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아이들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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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으로 들뜨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내게는 살만 루슈디의 작품이 그런 편인데, 이전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통해 저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번역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김진준 님의 번역이라 <한밤의 아이들>이 더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들뜨게 하는 데는 재미가 크게 한몫한다.
초반에 알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라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로 머리에 기름칠도 시켜주고, 조금 지루하겠다 싶으면 콧방귀 한 번 뀌며 특유의 재치가 섞인 지적인 농담으로 고봉밥 꿀떡꿀떡 넘기듯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해주어 제법 분량이 많은 책임에도 잘 읽히게 해준다.

총 2권으로 나눠진 이 <한밤의 아이들>은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우리나라와 인도는 독립운동 방식이나 식민 지배 기간의 차이는 있어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과 독립 이후에도 분단의 아픔을 겪는 것, 그리고 8월 15일이라는 독립 날짜까지 같다는 역사적 연결이 있는 나라이기에 여러 면에서 유대감이 느껴진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따라가 본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로 태어난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혹사당한 몸이 목숨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허망한 죽음에 두려움만 떨고 있다. 남은 시간은 유한하지만 할 얘기가 많아도, 너무 많단다.

살림은 피클 공장의 요리사로 지내는데, 밤에는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 ‘파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인도 역사를 들려주고 기록하면서 ‘보존’하는 작업에 만전을 기한다. (생계를 위해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글을 썼던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자기 몸 살피랴 역사를 굽어보랴 의사가 엉터리 치료법을 쓴다는 둥 독자에게 하소연하랴 바빠도 너무 바쁘다.

앗참!! 살림 옆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 풍기는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파드마가 내 심정을 어찌나 잘 알아채는지, 이야기가 곁길로 빠져 늘어지거나 궁금증만 유발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면 알아서 찡그리고 독촉하고 끌어내는 등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하며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아, 일단 살림에게 시간적 여유가 아주 넉넉지 않은 것 같으니 그의 이야기부터 얼른 들어봐야겠다.


35년 전, 1915년 인도 카슈미르의 어느 봄날로 거슬러 가본다.
보석상을 하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독일에서 최근 의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살림의 외할아버지인 ‘아담 아지즈’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유럽에서 살다 돌아와 변화의 냄새를 맡은 그의 눈에 이 작은 골짜기는 협소해 보일 뿐이고, 반대로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간 얼음장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외할아버지의 ‘코’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 지금 수면에 반사된 그의 얼굴 한복판에서 성난 바나나처럼 너울거리는 저것을...... (p. 35)

이 거대한 살덩어리를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는 살림의 코 이야기는 줄줄이 이어지고,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담긴 문장도 이어진다. 또 내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코가 그냥 코가 아니란다.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가 말하길, 그의 코는 무굴제국의 황제들도 탐낼 정도이며 왕조의 씨앗이 깃들었다고 한다. 나이도 알 수 없고 온갖 잡다한 소문만 무성한 뱃사공 타이는 아담 아지즈를 향해 예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코가 경고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끝장나는 줄 아시우. 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크게 출세할 게요.” (p. 45)

어느 날, 카슈미르의 지주 ‘가니’의 딸 ‘나심’이 복통을 호소한다는 전갈을 받은 아담 아지즈는 뱃사공 타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의사로서 가니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진이 계속되었고, 어쩌다 보니(?) 아담과 나심,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살림의 외조부모는 결혼과 동시에 조용한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역사의 아픔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 코가 반응한다.
간지럽고, 또 너무 간지러워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아담 아지즈가 재채기를 “에에에에-흐엣취!” 하는 순간,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무너지고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그 멍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독립을 약속한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속을 어기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부터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사건, 1947년 10월 27일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엄청난 만행이 벌어진 사건들을 포함해 그 외에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역사적 아픔을, 저자의 너스레 속에 기가 막히도록 잘 녹여내어 읽는 재미를 높여주고, 농담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뼈가 담긴 우스갯소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지냈던 저자의 그 당시 혼란스러운 내면의 심리를 아담 아지즈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돼지가죽으로 만든) 진료 가방인 하이델베르크 가죽 가방은 침략자이자 진보의 산물로 상징되는데, 독립운동 탄압을 더 강화하며 심리 없이 인도인들을 체포하고 투옥할 수 있는 ‘롤라트 법’의 폐기를 요청하며 시위하는 인도인들을 향해 영국군이 총격을 가한 날, 그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머큐로크롬(소독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해준다. 집에 돌아온 아담 아지즈는 자신과 반대 성향인 부인 나심에게 이 혼란스러운 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며 말한다.

