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東醫寶鑑》은 하늘타리의 효능을 부위별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 식물을 ‘하늘이 내린 신성한 식물’이라는 뜻의 ‘천과天瓜’라고도 소개한다. 《동의보감》, 《의방유취醫方類聚》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의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우리 땅에 나는 약재, 즉 ‘향약’의 쓰임을 꼼꼼히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그 당시 부르던 약재의 우리 이름을 세심히 적어두기도 했다. 하늘타리를 두고 ‘천질월이天叱月伊’, 즉 ‘하늘의 식물이 밤에 핀다’는 뜻에서 ‘달(月)’을 붙여 ‘하늘달이’라고 소개한다. 그 옛 이름에서 지금의 ‘하늘타리’가 되었을 것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2
하늘타리는 낮에는 꽃잎을 웅크려 쪼그라든 채 밤을 위해 에너지를 아꼈다가 밤이 되면 꽃잎을 한껏 펼치고 솨솨 소리를 낼 듯이 짙은 농도로 향기를 발산한다. 꽃가루받이의 매개자가 될 밤의 곤충들을 유혹하려고 어두운 숲에 자신의 향기를 부려놓는다. 너무 고혹적이고 관능적이고 농염해서, 그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허겁지겁 조사를 서둘렀던 기억이 여태껏 남아 있다. 포유류인 내가 그 꽃부리에 코를 묻고 있다가 한 점의 꽃가루로 변신해서 암술대를 타고 씨방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밑씨를 만나, 마침내 ‘수정’이라는 행위에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던 한여름 밤의 기억! 그 치명적인 향기를 하늘타리는 요술처럼 맨몸으로 만든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4
식물의 몸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화학작용의 결과로 발현되는 것이 그들의 향기다. 하늘타리의 향기에 관여하는 성분으로 밝혀진 휘발성 물질만 해도 50여 가지에 달한다. 식물의 옹근 몸체를 따지고 들면 구절초 기준으로 한 개체에서 향기를 내는 물질이 100종류가 훌쩍 넘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식물은 이 성분들을 제 몸에서 각양각색으로 조합하여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자 언어로 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4
하늘타리의 향기는 ‘리날로올linalool’과 ‘알데히드aldehyde’라는 성분이 주축을 이룬다. 전자는 시트러스 계열의 베르가트 향을, 후자는 달콤쌉싸름한 정체불명의 꽃향기를 내기 때문에 향수와 방향제와 섬유유연제의 원료로 쓰이는 이름난 방향 물질들이다. 몸의 내부에서 다양한 성분이 얽히고설켜서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향기를 분출하며 하늘타리는 말한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박각시를 비롯하여 밤에 활동하는 곤충들은 그 언어를 알아듣고 찾아가 하늘타리의 유혹에 응답한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5
서양에서도 꽃의 생김새 때문에 하늘타리속의 이름을 트리코산테스Trichosanthes라고 지었다. ‘털’을 뜻하는 그리스어 ‘trichos’와 ‘꽃’을 뜻하는 ‘anthos’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천연물질 ‘트리코산틴’은 하늘타리의 몸에서 추출한 단백질인데, 항암 효과, 특히 유방암과 폐암의 세포 발생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현대 과학이 밝히면서 신약의 주성분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과거에 민간에서는 하늘타리 뿌리를 임신부에게 절대로 쓰지 않거나 피임약 대용으로 처방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임신 중절에 미치는 ‘트리코산틴’의 기작은 비교적 최근에야 확인되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6
붉은하늘타리의 등장은 식물분류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이처럼 기존에 국내의 분포에 대한 기록이 없던 타국의 식물을 ‘미기록종’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신종’은 국경의 안팎 어디서도 확인된 적 없던, 지구상의 새로운 식물을 말한다. 남서해안에 넓게 퍼져 있는 먼 섬에서는 그간 기록되지 않았던 미지의 식물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67
향유가 지천으로 피었다. 가을이 왔다는 뜻이다. 쑥이나 서양민들레처럼 애써 가꾸지 않아도 민가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식물이 향유다. 꽃이 화려하지 않아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특유의 향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0
식물 전체에서 강한 향기가 난다고 해서 이름도 향유香薷다. 나물로 먹기도 해서 옛사람들은 ‘먹을 여茹’ 자를 붙여 ‘향여香茹’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히말라야와 유럽에도 널리 자라는 향유는 먼 옛날부터 약용식물로 널리 이용되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1
