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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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만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겐 그게 가장 최선이었다.
다른 세계를 생각해 볼 여력 조차가 없기도 했고.

그런 내가 박솔뫼 작가님 책을 읽으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상상도 마음껏 해 보고,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대로 등장인물과 내 식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 보는 재미를 느껴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은 후에도 애정이 무척 많이 쌓인다.

희한하다.
힘있게 화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기운 북돋아 주는 이 하나 등장하지 않는데 왠지 기운이 난다. 심지어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그 상상 속 일들을 들려주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를 발견하면 하나도 헤매지 않고, 하나도 외롭지 않고, 하나도 희미하지 않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기억하려고 애쓴다고 뭐라 하는 이 없고, 그저 ‘우리 다 똑같아’라며 곁을 내 주기에 내 마음은 그 무뚝뚝한 다정함을 향한다.

(P. 13) 1월 1일의 새벽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빳빳한 침대 위에 누이며 모든 멀고 생생한 이들이 잠깐 온양에서 잡힐듯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라고 해야 될까?

후지산에 있는 주카이숲에 가기로 한 친구들이 전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안 가기로 했다는데, ‘나’는 친구들이 숲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과는 ‘다른’상황에서 사는 모습을, 그것도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말이다.
이 책의 표제작 「우리의 사람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구들을 향한 애정 섞인 평범한 상상일 뿐인데,
왜 인지 아련함을 느꼈다.
계속 ‘나’를 따라가보면 알 수 있으려나.


‘나’는 새해를 맞이 한 후지노에서 ‘사쿠라이 다이조’라는 텐트 연극을 하는 연출가이자 연극인을 만난다.
극장이 아니라 텐트를 치고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텐트를 걷고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극장을 다니며 공연을 보는 시대에 텐트공연을 하는 이유가 뭘까.

1970년대 우치게바(내부 투쟁)로 친구들을 잃은 그가 학생운동의 여파로 버려진 곳 탈락된 곳을 향해 텐트를 치며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떠나기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나아가 광주로 가 한국 역사까지 체험했다고 한다.

사회 격변기에 한 장의 천 조각으로 외부와 내부를 갈라놓고 텐트 극을 열었던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1980년 그날의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남들과는 다르지만 분명한 신념을 지닌 사쿠라이 다이조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모습에 여러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P. 17) 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의 소설에는 잊히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사람, 사건, 장소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반복’의 이유가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더 재미있게 사는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한 ‘나’의 모습과 텐트를 치고 공연이 끝나면 원래 없었다는 듯이 텐트를 철거하고 또다시 텐트를 치는 사쿠라이 다이조의 공연까지 어딘가 맞닿아 보였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오래도록 많은 사람과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는 마음, 지치지만 지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외로움까지 모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P. 16) “매번 할 수 있을까? 이걸 왜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한다. 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 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항쟁하다가 희생되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함으로써, ‘기억하는 마음’이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련함을 느꼈나 보다.

‘나’와 사쿠라이 다이조와의 만남은 의미가 컸을 것 같다.
마음의 어지러움이 있어 고민의 길에 서 있을 때, 그런 나를 다시 움직이도록 이끌어주는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힘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 ‘드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땐, 모든 게 불투명할지라도 그 안에 ‘나’의 강한 신념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우리의 사람들」이었다.

(P. 31) 크고 울창한 나무들 너무나 선명한 푸른색들 모두는 정해진 길을 따라 걷지만 저 너머에는 누구도 찾기 힘든 곳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내겐 모든 말이 자연스러움으로 여겨졌다.
“나 이제부터 기억할 거야. 생각할 거야”라고 선전포고를 하고 기억하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건널목의 말」의 ‘나’가 호텔에서 정리된 침대에 누웠을 때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우리도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중 그 사이사이 ‘작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으로 후지산에도 가고 광주극장도 가고 부산호텔도 가니까 말이다.

생각이 많은 내게 ‘나’의 말이 적당한 안정감을 줬다.

(P. 52) 따라붙는 말에 대한 불안들도 일단은 간단하게나마 나는 이런 것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어. 라고 쓰고 그래도 왜인지 떨치지 못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을 땅에 묻는 일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에 대해서도 쓴다. (중략) 말을 땅에 묻고 그 말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낙엽이 썩어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집니다.