“이번 일은 아직 안 끝났소. 우린 떠날 수 없단 말이오. 다시 의사가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여기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담은 코를 비볐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 걱정이오.” (p. 82)

외조부모의 이야기는 여기서 살짝 건너뛰고 살림의 부모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날, 살림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꼬물대던 시절 어머니가 위험에 처한 힌두교 사나이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으로 그의 용한 점쟁이 사촌 형을 통해 ‘예언’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뱃속 아이의 앞날을 알려준다는 말이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며칠 후 만난 점쟁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기이한 목소리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힌두교 사나이를 다시 만나게 된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그때 당신 사촌 형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p. 193)


유럽에서 살다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카슈미르가 쫓아내고,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암리차르도 쫓아내고, 부모님 결혼 후에도 또다시 여기저기서 그들을 봄베이(현 뭄바이)로 몰아내는 바람에 살림이 봄베이에서 태어난 과정과 거꾸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봄베이가 동인도회사가 들어와 간척 사업을 벌여 지금처럼 육지로 변하기 전, 아령 모양의 섬이었던 시절에 빼앗기고 또 빼앗기는 패배로 원한만 표독스럽게 번뜩이던 그 옛날까지...(헥헥) 주사위를 잘못 던져 모든 게 다 최악인 시대를 읊어내느라 살림의 입이 고생이 많다.

아무튼 고기잡이 그물과 코코넛과 쌀과 뭄바데비가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고, 1947년 8월이 되면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떠날 차례였다. 영원한 지배는 없다. (p. 206)

봄베이에서 살게 된 살림의 부모님은 인도의 독립 선언으로 떠나야 하는 영국 행정관 ‘메솔드’의 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그가 제안한 조건에 수긍하며 거래하게 된다.

메솔드 단지의 매각 조건은 두 가지였다 : 건물 안의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송두리째 구입해야 하며 새로운 주인은 그 모든 품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소유권을 양도하는 시점은 8월 15일 자정으로 미룬다는 것. (p. 209)

이 조건은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독립과 그 이후 1948년 6월까지 인도의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한 영국이 ‘그냥 버리자’ 외치고 무책임하게 몸만 빠져나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와,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고?’라고 생각할 만큼 상징적인 것들의 연관성이 놀라울 만한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내 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어딘가 찝찝하기만 한데 메솔드는 가격도 환상적이고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상태로 넘겨주는 것이라며 큰 호의라도 베푼 듯 말한다.

“만사형통이로다.”


(아직도 안 꺼낸) 살림의 탄생 이야기까지는 하고 마쳐야겠다. 1947년 8월 15일 자정, 불행의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이라는 자유의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1,001명의 아이 중 정각에 태어난 살림. 아니,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발생한다.

나에게는 1,001명의 아이 중 마음에 쓰이는 아이가 있다.
허구이길 바랄 만큼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든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시바’라는 아이인데,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했을 이 아이의 난폭함이 오랜 세월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가 독립이 되었어도 갈등과 분열로 인해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닮았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그래봤자 어린아이일 뿐인데, 시대와 나라를 잘 타고났어야 한다는 말밖에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잠재적 위협이 느껴져 불안하게 만드는 이 아이가 2권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먹구름 낀 궁금함만 가득하다.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나 자신을 스스로 끌어 올리려고 이것저것 해보며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왜 꺼내냐면, 무너지고 일어서는 반복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느끼기까지의 나의 간절함을 떠올리게 해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생각해 봐야겠어.” (p. 478)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이 있다. 살림이 사나운 기질이 있는 자기 여동생의 호전적인 모습이 ‘사랑’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인데, 삭막한 상황을 사랑이라는 ‘온기’로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절실한 세상이다.

