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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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이를 향한 상실감을 가진 채, 함께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허망함을 가슴에 묻고, 슬퍼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소란스럽지 않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는 것이 애도의 과정이라면, 그 애도의 기간은 평생이지 않을까.

무한한 슬픔을 달래도록 시간의 흐름이 내게 준 요령이란 애써 떠올려본들 눈물만 차오를 것 같은 기억들은 마른침 한번 꿀꺽 넘기고, 애처로움은 찾아낼 수 없을 만큼 행복했던 사소한 일상만을 얼른 떠올려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거.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거니까...
뭐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생각하면서 그냥 그렇게 또 참아보는 거.

이 책의 저자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 인생이 더 빛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아니면 이별로 인한 애달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도록 , 운명을 바꿔보려 할까?


동쪽으로는 20년 후 미래의 시간, 서쪽으로는 20년 전 과거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낸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자문기관에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승인을 받은 이들로 한해서 ‘애도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다. 멀리서 관망하며 말이다.

총 2부인 이 책은 1부에서는 16세 소녀 오딜의 모습을, 2부에서는 20년 후 36세가 된 오딜의 모습을 담는다.

다붓다붓 모여 그들만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깔깔대는 아이들을 멀리서 혼자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서로 너나들이하는 아이들이 몰려오기 전, 얼른 잽싸게 뛰어들어가 빈 교실에 앉아 쓸쓸한 안정감을 느껴본다.
얼른 이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는 16세 소녀. 오딜.
같은 반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피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혼자만의 외로움이나 소외감에도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오딜을 본 같은 반 남학생인 ‘에드메’와 ‘알랭’이 그녀를 도와준다. 처음으로 받아 본 낯선 도움에 고마움을 느낀 오딜은 ‘에드메’에게 조금씩 끌리는 감정을 느낀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16세가 된 학생들은 각자 실습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딜은 그녀의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자문관’이 되기 위해 심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에드메는 바이올린 연주로 음악원에 가고 싶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몰래 연습을 하며 오디션을 준비한다.

이렇게 진로를 고민하며 지내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그네를 타던 오딜은 20년 후인 미래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 동부 철책에서 넘어온 에드메의 부모님을 우연히 목격한다.

(P. 40) 에드메의 부모님이 이곳에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밸리의 방문을 승인 받을 수 있는 사유는 사별뿐이었다. 산 너머, 20년 이후인 동부 밸리의 세상에는 에드메가 죽고 없는게 틀림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에드메의 운명을 알게 된 오딜은 이 사실을 발설하는 것이 위반사항 이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속앓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문관이 되기 위해서 더욱 철저하게 자문기관 실습 심사 프로그램에 임해야 했다.

(P.79) 방문이 청원자에게 ‘옳은’일인가? 방문이 청원자를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인가?

어떤 선택이 날 가장 두렵게 만들까? 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줄지의 대한 여부는 애초 고려대상이 아니다.
떠나보낸 사람을 관망하는 것은 내겐 그저 너무 서글픈 일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 오딜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에드메가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산속에 연습하기 좋을 만한 장소를 소개한다.
그들만의 연주회장처럼 깊은 밤, 고요한 숲 속을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로 채우는 동안 두 소년 소녀의 애틋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들이 굉장히 서정적으로 다가왔고 내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P. 161) 달빛이 비치는 공터에는 돌로 된 옹벽이 있었다. 벽은 잡초로 무성했지만, 굴곡진 오솔길을 따라 계단처럼 층층이 쌓인 구조 때문에 객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진줏빛 반광에 비친 에드메의 얼굴에 검연쩍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바이올린의 위아래와 양옆을 살폈다. 이제 바이올린의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그는 활을 들어올렸다.
활과 현이 충돌하는 순간, 삽에서 퍼 올려지는 흙처럼 음표가 사방으로 튀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깨끗함과 경이로움.
내겐 책의 내용을 떠나 힐링이 되는 순간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P.340)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P. 382) 새벽녘에 사택을 나섰다. 날이 상쾌했다. 풀과 나뭇잎에 신선한 공기를 뿜어냈고, 예배당 앞뜰에서는 스피어민트 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일조차 일상에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며 다른 밸리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던 오딜.
자신이 좋아하는 에드메를 위해 운명을 바꿀 선택지에 놓여 고민은 깊어지고 그를 향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간은 흐르고 복잡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에드메’의 마음도 자신을 향한 게 아닌 것 같다.
다시 외로움 가득 한 그림자가 그녀를 찾고 있다.

