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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으로 들뜨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내게는 살만 루슈디의 작품이 그런 편인데, 이전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통해 저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번역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김진준 님의 번역이라 <한밤의 아이들>이 더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들뜨게 하는 데는 재미가 크게 한몫한다.
초반에 알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라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로 머리에 기름칠도 시켜주고, 조금 지루하겠다 싶으면 콧방귀 한 번 뀌며 특유의 재치가 섞인 지적인 농담으로 고봉밥 꿀떡꿀떡 넘기듯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해주어 제법 분량이 많은 책임에도 잘 읽히게 해준다.
총 2권으로 나눠진 이 <한밤의 아이들>은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우리나라와 인도는 독립운동 방식이나 식민 지배 기간의 차이는 있어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과 독립 이후에도 분단의 아픔을 겪는 것, 그리고 8월 15일이라는 독립 날짜까지 같다는 역사적 연결이 있는 나라이기에 여러 면에서 유대감이 느껴진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따라가 본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로 태어난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혹사당한 몸이 목숨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허망한 죽음에 두려움만 떨고 있다. 남은 시간은 유한하지만 할 얘기가 많아도, 너무 많단다.
살림은 피클 공장의 요리사로 지내는데, 밤에는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 ‘파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인도 역사를 들려주고 기록하면서 ‘보존’하는 작업에 만전을 기한다. (생계를 위해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글을 썼던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자기 몸 살피랴 역사를 굽어보랴 의사가 엉터리 치료법을 쓴다는 둥 독자에게 하소연하랴 바빠도 너무 바쁘다.
앗참!! 살림 옆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 풍기는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파드마가 내 심정을 어찌나 잘 알아채는지, 이야기가 곁길로 빠져 늘어지거나 궁금증만 유발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면 알아서 찡그리고 독촉하고 끌어내는 등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하며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아, 일단 살림에게 시간적 여유가 아주 넉넉지 않은 것 같으니 그의 이야기부터 얼른 들어봐야겠다.
35년 전, 1915년 인도 카슈미르의 어느 봄날로 거슬러 가본다.
보석상을 하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독일에서 최근 의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살림의 외할아버지인 ‘아담 아지즈’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유럽에서 살다 돌아와 변화의 냄새를 맡은 그의 눈에 이 작은 골짜기는 협소해 보일 뿐이고, 반대로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간 얼음장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외할아버지의 ‘코’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 지금 수면에 반사된 그의 얼굴 한복판에서 성난 바나나처럼 너울거리는 저것을...... (p. 35)
이 거대한 살덩어리를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는 살림의 코 이야기는 줄줄이 이어지고,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담긴 문장도 이어진다. 또 내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코가 그냥 코가 아니란다.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가 말하길, 그의 코는 무굴제국의 황제들도 탐낼 정도이며 왕조의 씨앗이 깃들었다고 한다. 나이도 알 수 없고 온갖 잡다한 소문만 무성한 뱃사공 타이는 아담 아지즈를 향해 예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코가 경고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끝장나는 줄 아시우. 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크게 출세할 게요.” (p. 45)
어느 날, 카슈미르의 지주 ‘가니’의 딸 ‘나심’이 복통을 호소한다는 전갈을 받은 아담 아지즈는 뱃사공 타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의사로서 가니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진이 계속되었고, 어쩌다 보니(?) 아담과 나심,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살림의 외조부모는 결혼과 동시에 조용한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역사의 아픔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 코가 반응한다.
간지럽고, 또 너무 간지러워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아담 아지즈가 재채기를 “에에에에-흐엣취!” 하는 순간,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무너지고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그 멍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독립을 약속한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속을 어기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부터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사건, 1947년 10월 27일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엄청난 만행이 벌어진 사건들을 포함해 그 외에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역사적 아픔을, 저자의 너스레 속에 기가 막히도록 잘 녹여내어 읽는 재미를 높여주고, 농담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뼈가 담긴 우스갯소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지냈던 저자의 그 당시 혼란스러운 내면의 심리를 아담 아지즈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돼지가죽으로 만든) 진료 가방인 하이델베르크 가죽 가방은 침략자이자 진보의 산물로 상징되는데, 독립운동 탄압을 더 강화하며 심리 없이 인도인들을 체포하고 투옥할 수 있는 ‘롤라트 법’의 폐기를 요청하며 시위하는 인도인들을 향해 영국군이 총격을 가한 날, 그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머큐로크롬(소독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해준다. 집에 돌아온 아담 아지즈는 자신과 반대 성향인 부인 나심에게 이 혼란스러운 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며 말한다.
