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고백록』, 경세원, 2016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시적 정의』, 궁리, 2013
문학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자는 문학의 규범적 당위성이나 문학의 사회정의적 기능을 주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언어라는 반성적 도구를 매개로 한다 해도 인간의 정서에 무매개적으로 호소하는 문학을 즐기면 되지,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말 것이지, 굳이 문학에 정의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앨런 블룸의 다음 말을 덧붙이고 싶다.
“도덕적 현상을 간파하지 않는 정치학이 미숙하고, 정의를 향한 정열에 의해 고무되지 않은 기술이 시시콜렁하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정치철학과 시’)
‘정의를 향한 정열에 의해 고무되지 않은 기술’, 즉 정의에의 열정이 없는 예술은 시시콜렁하다. 이런 예술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감각도 없는 몰가치적 미학주의, 탐미주의에 빠져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시시콜렁한 예술’의 사례를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문학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 적은 없지만, <고백록> 3권에서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고백을 한다.
“거기서는 고통 자체가 곧 쾌락인 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야릇한 광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누구든 그런 감정에서 덜 치유된 사람일수록 저런 것에 더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몸소 겪을 적에는 ‘불행’이라 하고 남들과 함께 겪을 적에는 ‘동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가 아닌, 꾸며낸 연극을 보고 슬퍼하는 동정이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불쌍한 사람을 두고 아파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불만하지만, 정말 순수하게 동정심을 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아파할 대상이 아예 없는 편을 차라리 좋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성염 역. 3.2.2~3.2.3.)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 비극적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슬픈 이야기를 보며, 캐릭터들의 비극적 처지에 ‘동정’을 보내며 눈물을 훔쳤다. 이것은 비극을 통한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미하는 바를 세심히 읽어보면 그때 그가 연극을 본 목적은 감정의 정화가 아니라 그저 아파할 대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였으며, 그가 본 연극들도 관람객들에게 어떻게든 눈물을 쥐어 짜내려 하는 연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에 대한 가학적 학대를 통해 동정심과 쾌락이라는 양립되기 어려운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적인 호의”라고까지 부른다. 이런 동정과 쾌락은 연극을 다 보고 나면 사라지는 휘발적 감정이다. 현실에서 진정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비판한 로마의 연극들과 달리, 좋은 문학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태도”를 함양하게 해준다. 문학은 우리 앞에 이름을 가진 타인을 불러온다. 문학은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내러티브를 들려주고, 그 내러티브 속에서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게 하고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문학에서 마주친 타인을 통해 우리는 인습적으로 받아들이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현실의 사회적 약자와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과 연대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원천을 제공한다. 여기에 문학의 사회적 쓸모가 있다. 이상은 마사 누스바움의 이론을 요약한 것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누스바움이 규정한 공적 삶을 위한 문학에 완벽히 부합한다. 나는 이 글에서 신형철의 해설의 일부 논점을 철저히 따르면서,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제목의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며 논의를 시작하겠다. ‘백의 그림자’에서 ‘백(百)’이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모든 사람의 그림자’ 혹은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지고 있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자는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며, 그것의 의미에 대해 죽음, 절망이나 한(恨) 등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림자의 상징을 이해하기 전에 소설에서 그림자가 나오는 장면 몇 개를 추려보자.
“장례식이 끝난 후 어머니는 한동안 병원에 머물러 있다가 그림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그림자는 어머니 등에 달라붙은 채로 이미 상당히 자라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달라붙어 있다 보면 그림자가 어머니에게 붙은 건지 어머니가 그림자에게 붙은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68p)
“공원 주변으로 상가가 재정비되면서 부근의 상점들과 더불어 사라졌다, 오무사 노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늘고 홀쭉한 그림자 하나가 어딘가로 이어진 채로 며칠 그 부근을 서성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마저 사라졌다.” (109p)
그림자는 마치 하나의 독립된 개체처럼 분리되어서 움직인다. 그런데 그림자가 일어나는 순간들을 보면, 하나같이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극적인 슬픔을 느꼈을 때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그림자를 경험했다. 오무사 노인은 자신의 가게와 자신이 일하던 상가가 재개발로 없어져 삶의 터전을 빼앗기면서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과 고통이 극한에 달해 주체가 더 이상 이를 견딜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이를 고려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모든 사람이 겪는 극단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반증하듯, 그림자 분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겪는 현상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때마다 그 인물들이 그림자가 분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불행들을 이야기한다. 비정한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기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리고 이 모든 그림자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휩싸였을 때. 그림자가 일어난다. 그림자는 이 모든 요소를 포괄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현실을 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고통과 불행을 겪은 인간을 소설화하기 위해 저자는 치열한 방법론적 투쟁을 전개한다. 그림자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듯하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묘사할 때 개별적 불행의 단독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무수히 많은 불행들을 얘기한다. 하지만 <백의 그림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고통‘들’ 중 하나로 종속시키기를 거부하면서 모든 인물의 사연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런 불행의 일반화에 저항하고 불행의 단독성을 보존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의 문학 이론에서 묘사의 풍부함 등의 이유로 사실주의 소설을 극찬한다. 그러나 사실주의 소설만큼 묘사가 자세하지는 않으나, 황정은의 소설과 문체,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일반화에 대한 저항의식은 분명 사실주의 소설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를 대체하고도 남는다.
