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Lewis <순전한 기독교>(문고본, pp. 168~ 182) 중 발췌


1) 결혼의 영속성에 대해

기독교의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 – 이것은 한몸에 해당하는 현대어입니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로 믿습니다.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든 제작자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반뽁은 단지 성적인 차원에서만 짝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결합되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해 보이는 것은 원래 함께 어울려 모든 차원에서 연합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것에서 딱 하나(성적인 연합)만을 떼어낸 탓입니다.

교회들은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 수술처럼 살아있는 몸을 잘라내는 일과 같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합니다.......이혼을 단순히 ‘짝 재정리하기’ 정도로 여겨서, 배우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 반대합니다.

성적 충동이 다른 충동들과 똑같은 것이라면,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들과 똑같이 취급해야 합니다. 즉, 다른 충동들이 약속의 제재를 받듯이 성적 충동 역시 결혼 서약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껴야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결혼을 계약이나 약속으로 볼 여지는 아주 사라져 버립니다...그런데...서로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에게는 약속으로 자신들을 묶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기독교의 법은 사랑의 열정이 갖는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정 자체가 촉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사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꼭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의미의 사랑은 사랑(사랑의 느낌과 구별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 두 사람이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은혜로써 강화되는 깊은 연합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심지어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 사랑을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처음의 흥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재미에 마음을 붙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흥분을 발견하게 되기 쉽습니다...저는 이것이야말로 “어떤 것이 먼저 죽지 않는 한 참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뜻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두 가지 종류, 즉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엄밀하게 구별해야 어떤 부부가 기독교적 의미에서 결혼했으며,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은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내의 순종에 관하여: 에베소서 5장 22~24절에 대한 답변

(왜 머리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에서 가정에 머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결혼이 영속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언제나 일치한다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실제로 의견이 갈렸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결혼이 영속적인 것이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둘 중에 한 사람은 결정권을 가져야 합니다. 헌법 없이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왜 꼭 남자가 머리가 되어야 합니까?...주위 사람들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자기는 가정의 머리가 되고 싶어 허는 여성도 옆집 여성이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은 보통 좋게 보지 않습니다...아내 자신들이 남편 위에 군림하는 일을 어느 정도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휘둘리는 남편을 경멸하는 것을 보면, 아내가 남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무언가 부자연스런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가정과 바깥 세상의 관계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국은 남성이 책임져야 하는데, 남성은 가정 밖의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또 대개는 더 공정하기 때문입니다...남편은 아내의 강력한 가족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후 결정권을 갖습니다.

사랑(PP. 205~211)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을 북돋워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인위적으로 애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질적으로 냉정합니다...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먼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그가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자아이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바라듯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잘해 준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식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아니면 적어도 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적인 사랑은 머릿속이 감상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는 아주 냉정해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애정과 아주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애정을 낳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쓰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처음에는 자기가 좋아하게 되리라 상상조차 못 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십시오...“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떠오르는 일을 가서 하십시오.

감정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38)”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여성관과 결혼관 (헨리 채드윅, <교부 아우구스티누스>,pp150~151 발췌)


(고린도 전서 11:7에 대한)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은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으로 구별될 뿐, 영혼이나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당시 생물학적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담에게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함께할 짝으로서 조력자가 필요했다면, 하느님은 분명히 또 다른 남자를 주셨을 것이다. 하느님이 이브를 주셨을 때 의도하신 것은, 종의 유지를 보장하시려는 것이었다”(de genesis ad litteram ix9)

또한 그는 부부가 서로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결혼론 I.1)고 말했다. 남편은 앞에 걸어가고 부인은 아이들과 짐을 챙겨서 뒤에 따라가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이 관습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안타깝게 여겼던 것 같다. 공공 영역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평등하지 않지만 혼인의 권리에서는 절대적으로 동등하다고 그는 말했다(마니교의 파우스투스에 반대하여22.31; 구약 7경서에 대한 물음들iv59)

어떤 설교에서 그는 자연, 음악, 꽃과 그 향기, 좋은 음식, 그리고 ‘부부 간의 포옹’에서 느끼는 기쁨이 정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설교 159.2). <신국론>(xxii.17)에서는 다가올 세상에서 부활한 남자와 여자 모두 남자의 육체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생각은 마치 여성성을 창조주의 불미스러운 오류로 생겨난 것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결혼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중 5월15일 레나테와 베트게의 결혼식을 위해 쓴 설교문 발췌. 대한기독교서회, pp. 103~111)


본문: 에베소서 1:12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서약한 “예”라는 대답과 더불어 그들은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삶의 전환을 맞이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삶은 지속적인 결합에 직면해 주어졌던 온갖 물음과 염려들에 기쁨에 가득 찬 확신을 갖고 도전하고, 자신의 행동과 책임 가운데서 그들의 삶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자유와 힘이 주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환희가 모든 결혼식에서 울려퍼져야 합니다.

