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 이토록 유쾌하게 표현되고 독자로 하여금 미소도 머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절로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작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겁고 침울하게 그리기보단 건강하고 밝게 그리고 있다. 그것은 결코 작가가 그 현실적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난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고, 그로 인한 국제결혼이 다문화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면 그를 받아들여 풀어가야 할 숙제 또한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할 짐이기에 즐겁고 밝게 풀어가려 했음이리라. 그래서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 짐을 버거워하지 않는다. 그 짐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보듬고 간다. 오히려 내 짐이 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데도 남의 짐까지 나눠지려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주인공 완득의 담임인 똥주 선생님이다. 그는 표면상으로는 말이 걸고 행동이 모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독특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교사이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춘 가정환경을 가졌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못 마땅히 여기고 오히려 그들을 돕는 인생을 살아간다. 부모와 벽을 쌓고 단절된 그의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할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강한 인물이다. 다음으론 완득의 모친이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으로 시집을 왔지만 난쟁이에 변변한 직업도 없는 춤꾼 남편을 견디지 못해 이혼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잊지 못하는 인간적 면모를 지녔다.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자식을 모질게 버리는 그런 무정한 엄마가 결코 아니다. 비록 아들 곁에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아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녀는 똥주 선생님의 중개로 아들을 만나게 되고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 완득의 아빠와 삼촌 또한 마찬가지다. 아빠는 춤을 가르치고 술집에서 춤을 추는 삼류 춤꾼이다. 춤 실력은 뛰어나지만 볼썽사나운 외모로 인해 늘 외면을 당하는 소외된 존재이다. 그나마 춤 실력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는 멀쑥한 외모를 갖췄지만 말이 어눌한 제자를 키워 자신을 대신하게 한다. 그가 바로 완득의 삼촌 아닌 삼촌이다. 하지만 삼촌은 스승인 아빠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소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면의 순수함이 결코 스승을 떠날 수 없도록 그를 붙들고 있다. 그는 핏줄보다 더 진한 완득이 네의 또 한명의 식구인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정점은 주인공 완득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가는 주인공. 그는 자신을 늘 갈구는(?) 똥주 선생님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비뚤어나가지 않는다. 가난한 현실에도, 추한 아빠의 외모에도, 또한 남과 다른 엄마의 처지에도 결코 비관하지 않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엄마가 안쓰러워 신발을 챙겨주고, 춤판에 다닐 수 없게 되어 지하철과 시골장터를 전전하며 돈을 버는 아빠와 삼촌을 걱정하는 든든한 학생이다. 이런 등장인물로 인하여 이 소설은 곳곳에 무거운 사회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비추고 있지만 결코 암울하지도 않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외적인 화려함은 없지만 내적인 끈끈한 인간관계로 맺어져 있기에 독자는 유쾌하고 즐겁게 폭소를 터뜨릴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완득이를 통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의 외적 환경을 탓하며 불만을 토로하며 살아온 내 인생을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