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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성 어거스틴 지음, 선한용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9년 5월
평점 :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변두리인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말재주와 글쓰기 능력에도 뛰어난 인재였으며, 그의 중산층 부모는 공부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 수사학은 단순히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수사학은 정치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고, 특히 고대 로마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수사학 교사직을 맡을 정도로 수사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는 당대 최상급의 교양인 변론술까지 통달했으니, 그는 매우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통해 로마에서 성공하고픈 세속적 야심으로 불타올랐었고, 지방 총독직에 오를 뻔했었다. 입신양명의 욕구로 부풀어 올랐던 야심찬 이 젊은이에게 공부란 출세의 발판이었다.
그러나 힌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던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19살 때 읽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불멸의 지혜(immortalitas sapientiae)를 향한 열정으로 고양되었다. 그가 맨 처음 진리를 찾았던 곳은 성경이었으나, 성경의 소박하고 단순한 문체는 수사학을 공부하고 여러 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에게 하찮게 보였다. 성경을 덮은 그는 기독교를 멀리하고 마니교를 믿기 시작한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진리를 이해시키겠다는 마니교는 그에게 진리를 약속할 것만 같았다. 이로써 9년 동안 마니교는 그의 전 사유와 세계관을 지배하게 된다. 마니교는 단순히 사고방식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신념 체계였다.
마니교는 선악이원론과 유물론적 사고를 큰 특징으로 한다. 마니교는 선한 하나님의 존재와 그렇지 않은 악한 세상의 문제를(악의 문제)를 조화하기 위해서 악이 어디서 오느냐는 물음에 대해 '최고악의 본성'이라는 물질적 실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선악의 기원이 다르며, 선한 것은 모두 영원이고 악한 것은 모두 물질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무형의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형체를 가진 덩어리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조차도 물질적인 존재로 보았다. 마니교적 사유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영적, 정신적 실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질성을 가진 것만의 진리값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힌편으로 고매한 진리를 탐구하면서도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이런 마니교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마니교에 회의를 느끼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영적 실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때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의 다른 실체를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7.1.1) 이것은 그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심취해 있던 마니교적 사유와 다르게 생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추측했던 것은 당신을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7.1.2) 하나의 사유 체계 내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하나님을 물질적 실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가 "영적 실체의 자존성"(가토 신로의 표현)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 물질적 사고를 청산해야만 했다. 그것이 마니교를 정리하고 기독교로 귀의하는 첫 단계였다.
그런데 마니교적 사유는 그의 신앙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가치있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진리를 추구했으나 현실은 밑바닥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었다. 마니교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진리로 인정하는 이들에게 성공이란 물질적 성공만을 의미할 뿐이다. 마니교를 자신의 신념 체계로 받아들였던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예와 부와 결혼을 열망하고"(6.6.9) 있었다. 선한용은 명예(honores), 부(lucra), 결혼(coniugium)을 현대 말로는 권력, 돈, 성이라고 말한다. 재능을 가졌고 치기어린 공명심에 움직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명예, 부, 결혼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징표였다. 그는 이런 것들을 성취하고자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했다. 공부의 이유는 물질적 풍요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주의적 추구는 "아주 쓰디쓴 곤경"(6.9.9)이었다. 6권에서 그 자신도 현세적 이익추구와 진리 탐구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버릴 때 우리가 꽉 붙들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6.10.17)이다. 마니교적 사유에 물든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자신의 삶의 토대를 이루는 반석이요 진리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더 많은 재산, 더 좋은 차, 더 좋은 스마트폰, 더 넓은 아파트와 집, 번듯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부동산 시세, 주식, 매력적인 이성과의 사랑, 신도의 숫자 등. 이런 것들이 그의 삶을 이루고 있고, 그 토대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만큼 확고하게 그의 삶을 장악한다. 회심 이전 아우구스티누스를 끝까지 괴롭혔던 것들도 지성적인 요소들보다도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회심한 이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먼저 한 공적인 일이 수사학 교사직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마니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을 새로운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원리에 토대를 둔 새 삶을 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은 공부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큰 시사점을 준다. <고백록>은 엄밀한 의미의 자서전이 아니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삶을 신학적 관점에서 회고적으로 비평하고 재구성한 일종의 신학 에세이이다. 이 책에는 실재했을 역사적 서술과 그에 대한 현재 자신의 평가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다. <고백록>을 집필하던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이 모두 헛되었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최상위의 교양인 변론술을 익혔으며 로마의 고전 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도 익힌 인물이었다. 