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메멘토모리 - 조선이 버린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정구선 지음 / 애플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자살이 삶의 고통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정치인, 재벌, 유명연예인에서 시민들과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자살 보도가 끝도 없다.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고 자살은 한국인의

사망 원인인 암,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 네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고 한다.

 

수능시험 전후로 자살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실로 마음 아프다. 

중.고 학생들이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왕따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것 또한 못내 안타깝다.

그 시기를 인내롭게 넘긴다면 후일 틀림없이 웃으며 힘든 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을 단련시켰던 시간들에 감사하면서 더욱 알찬 삶을 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살하는 이들의 심적 고통을 다는 이해할 수 없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극한점을 헤메었을 것이고 타인이 이러니 저러니 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자살은 이기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여러 종교에서 강조하듯이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용납할 수 없으며 고통에서 도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발달한 현대문명은 사람들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사회 전방위에 걸쳐 물신화로 인한

극심한 인간 소외 현상을 초래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웃과 직장 등의 소집단 내에서, 그리고 가정과 학교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고 챙겨주는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개개인의 생명과 행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일이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당사자들의 극심한 고통을 살피지 못하고 연민 없는 냉정한

시선들이 혹여 그들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철저한 검토와 자기 반성이 

이뤄져야 할 때이다.

모든 경우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행해지는 것 같은 자살이라 해도

반드시 사회 구조 내부에 원인과 문제점이 있고 그 안에서 해결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사회학자 에밀 뒤르껨은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피력했다.

'자살은 사회적 사실이며 이는 다른 사회적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조선의 메멘토모리>에서 '조선이 버린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부제로

조선시대의 자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메멘토모리는 철학용어로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자살을 선택했을까?

저자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정치, 사회 상황과 더불어 유교적 가치관 등이 

자살의 근본 원인이라 진단하고 그 실태를 서술하고 있다. 

조선의 사회 문화를 오랜 세월 연구해온 저자의 이력에 힘입어 다양한 시각의 글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임금과 신하, 양반과 하인, 중국에 바쳐진 처녀들과 환향녀, 절개를 지키고자 목숨을

버린 여인들, 전장터에서 목숨을 버린 병사들과 민초들의 가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자살 묘사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점 또한

이 책의 매력이라 하겠다. 

 

 목차

1장 ; 왕실을 둘러싼 자살사건

2장 ; 정치적 암투와 그 패자들의 죽음

3장 ; 여인들의 한스러운 자결

4장 ; 전쟁터에서의 의로운 결단

5장 ; 민초들의 마지막 선택

6장 ; 애도할 수만은 없는 죽음

 

저자는 조선시대에 자살을 하려 했던 임금들로 선조와 인조를 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전쟁에 직면,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던

두 임금이 외적을 물리칠 생각 대신 무책임하게 자살 운운했으니...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치열한 당쟁과 당파싸움이 낳은 자살들 역시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희대의 독부라 알려진 장희빈 역시 숙종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돌아 서면서

정치적 숙청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파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반대당파의

벼슬아치들 뿐만 아니라 궁궐과 규중의 여인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조선사회에 뿌리박힌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자살을 유인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조선 사회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죽은 후 오랜 세월 정절을 지키며 살았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는 여인네들을 장려하여 열녀문을 세운 사회였으니 

순결과 정절의 미덕은 은장도 등과 함께 여성에게 따라 다니는 족쇄라 하겠다.

병자호란 직후 5만이 넘는 백성이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부분이 부녀자인 그들은 후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부르며 천하게 여겼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전란에 의해 치욕을 삼키고 참아 내다가 그리운 고향땅에 돌아왔지만 싸늘한 냉대 속에

시름 시름하다 죽거나 마음 아파했을 그녀들의 처지에 연민의 감정이 절로 인다.

고려에 이어 조선 역시 건국 초기와 후기에 명나라로 공녀를 보내야 했다.

처녀들은 공녀로 선발되지 않기 위해 자살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고

공녀로 뽑힌 이들은 중국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여인들은 약소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지만 조선은 그들을 품어주지 못하고

백안시까지 했으니 참으로 못난 사회였던 셈이다.

 

자살 이야기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신숙주의 부인 윤씨의 자살이다.

윤씨부인은 남편인 신숙주가 문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세조를 따르자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사육신과 달리 세조의 단종 폐위에 가담하고 이후 고위 요직을 거쳤던 신숙주는

후대에 변절자로 비판을 받았다.

윤씨의 자살설은 이광수의 <단종애사>에도 실려 있지만 소설가 김동인 외 여러 역사학자들은

자살설을 부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윤씨의 자살설이 속설에 그친다고 해도 과연

왜 그러한 속설이 생겨났느냐는 의문이 든다.

어릴적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전기를 읽으면서 사육신이 전왕에 대한 의리와 변치않는

충성심으로 권력에 빌붙지 않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아마 후대에 사육신을 숭배하는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가 사육신과 반대의 행보를 통해

부귀영화를 누렸던 신숙주한테 내리는 징벌의 의미로 그러한 속설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왕족들의 자살, 벼슬아치들과 사대부 양반들의 자살에 비해 민초들의 자살은

훨씬 절실하게 다가온다.

조선시대에는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백성이 많았다.

백성이 있고서야 관리가 있고 나라가 설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모르지 않았을텐데

참으로 한심하다.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던 어리석은 관리들 때문에 백성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군역의 고통 또한 극심하여 처자를 이끌고 목을 매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이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할 만 하다.

농사를 지어야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을 장정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택했을까.

그 당시도 양반의 자제들은 학업을 핑계로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고 하니

힘없고 불쌍한 백성들만 군역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모양새가 오늘날 고위 정치인들과

그 자제들의 경우를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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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2-07-3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가 저래서 자살률이 높아진이유가 너무 감정을 절제하기 때문에 그런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