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아이들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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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연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없다. 과거의 내 모습은 영원히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1권에서는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특별한 능력을 지닌 1,001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정각에 태어나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진 불가분의 관계이자 ‘맏형’으로서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가 서른한 살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연인 ‘파드마’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권에서도 외할아버지의 성난 바나나 같은 큰 코를 물려받은 살림의 스러져가는 삶 속 흩뿌려진 기억이 이어지고, 인도의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쑥쑥 자라 벌써 성인의 키만큼 자란 열한 살 살림이, 봄베이(현 뭄바이) 영화계에서 유일한 사실주의 작가인 외삼촌 ‘하니프 아지즈’와 전직 여배우인 외숙모 ‘피아 아지즈’에게 잠시 맡겨진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살가운 아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석양과 소음이 어우러진 봄베이의 ‘마린 드라이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다. 이곳에서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외삼촌의 단골들인 재즈 연주가, 가수, 화가, 사진 기자 등이 모이는데, 살림은 이곳 사람들에게서 떨어지는 흥미진진한 일화와 추악한 이야기를 줍고 또 줍는다.

인도의 신화적 삶에 휘말려버린 나는 나 자신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의식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p. 20)

살림은 행상인과 거지, 노점상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발코니로 나가 둥근 목걸이처럼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빛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영화계 거물인 한 남성과 잠시 대화를 나눈다.

“바깥공기가 상쾌하구나.”
“네, 아저씨.”
“그래, 그래. 인생이 그럭저럭 살 만하니?”

부모님 곁을 떠나 귀양살이 중이니 그럭저럭 살 만할 리가 없는 살림의 속마음을 들어보려 했으나 순번이 틀렸다는 듯 생각도 못 한 외숙모 피아의 하소연부터 이어졌다. 신식 사고방식의 며느리에게 냉소적으로 대하는 시어머니 ‘나심 아지즈’의 잔소리로 인한 한숨과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향수가 한데 뒤섞여 눈물과 함께 흐른다. (참고로 1권부터 이어진 시어머니 나심의 독특한 화법이 꽤 웃긴데, 익숙해져서 감흥이 없을 만도 한데 어째 튀어나올 때마다 잔웃음이 나온다.)

“우리 집안은 거뭣이냐! 아니 그러니까 거뭣이냐! 내 말은 거뭣이냐!”

그건 그렇고 살림도 울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다시 메솔드 단지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한평생 신기하고 황당무계한 변화의 세계와 맞닥뜨리면서 여러 가지로 골칫거리가 많아 고달프기 때문이다.

1권에서 살림은 인도의 독립과 함께 태어난 아이들과 ‘한밤의 아이들 협회’를 만들었는데 살림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간 이 협회는 단순히 아이들이 모여 잡담하고 낄낄거리는 친목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인도의 미래를 위해 활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제법 진지한 모임이다. 외삼촌 댁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물론, 이보다 더 큰 이유로 미뤄두었던) 다시 회의를 소집한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뜻한다.

인도는 독립 선언 이후에도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오랜 시간 식민 지배를 받으며 지내왔고 다양한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진 나라이면서 독자적인 국가 운영 경험 또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밤의 아이들 협회도 이런 나라 사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다시 모인 아이들과 영 신통치가 않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지역, 피부색, 종교, 계급 등의 차별과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대화조차 사라지며, 더 나아가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살림은 아이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때, 한밤의 아이들 중 살림과 같은 시간에 태어난 ‘파괴의 신’의 막강한 힘을 가진 ‘시바’가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것들을 어디다 쓰겠냐? 다들 먹고 살기도 바쁜 판국에. 지랄염병, 이 오이코 녀석아, 난 이제 너희 협회라면 신물이 난다. 재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냐.” (p. 44)

