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신인’이었다. 아직 젖내 나는 풋내기 간부, 성공 가도에 들어선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들 대부분이 프티 부르주아 출신이었지만 그 가치관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질투와 절망 섞인 감정으로 그랑 부르주아가 누리는 안락함과 사치, 그 완벽함을 곁눈질했다. 유산은 기대할 수 없었다. 제롬과 실비의 친구들을 통틀어 단 한 명만이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는데 프랑스 북부의 나사(羅絲) 도매상으로 실속 있는 자산가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0

그들 그룹을 진지하게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성향과 숨은 불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꼼꼼하고 깐깐한 사회 분석가라면 반목과 상호 간의 소외, 잠재된 증오를 벌써 밝혀냈을 것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충돌, 숨어 있던 상처의 말들, 은근하던 불화의 기운이 서로에 대한 반목의 불씨를 타오르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름답던 우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마치 처음 알았다는 듯 매우 놀라워하며, 자신들이 후하다고 믿고 있던 아무개가 사실은 쩨쩨하기 이를 데 없고, 또 다른 누구누구는 냉정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히고는 했다. 패가 갈리고 절교가 잇따랐다.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굴면서 사악한 쾌락을 맛보기도 했다. 등을 돌린 상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냉담과 함께 멀어질 대로 멀어진 거리가 그대로 지속되기도 했다. 서로를 외면하고 끊임없이 피할 만한 구실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다가 결국에는 사과와 용서, 따뜻한 화해를 했다. 뭐라 해도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2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함께 잊는 것, 기분전환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술을 좋아해서 많이, 자주, 함께 마셨다. 도누 거리의 해리스 뉴욕바라든가 팔레`–`루아얄의 카페들, 발자르, 리프, 그리고 몇 군데를 들락거렸다. 뮌헨 맥주, 기네스, 진,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운 펀치, 과일주를 좋아했다. 가끔 저녁 시간을 온통 술을 마시며 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이어 붙인 테이블 두 개에 끼어 앉아 자기가 누리고 싶은 삶에 대해, 앞으로 쓸 책에 대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보았거나 앞으로 볼 영화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정치 상황에 대해, 앞으로의 휴가에 대해, 과거의 휴가에 대해, 시골로의 바람 쐬러 가기나 브루게,12) 앙베르,13) 바젤14)로의 짧은 여행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가끔 집단 망상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암묵적 공모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고는 했다. 그러다 결국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무리 중 누군가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웨이터가 빈 그릇을 치우고 다른 요리를 내오면 대화는 점점 늘어져서 나중에는 자신들이 방금 마신 것, 그들의 취기, 갈증,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로만 이어졌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3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4

모두 열 명 정도였다. 뜰로 난 창에 불 켜진 좁은 아파트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까끌까끌한 벨벳 소파가 알코브 안쪽에 놓여 있었다. 2인용 소파에 세 명이 끼어 앉아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앞에 두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와 풋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먹고 마셨다. 넘치도록 풍부했지만, 음식들의 조합은 기괴했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요리법은 형편없었다. 구운 고기와 새고기에 소스가 하나도 곁들여지지 않았다. 채소라면, 튀긴 감자 아니면 삶은 감자였다. 월말에는 파스타 또는 올리브나 안초비를 곁들인 리조토를 먹었다. 다른 요리법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복잡한 요리법은 멜론 포르토, 바나나 플람베,16) 크림오이 정도였다. 몇 년이 흘러서야 음식에 예술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리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무엇보다 즐겨 먹던 음식들이 실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날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5

무엇보다 영화가 있었다. 분명히, 영화는 그들의 감수성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나이로 보나 받은 교육으로 보나 그들은 영화 1세대에 속했다. 이들에게 영화는 예술 이상으로 하나의 진리였다. 그들은 늘 영화를 보았고 어정쩡한 형태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영화의 걸작과 신화를 꿰뚫어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고 느꼈으며, 그들 이전의 누구보다도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6