여 씨 아저씨. 그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앰프 수리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해외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항상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기러기 아버지다.
유곤 씨도 있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여 씨 아저씨의 수리실을 방문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곤이 12살 때 건설 현장에서 압사당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림자에 짓눌리고, 그때부터 그도 그림자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곽 씨 아저씨는 여 씨 아저씨와 비슷한 연배로, “소방관이었는데 은퇴하고서는 영 마음 붙일 곳이 없다면서 그즈음 자주 수리실을 찾아왔다.”
오무사 노인도 있다. 그는 전자상가에서 몇십 년 동안 전구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사람들이 전구를 사가면, 사간 개수에서 꼭 하나를 더 넣어준다. 깨지기 쉬운 전구이기에 가다가 깨질 수 있겠다는 걱정에서 그런 것이다. 그는 손님 한 명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하며 배려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 소설에 나온다. 여기에 무재 씨가 나오고 은교 씨가 나온다. 앞서 말했듯이, 문학은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개별적인 단독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도, 그러한 각자의 역사와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작가의 관심은 비단 인물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전자상가이다. 작가는 이 상가를 그냥 하나의 상가로 묘사하지 않는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p) 가, 나, 다, 라, 마의 다섯 개 동으로 분리되어 있고 수 차례의 개축 공사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이 전자상가. 굳이 각 동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저자는 소설 속 인물들이 사는 공간의 내력을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소설 말미에 전자상가 가동 철거 소식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반응과 대조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고, 한 개인, 한 가족의 내력이 있는 공간에 대한 예의를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104p)
삶의 터전을 철거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은 이 공간에 “슬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극도로 무례한 언어적 폭력을 가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슬럼’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무재 씨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때 무재의 대사는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부분이다. “나는 아버지 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길게 자른 순대를 베어 먹었고요. 손에 기름이 밴다고 순대 밑동에 신문지를 감아서 내어 주던 모습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동전 몇 개를 쥐여주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한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를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말도 서툴고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함께 순대를 먹으며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슬쩍 일어나서 무어을 찾느냐고, 뭐가 필요하냐고 말을 걸곤 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이렇게 호객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당황스럽고,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종종 울었거든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우니까 못됐다고 혼도 많이 났지만 나는 그냥 속이 상했을 뿐이었고요. 그런 속을 모르고 혼을 내니까 더 속이 상해서 더 울고 더 혼이 나고, 하다 보면 아버지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되고 보면 나는 더 울 수가 없어서 아버지 곁에 그냥 서 있었고요.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
무재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전자상가는 가, 나, 다, 라, 마동이 있다. 다섯 개의 동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가 깃들어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하지만 바깥사람들이야 그런 것 알 바 없다. 어차피 밀어버릴 곳,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 공간과 사람들이 가진 개별성을 삭제하고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황정은의 방법론이 주체들이 가진 고유성과 차이를 드러내면서 그 개별성을 보존한다면, ‘슬럼’과 같은 언어는 그러한 차이를 손쉽게 박탈해버리고 고유의 이름을 제거한다. 전자상가가 ‘슬럼’이 되어버리면서 그 개별적 단독자들은 이름 없는 비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만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다. 무감각한 언어 사용의 폭력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당장 철거되는 것은 다섯 개의 건물 중 가동 하나뿐인데도, 기사 제목이 일률적으로 전자상가 철거로 마치 상가 전체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듯 구상된 것을 두고는, 그런 식으로 미리 상권을 죽여서 이후의 일을 쉽게 도모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09p) 언론에 진짜 그런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구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자들의 이런 행태는 분명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않은, 무례한 것이다. 이들의 기사는 전자상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개개인에 주목하지 않으며, 당연히 그 불행의 단독성이나 고유성에는 침묵한다. 이들에게 전자상가의 사람들이란 기사의 소재거리에 불과하다. (오늘날 사회적 현안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어떤지 비판적으로 반성해볼 문제이다)
그러한 폭력의 결과는 망각이다. “마침내 가동을 밀어내고 남은 자리엔 재빠르게 공원이 조성되었다.” (109p)
황정은 작가는 이러한 무감각한 언어의 폭력성과 오류, 무례함, 망각에 맞서 방법론적으로, 언어적으로, 시적으로 싸운다. 이 작가가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비정한 비윤리적 시스템, “난폭한 이 세계”(171p)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 우리는 세계가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하지만 전복적인 소망의 투영이 무재와 은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은교를 무재가 붙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20p)라고 무재 씨는 말한다. 결말에서는 제1장처럼 두 사람은 길을 잃지만, 그 분위기는 다르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여전히 약자에게 난폭한 이 세계에서 둘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무재와 은교의 순수한 사랑, 배려는 작가의 소망처럼 좀 따뜻한 세상을 느끼게 해준다. 그들의 사랑 앞에 나는 책을 덮은 뒤 홀린듯이 노트북을 틀어 무언가라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황정은 작가는, <백의 그림자>는 문학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