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불교적 사유
김진 지음 / 울산대학교출판부(UUP)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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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원하다는 삶 자체에 대해서는 해체하지 않고 긍정한다. 위버멘쉬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사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이것은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를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최고 유형`으로 느끼는 것과 같다.
이들은 가장 무거운 숙명적 과제를 짊어지고서 가장 가볍고도 가장 피안적일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하여 가장 가혹하고 무서운 통찰을 하면서도 삶의 영원한 회귀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하여 영원한 긍정을 말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영원회귀 안에서 위버멘쉬는 목적 없이 순회하는 세계 현실 안에 거주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미래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한다.이처럼 인간의 주체적인 정신을 혹자는 불교에서의 해탈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영원회귀에 대한 운명애적 태도를 불교적 열반사상과 비교함으로써 현실적인 삶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자기극복의 가능성에서 니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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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5-05-0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론과 같이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중론 사상이 나올때 중간 사상으로 니체의 영원회귀와 비슷한 사상이 나왔거던요...불교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전 스피노자나 니체의 생각을 봅니다.

2015-05-21 2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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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2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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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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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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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2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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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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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2 0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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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2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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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 0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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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 0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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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1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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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슴 속에 상처가 있고 상처는 언제나 벌어질 수 있다.누구나 내부에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고통을 간직하고 있고, 심하게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거기에서 치유되려 하지 않는다. -라마르틴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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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절대적 공간, 시간 개념을 부정하였다.
현대인은 은폐되어 있는 역동적 힘에의 의지를 망각하고 오로지 표면적인 합리주의적 지성만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맹신한다.
니체는 한편으로 다원적인 건강한 인간상을 자신의 철학함의 목적으로 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원천으로서의 힘에는 의지를 밝힘으로써 삶과 세계의 역동적인 형이상학적 내지 존재론적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표면의 형식적 지성적 자아는 삶의 원천을 망각하고 결여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자아는 질병의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니체가 보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자아에 의해서 성립된 가치나 도덕이 아닌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삶의 본래적 원리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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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에 대한 사랑, 즉 대담하게 독창성을 추구하며 조소를 당할 때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인정받지 않아도 견딜 수 있으며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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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니이체의 구원론의 차이 이영수(동아대)
니이체는 고전문헌학자이다. 그는 희랍예술에 정통했다. 그는 희랍예술에서 구원의 힘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리스 사람들의 예술체험은 이원적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올림푸스 신화에 나타나듯이 인간은 자기에게 닥치는 두려움을 알고는 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그들을 자신의 보호 벽으로 장막을 쳤다. 질서와 무질서, 빛과 어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섞바뀌어 회전하면서 희랍비극의 내용을 구성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심스럽고 두려운 특징만이 아니라 그 존재의 비극성까지도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예술은 행동하는 사람의 구원이다.행동하는 사람이란 모든 것의 두렵고 의심스러운 특징만이 아니라 그 특징과 더불어 살려는 사람이다.예술이란 고통받는 자의 구원이다.구원의 길이란 고통을 달게 받고 승화시키고 나아가 신성화한다.고통이 커다란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예술이란 삶을 비극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파괴력을 제거해 갈 뿐만 아니라 비극적 행위자이며 동시에 고난의 피해자인 인간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을 한 순간 잊게 만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힘의 의지는 곧 비극이요 이 비극은 또 다른 힘을 위한 순환의 흐름을 만든다.
이때 예술이란 곧 비극성을 사물에서 확인하고 행동하는 것, 고통의 승화, 창조의 말로서 예술을 논할 수 있고 이런 예술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덕의 관점에서 본 니체의 헤라클레이토스 김기선(명지대)
비극적 근본경험, 디오뉘소스적인 것
니체에게서 디노눠소스라는 이름을 들을 때 우리는 이와 동시에 반드시 디오뉘소스의 타자, 즉 그의 대극인 아폴론의 이름을 떠올려야 한다.그것은 이 두 이름이 상호불가분한 대립적 통일을 이루는 한쌍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헤시도오스가 전하는 희랍 신화의 요체는 결국 카오스와 코스모스, 혼돈과 질서의 다름없는 투쟁의 대극구도인 것으로 드러났다.그런데 그는 신들의 탄생의 태초의 장에 카오스와 다이어리는 대극쌍과 동시에 제3의 인격인 에로스를 등장시킨다.에로스는 생식의 신, 사랑의 신이다. 성애는 분리된 것의 결합을 지향한다. 분리 없이는 사랑의 작용도 없다.그러나 결합은 소생의 형태로 다시 분리를 산출한다.사랑은 분리와 결합의 역동성이다. 카오스와 가이아의 분리는 이 우주적 에로스의 최초의 작용이다. 이들은 다시 분리되어 카오스는 어둠과 밤을 낳고 가이아는 하늘과 산, 바다를 낳는다. 에로스는 이렇게 분리되어 대척하며 대극으로 내닫는 이들 소생을 각각 다시금 서로 끌어당겨 새로운 개채의 생산으로 이끈다. "신들가운데 가장 오랜 신"인 이 에로스는 스스로는 형체를 취하지 않으면서 모든 형체를 가진 것들로 하여금 대극적 사랑의 관계성의 장으로 진입하게 하는 가능성의 근거이다.
