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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도깨비 책귀신 1
이상배 글, 백명식 그림 / 처음주니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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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별로 없던 시골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종례 때마다 들려준 옛날이야기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한 대상이 도깨비다. 그 이야기 속 도깨비는 사람을 해치기보다는 늘 착한 편에 서서 나쁜 사람을 혼내 주는 심판자였다. 약간은 어수룩하여 인간에게 농락당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교묘한 속임수를 간파하고 악인을 징벌하는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여 어린이의 답답했던 가슴을 속 시원히 풀어주던 친숙한 존재였다.  그만큼 우리와 친숙한 대상이기에 도깨비는 책의 주인공으로도 꽤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역시 도깨비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돈 욕심에 모으고 모으는 데만 열을 올리는 구두쇠 영감을 가장 통쾌히 혼내주는 방법은 그 돈을 빼앗아서 정말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처음엔 이 도깨비도 어수룩하여 그저 돈을 모으는 데만 열중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주인이던 구두쇠 영감이 돈에 집착해서 고리짝에 담아두기만 했기에 고리짝 도깨비로서도 그저 돈 냄새에 익숙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고리짝 도깨비는 책의 소중함을 깨닫고 도서관을 짓는 데 모든 돈을 투자한다.

    이처럼 이 책도 도깨비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뭔가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주고자 시도한다. 즉 주제 의식이 아주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돈이나 땅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 읽기의 중요성이다. 책이 어린 시절 자신의 친구였고, 또 자신의 꿈을 키워 준 고마운 존재였다는 지은이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기쁨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땅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시각이나 돈이 최고라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에 일침을 가하는 통쾌한 일갈이다.

    이런 주제의식은 몇 가지 장면에서 확실히 부각된다. 우선 돈에 집착하는 구두쇠 영감의 손아귀에서 아무도 몰래 돈을 훔쳐낸 고리짝 도깨비가 돈에 집착하는 장면이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돈 냄새를 쫓아 돈을 훔쳐내고 그것을 벼락 맞은 은행나무 굴 속 깊숙이 숨기는 행동은 꼭 구두쇠 영감을 따라한 행동이라기 보단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인간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론 그 돈으로 명당을 잡아 집을 짓고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도깨비들의 발상이다. 그래서 찾아낸 명당을 놓고 인간과 경쟁하는 도깨비는 세상 곳곳의 명당을 찾아 땅 투기에 열을 올리는 복부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찜해둔 그 땅에 이미 다른 주인이 있어도 이를 몰아내기 위해 변을 뿌리는 등 치졸한 방법도 서슴지 않는다. 도깨비의 행동은 졸부 근성을 그대로 드러낸 코미디라 아니할 수 없다.     다행히 도깨비들은 이런 부도덕한 사람만을 만나진 않는다. 멋진 보금자리를 꾸미려 인간과 다투던 중 강력한 적수를 만난다. 어수룩한 도깨비는 한 훌륭한 선비의 교묘한 술수에 말려들어 땅을 놓고 지적 대결을 펼친다. 선비가 던진 '인불통고금(人不通古今)이면'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꼼짝 없이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도깨비들은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책방 가는 기쁨, 책 사는 기쁨, 책 읽는 기쁨을 누린다. 결국 지은이의 의도는 이 대목에서 여실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나는 이 책에서만큼은 지은이의 의도가 상당히 성공했다고 본다. 아이들은 도깨비가 무슨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이 책을 집어 든다. 아마도 그것은 <책 읽는 도깨비>라는 신선한 제목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일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도깨비가 그만큼 친숙한 덕분이기도 하리라. 어쨌든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읽기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만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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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 장기려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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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에게 근대의 색깔은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심하게 굴곡진 역사가 우리의 마음에 잿빛 구름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늘진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 본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뜻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삶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고난의 역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늘이 짙을수록 빛 또한 더욱 찬란히 빛나듯 그분들의 삶 또한 어둠의 역사를 이겨내는 등불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짙은 그늘에 숨어 생명을 연장하기에 바쁜 부끄러운 인간은 강렬한 그분들의 광채에 감히 눈을 뜨기도 힘들다.