(P.202) 너무 캄캄해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의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쓸쓸함이 반가웠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하릴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하루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계곡>은 방관하는 자, 감수하는 자, 이용하는 자, 이용당하는 자, 짓밟는 자, 떠밀린 자 등의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해 ‘따끔’하게 관통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가까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디디는 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그 길 앞에 서 있는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거친 파도 앞일지, 벼랑으로 이어질 비탈길일지, 아니면 결과가 예견되는 일에 나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앞에 놓여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인생은, 삶은, 매 순간 우리를 선택 앞에 놓이게 한다.
우리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선택의 순간들은 ‘시기’를 따지지도 않고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의 어딘가 용기 잃은 부족한 열정은 16세 소녀가 뒤늦게 친해진 친구들 무리 앞에서, 그리고 20년 뒤 장교들 무리 앞에서 미처 불꽃을 태우지도 못한 채, 흩어지는 연기와 절망감을 얻게 한다.
그들의 얼굴에 쏟아지는 햇살만큼, 익숙하고도 반가운 외로움 그리고 패배감이 그녀의 온몸에 쏟아진다.

(P. 247) “지난날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더 나은 앞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비가 내린 후 움푹 들어간 웅덩이를 ‘철퍼덕’ 소리를 거칠게 내며 밟고 지나가는 트럭이 남기고 간 바퀴 자국을 바라보던 16세의 오딜,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거친 바람에 잔뜩 낀 모래가 박힌 이마 주름을 바라보는 36세의 오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녀의 운명이?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얼른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걷는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 정돈을 하듯,
이 책도 그렇게 걸어가듯이 읽어내려갔다.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상실감은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경외심’을 발견하며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극복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이는 자세와 단단한 마음이 부족했던 나는 허위 단심 하며 지금도 배워나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워하는 마음을 추억이라는 자양분으로 삼아 오늘 이 하루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며 따뜻하게 가슴에 담아본다.

철학적인 많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저자의 글을 통해서 확인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P.364) “됐어야 해, 했어야 해. 그런 건 없어. 지금 내가 나인 거야.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P.452) ˝되기로 정해져 있는 건 없다.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로 대체된 거야. 남은 결과를 결정하는 건 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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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은 정해진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다 읽었어요 ㅋ 만약에 가능하다면 저는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가고 싶어요 ㅋ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좋습니다~!!

곰돌이 2025-04-12 17:12   좋아요 1 | URL
벌써 다 읽으셨군요? 저도 동쪽으로 가는 건 좀 무서워서 서쪽을 택할 것 같아요...지금 읽는 거 다 읽고 나면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어볼게요^^

rainbass 2025-06-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알고 싶어하지만, 정작 미래를 모르는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했네요. 곰돌이님이 좋아요를 누를지 몰랐던것처럼, 이렇게 글쓰고 갈 저를 몰랐던것처럼^^

곰돌이 2025-06-17 17:22   좋아요 0 | URL
친구를 살리고 싶었을 저자의 심정이 반영된 것으로 느껴지는 결말이 기억에 남는 책이었어요. 그 공감의 마음으로 좋아요 꾹 눌렀습니다 :)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현재를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레몽은 이 일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헌병으로서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했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어 처음 지원했던 두 실습 과정에서 떨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게 됐다고 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순찰이 아주 잘 맞더라고. 지난날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더 나은 앞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 P247

피슈그뤼 선생님이 죽었다니. 내가 내 과거에 어떤 감정을 느낀게 언제였던가? 나는 어떤 감정이라도 들기를 기다렸다. 꼭 선생님이 아니라 그 외 어떤 과거에 대한 감정이라도. 슬픔과 후회의 감정은 이미 수년 전에 말라붙어 각질처럼 벗겨진 지 오래였다. 때로는 필요한 것이 곧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나는 피슈그뤼 선생님을 기리며 술병을 들었다. ‘편히 잠드세요, 선생님.‘ - P260