이러한 비의적 디오뉘소스에 반해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과의 연관성 안에서 아폴론과 더불어 예술원리로서 거론하는 디오뉘소스는 우주적 에로스가 예술적 창조혼으로 전이되어 예술의 차원에서 구현된 신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그런데 니체에게서 아폴론과 디오뉘소스의 대극구도는 비극의 구성원리임을 넘어 예술 일반의 원리로 전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희랍의 비극을 단지 예술의 탁월한 역사적 예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전성의 구현으로 즉 예술을 예술이게 라는 규범을 내포하는 예술일반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비극이 가지는 예술로서의 규범성에 대한 설명이 요청된다. 니체는 그것이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상호적 필연성"에 입각하여 설명한다.아폴론은 빛의 신, 로고스의 신으로서 절도, 한계의 인식, 조형성, 질서, 단순성, 규칙과 개념의 정동으로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을 구현한다. 그에 반해 디오니소스는 반면 디오뉘소스는 도취와 파토스의 신으로 무절제, 과도, 한계와 구분의 해체를 초래하는 융해의 원리를 구현한다.비극에 있어 이 두 원리는 형식적으로는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무대사건의 아폴론적 형상성과 이를 근저에서 떠받치는 가무단의 디오뉘소스적 음향성의 병존으로 구현되며 내용적으로는 무대사건의 플롯을 구성하는 영웅의 운명, 그 부상과 몰락에 있어 드러난다.영웅은 도시의 건설자, 문화의 창조자, 공동체의 입법자이다.가이아적 질료의 범칙과의 투쟁에서 제우스적 형상을 탈취하여 제우스 왕국의 질서를 확립하는 아폴론적 원리의 현현이다.이러한 영웅은 그러나 바로 그 자신의 영웅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몰락한다. 영웅성은 가이아적 신성에 대한 독신hybris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영웅의 존재는 이 독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디케의 엄정한 법칙에 필연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웅의 아폴론적 부상과 디오뉘소스적 몰락이라는 비극의 무대사건의 서사적 형상성은 개개 사건을 음향의 바다로 함몰시키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다시금 용해되면서 그 비극성을 극도로 고조된다.비극에서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뉘소스적 요소는 그 상호요청적 병존에 있어 도달가능한 최고조의 긴장과 동시에 그 긴장의 최고도로 극적인 와해를 가져온다.절정과 전기의 이러한 역동성은 이 두 요소의 팽팽한 균형에서 설명된다.
우리가 체험하는 바와 같이 디오뉘소스적 힘들이 그렇게도 격렬하게 고양되는 곳에는 이미 아폴론적인 것 또한 구름에 휩싸여 우리에게로 하강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Friedrich Nietzsche :sat lithe werke 1,155)
이처럼 이들 두 요소의 정중이 구현됨으로써(K.Kim: mythos und tragodie 287쪽 이하 참조) 비극은 신화를 완성으로 이끈다. "비극을 통해 신화는 그 가장 심오한 내용, 가장 풍부한 표현의 형식에 도달한다."(1,74)는 니체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그가 비극에 경도하는 것은 비극이 구현하는 엄정한 대립적 조화, 그리고 이 조화가 구현하는 생의 역동성이다.이 조화는 불화를 배제하고 얻어지는 정태적 조화가 아니라 대립되는 것들의 투쟁의 한가운데서 분별과 선택을 떠나 이들 대립항 모두를 이를테면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동적 조화이다.
지극히 생소하고 가혹한 문제들에서조차도 이루어지는 생에 대한 긍정; 자신의 최고 유형들의 희생에 있어서도 자기 고유의 무진장한 본성에 환희하는 삶의 의지-그것을 나는 디오눠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비극적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다리임을 알아챘다(6,160)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비극적 철학자, 자신이 이해하는바 "고전적" 고대정신을 유일하게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의지는 그 바라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의지는 자기의 의지를 바라기"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또한 그것은 "동시에 자기를 앞지르며 자기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따라서 니체는 일반적으로 의욕하는 것은 <더욱 강하게 되려는 것>, <더욱 큰 힘을 바라는 것> 그리고 <더욱 생장하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미학적 문화에서 창조성의 개념은 누구나 자신을 삶의 예술적 조형가로 보고 "스스로를 작품으로" 형성하려는 의식적 노력에 본질이 있다.따라서 미학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니체의 문화철학은 탈주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의 재구성, 즉 몸의 미학적 재구성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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