그대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작용하고 있고, 승리하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 의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이 가는 길은 당신들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따라서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만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이것은 우리의 의지요, 우리의 사랑이며, 우리의 길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강철은 사라져 가지만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들에게 승리, 환희, 자부심을 허락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대들을 당신의 의지와 계획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동시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는 그대들의 사랑을 성스러운 결혼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결혼생활을 제정했습니다. 결혼은 그대들 사이의 사랑 이상의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좀 더 높은 존엄성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인간을 마지막 날까지 보존하시기를 원합니다. 사랑 속에서 그대들은 오직 자신들만으로 바라보지만, 결혼을 통해서는 인류의 한 지체가 됩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오고가게 하시며,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결혼은 인격을 초월하는 것이며, 신분이고 직무입니다...하나님과 인간들 앞에서 부부되게 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 결혼입니다...그대들의 사랑이 결혼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결혼이 그대들의 사랑을 지탱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의 결혼을 파기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19:6)” 하나님은 그대를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강조는 내가)......그대들은 사랑 안에 항상 내재하는 불안에서 벗어나 확신과 신뢰를 갖고 우리는 결코 서로 헤어지지 않고 뜻에 따라 죽을 때까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이 결혼을 통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시오.(골3:18)”..그대들은 그대들의 가정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단지 하나에서,, 즉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서만 그대들은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에게 그들이 가져야 할 영예를 허락했습니다. 창조이야기에 나와 있는 대로 남편에게 봉사하고 그를 돕는 것이 아내의 영예이며, 아내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이 남편의 영예입니다. 남편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고”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창 2:24, 마 19:5, 엡 5:29. DBW3(창조와 타락),88-95)” 남편을 지배하려는 아내는 자신과 남편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 또한 자신과 아내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아내가 남편과 같이 되려는 데서 명예욕을 찾고, 남편이 아내를 단지 자신의 지배와 방종의 장난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은 불건전한 시간과 관계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세계 한가운데 존재하는 나라 그 자체요, 시대의 폭풍 속에 있는 성채요, 피난처며, 성소입니다. 가정은 외적이고 공적인 삶 속에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사건들의 흔들리는 터전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처를 갖습니다. 즉 가정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의미와 가치, 본질과 권리, 그리고 규정과 존엄성을 획득합니다. 가정은 세계 안에 하나님의 터전...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이 거쳐해야 하는 장소입니다...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대한 운명이며 과제하는 것을 아는 아내는 복됩니다.

“남편이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면 가난을 모르고 산다. 그의 아내는 살아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 양털과 삼을 구해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식구들에게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여종들에게는 일을 정해 맡긴다...한 손은 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다른 손은 펴서 궁핍한 사람을 돕는다...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자식들은 모두 일어나 어머니의 업적을 찬양하고, 남편도 아내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덕을 끼치는 여자들은 많이 있으나, 당신이 모든 여자들 가운데 으뜸이오’라고 말한다(잠31:11-13,15,20)” “어진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입니다(잠12:4)”

남편이 아내의 머리로 지칭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같이(엡5:23)”라는 내용이 첨가된다는 것은 우리의 지상적인 관계에 신적인 광채가 비쳐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남편의 존엄성은 인격적 능력이나 성품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혼인과 더불어 받은 직무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존엄성은 동시에 남편 자신에게는 최고의 책임입니다. 머리로서의 남편은 아내, 결혼, 가정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남편은 자기 식구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합니다...(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에 복과 함께 짐을 지워 주십니다. 복은 후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계속되는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합니다...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들을 얻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아내와 남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짐이 지워져 있습니다. 아내는 고통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해야 하고, 남편은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가시밭에서 곡식을 거두어야 하며 얼굴에 땀흘려 노동을 해야 합니다....이 짐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본질이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지상의 가정은 하늘 집의 모상입니다. 지상의 가족은 모든 인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반영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결혼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 15:7)”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들의 죄를 서로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의 공동체도, 결혼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서로 대립해 죄를 상대방에게 떠넘기지 말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를 매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그대들의 가정으로부터 나오는 광채와 능력이 다른 사람들의 가정에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