비참한 미래와 망가진 척추, 내 눈에 들어오도록 자기 고개를 꺾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이후로 몇 달 내내 혼란스러웠지만, 이제 이해가 됐다. 자기 삶을 되돌리고 싶었던 그 여자가 뤼시의 탈주 경로를 틂으로써 이곳의 내게 기회를 주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 P309

겨울이 남기고 간 황폐함 속에서 피어난 초록 새싹을 보면 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오랜 투병을 마치고 마침내 고른 숨결을 내뱉듯 대지에 색채가 돌아왔다. 바람이 한 점씩 불어올 때마다 황금빛 꽃잎, 푸른 잎사귀가 열광하며 언덕을 깨웠다. - P340

돌이켜 보니 아쉬운 일들, 후회되는 일들이 슬픔이 되어 오랜 열병처럼 여전히 내 속을 헤집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은 사택 창틀에 비친 예배당 묘지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묘비는 내가 조각해 넣은 것 중에 사람과 가장 가까운 대상이었다.
혹시 내가 외로워서 이런 걸까? 지금 내게는 인생을 함께할 누군가보다 인생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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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심사 프로그램에서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없었는데,
연달아 통과하자 이제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달라진 마음가짐 때문에 내 약점이 드러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꿈이 외부의 승인과 타인의 인정에 좌지우지되는 건 아닐까, 하는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혹시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꿈도 생명체처럼 크게키우려면 보살핌이라는 품이 필요할지 모른다. 약간의 격려로 흙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내 꿈은, 이제 작은 새싹처럼 빛을 향해 스멀스멀 뻗어나가고 있었다. - P189

너무 캄캄해서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의 진흙탕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쓸쓸함이 반가웠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하릴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고통스러운 하루로 걸어 들어갔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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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봄,
하얀 물감 한 방울 ‘똑’ 떨어트려 놓은 분홍빛 세상.
포근하고 좋다.

요즘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시간의 계곡>을 읽고 있다. 저자는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라는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총 2부로 나뉘어 있고 아직 1부도 다 못 읽었다.

동쪽으로는 20년 후 미래의 시간, 서쪽으로는 20년 전 과거의 세월이 흐르는 마을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자문기관에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승인을 받은 이들로 한해서 ‘애도 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다. 멀리서 관망하면서 말이다.

나는 양쪽 다 서글프게만 느껴진다.


소재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능만 하다면 과거든 미래든, 가 볼 의향이 있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사뭇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경험이 다들 있지 않은가?

철학자인 저자가 상실감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궁금하면서도 무거운 마음이 드는 것은 역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현재 읽고 있는 부분은 반짝이기만 한 10대 소년 소녀들의 천진난만함을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고,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읽는 내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여름날, 숲속 깊은 곳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온 세상이 행복으로만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충만함과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자기네들끼리 신나서 킥킥거리는 와중에 코를 자극하는 풀 내음에 들숨 한번, 날숨 한번 해 보는 그런 감성.

예상되는 슬픔은 잠시 안 보이는 곳으로...
저 깊숙한 곳으로...


봄을 만끽할 수 있도록 피어있는 꽃들로 출퇴근길이 풍성해서 좋다. 곧 꽃비를 맞게 되겠지?

생각지도 못한 적립금 선물로 기쁨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바람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미천한 먼지가 할 수 있는 것이 ‘독서’뿐이라 책을 몇 권 샀다.

히죽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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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0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수린, 김연수 작가님의 작품들 좋습니다~!! 시간의 계곡 표지랑 내용이 마음에 드네요~!!!

곰돌이 2025-04-09 18:04   좋아요 1 | URL
시간의 계곡은 책 크기도 살짝 큼직하고 자간 간격도 맘에 들어요!! 그리고 감정 묘사가 섬세해요...술술 읽혀집니다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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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간 장례식장은 모순 되지만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는 곡소리에 겁을 먹고 들어가자마자 무거운 공기에 압도되어 숨 쉬기도 버거운데, 한 쪽에서는 얼큰하게 취기가 도는 김에 그간 밀려있던 이야기들을 왁자지껄 목청 높혀 쏟아내는 난리통이라 어린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하염없이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제 각기 삼삼오오 모였고, 웅성웅성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 잘 돌아가셨지. 더 사셨으면 큰 골치가 될 뻔 했어. 자식들 고생 덜었지 뭐.”

