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의 핵심은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훨씬 더 낮음에 있습니다. 인식의 해상도는 우주의 해상도보다 훨씬 낮겠지요. 이렇다 보니 수학적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Many to one mapping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언어를 봤을 때 상당히 다양한 생각들이 동일한 단어로 매핑될 수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생각의 수가 언어의 수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일대일 매칭이 안 되는 거죠. 따라서 단어만 보고 역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는가?’라는 재구현 역시 불가능합니다.(김대식, 『인간 vs 기계』)

-알라딘 eBook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중에서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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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번역에서 완전히 중립적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이것이 발생하는 원인이 번역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해석 행위에서 온다는 점이다. 셋째, 읽기 자체가 해석 행위라는 점이다. 즉 텍스트를 중립적으로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읽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맥락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중에서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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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개입 없이 단지 복제나 재현만 하는 번역 또는 다른 어떤 글쓰기는 생각할 수 없다.(……)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를 단순히(……) 중립적으로만 전해줄 수는 없다. 여기에는 늘 해석의 요소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모든 번역, 특히 문학 번역은 번역가의 창조성을 포함한다. 해석 자체가 창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진 보즈 바이어, 『문학의 번역』)

-알라딘 eBook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중에서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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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번역이 더 창조적이라는 역설이 생겨난 이유에는 번역의, 적어도 문학 번역의 이상으로 제시한 ‘복제’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라는 점도 있다.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번역가의 해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중에서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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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베르길리우스는 자연을 모방하여 민족적 서사시를 쓰려고 했는데, 호메로스가 이미 할말을 다 해버려 난감해하다가, 자연은 모방할 수 없지만 호메로스는 모방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고 한다.

-알라딘 eBook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중에서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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