《향약채취월령》은 예로부터 널리 쓴 우리 약재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이들을 정확히 언제 채집해야 하는지를 민간에서 노래로 익힐 수 있도록 기록한 일종의 의학서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11월은 ‘향유를 채집하는 달’이다. 《동의보감》도 향유를 중요한 약재로 기록한다. 특히 ‘곽란霍亂’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향유를 쓴다고 했는데, 그 시절 배탈의 특효약이 향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표 세균인 살모넬라균에 대한 항균 성분이 향유에서 확인되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1
식물의 약성은 영어로 흔히 ‘에센셜 오일’이라고 부르는 ‘정유精油’ 성분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공기 중에 노출될 때 식물 특유의 향기가 난다. 대개 향이 짙은 식물이 약성도 높은 편이다. 추출법을 달리하면 식물 체내에 둥둥 떠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에센셜 오일을 밝힐 수 있고, 그것으로 새로운 천연향료나 신약 성분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에 관련 연구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2
향유의 체내에서 확인된 정유 성분은 자그마치 70여 종류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리모넨limonene과 시트랄citral이다. 이들은 마치 레몬과 오렌지를 버무린 듯 상큼한 향을 담당하는 성분이다. 유명한 향수 브랜드 ‘조말론’과 ‘이솝’은 그 향을 담은 제품을 주력 상품으로 내걸기도 했다. 이들 성분을 자연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재배식물 레몬그라스에서 주로 얻는다. 레몬그라스는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키우는 볏과 작물이다. 잎만 보면 억새나 갈대처럼 큰 특징 없이 생겼는데, 옹근풀에서 나는 특유의 레몬향은 독보적이라 이름도 ‘레몬풀’이다. 향수를 만드는 원료의 대명사가 된 식물이자 셰프가 사랑하는 향신료, 태국의 대표 음식 똠양꿍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식물이 레몬그라스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쓰이는 레몬그라스가 안타깝게도 우리 땅에서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2
레몬그라스와 같은 수입 식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해당 식물의 원천에 대한 로열티를 따로 내야 한다. 국제협약인 ‘나고야의정서’의 엄격한 의무조항에 따라 이익은 마땅히 원산지에 공유되어야 하기 때문에, 외국 원산의 재배식물을 키워 쓰는 데 숱한 제약이 따르게 된 것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3
조선 건국 초기였던 1399년에 편찬된 의학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에는 우리 땅에 자라는 향약이 당약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이 곳곳에 담겨 있다.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의 서민 의료기관이었던 제생원에는 국내의 각 지역에서 수집한 약용식물을 심어 기르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되었다. 특히 세종은 즉위 초부터 지역별로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조선의 3대 의서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이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4
향유는 조선이 낳은 모든 의서에 하나같이 중요한 식물로 등장한다. 한방에서는 ‘향유’라는 이름 외에 ‘노야기’라고도 부르는데, 실제로는 향유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 식물인 꽃향유도 같은 이름으로 한방에서 함께 썼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꽃향유의 주 분포지는 한반도다. 향유는 북반구 일대의 여러 국가에 걸쳐 비교적 널리 자라지만 꽃향유는 한반도를 벗어나면 중국 동북부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란다. 꽃향유도 향유처럼 몸에서 특유의 레몬향을 발산하는데 향유와 비교하면 옅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꽃향유 몸에서 밝혀진 정유 성분은 향유의 절반에 그친다. 그 대신 꽃향유는 이름처럼 꽃이 두드러진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5
꽃향유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는 꽃향유를 쏙 빼닮은 가는잎향유와 변산향유와 좀향유가 자란다. 가는잎향유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이화령에서, 변산향유는 변산의 해안가 바위지대에서, 좀향유는 한라산에서 만날 수 있다. -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3238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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