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할아버지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건? ’
인자함, 온화함, 포근함, 자상함, 포용력 등등. 뭔지 모른 아늑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존재다. 손자손녀가 무슨 장난을 쳐도 그냥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놈’ 한 마디로 끝내실 것 같은 분. 할아버지의 구레나룻을 심술궂게 잡아당겨도 오히려 그 수염으로 내 얼굴을 부비며 장난을 치시던 분. 구부정한 허약한 등으로도 어리광부리는 손자를 업어서 달래시던 분. 추운 겨울 아랫목을 데우는 아궁이의 남은 불씨에 고구마를 묻어두고 손자손녀들을 부르시던 분. 장날 시장에서 엿을 사와 몰래 방에 감춰두곤 야금야금 내어주시던 분. 아련한 기억이지만 할아버진 그런 솜털 같은 포근한 존재로 기억에 새겨져 있다. 할아버지란 단어만 들어도 괜히 훈훈한 온기가 내 가슴에 서서히 스며드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선지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책들은 늘 내 시선을 끈다. ‘할아버지의 방’, ‘할아버지의 뒤주’, ‘할아버지의 안경’, ‘할아버지 손은 약손’, ‘우리 할아버지’ 등등. 책의 내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책들은 꼭 타임머신 같다. 이런 책들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할아버지 곁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존 버닝햄의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다. 벌써 수년 전 내 할아버지를 연상하며 내 아이에게 읽어주었던 그 책이 또 다시 내 아이에게도 지금 살아계신 저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리란 생각으로 자주 읽어주었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젠 내 아이가 아니라 내가 보육하고 있는 수많은 내 아들딸들에게 할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나 또한 거기에 편승하여 시간여행을 떠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이 책이 더욱 강하게 나를 이끈 건 할아버지란 단어보다도 앞에 붙은 ‘허허’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 단어가 유독 우리 할아버지를 더욱 강하게 연상시킨다.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 세월의 마모를 이겨내고 번뜩 튀어나온 단어. 이 한 단어로 인해 이내 잊힐 것 같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봄비에 새싹이 돋아나듯 새록새록 다시 돋아난다. 잔뜩 이끼 낀 오래된 비석을 부드러운 비단 걸레로 닦아내어 세월의 때 밑에 숨겨진 기억의 단어들을 다시 되살리는 것 같다. 그래도 너무나 먼 아련한 기억이라서 할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진 않다. 늘 점잖 빼며 뒷짐을 지고 다니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게으른 동네 젊은 농사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분명한 건 조선시대 사극에나 등장할 것 같은 엄한 할아버지도 유독 약자들 앞에선 늘 나긋해지셨다는 점이다. 단지 귀여운 손자손녀들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동네의 가난한 농군들에겐 늘 ‘허허’하시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내일처럼 도와주려 하셨던 것 같다.
여유로움이 모든 할아버지의 징표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이 세상 대부분의 할아버지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보단 훨씬 여유로운 것 같다. 이는 감각이 무뎌진 세월의 나이 탓이 아니라 이미 세상풍파를 다 겪고 난 이후 얻어진 하해(河海)와 같은 마음의 포용력 덕분이리라. 굴곡진 근현대사의 온갖 시련을 몸소 경험한 나의 할아버지 세대에게 그 어떤 세상사도 견뎌내지 못할 일은 없으리라. 그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타고나 부모의 부(富)를 바탕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세월이 주는 교훈들이다. 그러니 자연 젊은 사람들이 안달복달 하는 일들도 그분들에겐 별로 큰일도 아닌 사소한 일처럼 느껴진 것이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니’ 라는 솔로몬의 말을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는 인생 달관의 경지이리라. 지금 당장은 슬프고 괴롭더라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지금 당장 기쁘고 즐겁더라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알기에 지금 당장의 상황에 결코 흔들리지 않고 꼿꼿한 것이리라. 세월이란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허허’라는 단어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란 부처님의 말씀을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할아버지 세대의 여유로움을 상징하는 단어란 생각이 든다.
