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리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을 수 없는 것.
주인공은 그런 운명에 홀린 듯 레스토랑 무지개의 오너인 다카다 씨에게 다가간다. 그와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오래전부터 그와 절친했던 사이인 것처럼 그는 늘 주인공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한 잡지에 실린 보고서에 끌려 레스토랑에 취직하고, 그 고요하고 행복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레스토랑은 주인공의 삶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레스토랑에 투영한 오너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싹튼다. 그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인 것처럼 여겨진다. 스스로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인 것처럼.
주인공의 사랑은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슬며시 스며든다. 오너의 삶을 공유하면서 주인공은 오너에게 천천히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가진 오너와의 공통점이 저절로 그들을 서로에게 이끌리게 한다. 해안가에서 자라난 주인공에게 오너의 가게인 도쿄의 레스토랑 무지개는 타히티의 따뜻한 남국의 낭만을 안겨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건 온전히 오너의 꿈과 낭만이 일궈낸 그의 분신이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삭막한 도시의 냉랭함을 이겨낸다. 그녀는 그 품안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건 어찌 보면 오너의 정겨운 품안에 안겨 있는 편안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 포근한 인간적인 감정은 오너 다카다에게도 마찬가지다. 유부남으로서, 또한 같은 직장의 오너로서 겉으로 내색할 순 없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도 그리움과 애틋함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 어떤 인간적 애정도 느낄 수 없었던 오너에게 그녀의 존재는 고요한 호수에 이는 자그마한 파장 같은 것이었다. 무지개의 종업원에서 일시적으로 오너의 집 가정부로 들어간 주인공은 그들 부부의 삭막한 현실을 느끼게 된다. 황폐한 정원, 돌보지 않은 애완동물, 심지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의 아내. 어느 구석엔들 오너를 머물게 할 만한 곳이 없는 가정이다.
그러나 오너의 마음은 늘 타히티의 따스한 햇살과 풍요로운 바다, 즉 싱그러운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가정이 그런 따뜻한 보금자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런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노력의 흔적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오아시스도 없는 황량한 사막처럼 메마른 감정으로 살아가는 부부에게 그곳은 가정으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 장소일 뿐이다. 가정으로서의 기능 상실은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잠자리에 들 시간에 들어왔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는 낯선 타인의 공간일 뿐이다. 부부는 서로에게 타인이고 법적 의무만이 남아있는 외롭고 답답한 공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면의 공통점을 발견한 두 남녀가 서로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황량한 사막에 끼어든 주인공.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우물을 판다. 외로움에 의기소침해 있는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 마치 무너져 가는 한 가정을 대변하는 듯 말라가는 식물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가정엔 다시 생기가 찾아든다. 애완동물들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달라고 보채고, 말끔하게 다시 가꿔진 정원엔 새 생명들이 싹을 틔운다. 오너의 마음에도 희망의 빛이 스며든다. 그 희망은 주인공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점차 자라난다.
그런데 주인공의 유부남인 오너에 대한 그 사랑과 그녀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 사랑이 단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운명이라는 허울로 첫눈에 반한 두 남녀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면 지극히 천박한 삼류 애정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 소설이 독자를 애틋한 감정으로 몰고 가는 건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의 이끌림이 결국 둘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운명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 아니라 둘만의 가슴에 누적된 감정의 낟가리가 더 이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극한의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결국 어느 한 순간도 그리움의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무지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미 그녀에겐 첫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정적으로 서로를 끌어안아야만 할 정도로 운명적인 사랑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녀 자신도 그런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될 정도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그녀의 온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거부하고 떠난다는 건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이 운명적인 것이라면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유부남에 대한 사랑이라고 어찌 천박한 사랑이라 할 것인가?
이처럼 둘의 사랑은 독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온다. 유부남을 사랑한다 하여 비난할 수 없는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 서려있다. 오히려 독자의 마음에 숨겨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린 상처를 자극하며 은근히 스며드는 멋이 있다. 한순간 눈꺼풀이 씌워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알아가며 마음 속 깊은 내면을 열어 상대를 받아들인 사랑이기에 이룰 듯 이루어지지 않는 둘의 애정 관계에 오히려 독자가 더 안달할 정도이다.
나는 둘의 사랑이 무지개 색 황홀경을 쫓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지개의 흔적에 당황하던 내 어린 시절의 무지개 사랑이 아니길 기원한다. 그들의 사랑이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멋지고 황홀한 웨딩홀의 무지개 장식으로 결말지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서로에게 운명처럼 이끌리는 남녀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 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라고 난 생각한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빼앗아서도 안 되는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