인도는 빠른 경제 성장으로 불균형과 빈곤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바의 시선으로 볼 때,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살림의 낙관적이고 감상적인 태도에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얻게 되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빈민굴의 냄새와 치열한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온도를 알지 못하는 자본 계층에 속하는 살림에게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덩치만 컸지 아직도 열한 살인 살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혈안이 되어 속이 조용할 날이 없고 안팎으로 괴롭다. 외삼촌 댁에서 유배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온 가족이 파키스탄으로 건너가야 한단다. 이렇게 처음으로 내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북녘 도시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파키스탄 군인이자 정치가인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제 쿠데타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 총리가 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살림의 눈앞으로 폭력, 부패, 탐욕, 빈곤이라는 독립의 자식들이 줄을 지어 등장했다. 또 한참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 그런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능구렁이 같은 살림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지금까지 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의 청취자가 감정이입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p. 122)

어휴 못 말린다, 정말...
이처럼 독자와 호흡을 같이 함으로써 인물과의 정신적 교감이 깊어지고, 이 감정적 연결은 소설을 더욱 생동감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지루해질 만하면 살림이 또 곁길로 새거나 음란 마귀가 씌어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던지고 가는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한다. 이 녀석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신들의 인구수조차도 국민의 인구수와 맞먹는다는 이 나라는 조용할 날 없이 어수선하여 사춘기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민다. 불쌍한 녀석...


또다시 봄베이로 돌아온 살림의 가족.
살림은 탄생과 함께 인도의 운명과 함께한다고 밝혔으니, 변화가 있다는 건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1962년 10월 20일, 국경 문제로 인도는 중국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중국은 위기를 맞이했고, 제3세계 싸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도와 중국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전쟁이 터진 것이다. 6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이 분쟁과 관련하여 얼마 전 “일부 희망적인 합의가 있을 것”이라는 인도 무역부 장관의 기사를 읽었다. 내 나라 문제도 어수선하지만, 참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기적처럼 고통을 순식간에 벗어던질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지만, 질긴 잿빛 운명이 참 길기도 길다.

살림의 가족들이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모습은 다양했다. 불안으로 인해 악화하는 갈등 속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 각자의 사정을 떠나 사람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어쩌면 불행했던 어린 시절도 이제는 흘러간 세월만큼 담담하게 다가오고, 가족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그 당시에는 뾰족하게 올라갔던 송곳도 자취를 감추게 하여, 글을 써 내려가는 살림의 펜 끝이 뭉툭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파리처럼 무력했지만 파리보다 더 어리석었다. 거미줄에 걸렸는데도 오히려 기뻐했기 때문이다. (p. 149)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신앙보다는 상업의 윤리를 중시했던 살림의 집은 어머니의 요구로 봄베이에서 다시 파키스탄으로 향하게 된다. 위기에 처한 파키스탄 정부가 특효약으로 눈길을 둔 것은 전쟁이었고, 인도와 중국과의 분쟁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5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다. 이쯤 되면 인도 현대사 전체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살림의 비애감이 만들어 낸 주장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집이 터지고 무너지고, 구원의 희망도 없고, 얻기 위해 빼앗아야 하는 이 전쟁은 휴... 6년 후에 또다시 일어난다.

살림이 들려주는 참혹함을 조용히 듣고 있는 그의 연인 파드마의 두 뺨에 눈물이 연실 주르륵... 주르륵... 그녀와 독자의 무거운 마음을 달래줌과 동시에 뻔한 전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혹시라도 의문을 품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그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친절한 살림이 한 마디 덧붙인다.

“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어! 감전 사고와 열대우림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고 골수가 흐르는 들판에 우뚝 솟은 머리통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단 말이야. 앞으로 아슬아슬한 탈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첨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거야. 간단히 말해서 아직도 다음 상영작과 개봉박두가 수두룩하다 이거야. 부모가 죽으면 인생의 한 장이 끝나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p. 227)


책 읽기 전 맨 앞에 있는 ‘차례’를 들여다봤을 때, 도대체 무슨 제목이 이럴까?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다 읽고 다시 들여다보니, 제목만 봐도 머릿속에 줄거리가 떠올라서, 오! 이거 참 포인트를 잘 잡아서 정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섬세한지 독자의 기억 저장 능력을 염려하여 줄줄이 이어지는 폭풍 같은 이야기를 종종 요약해 줌으로써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척척 들어맞게 해 준다.