이 책의 주인공 장기려 선생도 내겐 감히 올려다보기 힘들 만큼 찬란한 빛에 둘러싸인 분이었다. 그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시대인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조국 독립과 그 이후 극심한 이념 갈등,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모두 겪어온 이력을 지녔다. 이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꿋꿋이 자신의 의지를 고수해온 분이다. 그 분의 뜻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 마치 위대한 성자를 연상하듯 선생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굳은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



외과의사인 선생은 직업상 인간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을 늘 감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생은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자신의 사소한 실수가 한 소중한 생명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환자가 어떤 사람이든 그에겐 단지 의사에게 생명을 의탁한 환자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다. 그에겐 높은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라 해서 헐벗고 굶주린 평민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은 한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돈이 없어 병원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였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다 똑같은데 누구는 부유해서 호화스런 병원에서 대접받고 누구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마냥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그에겐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 그가 의사가 되고자 했던 목적이 바로 그런 가난한 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내정된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서민의 병원을 택한다.



그가 택했던 평양의 기홀 병원은 그의 이상에 상당히 부합했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병원이었고, 무엇보다 지역적 특성상 많은 환자들을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민을 대상으로 한 병원이라 해도 이곳마저 찾을 수 없는 빈민촌의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병원 업무가 끝나면 남은 시간을 쪼개어 직접 환자를 찾아갔다.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이니 거꾸로 의사가 환자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념적 선택이 강요된 사회에서 어느 편이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단지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피아(彼我)의 구분을 초월하고자 노력했던 선생의 높은 이상은 용납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념 속에서 생명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더 높은 이념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찮은 한 생명은 그렇게 전쟁의 도구로 전장에서 쓰러져갈 뿐이다. 선생은 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 행위 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겪어야 했던 슬픈 역사이기 이전에 선생으로선 삶의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직전에서 선생을 살린 건 또 하나의 생명이다. 이제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자궁을 박차고 막 나오려하는 새 생명이 선생을 일으켜 세운다. 다 쓰러져가던 가련한 생명은 자신을 부르는 또 다른 생명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선생은 그런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을 위해 너의 생명을 다하라는 숙명적인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는지 모른다. 기적처럼 일어선 선생은 임산부를 병원으로 안내한다. 다른 의사들이 모두 외면한 불쌍한 여인을 막무가내로 병원 응급실로 인도하여 수술을 하게 한다. 생명의 부름에 응하는 선생의 그런 불굴의 의지를 가로막을 병원 관계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선생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오직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데 전념하신 분이다. 오로지 그것이 자신의 삶의 존재 의미였기에 어떤 주변의 압박에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물질적 욕망에 도취되어 존재적 의미를 내팽개치는 이 사회에 귀감이 될만한 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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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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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 이토록 유쾌하게 표현되고 독자로 하여금 미소도 머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절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작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겁고 침울하게 그리기보단 건강하고 밝게 그리고 있다. 그것은 결코 작가가 그 현실적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난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고, 그로 인한 국제결혼이 다문화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면 그를 받아들여 풀어가야 할 숙제 또한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할 짐이기에 즐겁고 밝게 풀어가려 했음이리라.

    그래서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 짐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그 짐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보듬고 간다. 오히려 내 짐이 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데도 남의 짐까지 나눠지려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주인공 완득의 담임인 똥주 선생님이다. 그는 표면상으로는 말이 걸고 행동이 모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독특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교사이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춘 가정환경을 가졌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못 마땅히 여기고 오히려 그들을 돕는 인생을 살아간다. 부모와 벽을 쌓고 단절된 그의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할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강한 인물이다.

