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는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학파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사마담의 개념화 이전에도 '법가'로 통칭할 만한 통일된 사상적 흐름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법의 작용을 특별히 강조하여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행위 규범도 법을 통해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법과 변법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법가적 실천은 이미 춘추 시대 관중과 자산이 보여주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이론을 제시한 인물은 이회(기원전 455~기원전 395)이다.

한비(기원전 280?~기원전 233)는 법가 사상의 집대성자다. 그의 사상사적 위치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순경은 유가를 기치로 삼아 선진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한비는 법가를 기치로 삼아 선진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우리가 공자와 맹자에게 쏟는 관심의 반만이라도 순자와 한비자에게 쏟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비는 고국 한(韓)나라의 멸망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는 취약한 국가가 부국강병으로 나아가는 길을 법치의 실행에서 찾았다. 한비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정법(定法), 즉 법률로 현존하는 봉건 질서를 고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군주 전제의 고취"이다. 강국의 관건은 법이다. 그러나 법치는 군주의 권력을 제약하기보다 군주전제를 고취했다. 한비에 따르면 "법이란 일 처리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法者, 事最適者也, <問辯>) 법의 목적은 일을 다스리기 위함인데, 그 핵심은 公을 존중하고 私를 폐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은 군주이며, 사는 군주와 대치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군주와 대치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백성뿐만 아니라 신하들까지도 포함된다. 인치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그는 통치에서 "법을 절대화한 동시에 군주를 절대화하여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한 것이다."

한비가 바라보는 세계와 인간은 참으로 부박하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이것은 개조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는 쌍방 대립 모순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순된 쌍방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한쪽이 상대방을 압도하든가 아니면 압도당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중립이나 절충따위는 없다. 정치에서의 모순 관계는 군주와 군주에 대치되는 세력의 대립이다.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군주를 존중하는 것이다. 군주의 이익은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중요하며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의 이익과 상충되는 다른 이익은 배제해야 하며, 이럴 때 가장 유효한 원칙이자 수단은 '힘', 즉 실력이다. 정치란 신민의 힘을 모두 동원하여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데 있다. 한비자가 정치사상의 세 영역(권력론, 정의론, 국제관계론) 중에서 권력투쟁론을 중점적으로 논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한비는 극단적으로 군주 절대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면 어떤 이가 군주이며, 군주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유가는 군주에게 수양을 통한 인격의 도야를 요구했다. 그들은 요순과 같은 이상적 성인을 모델로 삼아 현실의 군주에게 그 모델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통치방식에서 유가는 인치를 주장했다. 법을 운용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이 있어야 법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비자는 이들을 비웃는다. "군주 대다수는 또한 그저 중간 정도의 자질을 갖추었을 뿐이다." 인치의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통치자의 질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염없이 요순과 같은 성인이나 현명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급박한 현실에서 군주를 수양시켜 현인으로 만드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법치는 인치의 약점을 상쇄한다. 법치가 확립되면, "중간 사람도...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법에 의한 통치가 우선시된다면, 폭군이나 범인이 다스리더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누가 집권하더라도 폭정으로 빠지는 가능성은 줄일 수 있다. 류쩌화는 이 사상이 황당하다라고 평하지만, 나름의 개혁적, 정치사상적 의의는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더 공부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가 인치를 반대하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현인을 기용하는 것은 군주의 권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군주는 현인 기용에 절대 반대해야 한다. 이처럼 그의 법치 사상은 "군주 개인 독재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므로 개혁의 분위기는 희석되어 버린다." 한비자의 정치사상은 권력투쟁론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경제문제에 대해 논급한 것은 적지만, 언급한 것은 상당히 특색이 있다.

한비자를 공부할 때 눈여겨볼 것이 사상통제('백가학설의 금지')이다. 한비는 "모든 말은 법의 궤도 아래", "관리들을 모든 일의 스승으로"라는 사상통제의 원칙을 제기했다. 이는 전 백성의 사상을 법과 교육으로 결정하려 한 시도이다. 그는 법령 준수와 교육을 하나로 결합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이리위사(以吏爲師, 관리들을 모든 일의 스승으로)"를 제기했다. 한비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기능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정치적 순화 작용이다." 유가는 교육의 독립성을 중시하나, 한비자는 교육을 정치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묵가나 유가 등 다른 제자백가 학파들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언변을 일삼을 뿐 검증이 없으며, 진부하여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상은 어리석고 증명할 수 없는 인의 따위를 증거로 삼기에, 그들의 사상을 따르는 것은 망국의 길이다. 교육도, 통치도 마땅히 법으로만 해야 한다.

결어에서 류쩌화는 이렇게 말한다. "한비는 군주와 신하, 군주와 인민 관계의 장막을 가장 진솔하게 벗겨버렸다...그가 성인의 팻말을 건지지 못한 주요 원인은 아마도 그가 너무 사실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봉건시대에는 허위가 성실보다 더욱 유용하며 더욱더 군주를 기쁘게 하였다." 한비자의 사상은 사실을 충실하게 말해서 군주들에게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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