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인 시민이 미술의 스폰서이기 때문에 화려한 종교화나 역사화보다는 초상화나 풍속화가 선호되었습니다. 또한 시민의 가정에 장식할 만한 크지 않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페르메이르32의 작품은 실로 네덜란드 회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변태 미술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238102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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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신이 무너지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매우 극적인 기적의 순간을 그린 것이지요. 그런데 루벤스는 카라바조만큼 테네브리즘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 <변태 미술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238102 - P192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여신들. 일반적으로 아글라이아(빛의 여신), 에우프로시네(기쁨의 여신), 탈리아(만발한 꽃의 여신)를 가리킨다. - <변태 미술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238102 - P210

카라바조의 바로크가 ‘빛과 그림자의 대비’였다면, 루벤스의 바로크는 ‘과잉’이 키워드입니다. 작품 수도 너무 많고, 소통도 너무 잘하고, 과하게 통통하고 어린 여자를 좋아하고, 그리고 아이도 너무 많이 낳았죠. ‘인생에는 지나침이 없다!’라는 느낌이 작품에도 묻어나지요. - <변태 미술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238102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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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의 화면은 후기로 갈수록 표현성이 강해진다. 거기서 후기 인상주의가 탄생한다. 사실 후기 인상주의는 더 이상 인상주의 운동의 범위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 후기 인상주의 화면은 외부 사물의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내면의 정서적 표현(expression)‘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에는 아직신인상주의에서 유래한 분할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에서는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 대상은 어두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이고, 그 안쪽은 실제로 보이는 것과 관계없는 표현적 색채로 처리된다.
고흐와 고갱은 조형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림이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되게 했다. - P221

고흐에게도 색채는그저 재현의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는 "색은 그자체로 뭔가를 표현한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흐는 노랑을 좋아했다.
노랑이 감정적 진실의 상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노랑은 태양과 삶과 신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초기의 모노크롬에서 벗어나 색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온전한 색채의 형이상학‘에 빠져든다.
색의 상징주의. 이 중세의 전통이 동시에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칸딘스키는 모든 색에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고흐의 작품은 그 밖에도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 P235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상징‘이란 가시적인 것 속에 담긴비가시적 의미를 가리킨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가시적 세계를 그저 ‘재현‘ 하려 했다면, 상징주의는 가시적 대상을 비가시적인 의미의 ‘상징‘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를테면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나 오르페우스의 형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어두운 힘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상징주의는 독일·오스트리아 · 노르웨이 등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국제적 운동이 된다. 20세기 미술 특유의 상징적 성격은 상징주의 운동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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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실 인상주의와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단 사진은 대상의 형태를 정밀하게 묘사할 의무에서 화가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인상주의자들이 형태의 정확성을 포기한 채 빛이 만들어내는 색채 효과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도실은 사진이 그동안 회화가 해온 그 과제를 넘겨받은 덕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기억을 돕는 자료(aide-mémoire)로 종종 사진을 사용했다.
사진을 사용하는 데 부정적이던 모네조차도 실은 지베르니에서 루앙대성당을 그릴 때 사진을 참조했다고 한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얼룩덜룩한 색점들로 이어진 인상주의 회화가 대도시인의 지각 방식을 회화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 P177

19세기 후반에 서구의 미술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빠른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850년 이후 채 50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수많은 예술 언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20세기에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예술, 즉 ‘모더니즘’ 예술이등장한다. 흔히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불리는 이 급진적인 예술도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다양한 예술운동이 없었더라면 결코 탄생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시기에 서구의 미술에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걸까? 미술사가들은 흔히 그 요인으로 유럽 안의 전통‘과
‘유럽 밖의 영감‘,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영향‘을 꼽곤 한다. - P181

빛과 물감은 성질이 다르다. 빛은 섞으면 섞을수록 밝아지는 반면,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어두워진다. 이는물감으로 빛을 그린다는 인상주의의의 기획에 중요한 장애가 된다.
신인상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쇠라와 시냐크는 명도의 저하 없이 혼합색을 얻기 위해 물감을 섞는 대신에 원색의 색점을 화폭위에서 병치하는, 이른바 ‘색광주의‘를 제안한다. 이 이론에 따라 미세한 색점들로 화면을 구축하는 것을 ‘분할주의‘라 부른다. 분할주의를 적용할 경우 원칙적으로 화면에는 삼원색만 남게 된다. 후기로 갈수록 신인상주의 화면은 원색에 가까워져 강렬한 표현성을 띠게 된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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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에 사실주의는 이미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독일에서 쿠르베의 역할을 한 사람은 역사화가로 알려진 아돌프 폰 멘첼이다. 그의 초기 작품에도 벌써 사실주의적 면모가 엿보이나, 당대의 일상을 그리는 등사실주의 경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1860년 이후의 일이다. 1870년대에 그린 〈압연 공장>에서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미술에 등장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일리야 레핀을 필두로 한 방랑자 그룹이 사실주의 운동을 주도한다.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러시아 사실주의의 특성은 강렬한 ‘민중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사실주의 미술은 정치적 해방의 무기를 자처했다. - P55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양식, 1830년의 시민혁명이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양식으로 표현되었다면, 사실주의는 1848년 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양식이라고 할수 있다. 1848년 혁명 이후 한때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던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연대에는 균열이 생긴다.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를 잡은 시민계급이 급속히 보수화하여 사회의 변혁을 유보하거나 거부하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에게 배신당한 노동자계급은 1872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파리코뮌을 수립한다. 1848년 혁명과 이 단명한 정권 사이가 사실주의자들이 활동한기간과 일치한다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 P71

