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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도 수학문제를 붙들고 깊은 시름에 잠긴다. 벌써 상당 기간 동안 난 초등학생 아들의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아니 대학 입시 이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수학교과서를 다시 공부하는 중이다. 학창시절 그다지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수학을 다시 공부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사교육비를 아껴보자는 심산에서다. 초등 5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부천의 모 유명 학원을 들렀다가 수학 한 과목에 무려 50만원에 육박하는 학원비를 내야한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던 충격적인 기억이 내가 이렇게 독기를 품은 이유다.
이날 이후 난 조금은 극성맞은 부모가 되었다. 내가 아들에게 물질적으로 해 줄 수 없는 부분, 즉 우리 가정의 경제적인 한계를 내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보충해주기 위해 난 무척 노력했다. 그런 엄마의 극성을 아들이 당연히 공부와 성적으로 보상해 줄 것이라 믿었기에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이 부모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추진해 나갔다.
그렇게 숨 가쁘게 지나온 세월이 이제 어언 1년 반 정도 흘렀다. 아들은 정확히 엄마의 극성만큼의 성적만 나온다. 무슨 얘기냐 하면 엄마가 자기 손에 쥐어준 만큼의 성적은 나오지만 스스로 공부하여 그 이상의 성적으로 도약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엄마가 설쳐대고 윽박지르고 책상머리에 앉혀놓아도 결국 아들이 스스로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느긋한 성격의 아들은 엄마의 조급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간적 여유만 생기면 늘 던전앤파이터라는 온라인 게임과 닌텐도 위만 붙들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
정체 상태가 된 아들의 성적과 열성적인 학습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아들로 인해 서서히 지쳐갈 무렵 내게 구세주처럼 다가선 사람이 바로 박철범이다. 그가 나를 자극한 것은 지극히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대를 합격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아들이 가지지 못한, 그래서 엄마로서 내 아들이 보여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그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바리 근성이다. 자주 전학을 해야만 했던 불우한 처지가 그런 근성을 쌓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새 학교에 전학을 와서도 소위 학급의 짱에게 덤빌 만큼 대단한 근성을 지닌 아이였다. 그런 근성은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었을 때 공부에도 무섭게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런 근성이 있어야만 욕심이 생기고 공부에도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미적지근한 성격에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만 마치면 그만인 아들에게선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난 아들의 책상 앞에 이 책을 슬며시 갖다 놓는다. 어떤 책을 읽든 특별히 간섭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만은 꼭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이 책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마저 엄마의 강요가 개입된다면 또다시 스스로 홀로서기를 포기할 것 같아서다. 실은 내겐 오히려 저자의 학습에 대한 의지보다 그의 어머니의 교육법이 더 중요한 핵심으로 다가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생활고로 바쁜 와중에서도 아들의 책을 반드시 직접 읽어보고 골라주었다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읽고 깨우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없이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교육법이 아닌가 싶다.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정보와 엄마의 극성스런 열정이 합쳐졌을 때 아이는 스스로의 교육을 포기하게 되고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엄마 자신이 주변의 매력적인 소문에 흔들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줏대 없이 자녀를 몰아붙인다면 어찌 아이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 대개는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학습량이 부과대고 아이는 부담스런 학습량에 지레 질려버려 아예 학습 의욕을 상실해버린다.
이처럼 아들의 학습 태도에 대한 불만에서 접하게 된 이 책은 아들보다는 내 자신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아직 어린 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순전히 그 자신의 역량에 달렸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 자신에게 이 책은 단지 아이에 대한 부모의 학습법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내 삶의 중요한 핵심을 건드린 측면에서 큰 의미를 던져준다. 그 핵심은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관련된 문제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저자의 꿋꿋한 자세가 비슷한 순간에 자신의 길을 포기해버린 나와 여러모로 비교되었기에 저자는 내 일말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열악한 학습 환경으로 따지면 나도 저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젊어서 아빠와 사별한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4남매를 키워야 했다. 연속으로 두 살 터울인 두 남동생을 위해 당시 비교적 취업이 용이했던 전문대 유아교육과에 진학해야 했던 나는 이 분야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졸업 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근무하면서도 그저 직업으로서 맡은 일을 했을 뿐 높은 사명감을 갖지도 않았다. 그렇다보니 결혼 후 아예 직장을 놓아버렸고 나의 못다 이룬 꿈을 오직 아들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로서의 극성은 순전히 이런 나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떠한가? 그는 대한민국 수험생이 모두 바라마지 않는 서울대를 합격하고도 자신의 진정한 꿈을 찾아 법대를 찾아가지 않았던가? 오직 서울대라는 간판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학과를 찾아가기 위해 또다시 도전하지 않았던가? 마치 저자는 ‘당신도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이라도 아들의 꿈이 아닌 너 자신의 꿈을 찾아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제 난 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내 꿈을 아들을 통해 얻으려는 보상심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아들 스스로가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편이 내가 바라는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반면 극성스런 대한민국 아줌마의 열정을 내 자신에게 쏟아보려 한다. 아들을 위해 골치 아픈 수학에 지나치게 매달릴 게 아니라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원예나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 지금은 문화 센터에서 교양 강좌를 듣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앞으론 주부 대학이나 방송통신대 강좌를 수강해볼 생각이다.
이처럼 독서는 타인과의 만남이다. 나와 다른 삶을 통해 나와 다른 느낌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타인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은 또한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내겐 미답의 영역이기에 지은이의 삶은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제공한다. 저자 박철범의 삶이 그렇다. 비록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삶은 내가 걸어온 삶보다 훨씬 치열했고 또 치밀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삶을 통해 내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로 삼는다. 무엇보다 그는 내게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고, 나이와 함께 퇴락해가던 오기를 발동시켜 주었다. 내안에 잠재되어 있던 내 꿈을 되찾게 해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