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섭리에 대한 믿음이 근대의 진보이념으로 변모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사철학이란 근대인이 신학적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한 이념이었다. 뢰비트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건과 결과를 연결시키고 궁극적 의미와 관련지어 주는 원리를 실마리 삼는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 해석"(die systematische Ausdeutung der Weltgeschichte am Leitfaden eines Prinzips, durch welches historische Geschehnisse und Folgen in Zusammenhang gebracht und auf einen letzten Sinn bezogen werden)이다.
이러한 뢰비트의 규정에 따르면 역사철학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묻는 지적 활동이다. 이러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신학에서 도출되는데, 무엇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 틀 속에서 제기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목적(telos)이다. 이 목적은 사물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물이나 사건,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만들어진 목적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연장선상에서 뢰비트는 독일어 Sinn이 '의미', '목적', '목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의미가 부재한 사태의 나열일 뿐인 과정을 그 목적에 따라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이거니와, 뢰비트의 지적대로 역사철학이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종말론적 미래의 지평에서 역사의 최종 목적을 앎으로써 역사의 전체 과정을 사유할 수 있다. 역사의 궁극 목적이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뢰비트는, 이렇게 역사를 그 최종 목적에 따라서 성찰하는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어휘와 사상 구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고대와 그리스도교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구분되었고, 그에 따라 역사를 사유하는 방식도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마치 계절이 돌고 돌듯이 동일한 현상이 무한히 회귀하고 순환함을 전제한다. "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조(Anschauung)가 지배하고 있던 이러한 지적 분위기에서는 일회적이고 독자적인 역사적 사건의 세계사적 의의 따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들[고대 그리스인]이 시종일관 문제삼았던 것은 '우주의 이치'(Logos der Kosmos)였지 '우주의 지배자'(Herrn der Geschichte)가 아니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폴리비오스의 역사서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 제일전제는 "과거란 영속적인 원천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wird die Vergangenheit als immerwährender Ursprung ver-gegenwärtigt)는 원리다. 과거에 일어난 사태는 현재, 당연히 미래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이며, 따라서 과거에서 시간적으로 뒤에 일어날 일을 유추할 수 있고, 역사란 미래의 궁극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도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주의 이치가 실현되는 장이다.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는 "미래지향적"(futuristisch) 역사관을 통해 '역사'(historein)의 고전적 의미를 전복했다. 모든 역사란 "구속사"(Heilsgeschehen)다. 최고신인 야훼-하느님의 세계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 세계관은 세계의 종말을 사유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역사의 단초를 상상하고 종말을 예기하면서 역사의 처음과 끝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을 그리며 나아간다고 여긴다. 신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이 역사는 신의 뜻의 완성이라는 궁극 목적을 향한 도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과거는 영속적으로 반복되는 원천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비적 과정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엮는 필연적인 우주의 법칙이 없다는 점에서 미래는 과거와 단절되어 있으며 미래는 결코 예측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예언자가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폴리비오스처럼 고정불변의 법칙을 찾는 것과 다르다. 예언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확정되지 자연적 운명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호와 인도도 거부하며 스스로의 의지와 신앙을 통해 종말론적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이자 진보의 이념이라는 세속화된 형태로 근대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고방식이다.
세속적 진보에 대한 믿음은 섭리적 믿음에서 변모된 것으로, 근대인은 신학적 원리를 진보로 세속화하여 이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함으로써 역사철학을 전개했다. 진보에 대한 관심은 "메시아적 일신론"의 계보 위에 있고, 진보적 믿음 자체가 목적론적/종말론적 도식 내에서야 가능한 관념이다. 토크빌, 슈펭글러, 토인비가 그리스도교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이 과거에 어떻게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세속화된 종말론, 즉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을 표방하고 있다.
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의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진보에 대한 세속적 신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이념과 신학 사이의 실체적 동일성과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뢰비트는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사상가들과 문헌들(부르크하르트, 마르크스, 헤겔, 콩도르세와 튀르고, 콩트, 프루동, 볼테르, 비코, 보쉬에, 요아킴, 아우구스티누스, 오로시우스, 성서)을 시간역순으로 배열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이로써 오늘날의 친숙한 이념이 점차 낯선 사상으로 바뀌어가면서도 오늘날의 사상이 어디서 유래하고 변천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