저자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활용한 표현이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던 세상을 떠올리며 말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더 생각해 보도록 해주었던 것 같다.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신화와 전설 등과 뒤섞여 있어도 허구와 환상으로 들여다볼 수가 없는 이미 드러난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어서인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움과 위화감 대신 오히려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끔찍한 상황을 처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순수한 아이가 단순하게 풀어내는 과정을 거쳐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그간의 삶 속에서 겪은 마법처럼 여겨질 만한 비극을 감당하면서 고통 없는 평화와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고 좌절하다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총칼을 들이대는 사실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으며 살아가야 했던 가혹한 경험으로 살림이 점점 매사에 초연해지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슬픔과 참혹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살림은 그 고통스러운 꿈과도 같은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사랑이 결여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초월적 힘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장 멋진 기적은 사랑이었다. (p. 130)

다 읽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아쉽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할 것 같은 한쪽만 검은색 렌즈를 끼운 안경을 쓴 살만 루슈디의 노여움과 울분 가득한 장황한 수다는, 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내려놓는 순간 또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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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우드의 <상실의 기도>를 방금 받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지만, 조금만 훑어볼까 싶어서 펼쳐봤다.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속이 시끄러울 때,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소란스러움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잔디는 없고 그냥 흙먼지 쌓인 죽은 풀밭이다. (p. 16)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비, 기계로 자르고 광택을 낸 그 두 개의 돌덩이 앞에 섰다. 묘비의 색깔과 디자인, 그 위의 글자들은 부모님 누구의 흔적도 간직한 듯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가 결정하고 승인했을 것이다. (p. 16)

나의 외면은 변하지 않았으나 내면의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던 기억. 마치 내 안에서 모래톱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던. (p. 17)

마치 알알이 묵주처럼. 마치 내 몸의 뼈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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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따끈따끈한 신간이네요. 잘 모르는 작가라서 이런 책은 먼저 읽은 분의 리뷰가 항상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부커상 좋아요. 부커상 출신 작품들 왠만하면 괜찮더라구요.

곰돌이 2025-09-15 20:44   좋아요 1 | URL
앞부분만 조금 읽어봤는데 불편한 느낌이 없고 편하더라고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흠.. 표현력이 부족해서 답답해요!!) 바람돌이님이 아마 잘 알아채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ㅋㅋ

바람돌이 2025-09-15 20:45   좋아요 1 | URL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싶은게 제일 핵심이죠.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밤의 아이들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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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감으로 들뜨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다.
내게는 살만 루슈디의 작품이 그런 편인데, 이전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통해 저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번역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김진준 님의 번역이라 <한밤의 아이들>이 더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들뜨게 하는 데는 재미가 크게 한몫한다.
초반에 알아가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라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로 머리에 기름칠도 시켜주고, 조금 지루하겠다 싶으면 콧방귀 한 번 뀌며 특유의 재치가 섞인 지적인 농담으로 고봉밥 꿀떡꿀떡 넘기듯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해주어 제법 분량이 많은 책임에도 잘 읽히게 해준다.

총 2권으로 나눠진 이 <한밤의 아이들>은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우리나라와 인도는 독립운동 방식이나 식민 지배 기간의 차이는 있어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과 독립 이후에도 분단의 아픔을 겪는 것, 그리고 8월 15일이라는 독립 날짜까지 같다는 역사적 연결이 있는 나라이기에 여러 면에서 유대감이 느껴진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따라가 본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로 태어난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혹사당한 몸이 목숨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로 허망한 죽음에 두려움만 떨고 있다. 남은 시간은 유한하지만 할 얘기가 많아도, 너무 많단다.

살림은 피클 공장의 요리사로 지내는데, 밤에는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 ‘파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인도 역사를 들려주고 기록하면서 ‘보존’하는 작업에 만전을 기한다. (생계를 위해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글을 썼던 저자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자기 몸 살피랴 역사를 굽어보랴 의사가 엉터리 치료법을 쓴다는 둥 독자에게 하소연하랴 바빠도 너무 바쁘다.

