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작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중심 갈등은 물건의 양을 둘러싼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나는 미니멀리스트고 황선우는 맥시멀리스트다. 나는 물건이 적고 빈 공간이 많을수록 안정감을 얻는 타입이고, 황선우는 ‘빈 공간=수납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타입이다. 정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도비’, 즉 해리 포터에 나오는 집요정의 이름을 딴 별명이 생겼고 황선우에게는 ‘호더hoarder’, 즉 수집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내가 넓은 집을 왜 샀는데!’ 하는 이유가 서로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으니 갈등이 없을 리 없다. 나는 빈 공간을 넓히려고 큰 집을 샀고 황선우는 그 공간을 다 채우려고 큰 집을 산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살면서 서로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우리 집 모양새는 조수간만의 평형이 맞듯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이 곳곳마다 상이한 비율로 균형을 맞춰가게 되었다. 그러다 이번 여행에서 특대 여행가방이 생기자 황선우의 호더 기질이 갑작스레 폭발해버린 것이다. 사진과 동영상 촬영팀이 함께 가는 여행인 만큼 나보다 옷, 신발, 가방이 월등히 많은 황선우가 만반의 준비를 다하느라 일이 그리되었다.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8

우리 방에 짐을 풀어놓고 잔디가 깔린 해변을 따라 리조트의 중심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피자와 샐러드, 감자튀김 등을 푸짐하게 시켜놓고 퀸즐랜드주에서 양조되는 맥주인 포엑스XXXX도 곁들였다.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51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꼼짝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키가 50cm는 넘을 듯한, 다리가 길고 가느다란 새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월레스와 그로밋>에 나오는 악당 펭귄과 흡사한 서늘함이 있었다.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얕보이면 덤벼들 것 같았다. 부시 스톤 컬루Bush Stone Curlew였다. 컬루는 마도요를 뜻한다. 부시 스톤 컬루는 호주 고유종으로, 이곳 모튼 아일랜드에서는 어쩐지 이 새들의 기세가 등등했다. 사람을 따라 레스토랑에 들어오기도 했고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기도 한다고 했다. 섬을 걷다 보면 곳곳에 부시 스톤 컬루가 있었고 눈이 마주치면 스나이퍼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고요히 노려보았다. 이 섬의 동식물들은 존재감이 상당했다. 모튼 아일랜드는 맹그로브와 산호초의 군락지이고 야생 돌고래뿐 아니라 바다거북도 언저리에 살고 있다. 혹등고래들이 지나가는 곳이며 수천 마리의 철새가 매년 찾아든다. 이곳에 사는 195종가량 새들의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섬 면적의 97%가 국립공원인 것이다.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52

옛날에 읽었던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향유고래의 머리를 잘라 주둥이가 아래쪽으로 가도록 고정해두었는데 어떤 선원이 그 속에 가득한 고래 머릿기름에 빠져서 죽을 뻔하던 걸 건져내는 장면이 있었다. 성인 남자가 그 머리통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크기라니, 책을 읽다 말고 그 스케일을 상상해보며 흐뭇해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인간을 조무래기로 만드는 거대한 존재들을 항상 좋아한다. 높은 산이든, 대양이든, 고래처럼 거대한 바닷속 포유류든 말이다. 나는 고래 해체 작업 건물을 보며 향유고래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거대한 혹등고래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옆에 선 나의 작디 작음을 즐거워했다. 세상에는 이토록 거대한 존재들이 있다.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53

나는 리프트도 없고 보호장구도 없는 이 단순한 널빤지 다이빙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참 미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쾌감을 느꼈다. 눈 언덕, 풀 언덕, 모래 언덕이 있으면 어떻게든 미끄러져 내리고 싶어하는 것도 인간들의 하찮고 귀여운 점이다. 몸을 이리저리 털고 버스에 올라탔지만 계속 어디선가 모래가 흘러나왔다. 귓속에서 백설표 황설탕 같은 모래가 약 1티스푼 나왔다. 양쪽 바지 주머니 속에서는 3테이블스푼씩 나왔다. 곳곳에서 모래가 나오는 현상은 약 3일간 지속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데 해가 저물어가는 아름다운 하늘에 펠리컨들이 한 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케냐의 원주민처럼, 아까 모래 언덕에서의 우리처럼.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56

‘살아 있는 초대형 그림엽서’로 표현되는 퀸즐랜드주는 지구 최대의 산호초 군락인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부터 내륙의 열대 우림까지 다채로운 자연 지형을 포함한다. 골드코스트는 그 가운데서도 닮은 데를 찾기 힘든 독특한 도시일 것이다. 수평으로 쭉 뻗은 해안선, 수직으로는 높이 들어찬 고층 빌딩들이 이 도시의 그리드를 꽉 채운다. 호주 전체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도시이며, 부동산 가격 급등을 여러 차례 겪은 지역이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로 초고층 빌딩들과 다양한 테마파크가 앞다투어 지어졌고 2005년에 Q1 타워가 완공되면서 현재 모습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골드코스트 어디에서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빌딩인 Q1은 퀸즐랜드주 넘버원이란 뜻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주거용 건물이다(1위는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다). 이번 여행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이런 건물 꼭대기를 발로 걸어 올라가게 될 줄은.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65