내가 저자의 책에 손길이 가는 이유는 그의 지적인 유머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도 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끌어내고 또 끌어내며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고, 사람이 매번 진지하게만 살아가는 것도 살짝 고리타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삶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가끔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만드는 점은 분명 나를 자극하고 손길을 가게 만든다.

아직 2권이 남은 상태라 개인적인 감상을 더 추가하다 보면 여태 스포일러를 샤샤삭 피해가며 적은 나의 노력의 땀방울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이쯤에서 1권의 이야기는 무 자르듯 잘라야겠다. 2권에서는 살림의 몸이 왜 지금 서른한 살을 앞두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을 떨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 고달프다.

후덥지근한 더위에 땀이 비처럼 쏟아지듯 답답한 밤의 끈적임은 사람들의 갈망만큼이나 끈적했고, 살림이 들려준 가정사와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혼란으로 머릿골은 지끈거렸다. 환상과 현실의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온갖 언어로 존재를 알리는 소리, 동류가 동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줄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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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9-1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 게 하도 오래 전이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같네요. 곰돌이님 글도 잘 쓰시지. ㅋㅋㅋ

곰돌이 2025-09-14 06:36   좋아요 1 | URL
1권 재미나게 잘 읽고 2권으로 갑니다.ㅎㅎ Falstaff님 칭찬 요정님이에요!!
 

<한밤의 아이들 1> 중에서...

저마다 자기 영역을 가진 신성한 소들이 흙먼지 자욱한 길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순찰하면서 배설물을 증거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떼! 즐거운 듯 붕붕거리는 공공의 적 제1호가 마치 꽃가루를 옮기는 꿀벌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 똥에서 저 똥으로 날아다니며 아낌없이 퍼붓는 이 선물에 내려앉아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 P75

내 말은 다만 내 몸이 낡아빠진 항아리처럼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러나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역사에 너무 많이 두들겨 맞고 아래위로 배수(水) 작업에 시달리고 문짝에 찍혀 훼손되고 타구(具)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가엾은 몸뚱이가 마침내 조각조각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 P86

"맙소사, 해가 왜 저쪽에 있지? 해가 엉뚱한 쪽에서 떠올랐네!" - P144

그들은 위로위로위로 기어올라 폐허의 가장 높은곳에서 자기들의 영토를 감시하다가 성 전체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일에 몰두한다. 파드마, 이 말은 사실이다: 그대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고, 해질녘 그곳에서 끙끙거리며 돌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흔들고 당기고 또 흔들고 당기고 하면서 한 번에 하나씩 돌을 뽑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털북숭이들을 지켜본 적도 없지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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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포터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7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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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구젤 야히나의 <나의 아이들>에 이어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인 이 소설은,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대조적인 감정선이 툭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줘서 서서히 스며들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기억, 말하자면 역사, 덧없는 회상, 일어났던 모든 일을 모은 미덥지 않은 집합체는 그들을 방치해두지 않았다. (p. 30)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말이 전부인 ‘일레인 신시아 포터’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지금 앤티가 세인트존스시의 묘지에 서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 ‘로더릭 포터’ 씨의 무덤을 찾고 있다. 어떤 결심이 들었기에 그녀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게 된 것일까?

일단, 포터 씨의 삶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서인도 제도의 앤티가섬에서 태어난 그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이 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무역이라는 잔혹한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흑인 노예 후손이며,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 역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고, 그럴 줄 아는 아이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아버지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읽고 쓸 줄 알고 심지어 그런 일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존재인 ‘나’는 그들이 살았던 세상, 그들이 존재했던 세상 속에서 그들이 남기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간다.

