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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그 땐 누구에게나 ‘외딴방’이 있었다. 아니지. 누구에게나 있었던 건 아니지. 내가 가파른 언덕 위 반지하의 어두운 골방에서 공부할 때 저 언덕 아래 평평한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 친구의 집은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니. 단지 나에게, 또 내 주변 친구들에게 ‘외딴방’은 그렇게 어두침침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지. 다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시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들은 그들만의 ‘외딴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게지. 애초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있던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그곳은 내가 느끼는 ‘외딴방’과는 다른 공간이었지.
내 나이 열여섯 시절에 나도 저자처럼 나의 ‘외딴방’에 둥지를 틀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내겐 할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홀로 농사를 짓는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시점에 두 살 터울의 남동생도 광주에 있는 중학교로 보냈다. 궁벽한 시골의 내 고향엔 변변한 고등학교가 없었으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처럼 도시 고등학교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가난한 살림에 버젓한 방을 얻어줄 수 없었으니 대부분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해야만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등하교를 했고, 지대도 높은 그 골목이 어찌 그리도 어두침침한지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하교할 땐 할머니가 마중을 나와야만 했다.
그 높은 곳에서 늘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가 오히려 굴욕감을 느꼈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 열여섯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에게 나의 ‘외딴방’은 부끄러운 자화상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지만,’ 한없이 외롭다는 생각. 그토록 계단을 이루며 층층이 쌓여있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있었지만 내가 거대한 도시의 바다 한 가운데 한 점 섬에 홀로 떨어져 지낸다는 생각. 내게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간에 기거하는 타인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나의 ‘외딴방’에 대해 얘기할 수도, 또한 그곳에 친한 친구를 데려올 수도 없는 공간. 내성적인 나의 성격 탓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외딴방’이 주는 자괴감이 나를 고립시킨 것이다. 나는 결국 나만의 ‘외딴방’에 고립되어 외따로이 그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외딴방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다시는 그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저자처럼 ‘정면으로 쳐다볼 자신이 없어 얼른 뚜껑을 닫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그저 지워버리고 싶은 내 인생의 슬프고 괴로운 기억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내게는 그 때가 지나간 시간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낙타의 혹처럼 나는 내 등에 그 시간들을 짊어지고 있음을, 오래도록 어쩌면 나, 여기 머무는 동안 내내 그 시간들을 나의 현재일 것임을”느낀다고 말한다. 작가로 인해 나도 이젠 나의 ‘외딴방’이 나의 과거가 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것은 지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새록새록 기억의 전면으로 솟아나오는 현재임을 느낀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고스란히 가슴에 묻어둘 수만은 없음을 느낀다. 그냥 그대로 기억의 창고 깊숙한 곳에 묻어두려 애쓸수록 곰삭은 기억이 오히려 어느 순간 나를 더욱 괴롭힐 것이기에.
그렇다면 작가는 왜 지금껏 도망쳤던 그 자리를 이 글쓰기를 통해 다시 현재로 끌어들인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나간 시간이 지나간 시간에 그칠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과거의 흔적이란 지우려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 현재로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자각한 때문이리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만큼이나 지우고 싶은 기억도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삶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내가 언제 어디에 있으나,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마을과는 반대의 의미로, 그러나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외딴방은 내 안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4년간의 ‘외딴방’ 생활을 ‘외딴방’ 이외의 시간과 똑같은 비중으로 느끼듯 내게도 나의 ‘외딴방’은 내 삶에 소중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단지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을 뿐이다. 저자로 인해 나도 굳이 무의식의 저편에 묻어두고 의식의 공간에 흰 공백으로 남겨두려 했던 외로운 시간을 의식의 지평으로 끄집어 내려한다.
작가가 이제 와서 굳이 ‘외딴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온전한 글쓰기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가 ‘되돌아보기’라고 한다면 삶의 한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온전한 글쓰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글쓰기란 이전의 모든 기억을 이 순간으로 끌어들여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란 현재에 그 의미를 둔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란 없다. 과거도 예전엔 현재였을 것이고, 미래 또한 언젠간 현재가 될 것이므로. 시간의 연결고리는 어느 한 순간을 끊어놓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을 끊어서 떼어놓고 부정할 수 있는 삶이란 없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가 삶의 본질을 담고자 한다면 과거의 한 순간을 부정하고선 온전한 글쓰기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꼭 글쓰기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본질적 삶을 성찰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스스로가 나의 ‘외딴방’ 생활을 부정하고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이미 열여섯 그 때의 외롭고 괴로운 생활은 내가 겪어온 내 삶의 일부분인 것을. 그 때 그 시절엔 현재형으로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었음을. 내 자아의 핵심적 부분이 그 시절 그 ‘외딴방’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음을. 그리하여 지금도 내 안에 억압된 잠재의식 속에 괴로운 기억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이걸 부정한다는 건 내 스스로 나를 부정함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외딴방’을 들춰내는 것은 작가가 글쓰기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글쓰기의 본질에 얼마나 접근했을까? 저자는 ‘외딴방’ 시절의 삶이 주는 무게감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시대적 질곡과 개인적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의 탄압과 서슬 퍼런 군부 독재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 또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해 좁고 답답한 ‘외딴방’에서 오빠, 외사촌 함께 생활해야 했던 불편함. 무엇보다 절친하게 지냈던 옆방 희재 언니의 자살. 이런 상황이 감수성이 예민했던 십대 후반의 여고생에게 드러내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상황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와 당당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소외된 자기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몸짓일 것이다. 솔직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그 시절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녀의 성숙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녀의 이전 소설과 다른 무게감으로 내게 다가온다. 과거에 대한 온전한 성찰이 온전한 글쓰기의 본질에 접근하게 했다면 지나친 과찬일까?
독자로서 나도 내 등에 짊어진 ‘외딴방’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이 든다. 나의 열여섯은 90년대이기에 저자가 느끼는 시대적 질곡은 그다지 크지 않다. 순전히 자기 열등감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무게감일 뿐이다. 그건 타인과 비교된 삶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일 뿐이다. 그 과거의 심리적 충격이 현재의 내게도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이젠 나도 ‘어린 나’에서 비롯된 억압된 의식을 풀어내리라. 그것이 나의 현재적 삶을 옭아매는 밧줄이 된다면 영원히 나의 과거의 한 부분은 무의식 속에 묻어둔 의식 속에 공백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