엔 올드 네이비 아니면 생제르맹 거리에 있는 다른 고풍스러운 카페로, 첫 번째(혹은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영화를 보러 시네마테크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바게트 샌드위치를, 친구와 함께 재즈바나 그야말로 완전히 퇴폐적인 바로, 그다음,
새벽 세 시는 지난 뒤, 작업을 제대로만 했다면, 누군가와 함께, 침대로."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손택은 보헤미안의 삶을발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작가의 삶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학계라는 모래사막에 묻혀 있던 욕망을발굴한 것이다. - P101

"게으름 외에는 그 무엇도 내가 작가가 되는 길을가로막을 수 없다. (…) 글쓰기가 왜 중요할까? 그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작가라는 페르소나를갖고 싶을 뿐, 꼭 써야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안 될 건 또 뭔가? 자존감을 약간만 쌓으면 -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하듯 꼭 써야 할 말이 있다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P102

손택이 작가로서의 야심을 정식화하는 과정은 자기회의를통해 확고한 동기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다수 작가의 자아상을 채우는 영감이나 창의력, 고취에 관한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손택은 무엇보다 작가의 ‘역할에 흥미가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불안정하고 문제적인자아를 달래려 했다. 글쓰기를 통해, 손택은 시간과 가족과학문적 삶의 요구에 맞서서 온전히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바로 그 자아에 도달하고자 했다.
할 말이 있기 때문에글을 쓰는 여느 작가들과 달리, 손택은 할 말을 찾아내기 위해서 글을 쓰고자 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손택이그 의도를 명료하게 말한다는 것, 허영심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다. 손택이 일기에 쓴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자학과 야심이라는 양극을 오간다. - P103

손택이 파리에 도착해 그곳의 문화생활에 몰입했던 때는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1960년대를 예고하는 새로운 움직임이시작되던 시기였다.
1950년대 후반 파리는 다가오는 1960년대의 문학, 영화, 정치 이론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 싹트고 트렌드가 형성되던 핵심적인 장소였다.
1957년 5월 22일 비평가에밀 앙리오는 『르 몽드Le Monde에서 ‘누보로망nouveau roman’ 이라는 신조어로 나탈리 사로트, 알랭 로브그리예,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셸 뷔토르가 이끄는 프랑스 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지칭했다.
새로운 세대의 소설은 전통 소설의 내러티브 형식에 반기를 드는 엄격한 지성의 원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작가들에 따르면, 등장인물의 심리적 발전과 내러티브의 연속성, 전지적 시점을 취하는 화자 등 전통적인 방식은 최근에끝난 세계대전과 막 시작된 냉전을 기술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누보로망은 서술 시점과 순서를 실험했다. 이들의 목적은 글에서 작가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버림으로써 문학을 작가의 의도보다는 독자의 해석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언어적사건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처럼 사뮈엘 베케트와 프란츠카프카, 그리고 존경하는 스승 케네스 버크의 열성적인 독자였던 손택은 이런 소설 양식에 담긴 지적인 함축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후일 손택은 누보로망이 자기 소설에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했지만, 그가 처음으로 쓴 두 편의 소설 은인TheBenefactor』(1963)과 『살인 도구Death Kit』(1967)는 누보로망의 특징을 두루 보여준다. - P107

1963년 2월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창간호가 발간됐다. 그 이후 10년 동안, 이 잡지는 양질의 기사와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찾아내는 감각으로 미국 지성계의 중추 역할을 했고, 그 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창간호에 기사를 쓴 사람으로는 노먼 메일러, 고어 비달, W.
H. 오든, 메리 매카시, 엘리자베스 하드윅, 그리고 젊은 수전손택이 있었다. 하드윅에 따르면, 그들이 잡지에 기고할 사람을 놓고 심사숙고할 때, 손택은 "선뜻 포함됐다".
손택은 친구수전 타우베스가 연구하고 있던 시몬 베유의 에세이집을 논평했다. - P136

손택의 출판인은 처음부터 저자의 매혹적인 아우라에 기대를 건 게 분명하다.
손택의 소설은 애초의 계획에서 방향을틀어 버크와 아렌트의 미사여구 대신 뒤표지 전면에 스물아홉이었던 저자의 사진을 실어 출간됐다.
해리 헤스가 찍은 흑백사진은 기막히게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여성을보여준다.
멋스럽게 자른 새카만 단발머리를 하고 현대적인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모습은 화려한 패션 잡지의 모델이라고 해도 될 것처럼 보인다.
표정은 꽤나 진지하다.
지적인 주체와 대상화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의 공생은 여기에서 처음 전형적으로 표현됐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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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턴의 초판본들에 관해 말할 때면 열을 올렸다.
손택의파트너 애니 리버비츠의 회고록에 의하면, "여행을 향한 평생의 열정"에 불을 붙인 건 핼리버턴의 책이었다.
핼리버턴은수전에게 여행의 낭만을 알려주었다.
수전은 모험가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모조리 읽었고, 그들의 책은 순수한 즐거움과 "성공적인 결단"의 근원이었다.
이 책들은 수전에게 상상의날개를 달 것을 요구했고, 수전은 그 요구를 기쁜 마음으로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경험은 글쓰기로 연결된다. 손택은 나중에 핼리버턴을 통해 작가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됐다고 말했다.
작가의 삶이란 "가장 특권적인 삶 (…) 끝없는호기심과 활력, 무한한 열정으로 가득한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여행가가 된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게동일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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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모습, 그 눈빛에 이끌려 이 책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격변의 시대 행동하는 지성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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