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삶터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아파트 밖 동네는 방치됐다. 어렵게 어렵게 내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어도 낙후한 동네 인프라를 바꾸긴 힘들었다. 단지 안의 안락한 생활은 집단으로 뭉친 개인들이 투자한 결과였고, 단지 밖의 험난한 삶은 집단이 되지 못한 개인들이 발버둥 치다 포기한 결과였다.

-알라딘 eBook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 (한은화 지음) 중에서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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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신인’이었다. 아직 젖내 나는 풋내기 간부, 성공 가도에 들어선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들 대부분이 프티 부르주아 출신이었지만 그 가치관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질투와 절망 섞인 감정으로 그랑 부르주아가 누리는 안락함과 사치, 그 완벽함을 곁눈질했다. 유산은 기대할 수 없었다. 제롬과 실비의 친구들을 통틀어 단 한 명만이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는데 프랑스 북부의 나사(羅絲) 도매상으로 실속 있는 자산가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0

그들 그룹을 진지하게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성향과 숨은 불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꼼꼼하고 깐깐한 사회 분석가라면 반목과 상호 간의 소외, 잠재된 증오를 벌써 밝혀냈을 것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충돌, 숨어 있던 상처의 말들, 은근하던 불화의 기운이 서로에 대한 반목의 불씨를 타오르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름답던 우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 매우 놀라워하며, 자신들이 후하다고 믿고 있던 아무개가 사실은 쩨쩨하기 이를 데 없고, 또 다른 누구누구는 냉정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히고는 했다. 패가 갈리고 절교가 잇따랐다.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굴면서 사악한 쾌락을 맛보기도 했다. 등을 돌린 상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냉담과 함께 멀어질 대로 멀어진 거리가 그대로 지속되기도 했다. 서로를 외면하고 끊임없이 피할 만한 구실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다가 결국에는 사과와 용서, 따뜻한 화해를 했다. 뭐라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함께 잊는 것, 기분전환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술을 좋아해서 많이, 자주, 함께 마셨다. 도누 거리의 해리스 뉴욕바라든가 팔레`–`루아얄의 카페들, 발자르, 리프, 그리고 몇 군데를 들락거렸다. 뮌헨 맥주, 기네스, 진,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운 펀치, 과일주를 좋아했다. 가끔 저녁 시간을 온통 술을 마시며 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이어 붙인 테이블 두 개에 끼어 앉아 자기가 누리고 싶은 삶에 대해, 앞으로 쓸 책에 대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보았거나 앞으로 볼 영화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정치 상황에 대해, 앞으로의 휴가에 대해, 과거의 휴가에 대해, 시골로의 바람 쐬러 가기나 브루게,12) 앙베르,13) 바젤14)로의 짧은 여행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가끔 집단 망상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암묵적 공모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고는 했다. 그러다 결국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무리 중 누군가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웨이터가 빈 그릇을 치우고 다른 요리를 내오면 대화는 점점 늘어져서 나중에는 자신들이 방금 마신 것, 그들의 취기, 갈증,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로만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4

모두 열 명 정도였다. 뜰로 난 창에 불 켜진 좁은 아파트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까끌까끌한 벨벳 소파가 알코브 안쪽에 놓여 있었다. 2인용 소파에 세 명이 끼어 앉아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와 풋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먹고 마셨다. 넘치도록 풍부했지만, 음식들의 조합은 기괴했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요리법은 형편없었다. 구운 고기와 새고기에 소스가 하나도 곁들여지지 않았다. 채소라면, 튀긴 감자 아니면 삶은 감자였다. 월말에는 파스타 또는 올리브나 안초비를 곁들인 리조토를 먹었다. 다른 요리법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복잡한 요리법은 멜론 포르토, 바나나 플람베,16) 크림오이 정도였다. 몇 년이 흘러서야 음식에 예술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리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무엇보다 즐겨 먹던 음식들이 실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날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5

무엇보다 영화가 있었다. 분명히, 영화는 그들의 감수성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나이로 보나 받은 교육으로 보나 그들은 영화 1세대에 속했다. 이들에게 영화는 예술 이상으로 하나의 진리였다. 그들은 늘 영화를 보았고 어정쩡한 형태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영화의 걸작과 신화를 꿰뚫어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고 느꼈으며, 그들 이전의 누구보다도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6