“이번 일은 아직 안 끝났소. 우린 떠날 수 없단 말이오. 다시 의사가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여기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담은 코를 비볐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 걱정이오.” (p. 82)
외조부모의 이야기는 여기서 살짝 건너뛰고 살림의 부모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날, 살림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꼬물대던 시절 어머니가 위험에 처한 힌두교 사나이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으로 그의 용한 점쟁이 사촌 형을 통해 ‘예언’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뱃속 아이의 앞날을 알려준다는 말이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며칠 후 만난 점쟁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기이한 목소리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힌두교 사나이를 다시 만나게 된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그때 당신 사촌 형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p. 193)
유럽에서 살다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카슈미르가 쫓아내고,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암리차르도 쫓아내고, 부모님 결혼 후에도 또다시 여기저기서 그들을 봄베이(현 뭄바이)로 몰아내는 바람에 살림이 봄베이에서 태어난 과정과 거꾸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봄베이가 동인도회사가 들어와 간척 사업을 벌여 지금처럼 육지로 변하기 전, 아령 모양의 섬이었던 시절에 빼앗기고 또 빼앗기는 패배로 원한만 표독스럽게 번뜩이던 그 옛날까지...(헥헥) 주사위를 잘못 던져 모든 게 다 최악인 시대를 읊어내느라 살림의 입이 고생이 많다.
아무튼 고기잡이 그물과 코코넛과 쌀과 뭄바데비가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고, 1947년 8월이 되면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떠날 차례였다. 영원한 지배는 없다. (p. 206)
봄베이에서 살게 된 살림의 부모님은 인도의 독립 선언으로 떠나야 하는 영국 행정관 ‘메솔드’의 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그가 제안한 조건에 수긍하며 거래하게 된다.
메솔드 단지의 매각 조건은 두 가지였다 : 건물 안의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송두리째 구입해야 하며 새로운 주인은 그 모든 품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소유권을 양도하는 시점은 8월 15일 자정으로 미룬다는 것. (p. 209)
이 조건은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독립과 그 이후 1948년 6월까지 인도의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한 영국이 ‘그냥 버리자’ 외치고 무책임하게 몸만 빠져나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와,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고?’라고 생각할 만큼 상징적인 것들의 연관성이 놀라울 만한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내 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어딘가 찝찝하기만 한데 메솔드는 가격도 환상적이고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상태로 넘겨주는 것이라며 큰 호의라도 베푼 듯 말한다.
“만사형통이로다.”
(아직도 안 꺼낸) 살림의 탄생 이야기까지는 하고 마쳐야겠다. 1947년 8월 15일 자정, 불행의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이라는 자유의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1,001명의 아이 중 정각에 태어난 살림. 아니,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발생한다.
나에게는 1,001명의 아이 중 마음에 쓰이는 아이가 있다.
허구이길 바랄 만큼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든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시바’라는 아이인데,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했을 이 아이의 난폭함이 오랜 세월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가 독립이 되었어도 갈등과 분열로 인해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닮았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그래봤자 어린아이일 뿐인데, 시대와 나라를 잘 타고났어야 한다는 말밖에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잠재적 위협이 느껴져 불안하게 만드는 이 아이가 2권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먹구름 낀 궁금함만 가득하다.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나 자신을 스스로 끌어 올리려고 이것저것 해보며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왜 꺼내냐면, 무너지고 일어서는 반복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느끼기까지의 나의 간절함을 떠올리게 해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생각해 봐야겠어.” (p. 478)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이 있다. 살림이 사나운 기질이 있는 자기 여동생의 호전적인 모습이 ‘사랑’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인데, 삭막한 상황을 사랑이라는 ‘온기’로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절실한 세상이다.
내가 저자의 책에 손길이 가는 이유는 그의 지적인 유머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도 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끌어내고 또 끌어내며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고, 사람이 매번 진지하게만 살아가는 것도 살짝 고리타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삶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가끔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만드는 점은 분명 나를 자극하고 손길을 가게 만든다.
아직 2권이 남은 상태라 개인적인 감상을 더 추가하다 보면 여태 스포일러를 샤샤삭 피해가며 적은 나의 노력의 땀방울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이쯤에서 1권의 이야기는 무 자르듯 잘라야겠다. 2권에서는 살림의 몸이 왜 지금 서른한 살을 앞두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을 떨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 고달프다.
후덥지근한 더위에 땀이 비처럼 쏟아지듯 답답한 밤의 끈적임은 사람들의 갈망만큼이나 끈적했고, 살림이 들려준 가정사와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혼란으로 머릿골은 지끈거렸다. 환상과 현실의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온갖 언어로 존재를 알리는 소리, 동류가 동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줄 이야기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