프랑스의 사실주의에 조응하는 것이 영국의 라파엘전파다. 프랑스와 달리 빅토리아 왕조 아래의 영국은 보수적이었다. 프랑스 화가들이 아카데미에 대한 반발로 허구에서 현실로 눈을 돌렸다면, 영국의 화가들은 아카데미에 대한 반발에서 라파엘 이전, 즉 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콰트로첸토(1400년대)로 돌아갔다. 라파엘전파가 그저 복고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복고풍은 사진을 방불케 하는 정교한 자연주의적 묘사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당대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라파엘전파의 화가들은 그림에 다양한 상징을도입함으로써 19세기 후반의 상징주의는 물론이고 20세기 미술의 상징적 경향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 P75

에두아르 마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두 걸작 <올랭피아>와〈풀밭 위의 점심>은 고전적 명화를 당대의 제재로 패러디한 것이다. 이렇게 회화의 무대를 신화 속 허구에서당대의 현실로 옮겨놓은 데서 사실주의자로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인상주의의 선구였다.
그의 작품 속 대상들은 외광 효과로 인해 뭔가 모델링이 덜 된 듯 평면적 느낌을 준다. 회화가 3차원 환영에서 2차원 구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는 자신을 인상주의자로 여기지 않았으나, 그의 여러 작품에는 이미 인상주의적 붓 자국이 나타난다. - P97

마네는 전통적인 역사화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당대의 현실에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풀밭 위의점심)‘은 전통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원래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원작에 기초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8~1534)가 제작한 동판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 P102

한마디로 중요한 것은 제재(what)가 아니라 화법(how)이라는 것이다.
사실 시사적 제재나 외설적 묘사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은 쿠르베가 마네에 앞서 했던 것이다. 마네에게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모던의 지각 방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화법에 있다. 예를 들어,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자세히 보라. 멀리서 보면 꽃다발로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형은 무너지고 붓 자국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는 인상주의 회화의 전형적 특징이다. 여기서 마네는 쿠르베의 그늘에서 벗어나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언어의 창시자가 된다. 졸라가 마네를 가리켜
‘미래의 화가‘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 P105

미국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평면성(flatness)을 모더니즘 회화의 본질로 꼽은 바 있다. 고전 회화가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면, 현대 회화는 그 환영을 파괴하고 다시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평론가 마이클 프리드는 그린버그에 기초하여 마네의 평면 효과가 ‘현대미술에 등장한 평면성의 최초의 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또 평면 효과가 일본 목판화와 길거리의 포스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마네의 평면 효과는 그 무엇보다도 사물을 상상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것도인위적 조건이 아니라 자연의 외광 아래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투철한 사실주의 정신의 산물이다. - P109

외광 효과를 내기 위해 그는 스튜디오 조명을사용했다고 한다. 마네가 이 새로운 기법을 선보인 후 그의 주위에는몇몇 젊은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곧 ‘인상주의자‘라 불릴 이 화가들은대부분의 그림을 실내가 아니라 실외에서 그리게 된다. 이를 ‘플렝 에르(plein air)‘라 부른다. 물론 인상주의자들 이전에도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간 화가들은 있었다. 다만 이들은 반사광의 평면 효과를 무시하고대상을 마치 실내에서 본 것처럼 모델링했다. 이들이 제재, 즉 그릴 것을 찾아 야외로 나갔다면, 모네와 피사로,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자들은 외광 효과를 얻기 위해 야외로 나갔다. - P110

인상주의자들에게 그 못지않게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 전통적 유화에서는 하나의 색을 칠한 후 그것이 마르면 그 위에 다른 색을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나의 물감 층이 마르기까지 며칠에서 심지어 몇 주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마네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물감을 발라 최종적으로 얻어내려는 색깔을 곧바로 만들어내곤 했다. 이를 ‘알라 프리마(alla prima)‘라고 하는데, 마네는 이 기법을수련 기간에 접한 벨라스케스와 할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마네에게 배운 이 기법을 자신들의 작업에 널리 활용하게 된다.
이 기법이 특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때 빛과 대기의 순간적 효과를빠르게 포착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 P110