그들은 영화광이었다. 영화는 첫째로 꼽는 열정이었다. 거의 매일 밤 영화에 빠져들었다. 화면을 사랑했다. 장면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우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끌어당기고, 매혹적이고, 사로잡는 면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공간과 시간, 움직임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뉴욕 거리의 소용돌이와 열대 지방의 나른함, 술집의 폭력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무턱대고 에이젠슈타인이나, 브뉘엘, 안토니오니, 아니면 카르네, 비더, 알드리치, 히치콕 같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둔한 마니아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충주의자도 아니었다. 비평 능력을 상실한 이 유치한 축들은 스카이블루를 하늘색으로 표현했다고, 시드 채리스가 입은 밝은 빨강 원피스가 로버트 테일러의 짙은 빨간색 소파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고 극찬하는 이들이었다. 실비와 제롬, 그 친구들은 취향이 분명했다. 소위 진지하다는 영화를 특별히 경계했다. 이러한 그들의 분류는 이 타이틀을 달지 않은 필름들을 더 돋보이게 했다. (어쨌든 그들이 옳긴 옳았다. 「마리앙바드」, 쓰레기 같은 영화!) 서부극, 스릴러, 미국 코미디물에 대해서는 지나친 호의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신기한 모험물에 열광했는데 내용의 비약과 화려한 화면, 설명 불가능하리만치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과장된 영화들이었다. 이런 영화들 중에 「롤라」, 「운명의 기로」, 「마법에 빠진 사람들」, 「바람에 쓴 편지」 같은 것은 이들의 기억 속에 늘 남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7

그들과 친구들은 이렇게 살았다. 작고 뒤죽박죽인 아파트였지만, 산책과 영화, 함께하는 우정 어린 식사, 멋진 계획들이 있어 달콤했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찰나적이고 아스라한 삶의 행복들이 일상에 빛을 주었다. 어떤 날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포도주병을 비우고, 안주를 씹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떤 밤에는 잠들지 못하고 베개에 편히 기대 반쯤 누운 상태로 재떨이를 사이에 둔 채,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산책을 했다. 쇼윈도 앞에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시간도 이제는 그들에게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춥고 맑은 어느 날, 옷을 두툼히 입고 저물녘 길가에서 친구 집을 향해 여유 있게 걸으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면, 담뱃불을 붙이거나, 군밤 한 봉지를 사고, 역 입구의 인파를 뚫고 빠져나오는 사소한 행동들이 고갈되지 않는 행복의 확실한 증거처럼 보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9

그들은 바보였다. 아, 얼마나 수없이 되뇌었던가. 자신들이 바보 같다고, 틀렸다고, 악착같이 달려들고, 기어오르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을 덜 차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날들, 게으름 피우며 눈뜨는 아침, 침대 한쪽에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책을 쌓아놓고 뒹구는 아침나절, 한밤중에 센 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 문득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 지방으로 설문 조사를 나설 때마다 드는 휴가 기분을 사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4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9

사회의 서열 관계를 증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근근이 살아갔다. 돈을 쉽게 써버렸다. 사흘 일해 번 돈을 여섯 시간 만에 써버리기도 했다. 자주 꾸러 다녔다. 형편없는 감자튀김을 먹고,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눠 피웠다. 지하철 표 한 장을 찾으려 두 시간 동안 뒤지기도 하고, 꾀죄죄한 셔츠를 입는가 하면, 못쓰게 된 음반을 듣고,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했다. 한 달 넘게 침대 시트를 갈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1

미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 자신과 자신들 세대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 분명한 가치관을 지녔으리라 짐작했다. 자신들이 스페인 내전이나 레지스탕스 시대에 스무 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당시의 문제들, 답해야 한다는 압박이 훨씬 심했을지라도, 당시에 맞닥뜨려야만 했을 문제들이 더 분명해 보였다. 자신들은 함정이 놓인 문제에 둘러싸였을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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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그들이 아무 배경 없는 프티 부르주아 출신에 개성 없는 그저 그런 학생 신분으로, 세상에 대해 편협하고 피상적인 생각만을 했다면, 이제 사회에 점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교양인이란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얻게 된 하나의 깨달음, 엄밀히 단 하나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그려보기 어려웠을 자신들의 장래 모습,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으로 자신들의 변신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3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처음의 공감에서 그저 그런 관계, 점점 뜸해지는 전화 통화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드물기는 해도 우연한 만남, 서로의 필요에 의한 만남으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정이 자라나기도 했다. 이처럼 해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우정은 서서히 공고해져 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5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엑스프레스》의 지지자였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 지성, 유머, 젊음이 언제 어디서나 적절하게 표현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엑스프레스》가 그 역할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 이유는 가장 쉬운 방법일 뿐 아니라, 그들이 잡지에 퍼붓는 경멸 역시 자기 합리화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은 그만큼 그 잡지에 예속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투덜대며 잡지를 뒤적였으며 비난을 하고 멀리 집어 던져버렸다. 때로는 잡지의 형편없음에 대해 끝없는 경탄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엑스프레스》를 읽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거기에 젖어 살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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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난 요즈음/ 먼 길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오는 것 같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 늘 밖으로만 뛰쳐나가려 했을까/ 무슨 대단한 꿈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멀리 떠나려고만 했을까/ 그런데 지금은/ 오랜 타향살이에 지쳐 돌아오는/ 나그네처럼/ 어느 해질녘 빈 배낭 하나 둘러메고/ 고향역에 내리고 있는 것 같네/ 마침내 고향집 거울 앞에 와/ 비로소 나를 만나고 있는 것 같네.
이 시는 채희문 선생님의 시 〈빈 배낭〉이다. - <울다가 웃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0109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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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인테리어는 분명 가능했다. 패널 벽을 들어내 죽은 공간이 되어버린 널찍한 구석을 시원하게 넓히고, 지나치게 큰 가구를 적당한 크기로 교체하고 다닥다닥 붙은 벽장을 뜯어낼 수도 있었다. 조금만 칠을 새로 하고 묵은 때를 벗겨 내고 공들여 잘 정돈하면 아파트는 몰라보게 멋질 수 있었다. 창에는 붉은색과 녹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멋들어진 복사판 해도 아래 한쪽 벽 길이만큼 기다란 벼룩시장에서 산 흔들거리는 오크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긴 했지만, 청동으로 테두리를 두른 제2제정 시대의 작은 마호가니 책상도 있었다. 책상을 나누어 왼쪽은 실비, 오른쪽은 제롬이 썼다. 붉은색 압지를 깔고 유리 케이스와 연필꽂이는 함께 썼다. 이것 말고도 구식 주석 상감 유리 램프라든가 휴지통으로 쓰는 10리터들이 합판 곡물통, 모양이 각각인 안락의자 두 개, 짚으로 짠 의자, 투박한 스툴이 있었다. 그들만의 재기 넘치는 분위기로 가득한,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따뜻한 우정, 함께 살아가며 일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9

