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多崎つくる)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 따위 날달걀 하나 들이켜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4
여기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여기에서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 이 세계에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
그는 그 시기를 몽유병자로서, 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자(死者)로서 살았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
볼일이 없는 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혼자 사는 방으로 돌아오면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댄 채 죽음에 대해 또는 삶의 상실에 대해 끝도 없이 생각했다. 어두운 심연이 그의 눈앞에서 크게 입을 벌린 채 지구의 중심까지 곧장 뻗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짙은 구름으로 소용돌이치는 허무였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이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
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강렬하게 죽음에 이끌렸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단호하게, 타협의 여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그렇게 가차 없는 통고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
다섯 명은 나고야 시 교외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 남자가 셋, 여자가 둘. 1학년 여름에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친해져서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뀐 후에도 변함없이 한 그룹으로 뭉쳤다. 사회 과목의 여름 방학 과제로 주어진 활동이었지만, 정해진 기간이 끝난 다음에도 그 그룹은 자발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8
그들은 캠프 활동 사이사이 짬을 내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이나 사람됨을 이해하게 되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가슴에 품은 문제들을 고백했다. 그리고 여름 캠프가 끝났을 때 다섯 명은 제각기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라고 느꼈다. 자신이 다른 네 명을 필요로 하고 다른 네 명 또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조화로운 어울림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우연한 행운이 불러온 화학적 융합 같은 것이었다. 같은 재료를 갖추고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같은 결과가 결코 두 번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9
또한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다자키는 처음부터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이름에 색깔이 있건 없건 그 사람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건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했고, 스스로도 놀란 일이지만 꽤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다른 넷은 당연한 것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만일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하고.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0
시로와 구로, 둘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어서 다섯 명이 그룹을 만들기 전부터 서로 잘 알았다. 둘이 나란히 서면 참으로 볼만한 풍경이었다. 예술적 재능을 갖춘 내성적이면서 특출한 미모의 소유자와 총명하면서도 시니컬한 코미디언. 유니크하면서도 참으로 매력적인 조합이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5
잘 정돈된 반듯한 얼굴이고 실제로 가끔 사람들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요컨대 ‘특별히 찌그러진 데가 없다.’라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예술 쪽에 관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취미나 특기도 없었다. 입이 무거운 편에 얼굴이 잘 붉어지고 사교성이 떨어져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안절부절못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6
다만 한 가지, 취미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다자키 쓰쿠루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철도역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자의식이 생긴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시종일관 철도역에 매료되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7
현실과 공상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면 흥분한 나머지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왜 자신이 철도역에 그렇게나 마음이 끌리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령 설명할 수 있었다 해도 특이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자신에게 어쩌면 알지 못할비정상적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8
눈에 띄는 개성이나 특징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그리고 늘 중용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데도 주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뭔가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있는 것 같다.) 모순을 포함한 그러한 자기 인식은 소년 시절부터 서른여섯 살에 이르는 지금까지 인생의 이런저런 부분에서 그에게 당혹감과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때는 미묘하게 어떤 때는 나름대로 깊고 강하게.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8
그래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섯 명의 친밀한 그룹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20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쓰쿠루의 몸에는 아주 섬세한 감각을 가진 장소가 한 군데 있다. 그것은 등 어딘가에 존재한다. 손이 닿지 않는 부드럽고 찾기 힘든 부분으로 평소에는 뭔가에 감싸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무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그곳이 노출되어 누군가의 손가락 끝에 닿는다. 그러면 그의 내부에서 뭔가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특별한 물질이 몸 안에서 분비된다. 그 물질은 혈액에 섞여 몸 구석구석까지 흘러간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자극적인 감각은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22
"우리들 사이에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암묵적인 룰이 있었어. ‘가능한 한 다섯이서 같이 행동하자.’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어. 이를테면 누군가와 누군가가 둘이서만 뭔가를 하는 건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자.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룹이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하나의 구심적인 유닛으로 존재해야만 했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같은 걸 유지하려 했던 거야."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25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28
그래서 자신과 주변 세계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때 그에게는 아직도 돌아갈 장소가 있었다. 도쿄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만 가면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친밀한 장소’에 돌아갈 수 있었다. 거기서는 시간이 평온하게 흐르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들이 그를 기다렸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33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그리고 그 여름을 경계로 다자키 쓰쿠루의 인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날카롭게 솟은 능선이 양쪽의 식물 생태를 다르게 갈라놓듯이.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35
쓰쿠루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나는 그 일이 벌어진 이전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좀 다른 인간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해."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46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47
그 여름, 나고야에서 도쿄로 돌아온 쓰쿠루를 지배한 것은 몸의 구성이 고스란히 바뀌어 버린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눈에 익었던 사물의 색이 특수한 필터를 덮어쓴 것처럼 다른 색감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소리가 들렸고, 지금까지 들려왔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그 움직임이 아주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둘러싼 주변의 중력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48
그럴 때, 그는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었다. 다자키 쓰쿠루이면서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느끼면 그는 자신의 몸을 떠났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무통의 장소에서 아픔을 견디는 다자키 쓰쿠루의 모습을 관찰했다. 의식을 강하게 집중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언뜻언뜻 그의 내면에서 되살아났다. 자신을 떠나는 것. 자신의 아픔을 타인의 것처럼 바라보는 것.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49
죽어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실제로 죽음 앞에 직면했으니까. 나뭇가지에 달라붙은 벌레의 허물처럼 조금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휙 어딘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상태로 겨우 이 세상에 매달려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자신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쓰쿠루의 마음을 새삼 세차게 때렸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언제까지고 지칠 줄 모르고 응시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3
나는정말로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쓰쿠루는 그때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전해 여름, 친구 네 명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존재의 겉모습만은 겨우 유지되었지만 그마저 약 반년 사이에 크게 바뀌어 버렸다. 체형도 얼굴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이나 흐르는 물소리나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빛의 기운이나 계절의 꽃 색깔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 있는 것은, 이렇게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언뜻 다자키 쓰쿠루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편의상 다자키 쓰쿠루라고 부르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가 아직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딱히 달리 부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3
그러나 꿈속에서 그는 한 여성을 무엇보다 간절히 갈구했다.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그냥존재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녀는 육체와 마음을 분리할 수 있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어느 쪽이든 하나만 원한다면 당신에게 내줄 수 있다고 그녀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육체냐 마음이냐. 그렇지만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어느 쪽이든 하나만 선택해야만 해. 다른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쓰쿠루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모든 것이다. 어느 반쪽을 누군가 다른 남자에게 내줄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바엔 어느 쪽도 필요 없어. 그는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5
그때 쓰쿠루가 느낀 것은 누군가가 커다란 두 손으로 온몸을 틀어쥐고 쥐어짜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비명을 질렀다. 거기에는 또, 모든 세포가 말라 버리는 듯한 격한 목마름이 있었다.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반을 누군가에게 내주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분노는 진득한 액이 되어 골수에서 빠져나와 끈적하게 흘렀다. 폐는 미쳐 버린 한 쌍의 풀무가 되었고, 심장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은 엔진처럼 회전수를 올렸다. 그러고는 들끓는 검은 피를 몸 구석구석까지 흘려보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6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자기가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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