그는 비상한 이해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한번에 읽고 이해한다. 그는 최고의 교양인(교양을 좁게 정의하면)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 당시에 학예라고 부르는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구입하여 모조리 읽고 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4.16.30) 그러나 이 득의양양한 학자의 발언은 다음 문장에서 빛을 바랜다. "나는 그 책들을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만 그 책 속에 있는 참되고 확실성 있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나의 삶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온갖 서적을 다 읽고, 지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읽고서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조적 비판은, 역시 다방면의 책을 읽고 어려운 고전을 머리 싸매며 읽어나가는 나에게는 힘빠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한탄은 모든 공부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아니면 세속적 성공을 위해서?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중 하나일 수도 있고, 전부 다일 수도 있다.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래보인다. 그가 자유학예를 익힌 것은 진리를 알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앎을 충족하기 위해서이고 무엇보다 성공을 위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의 공부는 그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도 변론술도 그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 권력욕을 단죄하지만, 그 못지않게 단지 앎을 위한 공부도 경계한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 공부는 기만술이다. 그가 <고백록>에서 수사학과 변론술을 가리켜 남을 속이는 기술이라고 경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는 도정에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플라톤주의는 그로 하여금 영적 실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마니교의 유물론적 사유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이런 지적인 변화가 훗날 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적 회심의 과정을 담은 7권 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렇듯 나는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7.1.2, nec mihimet ipsi vel ipse conspicuus) 공부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며,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마니교적 물질적 사고 이외에 다른 방식의 사유 체계를 접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점검하고 그것의 잘못을 인식하고 새로운 길(영적 실체)로 자신이 함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해내어 생각을 바꾸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나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이 과정은 뼈를 깎는 듯한 실존의 고통스러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신념 체계와 그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유동하는 것, 이것이 공부의 또 다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10권 23장 34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공부가, 교양이 내면을 바꾸고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지식 쌓기'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들의 공부에 통렬한 야유를 가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진리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그 행복을 사랑한다 하면서 진리를 전파하는 당신의 사람은 적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속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속고 있음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의 자리에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가져다 놓고는 그것들을 위해 진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마니교도들을 생각하면, 이 지적이 과거의 것으로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비판은 사실 <고백록>에서 낯설지 않다. <고백록> 1권에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문법 교육은 중시하면서 사람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적한다. 문법학자, 학교 교사들은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hominem'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에는 주의하면서 정작 실제 사람을 대할 때는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공부 깨나했다는 그들은 hominem을 틀리게 발음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잘못 발음한 사람을 깔보지만, 사람의 마음에 상처주는 일에는 전혀 서슴치 않는다. 이것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공부의 폐해라고 하겠다.
<고백록>은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텍스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모든 공부하는 이들의 경전이다.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10.1.1.)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무한자에 비추인 유한자의 조건을 앎으로써 자신의 삶을 무엇에 근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반성적 성찰의 매개체로서의 공부이다. 누군가 나에게 왜 공부하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돈과 명예 때문일까? 한국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교수가 아닌 이상 공부로 먹고 사는 사람에 대한 대우가 어떤지 뻔히 아는 이상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가 꿈인 것도 아니므로 명예는 더더욱 아니다. 공부에 무언가 혁명적 힘이 있어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르크스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변혁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앎과 이해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인간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사회 속의 개인을 문제삼지 않고 있다. 나는 인간, 하나님, 내가 사는 사회를 알고 싶다. 이를 퉁해서 잘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