그들은 영화광이었다. 영화는 첫째로 꼽는 열정이었다. 거의 매일 밤 영화에 빠져들었다. 화면을 사랑했다. 장면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우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끌어당기고, 매혹적이고, 사로잡는 면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공간과 시간, 움직임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뉴욕 거리의 소용돌이와 열대 지방의 나른함, 술집의 폭력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무턱대고 에이젠슈타인이나, 브뉘엘, 안토니오니, 아니면 카르네, 비더, 알드리치, 히치콕 같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둔한 마니아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충주의자도 아니었다. 비평 능력을 상실한 이 유치한 축들은 스카이블루를 하늘색으로 표현했다고, 시드 채리스가 입은 밝은 빨강 원피스가 로버트 테일러의 짙은 빨간색 소파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고 극찬하는 이들이었다. 실비와 제롬, 그 친구들은 취향이 분명했다. 소위 진지하다는 영화를 특별히 경계했다. 이러한 그들의 분류는 이 타이틀을 달지 않은 필름들을 더 돋보이게 했다. (어쨌든 그들이 옳긴 옳았다. 「마리앙바드」, 쓰레기 같은 영화!) 서부극, 스릴러, 미국 코미디물에 대해서는 지나친 호의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신기한 모험물에 열광했는데 내용의 비약과 화려한 화면, 설명 불가능하리만치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과장된 영화들이었다. 이런 영화들 중에 「롤라」, 「운명의 기로」, 「마법에 빠진 사람들」, 「바람에 쓴 편지」 같은 것은 이들의 기억 속에 늘 남아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7

그들과 친구들은 이렇게 살았다. 작고 뒤죽박죽인 아파트였지만, 산책과 영화, 함께하는 우정 어린 식사, 멋진 계획들이 있어 달콤했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찰나적이고 아스라한 삶의 행복들이 일상에 빛을 주었다. 어떤 날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포도주병을 비우고, 안주를 씹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떤 밤에는 잠들지 못하고 베개에 편히 기대 반쯤 누운 상태로 재떨이를 사이에 둔 채,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산책을 했다. 쇼윈도 앞에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시간도 이제는 그들에게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춥고 맑은 어느 날, 옷을 두툼히 입고 저물녘 길가에서 친구 집을 향해 여유 있게 걸으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면, 담뱃불을 붙이거나, 군밤 한 봉지를 사고, 역 입구의 인파를 뚫고 빠져나오는 사소한 행동들이 고갈되지 않는 행복의 확실한 증거처럼 보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49

그들은 바보였다. 아, 얼마나 수없이 되뇌었던가. 자신들이 바보 같다고, 틀렸다고, 악착같이 달려들고, 기어오르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을 덜 차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날들, 게으름 피우며 눈뜨는 아침, 침대 한쪽에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책을 쌓아놓고 뒹구는 아침나절, 한밤중에 센 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 문득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 지방으로 설문 조사를 나설 때마다 드는 휴가 기분을 사랑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4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59

사회의 서열 관계를 증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근근이 살아갔다. 돈을 쉽게 써버렸다. 사흘 일해 번 돈을 여섯 시간 만에 써버리기도 했다. 자주 꾸러 다녔다. 형편없는 감자튀김을 먹고,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눠 피웠다. 지하철 표 한 장을 찾으려 두 시간 동안 뒤지기도 하고, 꾀죄죄한 셔츠를 입는가 하면, 못쓰게 된 음반을 듣고,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했다. 한 달 넘게 침대 시트를 갈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1

미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 자신과 자신들 세대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 분명한 가치관을 지녔으리라 짐작했다. 자신들이 스페인 내전이나 레지스탕스 시대에 스무 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당시의 문제들, 답해야 한다는 압박이 훨씬 심했을지라도, 당시에 맞닥뜨려야만 했을 문제들이 더 분명해 보였다. 자신들은 함정이 놓인 문제에 둘러싸였을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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