앗참!! 살림 옆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 풍기는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파드마가 내 심정을 어찌나 잘 알아채는지, 이야기가 곁길로 빠져 늘어지거나 궁금증만 유발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면 알아서 찡그리고 독촉하고 끌어내는 등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하며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아, 일단 살림에게 시간적 여유가 아주 넉넉지 않은 것 같으니 그의 이야기부터 얼른 들어봐야겠다.


35년 전, 1915년 인도 카슈미르의 어느 봄날로 거슬러 가본다.
보석상을 하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독일에서 최근 의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살림의 외할아버지인 ‘아담 아지즈’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유럽에서 살다 돌아와 변화의 냄새를 맡은 그의 눈에 이 작은 골짜기는 협소해 보일 뿐이고, 반대로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간 얼음장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외할아버지의 ‘코’가 예사롭지 않다!!!

보라, 지금 수면에 반사된 그의 얼굴 한복판에서 성난 바나나처럼 너울거리는 저것을...... (p. 35)

이 거대한 살덩어리를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는 살림의 코 이야기는 줄줄이 이어지고,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담긴 문장도 이어진다. 또 내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코가 그냥 코가 아니란다.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가 말하길, 그의 코는 무굴제국의 황제들도 탐낼 정도이며 왕조의 씨앗이 깃들었다고 한다. 나이도 알 수 없고 온갖 잡다한 소문만 무성한 뱃사공 타이는 아담 아지즈를 향해 예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코가 경고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끝장나는 줄 아시우. 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크게 출세할 게요.” (p. 45)

어느 날, 카슈미르의 지주 ‘가니’의 딸 ‘나심’이 복통을 호소한다는 전갈을 받은 아담 아지즈는 뱃사공 타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의사로서 가니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진이 계속되었고, 어쩌다 보니(?) 아담과 나심,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살림의 외조부모는 결혼과 동시에 조용한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역사의 아픔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 코가 반응한다.
간지럽고, 또 너무 간지러워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아담 아지즈가 재채기를 “에에에에-흐엣취!” 하는 순간,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무너지고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그 멍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독립을 약속한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약속을 어기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부터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사건, 1947년 10월 27일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엄청난 만행이 벌어진 사건들을 포함해 그 외에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역사적 아픔을, 저자의 너스레 속에 기가 막히도록 잘 녹여내어 읽는 재미를 높여주고, 농담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뼈가 담긴 우스갯소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 같은 심정으로 지냈던 저자의 그 당시 혼란스러운 내면의 심리를 아담 아지즈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돼지가죽으로 만든) 진료 가방인 하이델베르크 가죽 가방은 침략자이자 진보의 산물로 상징되는데, 독립운동 탄압을 더 강화하며 심리 없이 인도인들을 체포하고 투옥할 수 있는 ‘롤라트 법’의 폐기를 요청하며 시위하는 인도인들을 향해 영국군이 총격을 가한 날, 그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머큐로크롬(소독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해준다. 집에 돌아온 아담 아지즈는 자신과 반대 성향인 부인 나심에게 이 혼란스러운 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며 말한다.

“이번 일은 아직 안 끝났소. 우린 떠날 수 없단 말이오. 다시 의사가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여기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담은 코를 비볐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 걱정이오.” (p. 82)

외조부모의 이야기는 여기서 살짝 건너뛰고 살림의 부모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날, 살림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꼬물대던 시절 어머니가 위험에 처한 힌두교 사나이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으로 그의 용한 점쟁이 사촌 형을 통해 ‘예언’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뱃속 아이의 앞날을 알려준다는 말이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며칠 후 만난 점쟁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기이한 목소리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힌두교 사나이를 다시 만나게 된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그때 당신 사촌 형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p. 193)


유럽에서 살다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카슈미르가 쫓아내고,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암리차르도 쫓아내고, 부모님 결혼 후에도 또다시 여기저기서 그들을 봄베이(현 뭄바이)로 몰아내는 바람에 살림이 봄베이에서 태어난 과정과 거꾸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봄베이가 동인도회사가 들어와 간척 사업을 벌여 지금처럼 육지로 변하기 전, 아령 모양의 섬이었던 시절에 빼앗기고 또 빼앗기는 패배로 원한만 표독스럽게 번뜩이던 그 옛날까지...(헥헥) 주사위를 잘못 던져 모든 게 다 최악인 시대를 읊어내느라 살림의 입이 고생이 많다.

