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늘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다. 뭘 요구하거나 하는 의미망 레이더에 걸러지는 말을 하는 존재가 못 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동네 사람들 거개가 아버지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조각 같은 미남에 꿈꾸는 눈동자, 천상의 목소리, 하모니카 솜씨, 고운 말씨, 법 없이도 살 사람, 희소한 영어 실력… 뭐 이런 찬탄의 대상이었던가. 그러나 엄마는 이 모든 요소를 끌어모아 그냥 딱 한마디로 ‘식충’이라고 했다. - P154
‘History is that certainty produced at the point where the imperfections of memory meet the inadequacies of documentation.‘ - P59
열여섯 살, 처음으로 순결을 위협받았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짜증이 치밀 정도로 계속되는 머리와 몸의 전쟁을 느꼈고 조용히 엄마의 자비를 빌었다. 하지만 엄마,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정말로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건 나도 몸이 달았고 이 남자가 날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 끈질기게 조르고 있다는 것뿐이야. 골목에서, 공원 벤치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방에서 엄마가 뒤척이며 누워 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전쟁터에 나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나에겐 지원군이 없어.-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8
엄마는 우리 건물에서 억양이 없는 영어와 확고한 태도 때문에도 눈에 띄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아니,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다. 그저 그런 행복한 결혼이 아니다. 마법과도 같은 결혼, 운명적인 상대와 맺어진 완전무결한 결혼이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6
지독한 사랑은 죽음의 심연을 넘어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세 번째 작품이다. 존재를 위해 스스로 소멸해 간 <채식주의자>도, 차마 떠나지 못한 영혼의 진혼곡 <소년이 온다>도, 그리고 영원히 죽음과 사랑을 가슴에 묻은 <작별하지 않는다> 까지, 그의 작품을 읽는 과정은 늘 마음으로 힘겹다. 그렇지만 다소곳한 한강작가의 글들은 오히려 힘주어 꾹꾹 눌러 쓴 글자처럼 힘이 느껴진다. 마치 작품 하나하나가 작가의 분신을 보는 것 같다. 동시대를 살며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내겐 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