잘 돌아가셨다니.
어른들의 대화는 진심으로 충격 그 자체였다. 아까 하염없이 쏟아낸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때의 장례식장 풍경도 이제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눈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잘 돌아가셨다는 그 말이 상실을 담은 말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던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어릴 적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고향 구례를 ‘다시’ 찾은 딸이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해작이며 아버지와 자신과의 시간의 틈을 메꾸고, 얇아진 마음의 끈을 붙여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빨갱이라 불리며 등 돌리는 사람들과도 속없이 어울려 지냈던 아버지의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빨치산의 딸 ‘고아리’는 어떤 삶을 살았으며, 아버지가 그녀에게 주고 간 것은 무엇이고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P.27)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가는 것, 다시 올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빨갱이의 딸로써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를 얻은 다른 가족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없고 짐작 조차 되지 않는다며 자신보다 더 가엾게 바라보고 저절로 수그려지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되뇌었다.
‘이해할 수 조차 없다. 짐작 조차 되지 않는다.’

(P.81)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 아버지의 죄라니.


고작 사년뿐이었던 아버지의 빨치산 이력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이 사회가 평생을 옥죄게 하였다. 그녀는 알아서 적당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름의 배려를 선택하는 삶을 걸어가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외면한 채.

생전 아버지의 오지랖이 구례 곳곳에 넓고 길게 뻗은 덕분인지 동네 사람들의 억척스럽지만 자신의 가족 일인양 보내오는 정스러운 손길 덕분에 치매가 더 진행되어 단속 해야만 했던, 그래서 마침 맞았던, 아버지의 장례를 순탄하게 치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P. 93)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없어?”
“ 두말하면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면 싹 꼬실라부러라.”

유물론자답게 ‘꼬실라서 암 디나 뿌레삐레라.’ 라고 생전에 말씀 하셨던 아버지를 험란했던 삶 속 에서 해방 시켜 떠나보내드렸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을 겪을 때 망연자실한 그 순간에도 돋을볕처럼 따사롭게 잡아주는 사람들의 손길을 잡고 다시 일어선다. 베푼게 없어 붉어진 두 볼과 갈 곳 잃은 손. 도망 갈 구멍을 찾느라 바쁜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된비알 같은 인생 다 그렇게 살아가는거야.’ 라고 말해준다. 그럴 때면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나온다.

토닥..토닥..토닥..토닥..
그 손길에 움켜쥐고만 있었던 슬픔이 쏟아져 나올 때 나는 알았다. 눈물을 안으로만 삼키지 말고, 등 쓰다듬어 주며 함께 울어주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P. 224)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마 사람의 곁이 부담이고 다 빚처럼 느끼며 살아왔을 ‘고아리’ 그녀도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그 따뜻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모질고 거친 삶을 살게 한 아버지.
소주 한병과 에쎄 한갑, 돈 사천원 지출이 하루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원망하기엔 그녀와 어머니, 그들 세 식구 모두 많은 일에 대낀 세월은 한없이 고단했으며 가년스러웠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기는 어느 누구나 겪게 마련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은 더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머리가 좀 컸다고 잘난 척 해대며 산다. 깊은 후회가 늘 따른다.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고향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미처 알지 못 했던 각자의 ‘사정’들을 통해 그녀는 이제서야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를 사랑해줬던 아버지와의 추억들을 하나 둘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 내 곁을 떠난 아버지.
사상과 신념이 중요했던 아버지 ‘고상욱’씨는 그녀의 딸 ‘고아리’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 참 다운 삶을 일깨워주고 그렇게 떠났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짠해져 코끝이 찡~해질라 하면, 어디선가 장독대에서 막 퍼담은 된장처럼 구수한 방언이 일렁거리는 마음을 위로하는 듯 무심하고 투박스럽게 눈물을 ‘쓰윽’하고 닦아주고 간다. 이렇게 방심을 하던 찰나, 맨 마지막 정지아 작가님의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P. 268)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떠한 가련한 사유로 행복에도 마지노선을 그어 놓은 채 살아가야만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것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단 며칠, 몇분 몇초의 시간이라도 고통없이 사는 것 조차 너무나도 간절할 누군가들에게는 이 단 하루도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소중하기에. 이 하루는 너무나도 값지기에. 그리고 나를 평생 기다려주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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