아무튼 고기잡이 그물과 코코넛과 쌀과 뭄바데비가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고, 1947년 8월이 되면 이번에는 영국인들이 떠날 차례였다. 영원한 지배는 없다. (p. 206)

봄베이에서 살게 된 살림의 부모님은 인도의 독립 선언으로 떠나야 하는 영국 행정관 ‘메솔드’의 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그가 제안한 조건에 수긍하며 거래하게 된다.

메솔드 단지의 매각 조건은 두 가지였다 : 건물 안의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송두리째 구입해야 하며 새로운 주인은 그 모든 품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소유권을 양도하는 시점은 8월 15일 자정으로 미룬다는 것. (p. 209)

이 조건은 1947년 8월 15일 인도의 독립과 그 이후 1948년 6월까지 인도의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한 영국이 ‘그냥 버리자’ 외치고 무책임하게 몸만 빠져나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와,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고?’라고 생각할 만큼 상징적인 것들의 연관성이 놀라울 만한 (이 리뷰에 담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내 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어딘가 찝찝하기만 한데 메솔드는 가격도 환상적이고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상태로 넘겨주는 것이라며 큰 호의라도 베푼 듯 말한다.

“만사형통이로다.”


(아직도 안 꺼낸) 살림의 탄생 이야기까지는 하고 마쳐야겠다. 1947년 8월 15일 자정, 불행의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이라는 자유의 소식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1,001명의 아이 중 정각에 태어난 살림. 아니,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발생한다.

나에게는 1,001명의 아이 중 마음에 쓰이는 아이가 있다.
허구이길 바랄 만큼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든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시바’라는 아이인데, 희망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했을 이 아이의 난폭함이 오랜 세월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가 독립이 되었어도 갈등과 분열로 인해 운명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닮았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그래봤자 어린아이일 뿐인데, 시대와 나라를 잘 타고났어야 한다는 말밖에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잠재적 위협이 느껴져 불안하게 만드는 이 아이가 2권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먹구름 낀 궁금함만 가득하다.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나 자신을 스스로 끌어 올리려고 이것저것 해보며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뜬금없이 이 얘기를 왜 꺼내냐면, 무너지고 일어서는 반복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느끼기까지의 나의 간절함을 떠올리게 해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생각해 봐야겠어.” (p. 478)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이 있다. 살림이 사나운 기질이 있는 자기 여동생의 호전적인 모습이 ‘사랑’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인데, 삭막한 상황을 사랑이라는 ‘온기’로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절실한 세상이다.

내가 저자의 책에 손길이 가는 이유는 그의 지적인 유머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도 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끌어내고 또 끌어내며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확실하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고, 사람이 매번 진지하게만 살아가는 것도 살짝 고리타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삶이라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가끔 진지하게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만드는 점은 분명 나를 자극하고 손길을 가게 만든다.

아직 2권이 남은 상태라 개인적인 감상을 더 추가하다 보면 여태 스포일러를 샤샤삭 피해가며 적은 나의 노력의 땀방울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이쯤에서 1권의 이야기는 무 자르듯 잘라야겠다. 2권에서는 살림의 몸이 왜 지금 서른한 살을 앞두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두려움을 떨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 고달프다.

후덥지근한 더위에 땀이 비처럼 쏟아지듯 답답한 밤의 끈적임은 사람들의 갈망만큼이나 끈적했고, 살림이 들려준 가정사와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혼란으로 머릿골은 지끈거렸다. 환상과 현실의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온갖 언어로 존재를 알리는 소리, 동류가 동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들려줄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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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9-1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 게 하도 오래 전이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같네요. 곰돌이님 글도 잘 쓰시지. ㅋㅋㅋ

곰돌이 2025-09-14 06:36   좋아요 1 | URL
1권 재미나게 잘 읽고 2권으로 갑니다.ㅎㅎ Falstaff님 칭찬 요정님이에요!!
 