나만 그런 마음은 아니었는지, 근처의 서퍼스 패러다이스 해변을 산책하자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게다가 전망대에서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받아낸 덕분에 시원한 맥주가 간절하기도 했다. 바닷가의 펍에 자리를 잡은 우리 일행은 퀸즐랜드주에서 생산하는 포엑스XXXX, 역시 호주 브랜드인 투헤이Toohey, 빅토리아 비터VB, Victoria Bitter 같은 생맥주를 각기 고른 다음 빠르게 수분과 행복감을 충전했다. 두 번째 잔이 바닥을 보였을 때쯤에는, 지는 해를 즐기러 갈 에너지가 넉넉했다. - <퀸즐랜드 자매로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8032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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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 놓으라.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 <숨결이 바람 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4593191 - P14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

But steps to your eternity.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 - <숨결이 바람 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4593191 - P14

웹스터는 너무도 죽음에 사로잡혔기에

피부 밑에 있는 두개골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땅 밑의 가슴 없는 존재들이

입술도 없이 활짝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T. S. 엘리엇, 《불멸의 속삭임》 - <숨결이 바람 될 때>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4593191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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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뚜렷한 만큼 손절도 빨랐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거나 서로에게 필요가 없어지면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고 남들도 내게 그랬다. 관리 대상인가 아닌가를 따져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나날들이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거대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에서 내가 탈락할까 봐 늘 초조해하며 살아야 했다. 명함 지갑이 뚱뚱해질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비겁해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19

스마트폰 주소록 대신 머릿속에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더 읽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깊이 있는 기자가 되어 있었을 것만 같다. 성공의 신기루 대신 꿈을 좇았다면 지금은 상상만 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0

마흔을 앞두고, 그동안 당연한 명제로 여겼던 ‘인맥 관리’를 이제는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 인간을 쌓거나 넓히는 대상으로 활용하고 싶지 않다. 그저 개별로의 인간 주체와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 한다. 잘나가려는 희박한 가능성보다는 또렷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시간을 집중하고 싶다. 나에게 이득이 아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좇아다니며 인맥이 아닌 인격이 폭넓은 40대로 커나가고 싶다. 그런 나로 이끌어줄 이는 알고 보니 오랜 친구일 수도, 책이나 음악 속에 있을 수도, 어제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밑도 끝도 없이 "내 편이 될 거냐"고 묻는 사람, 내게 장밋빛 약속을 던지는 사람들을 멀리하며 지내기로 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

사람에겐 하루 일구고 밭을 갈 수 있는 약간의 땅만 필요하듯 결국 내 삶을 이루는 사람들은 주변의 몇 명, 많아야 몇십 명 정도일 것이다. 내가 잘나갈 때야 누구든 옆에 붙겠지만 가장 외로울 때 비로소 커다란 존재로 나를 감싸 안아줄 몇몇의 사람들 말이다. 그 소수의 사람들만이 내 인생을 증명하고 행복을 좌우할 터이다. 명절마다 문자를 보내고 애써 식사 약속을 잡으며 아껴야 할 사람들, 그러니까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21

두 번째로, 그들은 ‘확신’형 인간들이었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하거나 지식과 경험에 관한 확신이 높은 사람들. 그들은 대체로 사사건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말을 끊을 때 시작되는 첫마디에 유심히 귀 기울여 보면 경험치에 대한 확신이 잔뜩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알아, 아는데", "내가 해봤는데" 같은 말들. 그런 분들에게 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뭔 말인지 알겠다고 했지만 잘 모르시는 것도 같다고. 그리고 나도 뭔 말인지 알 것 같은데 그냥 끝까지 듣고 있어주는 거라고. 당신의 논리가 아닌 내 체면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 대부분은 정작 남이 말할 때는 스마트폰을 보는 등 딴청을 피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니까 잘 듣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말은 말대로 끊는다는 거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33

마지막으로, 남이 내 말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나 스스로 더 단순하고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써보기로 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35

우리나라의 존댓말-반말 문화가 단순히 예의 차원이 아닌 권력과 복종의 문제라는 걸, 그렇게 비로소 깨달아갔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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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뚜렷한 만큼 손절도 빨랐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거나 서로에게 필요가 없어지면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고 남들도 내게 그랬다. 관리 대상인가 아닌가를 따져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나날들이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거대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에서 내가 탈락할까 봐 늘 초조해하며 살아야 했다. 명함 지갑이 뚱뚱해질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비겁해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작 이 정도의 어른> (남형석 지음) 중에서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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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do no harm…’ Commonly attributed to Hippokrates of Kos, c. 460 BC

‘Every surgeon carries within himself a small cemetery, where from time to time he goes to pray – a place of bitterness and regret, where he must look for an explanation for his failures.’

René Leriche, La philosophie de la chirurgie,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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