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남동 가정집들 사이에 휴남동서점이 문을 열었다.
문만 열어놓았을 뿐 영주는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점은 아픈 동물처럼 숨을 헐떡이며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서점이 뿜어내는 은은한 분위기가 처음엔 동네 사람들을 끌어들였지만, 이내 발걸음이 줄었다. 몸속에 피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얗게 앉아 있는 영주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마치 그녀의 개인 공간을 침범하는 기분을 느꼈다. 영주는 웃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웃음을 따라 웃지 않았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8

읽고 싶은 책을 곁에 쌓아두고 히죽히죽 웃기도 하고, 골똘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밤낮없이 책을 읽던 어린 시절처럼.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배고픔도 잊고 눈이 빠져라 책을 읽던 즐거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이 즐거움을 다시 찾는다면, 어쩌면 영주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10

어렸을 때 헤어진 친구와 관계를 회복하듯 영주는 온 마음을 다해 책을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두 친구는 떨어질 줄 몰랐다. 소원하던 관계가 찰싹 달라붙더니 둘 사이는 금방 회복됐다. 책은 영주를 받아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따뜻이 품어주었고, 영주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 영주를 그 자체로 이해해주었다. 영주는 하루 세끼 밥을 잘 챙겨 먹는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이 튼튼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튼튼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비로소 서점의 객관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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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 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 - P41

나는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물론 단점은 있어. 하지만 난 혼자 사는 게 정말로 좋아." 장점도 몇 가지 꼽아 보였다. 내 시간을 내 맘대로 보내고, 생활 규칙을 알아서 정하고, 내 취향을 맘껏 탐닉할 자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하고도 소통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성취감, 나는 말했다. "이건 선택의 문제, 스타일의 문제야. 그리고나는 이 스타일이 편해." - P43

솔직히 나는 주말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다. 최소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은 잡지 않는다. 내가 금요일 밤에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찾는 레시피는 《뉴욕 타임스》 십자말풀이와 <호머사이드> 새 에피소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개와 숲을 산책하는 일 위주로 돌아간다. 인간 동행이 함께할 때도 있지만 늘 그렇진 않다. - P43

홀로 있음의 폭넓은 스펙트럼 중에서도 나는 극단에 기우는 편이다. 나는 혼자 살 뿐 아니라 혼자 일하므로, 하루 종일 타인에게 "안녕하세요" 같은 말조차 건네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하루에 나눈 대화가 동네 스타벅스에서 말한 다섯 마디, "카페라테 라지로 한 잔 주세요"가 전부일 때도 있다. 나는 또 혼자 운동하고, 혼자 장을 봐서 혼자 요리하고 먹고 TV를 보고, 개를 논외로 친다면 (나는 그러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다) 밤에도 혼자 자고 아침에도 혼자 일어난다.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내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나만의 어둡고 외로운 동굴로 조용히 돌아가는 돌연변이 종족처럼 느껴졌다. - P45

내 경우 그 이유는 내면적인 것, 기질적인 것, 섹슈얼리티처럼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나도 어릴 때는 언젠가 내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이룰 것이라고, 아이가 갖고 싶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부 여자들(또한 남자들)처럼,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또 흘러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안에서 그럴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들지않는 듯했다. 인생의 많은 결정들이 이런 식이다. 우리가 고를 선택지가 처음부터 빤히 보이고, 해답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소극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문득 내가 성인이 된 뒤 대부분의 기간을-지난 18년 중 15년을 혼자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좀 놀란다. 그 기간 동안-부엌에서 예의 명랑하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던 날까지-대체로 나는 혼자라는 상태를 일시적인 상태로 여겼던 것 같다. 스타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의 산물이라고하지만 사실 나는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살아왔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선택한 고독의 수준이 어떤 면에서든 내게 좋았기 때문에, 나와 내가 잘 맞았기 때문에 그래 왔을 것이다. - P46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 - 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TV 등장인물들을 현실의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고, 집에 들어온 파리가 친구 삼을 만한 상대로 느껴지고, 남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작은 사건들이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추리닝 바지보다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 하는상황이라거나) 기이하고 불가해한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 P48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1998년) - P50

요전 날 친한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여자친구들 고유의 스타일로, 어떤 소재도 너무 시시하거나 너무 심오하다고 배제하지 않고, 드라마 <앨리 맥빌>에 대해서 5분 투덜거리다가(유아적이고 여성혐오적이라고), 머리카락에 대해서 2분 투덜거리다가 친구의 머리카락은 푸시시하고 내 머리카락은 처진다), 몇 가지 기본적인 주제에(남자, 심리치료, 부동산) 바탕을 둔 존재론적 좌절에 대해서 좀 더 오랫동안 투덜거리다가 하는 식이다. 간간이 친구가 말을 멈추고 개를 조용히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네 개는 다른 개가 집 근처를 지나갈때마다 왕왕 짖어댄다. 만약 친구가 귀 기울여 들었다면, 내 쪽에서 뭔가 나지막하게 똑똑거리는 걸 들었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부드럽게 똑똑, 똑똑거리는 소리. 나는 통화하면서 차분히 발톱을 깎고 있었다. - P61

이번 주부로 나는 희망hope 없는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프 Hope 없는 사람이다. 사귄 지 일 년 좀 넘은 친구인 호프가 캘리포니아로 이사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떠나는 걸 보면서 우정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때 친구가 될까? 우리가 어떤 사람은 오래 친구로 유지하면서 어떤 사람은 떠나보내는 것은 왜일까? - P67