지금 현재 나에게 있어 ‘사라지는 말’이 주는 의미는 긍정이다.
사람의 부재가 준 고통이 다른 어느 것보다 크지 않아서인지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말을 머릿속에 채워 이고지고 살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무겁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불안의 말을 땅에 묻고,
내가 좋아하는 그 계절이 오길 기다려본다.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다리며, 어딘가에 있을 내가 지금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나일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P. 55) 대부분의 꿈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나는 적어도 나는 내가 있었다면 내가 했다면 좋았을것에 대해 그것은 허황된 꿈과 바람이지만은 않고 사실 했을 법하지만 왜인지 아련한 것들에 관해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월이 오면 나는 일을 하고 걷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갑니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은 꿈을 기록하는 것과 늘 연결되게 됩니다.


「농구하는 사람」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하는 농구경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가 등장한다.
그들끼리 아는 경기 중의 예의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늘 운동장에서만 뛰어서 러너의 예의라는 것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읽은 최인훈의 「광장」을 떠올린다. 4.19에 관한 생각이 담긴 작가의 말을 읽고 상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 겪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때를 떠올린다는 것이 어쩌면 아득하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농구의 대해 아는 게 없는 ‘나’가 커다한 농구공을 만져보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지 못한 손으로 그때의 분위기를 더듬거려볼 뿐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생각한다.
그때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의 사람들처럼 스치듯 지나간다.

(P. 73) 쉽거나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고받으며 걸었다. (중략) 가끔 뛰고 뛰다보면 농구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축구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천천히 걷는 사람 맨손 운동을 하는 사람 우리는 모두 잠깐씩 스쳐 지나간다.


「이미 죽은 열두 명의 여자들과」는 끔찍한 현실을 담았다.

다섯명의 여자들을 강간 살해한 김산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미 죽은 여자들과 그와 범행수법이 비슷한 살인자에게 살해당한 일곱 명의 여자들까지, 총 열두 명의 여자들이 그를 다시 죽인다.

그에게 죽음의 고통을 반복하다가 서서히 옅어지는 자신을 느끼며 사라진 여자를 표현한 문장들에 목이 막혔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문이 막힐 만큼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서도 아니고, 죽은 사람이 현실도 아닌 복수를 백번 천 번 한들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도 아니었다.

너무 원해서다. 너무 원해서 목이 막혔다.

어두운 밤거리를 뚫고 집으로 무사히 들어온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아서 아무 탈 없이 돌아오게 된 것으로 여겨질 만큼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너무 공감하며 읽었다.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온몸이 굳는 긴장과 극도의 공포감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쿵 하고 맥없이 풀려버린 다리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가슴과 함께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던 일을 나도 경험했기에 소설로써만 읽히지 않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서로서로 목격자가 되어 보호하는 눈빛을 보내도 이제는 신경이 예민해져 눈빛의 의도도 불분명하게 느끼게 돼 버렸다.
그럼에도 보호의 눈빛과 서로의 팔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주는 그 손길이 필요하다.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택시 안과 밤거리에 겁을 먹었다는 ‘나’의 말에 나 역시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내 잘못도, 당신 잘못도 아닌데.

(P. 106) 이미 죽은 자들이 말한 것은 나는 그런 것이 전부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풀과 가지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은 것은 나중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것이며 다른 길로 걷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누구를 살릴 수도 있다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숨을 한 번 고르고 마음도 추슬러 보라는 듯이 가붓하고, 즐기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다.
괜히 이곳저곳 다니며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만나고 싶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을 만나, 생각지 못한 산뜻한 미소도 지어볼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이 책보다 먼저 장편으로 만나 본 「미래 산책 연습」은 내가 무척 애정 하는 작품이라, 또 만나서 반가웠다.

보통의 일상 그 속에서도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산책하듯이 세상을 들여다보며 눈에 들어오는 사람, 건물, 풍경 속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기억해주는 따뜻함이 참 좋았다.
다 읽고 나니 장편으로 만났던 <미래 산책 연습>에 ‘수미’도 보고 싶고, ‘나’도 보고 싶고, ‘윤미언니’도 보고 싶어진다.


나는 이른 새벽 혹은 늦은 밤, 작은 조명 하나 켜고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책 속의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게 전부인데, 박솔뫼 작가님 책을 읽을 때면, 이 사람들의 대해 당장에라도 움직이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조금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리뷰가 길어진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얼른 마쳐야겠다.

나는 내 삶 사는 거에만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서 내 가족 아닌 누군가를 떠올리고, 또 그들을 위한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조차 생각도 못 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나마저도 잠시 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고, 기분 좋은 뿌듯함을 느껴봤다.

