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욱더 거룩하게 하시고 저 새의 어리석음도 물리쳐 이제는 서로 믿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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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톤

플라톤의 경우,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3종류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박종현 역본이다. 박종현 선생님은 국내 고대 그리스 철학계의 대부이시다. 플라톤 저작 전체 완역은 아니지만, 중요한 저작들은 모두 번역하셨다. 특히, <국가>는 정암학당에서 번역이 나오지 않는 한,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정체>(서광사, 2005)가 가장 정확한 번역본이 아닐까 싶다. 고어투 문체가 읽기 힘들 수 있지만, 번역의 정확성만큼은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천병희 역본이다. 고전문학을주로 공부하신 천병희 선생님은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에도 매우 조예가 깊으시다. 2019년 총 7권 볼륨으로 플라톤 전집을 완역하셨다. 특히, <국가>는 박종현 선생님 이후로 두 번째 완역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법률>도 번역되어 있다. 천병희 역본의 가장 장점은 가독성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학쪽으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기에 어느 정도 신뢰하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다.

 

세번째는, 정암학당에서 나오는 플라톤 전집이다. 독일, 영국 등 해외 유학파 출신 등 권위있는 전공자들이 대거 활약하고 있는 정암학당에서 오래전부터 플라톤 전집을 발간하고 있다. 원래는 이제이북스에서 출판했으나, 현재는 아카넷에서 장정을 새롭게 하여 재출판하고 있다(내용을 보완하고 책의 구성이 조금 바뀌었으며, 양장본이 된 대신 판형이 조금 작아졌다) 전공자들의 번역이니, 각주와 해제가 본문보다 길 때도 있을 정도로 충실하다. 그리고 그리스어 단어 색인도 잘 되어있어 공부할 때도 매우 유용하다. 정암학당 플라톤 번역은 거의 아카넷과 이제이북스에서 나오지만, <법률>은 특이하게도 나남출판에서 나왔다. 

 

결론적으로 1. 정암학당->2. 천병희->3.박종현 순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아직 번역이 많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정치학> <시학><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은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있다. 그러나 전집을 내지는 않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은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한 번역본도 있는데, 이쪽은 전공자들이 번역하였다. 특히, 김재홍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전공자들의 번역을 원한다면,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것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을 읽어도 상관없겠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대학의 고대 그리스 전공하신 교수님도 천병희 선생님의 <정치학>을 읽는데, 그런거 보면 크게 차이는 없는 건가 싶다)

참고로 저는 천병희 선생님 역본으로 읽습니다 (중고로 싸게 나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악명높은 철학 저술 <형이상학>은 조대호 번역본(도서출판 길)과 김진성 번역본(이제이북스)이 있는데, 두분 다 정암학당 소속이다.

조대호 번역본이 일반적으로 많이 읽히는 것 같다. 김진성 번역본도 좋지만, 주로 한자로 번역되던 용어를 풀어쓴 한글 단어 옆에 괄호쳐서 한자어를 병기하는 등 읽기 조금 번잡스러운 면이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전집 발간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이제 갓 시작한 상태이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의 아카넷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발간하고 있는데, 현재 두 권이 나왔다. <영혼에 관하여>에서 <소피스트적 논박>까지 2년 걸렸는데, 이 속도면 역자분들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있겠다

 

 

여러 출판사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데, 아카넷-길-이제이북스 등의 출판사들은 사실 거의 믿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길에서는,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하고 있어 높은 가격대임에도 소장할 만하다.

 

 

번외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서양고대철학>1~2가 있다. 1권은 자연철학자에서 플라톤까지, 2권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서양 중세 철학까지. 각 분야의 권위자분들이 모여 집필한 책이므로 (많이 어렵지만) 이만한 개설서는 없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최근 현대지성사에서 박문재 선생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번역하셨다. 주로 기독교 계열의 서적들을 번역하셨고 전공자는 아니지만, 20년 넘게 번역 일을 해오고 매번 양질의 번역을 하신 분이니, 여러 권을 사서 읽는 것보다는 단권으로 읽고 싶다면 이러한 번역본도 읽을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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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사회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는 상류 사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하층과의 사이에 명확한 단결이 있는 계급 사회에서는, 일단 노동자의 자식이 대학 진학을 꿈꾸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경제적인 조건은 차치하더라도 ‘학력‘만 있다면 소작농이나 노동자의 자식이라도 도쿄대학에진학할 수 있었다. 거꾸로 만약에 성공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신분과같은 외재적인 제약의 탓이 아닌, 본인의 ‘실력‘ 이나 ‘노력‘ 이 부족한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학력주의야말로 기회의 평등, 우승열패,자기 책임이라는 자유 경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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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로써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인격으로 우리를 증명해야 합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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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언젠가 당신께서 한 월간지에 글을 기고하였는데, 한 스님이 그 기고문을 보더니, 자신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니’, ‘잘 통한다느니’ 하며 법정 스님을 극찬했던 그 사람은 바로 다음 달 같은 잡지에 게재된 스님의 글을 보더니, 이번에는 ‘당신이 그렇게 안 받는데’ 운운 하면서 욕을 하더란다. 이에 대한 법정 스님의 반응. ‘내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었구만.’ 이러한 일화를 얘기하며 스님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며,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실상은 상대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텁텁한 결론을 내리셨다. 그가 자신의 방에 붙여 매일 보았다던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어쩌면 이러한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영화 ‘완벽한 타인’(2018, 감독 이재규)은 법정 스님의 결론을 뒷받침해주듯이 매우 찜찜한 마무리를 보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와 설정을 봐보자.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3쌍의 부부(석호-예진/태수-수현/준모-세경)와 영배, 이렇게 총 8명이다. 그중에서 영배를 포함하여 남자들은 말 그대로 어렸을 때부터 40년 넘게 우정을 쌓은 죽마고우다. 당연히 서로의 배우자들끼리도 친하다. 40년지기 우정과 배우자. 얼핏 보면 서로가 서로를 전부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영화는 이 8명의 인물이 석호의 집에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식사 자리 중, 핸드폰으로 오는 모든 연락 내용을 서로에게 공개하자는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문자나 카톡이 오면, 남들이 들을 수 있게 읽고, 전화가 오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각자 자신이 평생 감추고 싶어했던(심지어 배우자와 친구들한테까지) 비밀들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한 비밀이, 다음에는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사실들이, 마지막에는 자신 이외에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비밀들이. 하지만, 반전은 하나 더 있었다. 영화는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 결말에는 모두가 좋아 보인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안다, 그 같은 평온한 관계는 전부 허위이고 거짓임을. 진실한 관계란 있는 것일까.