19세기 미술사의 꽃은 역시 인상주의리라. 인상주의는 ‘색은 곧 빛‘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색이 반사광에불과하다면 대상의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네가 그리려 한 것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망막에비친 그것의 주관적 인상이었다. 모네는 야외로 나가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색채를 알라 프리마로 신속하게포착하려 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한 장의 그림 안에 오직 한순간의 이미지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모네는사물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그 대상을 상이한 날씨 - 시간 · 계절의 조건 아래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곤 했다. - P115

모네에 이르러 마침내 회화의 목표는 ‘객관적‘ 대상의 재현에서 ‘주관적‘ 인상의 표현으로 바뀐다. 그 바탕에는 물론 색채에 대한 변화된인식이 깔려 있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고 믿었지만,
모네와 그의 친구들은 사물의 고유색 따위는 없다고 보았다. 색이란 그반사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상의 색은 빛의 조건에 따라, 말하자면 계절에 따라, 하루의 때에 따라, 혹은 날씨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려면 그림을 신속하게 그려야 하고, 나아가 매번 달라지는 그 모든 효과를 화폭에 담으려면 당연히 같은 제재를 여러 번 반복해 그리는 수밖에 없다. - P126

인상주의 운동을 모네 혼자서 추동한 것은 아니다. 피사로와 시슬레 역시 이 운동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네와함께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순수 인상주의자라 불러도 될 것이다. 특히 피사로는 인상주의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에 모네와 더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피사로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인상주의에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신인상주의 운동에 몸담기도 했고, 고등 · 세잔의 후기 인상주의에까지 커다란 영향을끼쳤다. 시슬레 역시 피사로와 더불어 끝까지 인상주의자로 남았다. 고전이 아니라 자연에서 배우자며 동료들을 설득해 밖으로 데려고 나간 사람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 P137

곧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효과를 포착하려면 윤곽의 명확함이나 세부의 정교함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대상의 윤곽선이 사라지고, 화면은 온통 짧고 두꺼운 스트로크(stroke)들로 뒤덮인다. 고전주의 회화가 선적(linear)이라면, 인상주의 회화는 회화적(malerisch)이다. 즉, 고전주의 회화가 색채를 형태에 종속시켰다면, 인상주의 회화는 색채의 요란함을 위해 윤곽의 명확함을 희생시킨다. 형태나 윤곽은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손으로 더듬어 만질 수도있으나, 색채는 오직 볼 수만 있을 뿐 더듬어 만질 수는 없다. 회화를촉각적 영역에서 시각적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 이것이 인상주의가 일으킨 ‘지각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 P139

인상주의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이름이 르누아르와 드가다. 평생 인상주의자로 남았던 모네 - 피사로 시슬레와 달리, 이 두 사람은 인상주의 운동과 비교적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상주의의 탄생에 기여한 르누아르는 1880년대 이후 ‘복고풍‘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앵그르의 신고전주의 풍으로 돌아간다. 드가는 처음부터 자신을 인상주의자로 여기지 않았다. 사실 신속한 움직임을 잡아낸다는 점을 빼면 사실드가와 인상주의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란 힘들다. 인상주의자들처럼 순간적 인상을 즉흥적으로 그리는 대신,
드가는 대상의 움직임을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그 기억을 화폭에 전사(轉寫)하곤 했다. - P159

생의의 마지막까지 인상주의자로 남은 모네 · 피사로 · 시슬레와 달리,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는 수미일관하게 인상주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즐겨 그리는 제재의 측면에서 동료들과 확연히 달랐고, 특히 1880년대이후에는 인상주의 화법을 버린 후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드가의 경우는 흔히 ‘인상주의자‘라 불리나, 그 명칭이 무색하게 그의 화풍은 첫눈에 보아도 인상주의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일시적 ·순간적 장면을 포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드가와 인상주의 사이에는거의 공통점이 없을 정도다. 실제로 드가는 인상주의자라기보다는 사실주의자‘라 불리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 P161

르누아르는 모네와 더불어 인상주의 언어의 발명에 결정적 기여를한 인물이다. 예를 들어, 그림자가 반사된 빛의 영향으로 주변 사물의색채를 띠는 ‘확산반사(diffuse reflection)‘ 현상을 처음 발견한 것도 모네와 르누아르였고, ‘타시(tache)‘라 하여 색깔이 다른 짧은 스트로크들을캔버스 위에 병치시키는 방법을 처음 도입한 것도 이 두 사람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이젤을 나란히 세워놓고 같은 시점에서 같은 대상을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그렇게 완성된 두 그림은 종종 누가 그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한 장소에서 그린 두 점의라 그르누예르)‘를 보면, 이미 이 시기에 두 사람이 인상주의 화풍을거의 완성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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