감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만져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P. 176)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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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의 일본으로의 밀항에 대해 읽다가 자식 여럿 가족 여럿을 밀항시키기 위해 수십번을 일본과 한국 사이를 오갔던 한 아버지에 관해 읽었다. 글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자식의 밀항 경험이었으나 그의 증언에서 그의 아버지가 모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세번의 밀항 시도 끝에 성공한 그의 경험을 미루어 밀항을 계획한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자주 일본과 한국 사이를 오갔을지 매번 어떤 고생을 하였을지 잠시 헤아려보았다. 한편 우리가 읽는 그 시대 사람들의 글은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이고 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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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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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 통틀어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후회한 적 한 번 없는 사람 없고 마음속 근심 하나 없는 사람 없을 테니, 그렇다면 이 책에서 공감 못 할 이야기 하나 없을 거다. 정곡을 찌르는 따끔함이 읽는 흥미를 놓지 않게 해줘서 야금야금 읽으며 여름밤 며칠을 재밌게 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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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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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을 앞둔 어느 날, 아빠가 의붓자식 소 팔러 보내는 것 같은 심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한 마디 하신다.

“차라리 못 해주는 사람이 낫다. 잘해주는 사람은 이유가 있어.”

어릴 적부터 내가 청개구리 짓도 잘하고, 고집도 없진 않아서 애당초 ‘미끄러져 봐야 알겠지’라는 생각이신건지 잔소리도 별로 안 하셨었는데, 그래도 막둥이가 사회인이 되는 첫 출근을 앞두고 눈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을 해주시려나 기대에 들떠 있건만 참고 참다가 던진 한 마디 치고 산뜻함이 없긴 하다.

이 책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다루고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의 지나간 일들이 소환됐다.

중국 허난성 옌진을 배경으로 두부장수 라오양과 그의 세 아들 양바이예, 양바이순, 양바이리가 이 소설의 중심에 있고, 이들 주변인물의 서사까지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그 중 평생 수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던 한의사 아버지와 그의 아들 라오후의 대화가 예전 나와 우리 아빠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라오후의 아버지는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다.
맥을 짚고 다음 붓을 한번 드는데도 세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라오후가 거시에 합격하고 관원이 되어 허난 옌진으로 부임할 때, 모두 그를 축하하며 배웅해주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의 아버지만 우는 것이었다.

(P. 76) “너는 착실한 천성을 타고 나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건 문제가 없다만, 관원이 되어 잔혹한 악인들 가운데 있다 보면 손해를 보기 십상이지. 짧으면 일 년이고 길어야 사오 년이니, 큰 죄명으로 감옥에 가지 않으면 실컷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게다.”

라오후가 말했다.

“남들은 관직에 부임할 때 빛나는 말만 해주는데 아버진 왜 그렇게 재수없는 말만 한 무더기 늘어놓으시는 겁니까?”


어릴적에는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왜 그리 다 잔소리처럼 들리는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고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는지도 모르면서,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내가 성장하면서 차차 알아나가고 싶었고 사회로 나가서 직접 부딪히며 깨우치고 싶었다.
그리고 내심 속으로는 살면서 일이 많아 봤자 뭐 얼마나 많다고 걱정부터 하나 싶어서 지나친 노파심이다 판단해버리고는 다른 세상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내가 왜 그때 끝까지 듣는 모습이라도 보이지를 못했을까 후회가 뒤늦게 밀려온다.

어려운 일도 아닌 그 일이 졸음 참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못 미더워도 믿는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찜솥에 김이 풀풀 나는 듯했을 텐데도 꾹꾹 잘 참아오신 게 놀라울 따름이다. 때가 되면 알겠지 하는 그 마음 안에 애간장이 시커멓게 탔어도 골백번은 더 탔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두부장수 라오양만큼 애간장 타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자식들이 자신을 도와 두부를 만들기는커녕, 세 아들 중 첫째 양바이예 빼고 나머지 둘은 아버지도 싫고, 더욱이 함께 두부나 만들면서 살고 싶지 않았기에 집을 떠난 것이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자식들이 결혼도 미루고 본인 곁에서 두부 만드는 일에 전념해주길 바라는 라오양의 모습에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할 것 같다. 누군가는 자식들에게 희생만을 요구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집안 사정 뻔하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다.

먹는 것만 기억하고 얻어맞은 것은 잊는 성격인 아버지 라오양과 얻어맞은 것만 기억하고 얻어먹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첫째 양바이예,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일이 아버지와 두부인 양바이순, 입이 한가하면 답답해 죽는 양바이리까지.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이들의 덜그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 라오양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 시선으로는 결코 호감스럽지는 않았다. 집안의 중대한 사항이나 자식들 장래 문제 관련해서도 늘 친구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자니, 차라리 친구와 소통하는 시간 대신에 자식들 말 한마디라도 경청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의 눈빛으로 들여다봤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누리고 사는 형편이 되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먹고 사는 일 하나만이 급급했을 테고, 자식은 자식 대로 그 밑에서 단순한 욕망도 억누르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았을 테니 서로 뒤틀리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생각하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비판할 수만도 없는 것 같다.

