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믿기지 않아, 엄마가 이런다는 게. 엄마는 어디 데이트하러 나가지도 않잖아. 하물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한 주씩이나 보내러 가다니. 그 사람이 도끼 살인마인지 뭔지 모르잖아."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6
"그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 사람은 내 시를 좋아했어. 그래서 자기 책을 스페인어로 번역해달라고 했던 거고. 그러면서 몇 년 동안 편지도 교환하고 전화 통화도 했잖니.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 그 사람도 홀로 네 아들을 키웠어. 나는 원예를 좋아하고 그 사람은 농장을 갖고 있고. 난 초대를 받아 우쭐한 기분이야…….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인데."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6
"너 그래서 그러는구나. 이 엄마가, 아니 50대 여자가 남자랑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쨌든 그 사람은 ‘우리 바람이나 피웁시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냥 그랬지. ‘우리 농장에 한 주 다녀가시는 건 어때요? 블루보닛이 만발하기 시작했어요. 내 새 책 원고를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낚시도 하고 숲으로 산책도 나가고.’ 닉, 나 좀 봐줘라. 엄마는 오클랜드 카운티 도심의 병원에서 일하잖아. 한 주 동안 숲속을 거닐 생각을 하는 엄마 기분이 어떻겠어? 게다가 블루보닛! 이 엄마한텐 천국일 거야."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7
그녀의 존 외삼촌처럼 콧소리 섞인 남부 특유의 느린 말투로 계속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텍사스는 어떻게 알아요? 그 옛날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이혼은 언제 했어요? 아들들은 어때요? 술은 왜 안 마셔요? 왜 알코올중독이 되었었죠? 왜 다른 사람들의 책을 번역해요? 곤란하고 괴로운 질문들이었지만, 그렇게 관심을 받으니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8
그녀는 소음이 없는 도시를 보니 어린 시절, 다른 시대가 생각났다. 사이렌 소리도, 교통 소음도, 라디오 소리도 없었다. 말파리가 유리창에 부딪치며 윙윙거렸다. 가위질 소리. 두 남자의 대화 리듬. 더러운 리본을 휘날리는 선풍기 바람에 오래된 잡지책이 바스락거렸다. 이발사는 그녀를 못 본 척했다. 무례해서가 아니라 예의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09
"오클랜드에서라면 지금 뭘 하실 시간이에요?" 그가 트럭에 타면서 물었다. 오늘은 소아과에서 일하는 날이었다. 코카인 중독자가 낳은 아기들, 총상 입은 아이들, 에이즈에 감염된 아기들. 탈장과 종기. 대부분 자포자기 상태의 성난 빈민들 상처를 돌보는 일이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0
"이 계절, 우리 집에 가는 길.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픽업트럭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달렸다. 아무도 없는 그 길은 꽃이 무성하고 공기가 향기로웠다. 분홍, 파랑, 자홍, 빨강. 그 가운데 노란색과 연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졌다. 향기롭고 더운 바람이 차 안에 가득했다. 엄청난 뇌운이 형성되면서 천지가 노란빛에 휩싸였다. 이 빛을 받은 꽃들이 아득히 이어지며 무지갯빛 광휘를 발했다. 종달새, 들종달새, 붉은깃찌르레기가 길 옆 수로 위로 쏜살같이 날아다녔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트럭 엔진 소리보다 높았다. 마리아는 창턱에 팔뚝을 대고 습한 머리를 내밀어 얼굴을 괴었다. 이제 아직 4월인데 텍사스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온몸에 번졌다. 꽃향기는 마약처럼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0
그녀는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피곤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나뭇잎들이 소용돌이치자 주위의 은은한 색채가 흐려졌다. 양철 지붕에 비 내리는 소리. 그녀가 자고 있을 때 딕슨이 와서 그녀가 깰 때까지 옆에 누워 있다가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게 전부였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3
그들은 갈퀴 모양의 발이 달린 욕조 안이나 배 안, 또는 숲속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비 온 뒤 포치에 아롱거리는 초록빛 속에서 서로를 안았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3
사랑은 무엇일까? 마리아는 자고 있는 그의 반듯한 얼굴선을 보며 자문했다. 사랑한다는 것.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4
그 책이란 테이블 위에 널린 수백 장의 카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왜 이제야 자기 원고를 읽으라는 걸까? 말하기 힘들어서 그러는지 모른다. 그녀도 그럴 때가 있다.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말하는 게 너무 힘들면, 그냥 시를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6
곧 성큼성큼 뒤따라온 딕슨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기슭에서 밀려나가고 있는 배 위에 올랐다. 그는 키스를 하다 축축한 바닥에 그녀를 내리누르고 그녀의 몸을 나체밀었다. 그들이 서로 껴안고 요동치는 동안 배가 아래위로 출렁이며 빙빙 돌다가 물가의 갈대숲에 흘러들어가 정지했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속에서 배와 함께 흔들거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런 넘치는 격정이 단순한 분노에서 오는지 상실감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일광욕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그날 밤이 거의 다 새도록 말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전에 코요테 우는 소리, 닭들이 나무에 올라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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