  다음으론 완득의 모친이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으로 시집을 왔지만 난쟁이에 변변한 직업도 없는 춤꾼 남편을 견디지 못해 이혼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잊지 못하는 인간적 면모를 지녔다.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자식을 모질게 버리는 그런 무정한 엄마가 결코 아니다. 비록 아들 곁에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아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녀는 똥주 선생님의 중개로 아들을 만나게 되고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

  완득의 아빠와 삼촌 또한 마찬가지다. 아빠는 춤을 가르치고 술집에서 춤을 추는 삼류 춤꾼이다. 춤 실력은 뛰어나지만 볼썽사나운 외모로 인해 늘 외면을 당하는 소외된 존재이다. 그나마  춤 실력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는 멀쑥한 외모를 갖췄지만 말이 어눌한 제자를 키워 자신을 대신하게 한다. 그가 바로 완득의 삼촌 아닌 삼촌이다. 하지만 삼촌은 스승인 아빠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소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면의 순수함이 결코 스승을 떠날 수 없도록 그를 붙들고 있다. 그는 핏줄보다 더 진한 완득이 네의 또 한명의 식구인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정점은 주인공 완득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가는 주인공. 그는 자신을 늘 갈구는(?) 똥주 선생님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비뚤어나가지 않는다. 가난한 현실에도, 추한 아빠의 외모에도, 또한 남과 다른 엄마의 처지에도 결코 비관하지 않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엄마가 안쓰러워 신발을 챙겨주고, 춤판에 다닐 수 없게 되어 지하철과 시골장터를 전전하며 돈을 버는 아빠와 삼촌을 걱정하는 든든한 학생이다.

  이런 등장인물로 인하여 이 소설은 곳곳에 무거운 사회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비추고 있지만 결코 암울하지도 않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외적인 화려함은 없지만 내적인 끈끈한 인간관계로 맺어져 있기에 독자는 유쾌하고 즐겁게 폭소를 터뜨릴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완득이를 통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의 외적 환경을 탓하며 불만을 토로하며 살아온 내 인생을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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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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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리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을 수 없는 것.

주인공은 그런 운명에 홀린 듯 레스토랑 무지개의 오너인 다카다 씨에게 다가간다. 그와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오래전부터 그와 절친했던 사이인 것처럼 그는 늘 주인공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한 잡지에 실린 보고서에 끌려 레스토랑에 취직하고, 그 고요하고 행복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레스토랑은 주인공의 삶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레스토랑에 투영한 오너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싹튼다. 그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인 것처럼 여겨진다. 스스로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인 것처럼.

주인공의 사랑은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슬며시 스며든다. 오너의 삶을 공유하면서 주인공은 오너에게 천천히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가진 오너와의 공통점이 저절로 그들을 서로에게 이끌리게 한다. 해안가에서 자라난 주인공에게 오너의 가게인 도쿄의 레스토랑 무지개는 타히티의 따뜻한 남국의 낭만을 안겨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건 온전히 오너의 꿈과 낭만이 일궈낸 그의 분신이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삭막한 도시의 냉랭함을 이겨낸다. 그녀는 그 품안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건 어찌 보면 오너의 정겨운 품안에 안겨 있는 편안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 포근한 인간적인 감정은 오너 다카다에게도 마찬가지다. 유부남으로서, 또한 같은 직장의 오너로서 겉으로 내색할 순 없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도 그리움과 애틋함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어떤 인간적 애정도 느낄 수 없었던 오너에게 그녀의 존재는 고요한 호수에 이는 자그마한 파장 같은 것이었다. 무지개의 종업원에서 일시적으로 오너의 집 가정부로 들어간 주인공은 그들 부부의 삭막한 현실을 느끼게 된다. 황폐한 정원, 돌보지 않은 애완동물, 심지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의 아내. 어느 구석엔들 오너를 머물게 할 만한 곳이 없는 가정이다.

그러나 오너의 마음은 늘 타히티의 따스한 햇살과 풍요로운 바다, 즉 싱그러운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가정이 그런 따뜻한 보금자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런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노력의 흔적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오아시스도 없는 황량한 사막처럼 메마른 감정으로 살아가는 부부에게 그곳은 가정으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 장소일 뿐이다. 가정으로서의 기능 상실은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잠자리에 들 시간에 들어왔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는 낯선 타인의 공간일 뿐이다. 부부는 서로에게 타인이고 법적 의무만이 남아있는 외롭고 답답한 공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면의 공통점을 발견한 두 남녀가 서로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황량한 사막에 끼어든 주인공.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우물을 판다. 외로움에 의기소침해 있는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 마치 무너져 가는 한 가정을 대변하는 듯 말라가는 식물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가정엔 다시 생기가 찾아든다. 애완동물들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달라고 보채고, 말끔하게 다시 가꿔진 정원엔 새 생명들이 싹을 틔운다. 오너의 마음에도 희망의 빛이 스며든다. 그 희망은 주인공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점차 자라난다.