 

누구나 아무리 가깝고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못하는(혹은 말하지 않는) 비밀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감추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는, 비밀이 밝혀져 일어날 인간관계의 붕괴와 사회적 자아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등장인물 영배는,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밝히자마자 바뀐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고 40년 우정을 잃는다. 아마 그 시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쟤는 알고 보니 저런 놈이었구나.”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아마 이것이 가장 피하고 싶던 결과 아닐까? 여기 있는 나는 변한 것이 없건만, 몰랐던 사실 하나 더 알게 된 것으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다. 그래서 점점 숨김으로써 전혀 다른 두 자아가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타인은 영원히 ‘완벽한 타인’으로만 남는 것일까?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러한 ‘완벽한 타인’의 결말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드라마는 이지안과 박동훈의 유대감 형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지안은 중학생 시절 자신의 할머니를 폭행하는 빚쟁이를 죽였다. 물론 그 정당방위가 인정되었지만, 그녀는 평생 살인 전과범이라는 낙오를 지니고 살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사채 빚 때문에 안 해본 일이 없으며 돈 되는 일이라면 도청이나 미행 같은 위험한 작업도 수시로 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호의에도 비관적으로 나온다(사실 호의다운 호의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이런 지안의 인간관계관을 표현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사람 죽인 걸 알아도 잘 대해줄까?’

 

 

그런 지안의 인생을 변화하게 만든 인물은, 그녀가 일하는 회사의 부장 박동훈이다. 처음에는 박동훈이 회사 정치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되자, 회사 대표 도준연이 박동훈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박동훈을 퇴사하게 하는 조건으로 도준연과 거래를 한다. 박동훈과 회사 내 반(反)도준연파의 계획을 알아채고 약점을 잡기 위해 이지안은 박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장치까지 설치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듣게 된다. 그러나 박동훈에게 다가갈수록 평생 받은 적 없던 따뜻한 호의와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진정한 어른’ 박동훈에게 마음을 연다. 그것 말고도, 지안이 동훈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박동훈의 핸드폰 도청이 있었다.

 

 

드라마 최후반부에서 박동훈은, 이지안이 그동안 몰래 자신을 도청해왔음을 알게 된다. 보통이라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동안 자신이 가장 밝혀지길 원하지 않던 것(아내의 불륜)을 모두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이지안과의 관계를 끊어버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당장 이지안을 고용했던 도준연도 그녀를 욕하며, 회사의 다른 상무들은 도청 사실을 구실로 이지안과 도준연을 보내버릴 계획을 짰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동훈은 이지안을 경멸하지도, 내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을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자기가 안 밉냐는 지안의 질문에 박동훈이 한 말이다.

 

 

‘완벽한 타인’과 ‘나의 아저씨’는 얼핏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완전히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이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내면까지 알게 된 순간, 타자는 타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타자에 대한 사실’을 더 앎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드러내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 법정 스님의 생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사랑은 오해나 착각이 아니다. 타자는 ‘완벽한 타인’으로만은 머무르지 않는다. 인격적 교제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타자는 내 안의 일부가 되고 나도 그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상대방이 ‘알고 보니’ 나를 도청한 스파이였단 ‘사실’조차 그 관계를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탕자의 비유를 해설하면서 탕자를 용서하고 끌어안은 아버지의 행동이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260p)”이 전제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믿음이 박동훈의 대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볼프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에겐 유익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린 사람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이미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돌아오고 싶어하는 이들과도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259p).”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원칙에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깊은 교제를 맺은 이들(안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 유지도 그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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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day1120zz 2020-09-0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계는 참 어려운거 같아요.
차라리 완벽한 타인이면 무관계로 설정해 두면 되는데....^^
비슷한 취향의 두사진...
요즘 사춘기와 나의 관계가 아주 힘들기에....^^

Redman 2020-09-03 10:12   좋아요 0 | URL
네 아예 차라리 나 혼자만 있었다면 안 했을 고민도 하게 되면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어지지만, 말처럼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막시무스 2020-09-03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보고싶어 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ㅎ

Redman 2020-09-03 10:04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