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 불볕더위다. 폭염은 새벽 동이 트자마자 그레타의 잠을 깨운다. 그녀를 침실에서 아래층으로 내몬 더위는 눌러앉은 손님처럼 집 안에 산다. 복도를 따라 누워 있고, 커튼 주변을 에워싸고, 소파와 의자에도 무겁게 축 늘어져 기대고 있다어떤 유형의 실체처럼 부엌을 가득 메운 공기 때문에 그레타는테이블 옆면에 기대어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이런 날씨에는 그저 빵을 굽는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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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 흔히 갖게 마련인 신랄함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조심성에 가까운 차분함을 가지고, 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보았다. 얼굴의 음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주름을 더 깊어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손가락 두 개로 잡아당기는 그탄력 없는 살갗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 아가씨의 대열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외모에몹시 신경을 쓰는 또 다른 폴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로서는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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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겨울이라 눈이 내려 집 앞 문까지 완전히 덮어 버리면서 세상 만물에 모두 같은 색깔과 같은 형상을 부여하고 있었다. 작은 묘 역시 그런 백색의 세계 안에서 모습을 잃었지만 묘표(墓標)의 가장 높은 십자가들은 두껍게 쌓이는 눈 속에 머리를 내밀었 다. 온통 눈 천지 속에서도 좁은 오솔길의 흔적만 유일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어제 페타르 수사(修士)를 매장할 때 생겨난 길 이었다. 그 길 끝쯤에서 오솔길의 얇은 선은 울퉁불퉁한 원으로 넓어지는 한편, 그 주위의 눈은 축축한 점토와 섞여 붉은빛을 띠고 있어 멀리서 보면 흰 바탕의 땅을 피로 물들인 갓 생긴 상처처럼 보였다. 순백의 설원이 끝도 없이 펼쳐지며 잿빛의 황량한 하 늘과 이어져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

그곳은 레반트 * 인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선원들이‘데포시토 (창고)’ 라 부르는 수인 (囚人) 과 보초들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 을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저주받은 안뜰’ 이 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매일 이 거대한,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체포 당하거나 연행되어 온 범죄자이거나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인 데, 이곳에서는 죄목도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고 의심은 한도 끝 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탄불 경찰은 범인을 추격하느라 이스탄 불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느니‘저주받은 안뜰’ 에 서 무죄로 판명된 자를 석방하는 쪽이 쉽다는 수사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체포자를 분류하는 일이 대규모로, 그리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어떤 부류는 재판을 위해 심문을 받고 또 다른 부류는 단기형을 치르게 되는데, 만약 정말 죄가 없다고 판명이 나면 석방되기도 하고 또 다른 부류는 먼 유배지로 기약 없이 떠나기도 한다. 한편 이곳은 경찰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허 위 목격자, ‘바람잡이’등을 동원할 수 있는 집결지이기도 하다. 그렇게‘안뜰’ 은 잡다한 무리를 끊임없이 체로 걸러야 하는데 늘 만원이었고 사람들의 출입이 계속 이어졌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5

어려서부터 비만한 데다 정글 같은 털에 검푸른 피부인 그는 어 릴 적에도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사람들을 속 이기에 충분했다. 1 백 오카 * 나 되는 체중에도 불구하고 암사자처 럼 재빠르고 민첩했으며 그의 육중한 육체는 그런 순간에도 황소 의 힘을 발휘했다. 졸린 듯한 얼굴 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감은 두 눈 뒤에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주의력과 악마와 같은 불안 하고 예민한 사고력이 숨어 있었다. 어두운 올리브색 얼굴에서 웃 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카라조즈의 몸 전체가 내부의 무 거운 웃음으로 흔들릴 때조차도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얼굴은 굳어지거나 이완될 수도 있었고 극도의 증오와 위협에 서 깊은 동정과 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돌변할 수도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눈의 놀림은 카라조즈 최고의 기술이었다. 왼쪽 눈 은 거의 감고 있었지만 그 겹친 눈썹 틈새로 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번득였다. 반면 오른쪽 눈은 부리부리하게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 눈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 있을 뿐이었으며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눈알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튕겨 나왔다가 똑같이 빠른 속도로 그 속에 숨어들었다. 또 그 눈은 먹이를 습격하고 자극을 주고 혼란에 빠 뜨리고 그 자리에 못 박아 놓고 상대의 사고나 희망이나 계획의 가장 비밀스러운 구석구석을 투시했다. 이 때문에 그 추악한 애꾸 눈은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가면의 표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33

