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밥그릇 한빛문고
이청준 지음 / 다림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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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읽기의 즐거움은 단지 책을 읽고 있다는 자체가 아니라 한 줄 한 줄 읽어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고, 그 책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 착각에 빠질 때이다. 그 때는 나 자신이 내가 아니고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그의 삶을 살고 있다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내 영혼을 일깨우는 각성제 역할을 하였다. 나의 영혼의 그 약을 흡입하는 순간 한 편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환희가 넘쳐흘렀고, 한편으로는 순수한 주인공들의 영혼과 비교되는 때 묻은 내 자아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책은 때 묻은 마음을 씻어주는 인생 동화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화가인 아빠는 죽은 아들의 저승길이 외롭지 않도록 그림을 그린다. 함께 놀아줄 아이들과 배고픔을 해결한 천도복숭아를 그려 관속에 부장하는 애틋한 부성애는 독자로 하여금 눈물을 글썽이게 할 정도이다. 여기서 그림은 단지 그림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들. 결국 그는 엄마 곁을 떠난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는 늘 그 자리에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기에 타향살이에 지친 아들은 언제라도 그의 쉼터를 찾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사에 지쳐 초라한 몰골이 되었더라도 그것을 치유할 방법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품이었던 것이다.
순희는 별을 기르는 아이이다. 병으로 앓아누운 홀어머니에게 약 한 첩을 사다드리지 못할 만큼 가난하지만 항상 맑고 깨끗한 영혼을 잃지 않는 착한 아이이다. 사람에게는 각기 별이 있고 사람의 운명에 따라 그 별의 운명도 달리 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순희는 의사 선생님이 꺼져가는 엄마별을 볼 수 있도록 의사 선생님 집의 유리창을 매일 깨끗이 닦는다. 의사 선생님은 밤하늘의 별이 아니라 순희의 정성을 눈치 채고 순희 집을 방문하게 된다.
밥그릇에 담긴 밥의 반을 항상 덜어 내시는 선생님. 그 행동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덜어낸 밥그릇의 절반만큼의 마음이 언제나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려는 선생님의 제자 사랑이 담겨 있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기도 힘든 초등 시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제자에게 선생님이 늘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스승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37년이 지난 지금 제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도 스승은 그 사랑의 표식을 실천하고 계신다. 제자는 선생님의 배려가 늘 그를 지켜주었음을 고백한다.
때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그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석구의 금옥에 대한 마음이 그렇다. 석구는 농촌 총각으로 동창인 금옥에게 일종의 열등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금옥의 개 누렁이에게 대항할 개 베스를 키운다. 결국 베스는 누렁이에게 승리하지만 그 개싸움은 석구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금옥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이 책속의 이야기들은 부모와 자식 간, 한동네 이웃 간, 스승과 제자 간의 인간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인간 본질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있기에 너무나 감동적이다. 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핵심을 짚어낸 것인데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이 그 기본을 망각하고 있기에 더욱 감동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 우리 세태가 부모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따라서 자식은 돌아갈 품을 상실해버리지 않았는가? 또한 스승은 사도를 벗어나 있으며, 이웃 간에는 반목과 질시가 만연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이런 시대적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인간의 본래적 심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독자들의 영혼 하나하나에 따뜻한 인간애를 불어 넣어주고 싶은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으면 흐릿한 영상이 맑고 깨끗해짐을 느낀다. 뒤틀린 영혼이 정리된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은 비뚤어진 영혼을 지닌 채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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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을 배우고 싶은 꼬마 이다 - 개구쟁이 에밀 이야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비에른 베리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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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아이의 거울입니다. 아이들의 행동 방식은 부모를 매개체로 해서 형성해갑니다. 따라서 아이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모방 심리는 부모의 행동을 여과 없이 자신의 행동으로 수용합니다. 아이들은 형이나 누나, 오빠나 언니 혹은 부모의 행동 거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직 인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자체를 일정한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시비를 가리기 보다는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윗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그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 버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직 어린 나이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다도 모방 심리를 지닌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영혼을 지닌 아이입니다. 그녀는 오빠 에밀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그의 행동을 답습하지요. 현재 그녀에겐 오빠의 행동이 절대적인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오빠를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썽을 피워서 목공실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오빠가 저지른 말썽에 대한 벌인데도 오히려 이다에게는 이것이 재미있고 신비하고 특별한 경험인처럼 보입니다. 목공실에 갖힌 오빠 에밀의 행동도 결코 그 벌칙을 싫어하는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이다도 말썽을 부려 목공실에 혼자 갇혀보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말썽을 피워보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 그것은 티없이 맑은 어린 아이의 짖궂은 장난으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오빠의 말에 따르면 말썽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말썽도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다가 드디어 말썽을 부렸습니다. 짖궂은 말괄량이 암탉 비틀 비틀로타가 덤불 속에 몰래 낳은 달걀을 발견한 에밀과 이다는 오래도록 덤불에 내버려진 달걀들이 썩은 달걀이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오빠가 알 낳을 곳을 지정해주기 위해 암탉을 들고 간 사이 이다는 달걀을 확인하기 위해 나무에 대고 달걀을 깨뜨려 보게 됩니다. 달걀의 상함 여부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다에게 달걀을 깨뜨린 이후에 벌어질 일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오빠에게서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 받고서야 이다는 자신이 말썽을 부렸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다에게는 이 말썽이 자신이 지금껏 원했던 일이었기에 별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지요.

