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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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면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아킬레우스는 철없는 소시민에서 성숙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전우 파트로클로스와의 우정, 공동체에의 헌신,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 즉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2.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직접적인 주제임을 드러낸다. 아가멤논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취한 크뤼세이스 대신 아킬레우스가 얻은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감으로써 그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첫째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가멤논이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강대진,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자신의 “명예의 선물”을 가져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차적으로 명예의 문제가 개입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트로이아군 헥토르에 의해 자신과 가장 친밀한 우정을 나눴던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헥토르에게 복수해야 하며, 침해된 그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헥토르를 죽이는 것은 22권에 가서 이루어지고, 명예의 회복은 24권에서 이루어진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본래 전장에서 많은 적을 쓰러뜨려서 획득한 것이었다. 명예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받는 전리품이라면, 브리세이스를 돌려받고 거기에 추가로 더 좋은 것을 받아야지 아킬레우스는 명예롭게 될 수 있다. 특히나, 전황을 한번에 뒤집고 헥토르를 쓰러뜨렸던 아킬레우스가 아닌가! 그는 더 좋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줌으로써 새롭게 명예를 부여받는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뺏어서 훼손된 명예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주면서 회복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온유함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3.

반면에 9권에서의 아킬레우스는 이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9권에서 아킬레우스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선택’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장에 나와 다시 싸우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 사절단을 이렇게 거부한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다시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공동체를 구하고 전공을 세워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을 택하면, 그는 불멸의 명성을 얻지만 필시 죽는다. 다른 하나는 명예를 버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얇고 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아킬레우스는 사절단의 권유를 뿌리치고 후자를 택한 것이다. 강유원에 따르면, 이때의 명예란 “위험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다. 아직 아가멤논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은, 속된 말로 아가멤논 때문에 삐진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왜냐하면 “싸워봤자 고맙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 뻔하고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심경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파트로클로스의 전사다. 주요 장수들이 계속해서 부상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파트로클로스는 전투에 나선다. 하지만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전사하고, 그 소식을 듣게 된 아킬레우스는, 죽을 줄 알면서도, 드디어 전투에 임하기로 작정했다. 전우의 죽음을 통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룩할 것이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하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필요에 따라 가슴속 마음을 억제하도록 합시다!

이제 나는 분노를 거둘 것이오. 화해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화를 낸다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오.” (19.65~68)

“가장 영광스런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여!

선물들은 마음이 내키시면 적당히 주시든지 아니면 간직하시든지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오. 지금은 서둘러

전의를 가다듬읍시다.” (19.146~149)

절정은 앞에서도 언급한 프리아모스와의 대화 장면이다. 프리아모스가 홀로 자신을 찾아오자,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프리아모스의 처지에 공감해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그의 장례식을 완수할 때까지 전투를 그치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특히, 24권 518~551행까지 이어지는 행복, 길흉화복, 죽음를 얘기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에서는 9권에서 사절단을 거절했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전에는 싸움만 잘하는 육체적 영웅에 불과했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갈등-파트로클로스의 죽음-헥토르와의 전투를 거치면서 영웅에 걸맞은 인격까지 얻게 된 것이다.

4.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리아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죽는다. 원래 아킬레우스가 살고자 했던 삶은 명예를 포기하는 대신 죽음의 운명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전장에 돌아왔다는 것은 죽을 운명을 각오했음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아킬레우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수용한 결과, 그는 시인의 노래를 통해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고, 제우스가 새로운 명예를 수여하였다. 그것은 강대진이 말했듯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적에게 관용한 데서 생겨난 새로운 명예이다.”

누가 영웅으로 불리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영웅적 가치란 무엇인지. <일리아스>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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