"어느 누구도 누군가를 위해 무죄를 주장하는 말을 내게 해서는 안 되지. 결백이라니, 그것만은 절대 안 되지. 왜냐하면 이곳에 무 고한 자는 있을 수 없으니까. 그 누구도 이곳에 실수로 온 자는 없 다고. 안뜰의 문턱을 넘는 순간, 무죄란 있을 수 없지. 틀림없이 죄를 지은 거니까. 현실 세계가 아니라면 꿈속에서라도 말이야. 그도 아니라면 어미가 배 속에 아이를 가졌을 때 사악한 생각을 품었든가. 물론 자신을 나쁘게 말할 놈은 없어. 하지만 난 지금까 지 억울하게 끌려온 자를 본 적이 없지. 여기에 들어온 자는 무조 건 유죄야. 아니면 죄인과 관련 있는 자란 말이지. 프히! 난 수많 은 수인들을 풀어 주었지. 상부의 명령도 있었지만 내 책임 아래 풀어 주기도 했어. 그러나 모두 유죄였어. 이곳에 무고한 자는 있 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오지 않은, 아니 올 리도 없는 수 천 명의 죄인들이 있기는 하지. 왜냐하면 그 모든 죄인들을 이곳으로 불렀다가는 안뜰을 바다에서 또 다른 바다까지 넓혀야 할 지 경이니 말이야. 난 인간이란 것을 알고 있어. 그들 모두가 죄인이 야. 하지만 모두가 이곳에서 신세를 질 순 없는 거라고."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37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특히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일 을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그런 이들을 지루한 이야기 나 떠벌리고 나불대는 사람으로 경멸한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이며 그런 그들의 단점에도 장점이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타인의 일에 관해, 뒤집어 말해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아직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볼 기 회가 없을 타국의 생활 환경이나 지리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은, 만약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즉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체험 하고 생각한 것을 말이나 글로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다면 도대체 얼마만큼 알 수 있을 것인가. 조금, 아주 조금일 것이다. 그렇게 인간적인 진실에서 그것들을 세심하게 듣거나 읽었던 것들만 언 제나 조금 남을 뿐이다.)
‘차밀 에펜디야와 그의 운명에 대한’하임의 잡다하고 오락가 락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페타르 수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63

"하지만 이건 학문이고 모두 책이란 소리지요!"씁쓰름하게 몰 아붙인 판사는 편협된 지식 때문에 자신들만의 이성과 통찰력, 모든 판단과 결론의 정확성을 무한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와 개개인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경험상 익히 알고 있는 터 였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75

흔히 그런 법이다. 우리가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 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멀 리 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보게 되어 기뻐 하는 우리의 희열은 바닥에서 표면으로 떠오르기까지 약간의 시 간이 걸리는 것이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6

스미르나 출신의 터키인 지주 청년과 보스니아에서 온 이방인 기독교도 사이의 묘한 우정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며칠 사이에 이 이상한 감옥에서 더욱 커지고 더욱 두터워졌는데, 이런 상황에 서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답게 신속하고 예상치 못 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과거에 보고 읽었던 것을 다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그 들 주위에서 들리고 볼 수 있는 그런 것들하고는 구별되었다. 그 것이 중요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7

‘술탄의 형제’주위에는 음모와 책동이 소용돌이쳤는데, 여기에 는 당시 유럽 국가들, 교황과 물론 바예지드 술탄도 개입되어 있었 다.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교황 인노첸시오 8 세도 터 키와 바예지드 2 세에 대항하는 전투의 또 다른 수단으로 젬의 인 도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활한 피에르 도뷔송은 귀중한 포로 를 자신의 권력 안에 두고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이용해 바예 지드와 이집트 술탄과 교황을 협박했다. 바예지드는 젬을 위한 경비로 거액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는 젬을 다른 곳에 인도하지 않 고 기사단이 잡아 두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황은 기사단장에게 젬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추기경의 지위를 약속했다. 이집트 술탄 은 그에게 상당한 금액을 건넸다. 이집트에서 자기 아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불쌍한 젬의 모친도 젬을 위해 송금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기사단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94

이 모든 얘기 역시 한 가지에 귀착하고 있었다. 서로 진정한 접촉 이나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전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실제로 없기 도 한 두 개의 끔찍한 세계가 1 천여 개의 유형으로 영원한 싸움에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가운데 자신의 방식으로 그 두 세계의 전쟁터에서 대가를 치르는 한 인간이 있었다. 황제의 아 들이자 황제의 동생, 자신의 가장 깊은 믿음과 감정 속에서 스스로 를 황제로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던 한 인간. 처음부터 배신당하고 패하고 사기당하고 자유를 박탈당 하고 고독하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격리당하고 비극적인 어려움 에 처하여 만천하에 죄인으로 공개되었지만 긍지를 가지고 본래 의 입장을 견지하며 늘 목표를 잃지 않고 사형 집행인인 형에게도, 혹은 비열하게 자신을 배신하고 을러대고 계속 팔아넘기는 이교 도들에 대해서도 양보할 줄 몰랐던 한 인간.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02

‘나!’─ (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리를 한정하는, 운명적이고 불가변적이며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의 훨 씬 아래, 아니 훨씬 위에 머무르게 하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능 력을 넘어서는 매우 의미 있는 단어다. 이 두려운 말은 일단 발음 이 되면 그 사람과 그가 생각하거나 말한 모든 것을 그에게 그런 마음이 없어도 실제로 이미 그가 동화해 버린 것으로 인정하고 영 원히 동일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06

그렇게 청년과 관리들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꽤 오랜 시간 이 흘렀다. 일출과 일몰에 의해 측정되는 일상 시간 밖에 인간관 계를 초월한 시간의 밖, 그 밤의 어느 무렵이 되자 차밀은 젬 술탄 과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즉 누구보다 불행하고 막다른 골 목에 이른 인물, 자기를 버리려 하지 않고 버릴 수도 없고 자기 자 신일 수밖에 없는 그 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자랑스럽 게 고백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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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총가虛塚歌 1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 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 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동서남북.
길은 동남서북.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數萬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82

진달래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 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속 깊이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 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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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아일랜드 - 희귀 원고 도난 사건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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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이 두사람의 일화가 문득 궁금해 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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