임시방편인 상태가 현재를 완전히 지배했다. 기적만 바랄 뿐이었다. 건축가, 인테리어업자, 미장공, 배관공, 카펫업자, 페인트공을 부른 다음 자신들은 유람선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와서는 완전히 새롭게 정돈되고 변신한 아파트,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어져 이상적으로 변신한 아파트, 꼼꼼하게 신경 쓴 구석구석, 접이식 칸막이, 미닫이문, 눈에 띄지 않게 제작된 효율 좋은 난방 기구, 감쪽같이 감춰진 전기 시설,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0

아마도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은 탓일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 동료, 그들이 몸담은 세상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단번에 너무 탐욕스러워진 것이리라. 그들은 지나치게 빨리 가고자 했다. 세상의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그들의 것이어야 했고, 소유의 기호들을 계속 늘려야 했다. 그들은 추구해야만 했다. 차츰 부자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2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쌓이면서 그들도 과한 열기를 어느 정도 잠재울 줄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법도, 적응해 가는 법도 배웠다. 취향은 더 확실하고 균형 잡힌 방향으로 서서히 자리 잡혀 갔다. 욕망은 성숙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탐욕은 분노의 성격을 점차 벗었다. 파리 뒷골목을 산책하면서 골동품 가게 앞에 발을 멈춰도 이제는 도자기 세트나 성당 의자, 불룩한 유리 항아리, 구리 샹들리에에 탐닉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상형으로 삼은 집이라든가 완벽한 안락함, 행복한 삶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상(像)에는 여전히 유치하고 자기 만족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당시 유행이 칭송하는 물건에 열을 올렸다. 그들이 좋아하는 에피날 지방의 모사본, 영국식 판화, 마노, 유리 섬유, 새롭게 디자인한 원시풍의 자잘한 물건들, 과학적 발명품 같아 보이는 가전제품들은 자코브 가나 비스콘티 가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느 진열대에서든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것들이 갖고 싶었다. 그들은 유행의 첨단을 걸으면서, 심미안으로 정평이 나고 싶은 당장의 욕구를 충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흉내 내기는 점차 시들해져 갔다. 자신들이 삶에 대해 품었던 공격적이고 요란하며 종종 유치하기까지 하던 추구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되면서 느긋해졌다. 애지중지하던 요술 거울, 나무 작업대, 형편없는 소형 모빌, 방사계, 형형색색의 돌멩이들, 마티유 식의 사인이 들어간 황마(黃麻) 화판 같은 것들을 불태워버렸다. 점점 자신들의 욕망을 제어하게 되는 듯했다.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분명했다. 자신들이 바라는 행복과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3

제롬은 스물넷, 실비는 스물둘이었다. 둘 다 사회심리 조사원이었다. 딱히 직업이라고도 전문 분야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일은 여러 주제를 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신경을 온통 집중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았고 비교적 보수가 괜찮은 편인 데다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5

제멋대로 흐르게 놔둔 시큰둥한 성향이 어디로 자신들을 이끌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그들을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물론,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천직이라 부르는 내부의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들을 뒤흔들 만한 야망, 충만케 해줄 열정을 느끼며 자신을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5

도통 알 수 없는 주저함과 애매한 침묵, 은근한 암시 중 그들이 탐색해야 할 길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만국 공통의 ‘흠’이 의미하는 숨은 뜻을 간파하고, 인터뷰 상대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신임을 얻고,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야기를 독려하고 답을 유도하며, 심지어 은근한 압력까지 넣는 진정한 의미의 마술 같은 인터뷰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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