<한밤의 아이들 1> 중에서...

저마다 자기 영역을 가진 신성한 소들이 흙먼지 자욱한 길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순찰하면서 배설물을 증거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떼! 즐거운 듯 붕붕거리는 공공의 적 제1호가 마치 꽃가루를 옮기는 꿀벌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 똥에서 저 똥으로 날아다니며 아낌없이 퍼붓는 이 선물에 내려앉아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 P75

내 말은 다만 내 몸이 낡아빠진 항아리처럼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러나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역사에 너무 많이 두들겨 맞고 아래위로 배수(水) 작업에 시달리고 문짝에 찍혀 훼손되고 타구(具)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가엾은 몸뚱이가 마침내 조각조각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 P86

"맙소사, 해가 왜 저쪽에 있지? 해가 엉뚱한 쪽에서 떠올랐네!" - P144

그들은 위로위로위로 기어올라 폐허의 가장 높은곳에서 자기들의 영토를 감시하다가 성 전체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일에 몰두한다. 파드마, 이 말은 사실이다: 그대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고, 해질녘 그곳에서 끙끙거리며 돌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흔들고 당기고 또 흔들고 당기고 하면서 한 번에 하나씩 돌을 뽑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털북숭이들을 지켜본 적도 없지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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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포터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7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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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 구젤 야히나의 <나의 아이들>에 이어 두 번째로 읽게 된 작품인 이 소설은,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대조적인 감정선이 툭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줘서 서서히 스며들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기억, 말하자면 역사, 덧없는 회상, 일어났던 모든 일을 모은 미덥지 않은 집합체는 그들을 방치해두지 않았다. (p. 30)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말이 전부인 ‘일레인 신시아 포터’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지금 앤티가 세인트존스시의 묘지에 서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 ‘로더릭 포터’ 씨의 무덤을 찾고 있다. 어떤 결심이 들었기에 그녀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게 된 것일까?

일단, 포터 씨의 삶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서인도 제도의 앤티가섬에서 태어난 그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이 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무역이라는 잔혹한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흑인 노예 후손이며,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 역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고, 그럴 줄 아는 아이를 하나도 만들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아버지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며, 읽고 쓸 줄 알고 심지어 그런 일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존재인 ‘나’는 그들이 살았던 세상, 그들이 존재했던 세상 속에서 그들이 남기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간다.

앤티가섬이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일단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뻥 뚫리는 해변과 미세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하늘은 보기만 해도 여유롭게 쉴 수 있을 만한 곳 같아 보인다. 그렇다. 나는 지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앤티가섬의 절경을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포터 씨는 자연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른다. 고단한 일상에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다.

앤티가섬에서 택시 운전사로 살았던 포터 씨의 일과는 어떤 모습일까.

1922년 1월 7일 세인트폴구의 잉글리시하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아버지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그는, 승객을 태우고 짐을 내려주며 명령과도 같은 말을 듣는 내내 벗은 모자를 손에 쥐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위안이 되는 바닥만 내려다본다. 그리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영겁의 세월이 깃든 껍데기 같은 양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저마다의 역사와 고통을 안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 자신의 고용주 ‘슐’ 씨에게 그의 차를 고스란히 그의 집에 갖다 놓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난다.

어느 날, 포터 씨는 택시 승객으로 ‘바이쳉거’ 박사를 만나게 된다. 고향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소용돌이치는 일들을 겪다가 앤티가섬에 오게 된 그가 본 세상은 폭력이 만연했고 혼란 그 자체였다. 이제는 과거의 기억이 기적처럼 여겨지고, 전쟁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전 끝없이 따뜻했던 햇빛을 그리워하며 “사무엘”이라 자신을 불러주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였던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바이쳉거 박사에게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깊은 한숨이 느껴진다. 반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포터 씨에게는 그저 맥없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포터 씨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 ‘너새니얼 포터’의 삶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한 적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스물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마저도 아는 것은 열한 명뿐이라고 한다. 자신이 어떤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듯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포터 씨의 아버지.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궁금해하지 않는 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통발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마릿수 정도가 되겠다. 자기 손과 발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은 그를 이루는 일부였으며 자연이 곧 자신이었다. 매일의 고통과 위험은 숨쉬기처럼 당연했고, 그것이 정상이었던, 고통 그 자체의 삶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의 삶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사랑은 꼭 그의 삶에 들어왔어야 했지만, 사랑은 너새니얼 포터의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앞에도 뒤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세상을 이루는 바로 그 땅 위에 서 있었고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영원히 잃었다. (p. 47)