허허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달관의 경지를 살펴보자. 할아버지는 ‘길가다 똥을 밟아도 거름에 보태면 되겠다고 허허’하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도리어 자기가 미안하다고 허허’한다. 심지어 ‘도둑이 들어도 살림이 넉넉해 보인 모양이라고 허허’한다. 언뜻 보기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꼭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온전한 정신을 놓아버린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과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할아버지의 삶의 자세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자신을 초대해 놓고도 도통 나타나질 않은 임금의 불쾌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덕분에 궁궐 구경 실컷 하는 구나.’라고 웃어넘기는 할아버지의 여유로움. 임금이 시험 삼아 떠넘긴 금가락지가 가짜 사공의 손에서 강물로 떨어져도 도리어 ‘너무 미안해 말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라고 오히려 사공을 위로하는 이 여유로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랴!
동화 속에서 허허 할아버지의 삶의 태도가 도드라지는 건 이와 대조되는 후우 임금님의 모습 때문이다. 사소한 일에도 입에 한숨을 달고 다니는 임금님. 그는 ‘낙엽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지저분하다고 후우-’하고, ‘신하들이 바른 말이라도 할라치면 잔소리한다고 후우-’한다. 심지어는 ‘곡식이 잘 되어도 쌓아 둘 데가 없다고 후우-’한다. 이 정도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거리다. 국사를 담당하는 임금이라서 아무리 근심걱정이 많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다. 그런데 실은 우리네 인생사가 생각하기에 따라 걱정거리가 아닌 게 없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데로, 공부를 못하면 공부를 못하는 데로 걱정이고, 돈이 많으면 돈이 많아 걱정, 적으면 또 적은 데로 걱정이다. 또 지위가 높으면 높은 데로, 지위가 낮으면 낮은 데로 모두 크고 작은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다만 그것을 부풀려 그러지 말아야할 데까지 모두 걱정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문제다.
흔히들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이 있다 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컵에 반쯤 담긴 물을 보고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말하는 것과,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방식이다. 전자가 부정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동일한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이 책의 허허 할아버지는 당연히 후자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떤 곤란한 상황도 ‘허허’하고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반면 후우 임금님은 전자의 입장이다. 그는 사소한 일에도 늘 근심과 걱정을 토로하며 ‘후우’하는 한숨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렇다면 어느 편이 더 편안하게 사는 현명한 방법일까? 이건 물으나 마나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평안한 태도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이 당연히 더 좋아 보인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본인도 그렇지만 그 곁에 있는 사람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그것이 행복 바이러스의 특성이다. 그것은 전염성이 있어 그런 사람 곁에만 있어도 덩달아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선지 이 책은 겉표지부터 독자를 즐겁게 만든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허허 할아버지의 신체와 얼굴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절로 마음이 누그러진다. 앙증맞은 작은 들꽃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한동안 독자의 시선을 표지에 머무르게 만든다. 안에 펼쳐진 할아버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시종일관 웃음꽃이 핀 할아버지의 얼굴은 글을 읽지 않고 바라만 보아도 즐거워진다. 반면 극명하게 대조되는 후우 임금님의 얼굴은 근심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책 속에 모든 신하들도 그렇지만 정작 글을 읽는 어린 독자들의 얼굴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당연한 바람이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허허 할아버지의 이런 미소를 잃지 않길 바란다. 그들의 내면에는 이미 그런 미소가 잠재되어 있는데 우리네 어른들이 쓸데없는 간섭으로 그런 미소를 앗아선 안 되리라. 우리 사회가 그들을 경쟁으로 내몰아 오히려 그 미소가 사라지게 해선 안 되리라. 온갖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저렇게 해야 한다.’하며 어른들의 잣대로 그들의 삶을 마음대로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날 미래의 희망도 점점 엷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 속 허허 할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내 부모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 부모들이 할아버지의 여유로움을 세상 물정 모르는 뒷방 늙은이의 어리석음쯤으로 여기는 학부모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직 유치원 어린 자녀를 대관령 양떼목장의 양들처럼 이리저리 내모는 부모가 너무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기에 드리는 말이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본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에 한번 찾아뵙기도 힘든 할아버지는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그냥 의례적으로 인사차 방문해야할 그런 존재가 아닐는지? 어느 광고에서처럼 할아버지의 집에는 컴퓨터가 없으니 심심해서 빨리 떠나고 싶은 공간이나 되지는 않을는지? 그리하여 그저 허접한 정보 나부랭이를 아무 생각 없이 실어 나르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매몰되어 정작 할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소중한 지혜는 매몰차게 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고 싶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얘기를 나누고 싶다. 단지 ‘허허’하고 어물쩡 넘기지 않고 ‘내 할아버지’를 주제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할아버지 그리기 수업도 좋을 성 싶다. 아이들이 내 할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