이처럼 아이들의 말썽은 저절로 이루어지나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의도적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아이들의 말썽이란 대부분이 그것을 말썽으로 인식하고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한것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한다면 아이들의 심리를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아이들의 비행을 범죄로 접근하기 보다 교육의 대상으로 여길수 있는 열린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다의 말썽도 그냥 윽박질러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튼 이 책은 어린이의 모방 심리를 잘 보여준 책입니다. 아이들의 독특한 모방 심리에 따른 말썽이 오히려 함박 미소를 머금게 하는 즐거운 책입니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행동이 어른들에게 어린이 책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겁니다. 또한 자녀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유익한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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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법칙 - 거미에게서 배우는 자연주의 처세법
오사키 시게요시 지음, 김현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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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인간에게 가르침을 준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지혜를 자연은 던져준다. 하찮게 보이는 작은 동물의 사소한 행동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자연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 속엔 인간이 배워야할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 숨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자연의 법칙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미가 주인공이다. 거미는 눈에 잘 띄이지도 않는 거미줄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은 거미의 거미줄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한다. 자신의 몸무게 만큼을 지탱할 수 있는 거미줄에 대한 믿음. 그가 자신의 거미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공중을 유영하며 생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거미는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안전과 신뢰에 대한 표본이 아닌가 싶다.


거미가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거미줄의 탄성력을 고려하거나 중력에 대한 계산을 통해 거미줄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거미줄의 탄성력을 계산해보면 그 오묘한 자연의 이치와 적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거미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거미가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거미줄을 선택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런 거미에 관련된 내용이 인간 영역에서도 적용가능함을 주장한다.


우리 인간들도 거미가 자신의 거미줄을 신뢰하듯 자신만의 확고한 신뢰 영역을 확보하고자 한다. 거미의 자연 적응력은 스스로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자신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오랜 기간동안에 진화를 한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내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신뢰의 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이 치열한 생존 경쟁의 시대에 안정된 삶을 확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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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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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과 느림의 차이가 뭘까? 일상적인 사고로는 빠름이 좋은 것이고, 느림은 늘 비난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승패의 갈림을 추구하는 스포츠라면 남보다 앞서 빨리 달려야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고 결국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겠지만 인생살이에서 빠름이란 결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우리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그 빠름이 발전과 개발의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느림이 삶을 깊이 있게 음미하게 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타를 잃지 않게 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보존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유지해 갈수있게 하는 면도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바라는 세상이 바로 느리지만 본성을 잃지 않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쿠바에서 그 가느다란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위기에 봉착한 쿠바의 농업이 '인민을 땅과 함께' 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후 각종 유기 농법을 적용하여 땅에 새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는 평가에서 단적으로 저자의 생각은 드러난다. 그 쿠바의 농업으로 잃은 것은 개발과 계획, 환경의 파괴, 땅의 물신화 이지만 그들은 생산의 어머니인 땅과 녹색의 초원을 얻었다. 인류 문명은 개발과 계획만이 잘사는 것의 전부인양 경제적인 잣대로 세상을 평가해 왔다. 자본주의의 물신화는 극에 달해서 더 이상 인격은 인간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지 못한다. 거기엔 경제적 잣대만이 남아 있다. 결국 그 종착점이 어디일 것인가? 아마도 노동의 가치에 눈을 감고 달러 몇푼에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는 쿠바의 국영 식당의 종업원과 같은 의식을 지닌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저자의 생각이 투영 되어서 인지 이 책의 호흡은 상당히 느리다. 지금껏 살벌한 경쟁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온 불쌍한 중생들에게 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기 라도 할것처럼 이 책은 여백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고 먼발치로 내다 볼만한 화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쳐 흐르고 자연의 경치에는 가슴이 트이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커피향이 은은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문장도 괜히 장문을 사용하여 마음을 심란하게 하지 않는다. 짤막한 문장으로 긴 여운의 맛을 주고자 한다. 또한 한컷 한컷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호흡을 잠시 멈출수 밖에 없도록 독자를 유도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맛 볼수 있게 한다. 굳이 쿠바에 가지 않더라도 그와 동반자가 되어 멋진 여행을 했다는 정신적 충만감을 느끼게 한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쿠바 혁명이 이념적 대결이 세계적 추세였던 지난 시대에 일어 났다고 해서 단순히 공산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혁명의 목표는 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뿌리치고 자주적 국가 건설을 이루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인류가 지향하는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다. 1959년 쿠바 혁명은 단지 외적 혁명에 불과하다.