그런데 주인공의 유부남인 오너에 대한 그 사랑과 그녀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 사랑이 단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운명이라는 허울로 첫눈에 반한 두 남녀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면 지극히 천박한 삼류 애정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 소설이 독자를 애틋한 감정으로 몰고 가는 건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의 이끌림이 결국 둘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운명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 아니라 둘만의 가슴에 누적된 감정의 낟가리가 더 이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극한의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결국 어느 한 순간도 그리움의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무지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미 그녀에겐 첫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정적으로 서로를 끌어안아야만 할 정도로 운명적인 사랑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녀 자신도 그런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될 정도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그녀의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거부하고 떠난다는 건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이 운명적인 것이라면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유부남에 대한 사랑이라고 어찌 천박한 사랑이라 할 것인가?

이처럼 둘의 사랑은 독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온다. 유부남을 사랑한다 하여 비난할 수 없는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 서려있다. 오히려 독자의 마음에 숨겨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린 상처를 자극하며 은근히 스며드는 멋이 있다. 한순간 눈꺼풀이 씌워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알아가며 마음 속 깊은 내면을 열어 상대를 받아들인 사랑이기에 이룰 듯 이루어지지 않는 둘의 애정 관계에 오히려 독자가 더 안달할 정도이다.

나는 둘의 사랑이 무지개 색 황홀경을 쫓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지개의 흔적에 당황하던 내 어린 시절의 무지개 사랑이 아니길 기원한다. 그들의 사랑이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멋지고 황홀한 웨딩홀의 무지개 장식으로 결말지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서로에게 운명처럼 이끌리는 남녀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 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라고 난 생각한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빼앗아서도 안 되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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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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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땐 누구에게나 ‘외딴방’이 있었다. 아니지. 누구에게나 있었던 건 아니지. 내가 가파른 언덕 위 반지하의 어두운 골방에서 공부할 때 저 언덕 아래 평평한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 친구의 집은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니. 단지 나에게, 또 내 주변 친구들에게 ‘외딴방’은 그렇게 어두침침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지. 다들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시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들은 그들만의 ‘외딴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게지. 애초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있던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그곳은 내가 느끼는 ‘외딴방’과는 다른 공간이었지.  



내 나이 열여섯 시절에 나도 저자처럼 나의 ‘외딴방’에 둥지를 틀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내겐 할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홀로 농사를 짓는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시점에 두 살 터울의 남동생도 광주에 있는 중학교로 보냈다. 궁벽한 시골의 내 고향엔 변변한 고등학교가 없었으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처럼 도시 고등학교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가난한 살림에 버젓한 방을 얻어줄 수 없었으니 대부분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해야만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등하교를 했고, 지대도 높은 그 골목이 어찌 그리도 어두침침한지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하교할 땐 할머니가 마중을 나와야만 했다.  



그 높은 곳에서 늘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가 오히려 굴욕감을 느꼈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 열여섯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에게 나의 ‘외딴방’은 부끄러운 자화상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지만,’ 한없이 외롭다는 생각. 그토록 계단을 이루며 층층이 쌓여있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있었지만 내가 거대한 도시의 바다 한 가운데 한 점 섬에 홀로 떨어져 지낸다는 생각. 내게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간에 기거하는 타인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나의 ‘외딴방’에 대해 얘기할 수도, 또한 그곳에 친한 친구를 데려올 수도 없는 공간. 내성적인 나의 성격 탓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외딴방’이 주는 자괴감이 나를 고립시킨 것이다. 나는 결국 나만의 ‘외딴방’에 고립되어 외따로이 그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외딴방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다시는 그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저자처럼 ‘정면으로 쳐다볼 자신이 없어 얼른 뚜껑을 닫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그저 지워버리고 싶은 내 인생의 슬프고 괴로운 기억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내게는 그 때가 지나간 시간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낙타의 혹처럼 나는 내 등에 그 시간들을 짊어지고 있음을, 오래도록 어쩌면 나, 여기 머무는 동안 내내 그 시간들을 나의 현재일 것임을”느낀다고 말한다. 작가로 인해 나도 이젠 나의 ‘외딴방’이 나의 과거가 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것은 지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새록새록 기억의 전면으로 솟아나오는 현재임을 느낀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고스란히 가슴에 묻어둘 수만은 없음을 느낀다. 그냥 그대로 기억의 창고 깊숙한 곳에 묻어두려 애쓸수록 곰삭은 기억이 오히려 어느 순간 나를 더욱 괴롭힐 것이기에.  