나는 나이가 들수록 우정에 좀 더 냉정해졌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친구 관계를 좀 더 쉽게 끊게 되었고, 좋은 우정과 그저 그런 우정을, 기능하는 우정과 망가진 우정을 좀 더 빨리 구별하게 되었다.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나는 불만족스러운 친구 관계에 대한 참을성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한편으로는 우정을 키우고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직 잘 몰랐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 되었든 유대감에서 결함이 발견되면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친구와의 점심 혹은 저녁 식사에서 거리감이나 아쉬움이 들면 나는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내가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오래 그 관계에 매달렸다. 똑같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만남을 반복하고, 실패한 우정이라는 네모꼴 못을 변함없이 동그란 구멍에 끼워 넣으려고 애썼다. 요즘은 레이다가 더 나아졌고, 불만족의 문턱값도 훨씬 더 낮아졌다. 잘되지 않는다 싶으면ㅡ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나와 너무 다르다면, 서로의 가치와 감수성과 욕구와 목표가 너무 상이하다면-나는 그를 목록에서 지워버린다. 그런 결정을 늘엄청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지만(전화 답신을 하지 않는다든지하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거리를 두는 전략을 취하는 편이다), 우정에 대한 기준이 예전보다 훨씬 더 명확해졌으며 우정에 대해서 내가 좀더 시니컬해졌다. 우정은 아주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덧없을 수도 있다. 영혼의 짝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헌신하는 데는 관계를 성장시키고,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필연적인 실망을 극복하는 데는ㅡ시간 면에서나 감정 자원 면에서나 적잖은 투자가 든다. - P70

나는 더 많이 원한다.
나는 잘 때 그가 나를 밤새 안아주길 바라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가 내게 키스해주길 바란다. 그가 커피잔 너머로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길 바라고, 하루에 50번씩 안아주길 바라고, 매일전화와 다정한 메모를 주길 바란다. 그가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느껴지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가 나보다 먼저 알아차리길바라고, 우리 둘이 마음이 어찌나 잘 맞는지 내가 시작한 문장을그가 끝맺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최고의 섹스를 바란다. 자연스럽고 편안하면서도 열정이 담뿍 담긴 섹스, 나는 고차원적인 대화와끊임없는 웃음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만 꿀 정도의 즐거움을 바란다.
한마디로 나는 사랑받기를 바란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기를.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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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도리포스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궁금해할 독자를 위해 그의 외모와 태도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그는 키가 크고 우아했지만, 빛나는 까만 눈과 가지런한 하얀 이, 그리고 사제답게 우아히 떨어지는 진갈색 곱슬머리를 제외한다면, 감탄을 자아낼 만한 면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얼굴 구석구석 퍼져 있는 감수성의 빛으로 인해 그가 잘생겼다고 착각했고, 이런저런 식으로 다들 거기에 끌렸다. 다시 말해, 여기서 묘사하려는 그의 매력은 표정인데, 사람들은 그의 표정에서 그의 마음속 감정을 보았고, 가장 깊은 내면의 모든 움직임, 희망과 공포로 뛰는 힘찬 박동이나 인내의 체념으로 고요히 머무는 평온한 맥박 같은 것을 보았다. 이러한 표정 위에 그의 생각이 나타났고, 그의 마음이 가치 있는 모든 덕으로 풍부해졌듯이 그의 정직한 얼굴도 그러한 덕의 온갖 표식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덕은 그의 모습에 광채를 보탰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말에 조화로운 소리를 더했다. 그의 말은 설득력 있었고 완벽한 호소력을 지녔으며, 그사이 당신은 그의 표정에서 생각이 입술을 따라 움직이면서 말과 일치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단순한 이야기> (엘리자베스 인치볼드 지음, 이혜수 옮김) 중에서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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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토메르의 학문적이고 엄격한 대학*에서 배운 도리포스는 받은 교육으로나 속한 교단의 엄숙한 서원에 의해서나 가톨릭 신부였다. 하지만 가톨릭의 철학적인 부분과 미신적인 부분을 섬세히 구분하고 오로지 전자만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의 최상위 교수에 값하는 자질들을 갖추고 있었다. 즉 기독교의 모든 덕을 가르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또 그는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면서 사람들을 교화하는 공덕을 쌓는 일을 회피하는 종교인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수도원 벽에 둘러싸인 채 평신도들이 받는 유혹으로부터 숨기를 거부했고, 대신 런던 중심가에 숙소를 얻어 그곳에서 신중, 정의, 용기, 그리고 절제**를 실천하며 머물렀다.

-알라딘 eBook <단순한 이야기> (엘리자베스 인치볼드 지음, 이혜수 옮김) 중에서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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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우리에게 "집에 남자가 없어 아쉬울 때는 없어?"라고 묻는다면,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지"라며 이 사건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만약 우리 집에 저 코딱지만 한 윗집 남자보다 더 건장하고 젊은 남자가 있었다면 과연 그가 우리에게, 13년간 지하실에 있었던 마룻장으로 보수를 해주겠다는 소릴 할 수 있었을까? 보험회사 견적의 60%가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쓴 내용증명을 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내가 누수 탐지를 위해 윗집에 올라갔을 때, 그 집 벽에는 윗집 부부가 딸들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찍은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따로 산다는 그 딸들도 세상 살기 참 힘들 거예요, 바로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7781224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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