앤티가섬이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일단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뻥 뚫리는 해변과 미세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하늘은 보기만 해도 여유롭게 쉴 수 있을 만한 곳 같아 보인다. 그렇다. 나는 지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앤티가섬의 절경을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포터 씨는 자연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른다. 고단한 일상에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다.

앤티가섬에서 택시 운전사로 살았던 포터 씨의 일과는 어떤 모습일까.

1922년 1월 7일 세인트폴구의 잉글리시하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아버지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그는, 승객을 태우고 짐을 내려주며 명령과도 같은 말을 듣는 내내 벗은 모자를 손에 쥐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위안이 되는 바닥만 내려다본다. 그리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영겁의 세월이 깃든 껍데기 같은 양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저마다의 역사와 고통을 안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 자신의 고용주 ‘슐’ 씨에게 그의 차를 고스란히 그의 집에 갖다 놓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난다.

어느 날, 포터 씨는 택시 승객으로 ‘바이쳉거’ 박사를 만나게 된다. 고향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소용돌이치는 일들을 겪다가 앤티가섬에 오게 된 그가 본 세상은 폭력이 만연했고 혼란 그 자체였다. 이제는 과거의 기억이 기적처럼 여겨지고, 전쟁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전 끝없이 따뜻했던 햇빛을 그리워하며 “사무엘”이라 자신을 불러주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였던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바이쳉거 박사에게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깊은 한숨이 느껴진다. 반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포터 씨에게는 그저 맥없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포터 씨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 ‘너새니얼 포터’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한 적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스물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마저도 아는 것은 열한 명뿐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떤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듯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포터 씨의 아버지.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궁금해하지 않는 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통발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마릿수 정도가 되겠다. 자기 손과 발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은 그를 이루는 일부였으며 자연이 곧 자신이었다. 매일의 고통과 위험은 숨쉬기처럼 당연했고, 그것이 정상이었던, 고통 그 자체의 삶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의 삶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사랑은 꼭 그의 삶에 들어왔어야 했지만, 사랑은 너새니얼 포터의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앞에도 뒤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세상을 이루는 바로 그 땅 위에 서 있었고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영원히 잃었다. (p. 47)

저자는 다시 우리의 시선을 ‘나’의 아버지 포터 씨에게로 옮긴다. 그는 늦은 밤 짙은 어둠과 이른 아침의 엷어지는 어둠 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며 매일의 위험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낸, 자신의 아버지 그 자체였다.

70년의 생 시초에 70년은 포터 씨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로 여겨졌을 것이며, 생의 끝 무렵에는 그가 살았던 모든 날 이 하루,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루와도 같이 느껴졌다. (p. 63)

대책 없이 자신처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자식을 많이도 낳았다. 고통을 낳듯이 낳은 자식 중 원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고, 사랑이란 건 받은 적이 없어 줄 줄도 몰랐다. 누가 누구를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로 바라볼 필요도 없이 내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경계가 없고 거리가 없이 그저 똑같을 뿐이었다.

차라리 분노든 증오든 좌절이든 같이 감정을 나눌 수 있도록 표출해 주면 읽는 마음이라도 덜 불편할 텐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겉으로 감정을 내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들처럼, 심지어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다. 경외감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해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쩍쩍 갈라지는 나무껍질과도 같은 건조한 모습으로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감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런 이들을 떠올리며 글로써 담담하게 담아내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무연한 마음만 들었다.

