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라, 황홀하라. 그대가 떠돎과, 상처와 욕망의 존재임에 감사하라, 황홀하라.

그대여, 떠도는 이들이여, 그대가 떠돌 수 있음에 감사하라. 황홀하라.
그대여, 상처받는 이들이여, 그대가 상처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라. 황홀하라.
그대여, 욕망에 부풀어 늘 허덕이는 이들이여, 그대가 욕망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욕망을 못 이룸에 감사하라, 황홀하라, 그대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욕망이 달려오리니, 그것이 그대를 끌고 한 치라도 앞으로 나아가리니. 그렇게 그렇게 그대의 욕망들의 궤적이 이 행성 위에 아름답게 새겨지리니…….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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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연방 체제는 분명 대의 민주주의적 요소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독립성을 중시하는 스위스인들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안은 의회와 내각에서 처리하게 내버려 두고, 중대하고 결정적인 사안은 국민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흔히 국민투표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이 제도는 사실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국민제안(Popular Initiative)’이고, 다른 하나가 ‘국민투표(Referendum)’다. 대리인을 두되 중요한 건 스스로 결정하는, 반半직접민주주의가 이렇게 탄생했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99

직접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단어지만, 그에 속한 구성원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 ‘국민이 직접 결정한다’는 것과 포퓰리즘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국민투표라는 제도는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의 두 원칙 중 어느 것에 더 무게가 실려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국민투표와 선거가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라며, 국민투표를 ‘감정의 인형극‘에 비유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영국이 브렉시트 결정을 국민투표에 맡겨서는 안 됐다고 말했다.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이 늘 옳다는 생각은 철인정치나 과두정치 못지 않게 위험할 수도 있다. 심사숙고의 과정이 생략된 채 선동만이 난무하는 선거 과정은 낯설지 않다. 많은 활동이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 이뤄지고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상에 더 깊이 침투하면서, 투표하는 우리의 마음이 기술에 의해 조작되지 말란 법이 없다. 민주정치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감정을 건강하게 보호하고 다스리는 법을 계속 고민해야 한다. - <오래된 유럽>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4186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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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 보게, 그대의 집으로……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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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 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36

아버지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을까? 인간의 시원은 먼지, 누구라도 언젠가는 그 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불변의 과학이라 생각하는 사람답게 담담하게 맞이했을 것도 같고, 아는 것은 머리요, 정작 죽음이 닥쳤을 때는 머리만 바위 밑으로 디밀었다는 김일성대 출신의 엘리트처럼 공포에 떨었을 것도 같았다. 뇌출혈이었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병원으로 실려 간 아버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한두시간 누워서 경과를 본 후에 퇴원하라는 게 병원의 유일한 조치였다.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집에 갈라네, 헛소리를 하고는 순식간에 정신을 놓았고, 순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정신이 없는 채로 어머니의 손을 잡은 게 마지막이었다. 손을 잡은 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담담한 인사였을까?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38

레포의 딸이 끓였다고 맛있기야 하겠는가. 남다른 손맛에다 무엇에든 정성스러운 언니의 마음이 담겨 맛있을 터였다. 동지의 딸이 끓인 전복죽이니 빨치산들에게는 남다른 맛이기도 할 것 같았다. 평생 떡 만들며 살아온 언니가 동지는 아니니 이 전복죽이 동지애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가난한 빨치산의 장례식에는 날고 기는 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없을 전복죽이 있다! 어쩐지 마음이 언니가 뽀땃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뽀땃해지는 느낌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3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니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내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정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말에는 칼이 숨어 있다. 그런 말을 나는 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4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8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9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0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가자 못 간다 실랑이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집 사립문 밖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쉰내 풀풀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떨어지는 게 시원섭섭했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7

그 여름날 작은아버지가 웅얼거리던 말이,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이 불현듯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쳤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내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아버지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기왕 취해 보낸 일평생, 하루쯤 더 보탠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도 그 원흉이 간 자리인데.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7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62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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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나 자신이 관습적인 비평 같은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내가 떠올린 것을 일깨웠던 은유와 직유는 음악 속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점점 부족함을 느꼈다. 더욱이, 가장 간단한 직유마저도 허구의 기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머지않아 은유는 한 편의 이야기와 장면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럼에도 동시에 이 장면들은 하나의 곡 혹은 음악가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기록이 되기를 의도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읽게 될 내용은 허구인 동시에 상상적 비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 <그러나 아름다운>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6717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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