저자는 다시 우리의 시선을 ‘나’의 아버지 포터 씨에게로 옮긴다. 그는 늦은 밤 짙은 어둠과 이른 아침의 엷어지는 어둠 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며 매일의 위험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낸, 자신의 아버지 그 자체였다.

70년의 생 시초에 70년은 포터 씨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로 여겨졌을 것이며, 생의 끝 무렵에는 그가 살았던 모든 날 이 하루,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루와도 같이 느껴졌다. (p. 63)

대책 없이 자신처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자식을 많이도 낳았다. 고통을 낳듯이 낳은 자식 중 원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고, 사랑이란 건 받은 적이 없어 줄 줄도 몰랐다. 누가 누구를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로 바라볼 필요도 없이 내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경계가 없고 거리가 없이 그저 똑같을 뿐이었다.

차라리 분노든 증오든 좌절이든 같이 감정을 나눌 수 있도록 표출해 주면 읽는 마음이라도 덜 불편할 텐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겉으로 감정을 내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들처럼, 심지어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다. 경외감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해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쩍쩍 갈라지는 나무껍질과도 같은 건조한 모습으로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감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런 이들을 떠올리며 글로써 담담하게 담아내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무연한 마음만 들었다.

왜 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자식을 많이 낳았느냐고, 왜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못 했느냐고 소리쳐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는 모습에서, 허약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운명이 물려받아야 할 업보처럼 인생의 비등점 없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떠받치며 연약한 모습으로만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삶 자체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연민 안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더 이상 원치 않는 고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엄마가 된 ‘나’의 간절함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내 속마음 일 뿐이지만, ‘나’라는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연민으로 들여다 볼 수 있기까지의 시간이 덜 걸렸을 것 같고,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에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이제는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미줄처럼 그어진 줄을 스스로 거둬내 가슴 속에만 쌓고 지냈던 그 응어리를 세상 밖으로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나’ 자신이 가진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고통까지 전부 토해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요? 내게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당신의 관심을 원할 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을 수 있죠? (p. 169)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어, “내가 태어난 것은……”으로 시작하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는 포터 씨와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갔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세상 모든 포터를 위해 ‘나’는 과거를 끌어올려 글로써 적어 내려갔다. 분명, 그녀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글 속에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 하며 자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또 다른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한 위로의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이 소설 내용 중에서, 포터 씨 탄생의 순간부터 그의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가 바닷가에서 맞이한 죽음을 담은 64쪽부터 84쪽까지의 이야기도 절대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태어난 것이 죄가 되고, 고통으로부터 마침표를 찍는 것이 죽음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의 애석함이 너무 슬프고 먹먹해서 나의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게 만들었다.

원망과 서글픔이 없을 수가 없는 ‘나’의 마음을 조심스레 헤아려보자면, 이 소설이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햇빛과 낮과 밤, 이 모든 것의 일부로서만이 아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 끝에 존재했던 포터 씨, 로더릭 포터로서의 인생을 끌어내 준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은 결코 한 적이 없었던,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던 황량한 삶을 살아간 사람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말이다.

포터 씨 자신은 아무 말도,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함은 얼마나 슬프며 애초부터 목소리를 갖지도 못했던 것은 얼마나 더 슬픈가.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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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7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관심가던 작가였는데 읽어야 될 작가로 바뀌네요.

곰돌이 2025-09-07 15:33   좋아요 1 | URL
나중에라도 읽게 되시면 리뷰 올려주실 거죠? ㅎㅎ 바람돌이님의 섬세함으로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