왜 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자식을 많이 낳았느냐고, 왜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못 했느냐고 소리쳐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는 모습에서, 허약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운명이 물려받아야 할 업보처럼 인생의 비등점 없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떠받치며 연약한 모습으로만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삶 자체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연민 안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더 이상 원치 않는 고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엄마가 된 ‘나’의 간절함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내 속마음 일 뿐이지만, ‘나’라는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연민으로 들여다 볼 수 있기까지의 시간이 덜 걸렸을 것 같고,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이제는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미줄처럼 그어진 줄을 스스로 거둬내 가슴 속에만 쌓고 지냈던 그 응어리를 세상 밖으로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나’ 자신이 가진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고통까지 전부 토해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요? 내게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당신의 관심을 원할 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을 수 있죠? (p. 169)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어, “내가 태어난 것은……”으로 시작하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갔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세상 모든 포터를 위해 ‘나’는 과거를 끌어올려 글로써 적어 내려갔다. 분명, 그녀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글 속에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 하며 자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또 다른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한 위로의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이 소설 내용 중에서, 포터 씨 탄생의 순간부터 그의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가 바닷가에서 맞이한 죽음을 담은 64쪽부터 84쪽까지의 이야기도 절대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태어난 것이 죄가 되고, 고통으로부터 마침표를 찍는 것이 죽음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의 애석함이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나의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게 만들었다.

원망과 서글픔이 없을 수가 없는 ‘나’의 마음을 조심스레 헤아려보자면, 이 소설이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의 일부로서만이 아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 끝에 존재했던 포터 씨, 로더릭 포터로서의 인생을 끌어내 준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었던,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던 황량한 삶을 살아간 사람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말이다.

포터 씨 자신은 아무 말도,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함은 얼마나 슬프며 애초부터 목소리를 갖지도 못했던 것은 얼마나 더 슬픈가.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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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7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관심가던 작가였는데 읽어야 될 작가로 바뀌네요.

곰돌이 2025-09-07 15:33   좋아요 1 | URL
나중에라도 읽게 되시면 리뷰 올려주실 거죠? ㅎㅎ 바람돌이님의 섬세함으로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지네요!
 

<미스터 포터> 중에서...

바다, 바다, 너무나 광활한, 너무나 광활하고도 광활한 바다가 그들, 포터 씨와 바이쳉거 박사 앞에 놓여 있었으며, 둘 다에게 바다는 극도의 위험을, 너무도 어두운 기억들을 품고 있었다. - P16

그는 그 전 모습 그대로, 프라하에서 왔고 그에 수반된 모든 일을 겪은, 죽음에서의 탈출과 낙원에서의 추방과 지도로만 알았던 끔찍한 이름들이 붙은 장소들로의 여행을 겪었으며 이제는 포터 씨로의 그리고 포터씨를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고 또 앞으로의 모습으로 만들 장소로의 여행을 겪은 사람 그대로였고, 그 모든 것은 참으로 하잘것없어 어떤 지도 제작자도 포터 씨의 존재와 그가 어디서 왔는지와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리하여 바이쳉거 박사는 그것을 지도에서 본 적이 없었다. - P23

포터 씨는 자신이 속한 모든 포터들을, 그리고 어쩌다 자신이 그 혈통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 열망이 없었고, 과거를 캐물어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대지의 모양이나 하늘의 색을 서술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모든 진실한것에 선천적으로 깃들어 있는 확신을 실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P31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세상에 들어오지 않는다. - P46

너무나 많은 고통이 포터 씨에게 따라붙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소진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는 남기고 갔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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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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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님의 책은 인물이 남긴 잔상이 오래가는 편이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소희, <각각의 계절>에 마리아, <안녕 주정뱅이>에 수환과 영경이는 여전히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사람처럼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이들의 삶을 통해 나의 위선을 확인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하고 놓치고 있던 내 주변에 가까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후회와 미안함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지금까지 읽은 작품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의 틈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 읽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각각의 상황 속 세밀한 감정들을 느껴보면서 스스로 돌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나의 시간을 끄집어내고, 현재의 감정을 살펴보며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에 담긴 7편의 단편 모두 애써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읽어 내려갔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얕은 잠에서 잠깐 깼을 때, 완전히 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마저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흘려버리지 못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을 읽을 때면, 여기저기 붙어 있는 묵힌 감정들을 날카로운 것으로 싹싹 긁어서 한데 모아 남김없이 탁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시곗바늘이 돌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시침과 분침이 시시각각 낯선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면서 흘려보낸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나아지고 마음이 아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울지도 않고 글을 다시 쓰게 될 그 시간, 그때의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게 될지 알지 못해 그녀는 못 견디게 불안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거칠고 두터운 시간이 흘러갔다. (p.34)