(P. 198) 옌진은 알칼리성 토지라 십 년에 구 년 꼴로 재난이 일어났다. 주로 한재가 아니면 농작물 침수였다. 현 전체의 삼십여 만 명 인구 가운데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겨우 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옌진 사람들이 비교적 야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밥을 먹다가 절반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하는 셈이었다.


(P. 114) 모든 것이 그 놈의 입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 통틀어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 후회한 적 한 번 없는 사람 없고 마음속 근심 하나 없는 사람 없을 테니, 그렇다면 이 책에서 공감 못 할 이야기 하나 없을 거다.

등장인물 중 두부장수 라오양의 둘째 아들 ‘양바이순’이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가슴에 묻고, 곡절이 많았던 옌진 땅을 떠나 이일 저일 배워가며 힘들게 지낸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애잔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노력도 꽤 하고 지냈는데 과정보다 결과만을 따지고, 살면서 적당한 말 한마디 둘러댈 줄도 모를 만큼 유약했던 양바이순에게는 한숨 푹푹 나올 사정 또한 곧잘 생겨 한 곳에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일에 방법을 터득해서 여유를 갖게 되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시간은 흘러 흘러 고단함이 주름이 되었을 양바이순의 떠올려지는 얼굴이 어쩌다가 들여다본 내 집 식구 주름을 본 것처럼 마음이 짠했다. 저자가 담백하게 담아내서 그렇지, 먹고 살기 어려워도 어쩜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P. 269) 사람은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새털 같은 입으로 사고나 치고 된통 당하는 짠내 풀풀 풍기는 이야기에 실소가 터지기도 하고, 딸을 잃고 추스를 수 없는 고통과 그리움에 이곳저곳을 한없이 걸어도 남는 거라고는 그저 자신의 발자국이었을 뿐인 아버지의 모습에는 눈물도 죽죽 흘렸고, 단 한 번의 실수일지라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후회하는 이의 모습에는 그를 타산지석 삼아 겸연쩍은 다짐도 은근슬쩍 해봤다.

더운 여름밤, 이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여다보며 내 인생도 한번 되돌아보고, 그러다가 책 읽기를 멈추고는 잠시 옛 기억들 속에서 한참을 머물러보니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싶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경험 했다고 치기에는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사느냐고 고생이라는 내 마음속 진심이 튀어나오게 할 만큼 참 성격도 다르고 기질도 다른 사람들끼리 섞여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에는, 세끼 먹고 사는 거 다 똑같고 달라 봤자 한 끼 더 먹고 덜 먹고 차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다름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살면 안 되나 혼잣말도 했지만, 그게 또 우리 인생이구나 싶다.
내가 누군가에게 풍겼던 불쾌감과 흘린 먼지도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다.

마음까지 뜨끈하게 데워주는 공감되는 이야기들 덕분에 국적과 시대의 차이의 틈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고, 정곡을 찌르는 따끔함이 읽는 흥미를 놓지 않게 해줘서 야금야금 읽으며 여름밤 며칠을 재밌게 채울 수 있었다.
최대한 내용을 많이 숨기고 숨겼지만, 곱씹어 볼 문장들이 많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에 재미와 더불어 심란하고 복잡한 감정까지 느꼈던 <말 한 마디 때문에>였다.

(P. 365) 한 사람이 상대방의 생각에 거스름이 없게 되면, 자기 마음에는 약간 불편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과 틀어지는 것이 남에 의해 틀어지는 것보다 더 자신을 강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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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7-15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곰돌이 님 참 글도 재미있고, 깊숙하게 참 잘 쓰시네요! ㅎㅎㅎ 글 쓰는 거 공부하신 거 같아요!

곰돌이 2025-07-15 20:52   좋아요 1 | URL
오늘은 모처럼 선선했는데 쾌적하게 잘 보내셨나요? 읽어주신 것도 감사한 데 재밌게 봐 주셔서 더 좋네요. 제 입꼬리가 가만있질 못하네요. 헤헤
 

라오왕은 새로 진도를 나가지 않고 학생들에게 각자 글을 짓게 했다. 작문 제목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자신이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탓하라(不患人之不知患不知也)."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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