그렇다면 작가는 왜 지금껏 도망쳤던 그 자리를 이 글쓰기를 통해 다시 현재로 끌어들인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나간 시간이 지나간 시간에 그칠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과거의 흔적이란 지우려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 현재로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자각한 때문이리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만큼이나 지우고 싶은 기억도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삶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내가 언제 어디에 있으나,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마을과는 반대의 의미로, 그러나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외딴방은 내 안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4년간의 ‘외딴방’ 생활을 ‘외딴방’ 이외의 시간과 똑같은 비중으로 느끼듯 내게도 나의 ‘외딴방’은 내 삶에 소중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단지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을 뿐이다. 저자로 인해 나도 굳이 무의식의 저편에 묻어두고 의식의 공간에 흰 공백으로 남겨두려 했던 외로운 시간을 의식의 지평으로 끄집어 내려한다. 
 


 작가가 이제 와서 굳이 ‘외딴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온전한 글쓰기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가 ‘되돌아보기’라고 한다면 삶의 한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온전한 글쓰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글쓰기란 이전의 모든 기억을 이 순간으로 끌어들여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란 현재에 그 의미를 둔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란 없다. 과거도 예전엔 현재였을 것이고, 미래 또한 언젠간 현재가 될 것이므로. 시간의 연결고리는 어느 한 순간을 끊어놓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을 끊어서 떼어놓고 부정할 수 있는 삶이란 없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가 삶의 본질을 담고자 한다면 과거의 한 순간을 부정하고선 온전한 글쓰기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꼭 글쓰기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본질적 삶을 성찰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스스로가 나의 ‘외딴방’ 생활을 부정하고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이미 열여섯 그 때의 외롭고 괴로운 생활은 내가 겪어온 내 삶의 일부분인 것을. 그 때 그 시절엔 현재형으로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었음을. 내 자아의 핵심적 부분이 그 시절 그 ‘외딴방’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음을. 그리하여 지금도 내 안에 억압된 잠재의식 속에 괴로운 기억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이걸 부정한다는 건 내 스스로 나를 부정함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외딴방’을 들춰내는 것은 작가가 글쓰기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글쓰기의 본질에 얼마나 접근했을까? 저자는 ‘외딴방’ 시절의 삶이 주는 무게감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시대적 질곡과 개인적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의 탄압과 서슬 퍼런 군부 독재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 또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해 좁고 답답한 ‘외딴방’에서 오빠, 외사촌 함께 생활해야 했던 불편함. 무엇보다 절친하게 지냈던 옆방 희재 언니의 자살. 이런 상황이 감수성이 예민했던 십대 후반의 여고생에게 드러내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상황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와 당당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소외된 자기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몸짓일 것이다. 솔직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그 시절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녀의 성숙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녀의 이전 소설과 다른 무게감으로 내게 다가온다. 과거에 대한 온전한 성찰이 온전한 글쓰기의 본질에 접근하게 했다면 지나친 과찬일까?  



 독자로서 나도 내 등에 짊어진 ‘외딴방’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기분이 든다. 나의 열여섯은 90년대이기에 저자가 느끼는 시대적 질곡은 그다지 크지 않다. 순전히 자기 열등감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무게감일 뿐이다. 그건 타인과 비교된 삶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일 뿐이다. 그 과거의 심리적 충격이 현재의 내게도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이젠 나도 ‘어린 나’에서 비롯된 억압된 의식을 풀어내리라. 그것이 나의 현재적 삶을 옭아매는 밧줄이 된다면 영원히 나의 과거의 한 부분은 무의식 속에 묻어둔 의식 속에 공백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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