진정한 혁명은 그 이후 그들이 걸어온 길에서 실현 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한 혁명을 이룩했는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해야 할것 같다. 살기 좋은 세상이란 단지 풍요로운 의식주가 배급되고 개발을 통한 부의 축적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환경을 담보로 이룩된 경제 개발이라면 결코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는 실현 될수없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벌한 경쟁이 인간관계를 규정한다면 아무리 경제적 지수가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쿠바의 진정한 혁명은 현재 시험대에 올라있다.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가 침투하지 아니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 나름대로 생태적 환경에 대한 의식 전환을 확산 시키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고 있는 쿠바는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적 실험 대상 일수있는 것이다. 쿠바는 더디지만 느린 발걸음으로 우리 인류가 지구와 환경에 진 빚을 갚아 나가고 있다. 저자는 그 느린 발걸음에서 먼 장래의 승리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룩해야 할 진정한 혁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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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트 - 전13권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요코야마 미쓰테루 그림,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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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가끔 깊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의 인생이 과연 얼마나 보람 있는 인생인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상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서도 늘 부족함을 불평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삶이 내가 진정 추구했던 이상이었던가? 아니 원대한 포부와 희망은 아니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진진한 삶의 목표가 과연 있었던가? 이런 상념에 빠지다 보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내 앞에 스스로 부끄러워 거울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대리만족일 망정 위대한 영웅들의 일대기를 자주 찾는다. 그들의 삶속에는 용광로처럼 들끓는 불꽃이 있고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에너지가 전이되어 내가 바로 그 영웅의 위치에 서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이 바로 나에겐 며칠간의 삶의 활력소였다. 책을 읽는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에게 삶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가 그의 자녀들을 호되게 꾸짖을 때는 그것이 나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느낌이었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안이하고 나태하게 살아가느냐고 다그치는 아버지 같은 느낌. 이런 호된 질책이 전혀 반감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의 삶이 그만큼 치열하고 진지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결코 회피하거나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인생의 멀고 험난한 길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던 진정한 영웅이었다.

독자는 이 책 속에서 여러 명의 시대가 낳은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다케다 신공, 오다 노부나가, 다이코(토요토미 히데요시)등이 그들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오고쇼(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들을 회고한다. 다케다 신공은 자기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오다 노부나가는 사람을 믿게 만들어 주었으며, 다이코는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정한 영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그는 그 이전의 영웅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세밀히 검토하고 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름대로 그들이 지닌 장점을 취하여 자기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 반면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점은 그가 변함없는 삶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이상은 바로 평화였다. 지긋지긋하게 계속된 가문간의 전쟁과 인질교환, 전쟁에 동원되어 헛되이 사라지는 소중한 생명들, 그리고 그로 인해 황폐화된 민초들의 고통을 종식시키고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끝까지 인내했고 자신의 안위와 가문의 영화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 이전의 영웅들과 그를 구분짓게 한다. 일본 통일을 추진했던 걸출한 영웅들은 결국 오만에 빠져 무리수를 두거나 애초의 이상을 잃고 가문을 유지하는데 급급하다 최후엔 살육전쟁으로 인해 멸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최대한 신중을 기해 행동했고 힘이 미약한 다른 가문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궁지로 몰아 살육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인간적인 포용력이 전쟁이 아닌 인간적 존경으로 적을 굴복하게 하는 큰 효과를 거둔다.

그래서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일본 평화라는 큰 나무에 튼튼한 밑둥이 되어 살아 있는 것이다.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그는 말한다. 다케다 신겐도 오다 노부나가도 다이코도 결코 죽지 않았다고. 지금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큰 나무의 가지로서 활약했고, 큰 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는데 비료가 되었노라고. 지금의 평화는 바로 그들의 비료를 양분으로 해서 이룩되었노라고. 이제 그 평화의 꽃이 다시 시들지 않게 하는 것은 후세들의 몫일 것이다. 우리 후세들이 그 큰 나무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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