사회 초년생 시절,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완벽하고 싶은 마음에 무모한 열정을 앞세워 이리 돌리면 이리 돌려지고 저리 돌리면 저리 돌려지듯 휩쓸리면서 앞질러 가는 이들을 쫓아가며 사느라 참 바빴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은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서서히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되며 이내 줄어든 열정은 다른 곳에 쏟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사람이 복병이었다.

현재의 나로부터 해방시켜줄 만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건져 올린 기억 속에서 사랑과 실연의 극복 또한 참 다양할 것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극에 달했을 때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치졸함, 이 치졸함이 결국 나를 위한 극약처방이자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던 그 시절을 화끈거리며 떠올려본다.

누구나 그렇듯 대단하지 않은 것에 흔들리고, 별거 아닌 일로 극복하는 삶을 반복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내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 보면 누군가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무망감이 희망으로 방향을 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겪는 고통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민감한 인식을 가진 저자가 우리에게 조금은 시리지만 담담하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그리고 이 위로의 말은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말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p. 80)


이 소설은 자꾸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게 만든다.
그래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내가 탄탄하게 다지고 쌓아 올린 이성의 끈을 조금도 놓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느 하나도 남김없이 터트리고 싶은 이중 심리로 복잡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고민 없이 책을 들고 여러 감정을 느껴보는 그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된다. 한 감정에 오래 머물러서 굳어질까 봐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때가 있어서인지, 생각이 멈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나에겐 비극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꿈에서 깨고 나자 금방 잠들면 또다시 그 꿈이 이어질까 봐 억지로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현실의 공기를 충분히 마신 뒤, 꿈이라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에야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나의 반응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현실을 살 때는 아무리 깨고 싶은 꿈을 꿔도 그따위는 너무 아무것도 아닌 거다.

이제는 흐릿하게 맴돌았던 기억들이 투명한 물 위에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하나, 둘 드러나는 이야기가 예전보다는 조금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이때 나는 느낀다. 빛이 바랬다는 것을.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p. 118)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갖가지 감정들을 직접 읽어보며 충분히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줄거리를 생략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리고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그 마음을 대신해 주는 이야기로 가득했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글은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느낀 내면의 서늘한 고독을 끌어내는 고유의 결이 내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 싶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 몸에서 비워야 할 게 있다면 우선 드러내 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싶다.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루며 불안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남긴 흔적에는 환멸감, 자격지심, 둔감한 무관심, 분노, 증오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거창한 무언가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보잘것없는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나를 얼마나 끌어올려 주고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말이다.

날씨도 자기 계절을 찾아가듯이,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조금은 느슨한 마음으로 지켜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 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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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4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4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bass 2025-09-06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연극을 검색하다가 ˝봄밤˝이라는 연극 제목이 있었는데 <권여선 작가>의 글을 무대로 만든거라고 해서. 저는 처음 들어본 작가이길래 책을 검색했더니. 저와 <친한친구가 좋아요> 한 책이라며 곰돌이님이 검색되더라구요. 오홍, 신기했습니다. 곰돌이님이 좋아하는 작가였다니.

곰돌이 2025-09-06 05:38   좋아요 1 | URL
권여선 작가님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에 수록된 단편인데 몇 달 전에 영화로도 개봉됐어요. 최근에 연극 ‘봄밤’으로 초연된다는 기사 저도 읽었는데 괜히 반갑더라고요 :) rainbass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 그건 그렇고 하필 제 글이 검색되는 불상사를 겪으셨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