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에 아빠랑 처음 등산을 갔던 기억이 난다.
날은 덥고 올라가도 끝이 없는데 마실 물마저 똑 떨어진 거다.
칭얼거리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느냐고 우거지상을 하고 물으니까,

“예전에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 지금 너처럼 목이 말라 힘들어하는 군사들을 향해 말했어. 저 너머에는 살구나무가 있다고. 그랬더니 군사들이 군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산을 넘었다고 해. 결국, 그 힘으로 전쟁에서도 잘 싸울 수 있었던 거야.”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나폴레옹이고 할애비고 지금 더워는 죽겠고, 목은 마르고, 끝은 보이지가 않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에 심지어 웃고 있는 아빠 얼굴까지 모든 걸 다 갖춘 날이었다.

된비알을 지나 정상에 올라 두 팔 번쩍 올려본다.
가슴 속까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을 보면 아직도 그때 생각에 잔웃음이 나온다.
하산길에 얻어먹은 오이는 귤처럼 달았다.
그 기억에 오이와 귤 몇 개 정도는 더 챙겨 나눌 줄 알게 된 것 같다.


위화의 <인생>을 펼쳤다.
한국어판 서문이 인상적이다.

(P.8) 사람과 그의 운명은 서로 상대방을 포기할 방법이 없고, 서로 원망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은 흙먼지 풀풀날리는 길을 함께 가고, 죽을 때는 빗물과 진흙 속으로 함께 녹아든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P. 9)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것까지도 이야기한다. 독자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푸구이’라는 이름의 한 노인이 자기가 살아온 인생길을 들려준다.
지금은 남루한 모습의 자신을 쏙 빼닮은 늙은 소 한 마리 이끌고 밭을 매고 있지만, 옛날에는 소유하고 있는 땅이 백 묘가 넘었던 쉬씨 집안의 도련님이었다. 아버지와 둘이 길을 갈 때면 신발 소리가 동전이 쩔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을 거란다.

노인과 소의 대화(?)만으로도 어쩜 이렇게 웃긴지.
콧방귀를 뀌게 하고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웃을 때가 좋았다.
푸구이가 개망나니였던 시절 이야기는 욕도 아깝구나 싶었는데 이내 곧 그와 가족들의 삶이 마음을 찌릿찌릿 아프게 했다.

백 묘가 넘었던 땅을 도박 빚으로 고스란히 내어줬다.
네 살이었던 딸과 부인 뱃속에 둘째까지 자라고 있어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 다섯 묘를 빌려 받는다.

고단하지만, 이제야 진짜 삶을 살아가게 된 게 아닐까?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나의 모자란 행동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나로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실로 무서운 현실을 마주하며 얻은 교훈으로 손톱에 낀 진흙이 깊게 박힐수록 가족을 향한 책임감 또한 깊어졌을 테니 말이다.

알 수 없는 인생,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고난도 이겨내 보면서.

(P. 70) 나는 우리 쉬씨 집안도 처음에는 병아리에 불과했으니 내가 이렇게 일을 하면 몇 년 안에 병아리가 거위가 될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되면 언젠가 다시 일어설 날이 있을 거라고.


온 천지 국민당군이 총검을 들고 코앞에서는 총알이 날아가고 무덤에서 꺼낸 관을 땔감으로 쓰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의 일환이었던 농업 집단화로 배정받은 밭일을 해 가며 머리가 허옇게 세는지도 모르고 지낸 세월 속에서 너무 어린 나이에 철이 든 자식을 바라보며 기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을 시절까지, 푸구이의 입에서 샘물처럼 흐르는 말들은 신세타령 같아 보이지만 실은 사람의 도리를 일러주고 있었다.
후회하는 만큼 정말 쉼 없이 흘러나왔다.

(P. 210)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저번에 읽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지난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나는 밥 먹는 속도도 어찌나 느린지, 아까부터 먹던 밥을 여태 먹고 있느냐는 소리를 꽤 듣고 자랐다. 사실, 부지런히 먹으려고 마음먹고 있다가도 아빠가 한 소리를 하고 나면 일부러 더 소 여물 먹듯이 했다.
엄마는 원래 천천히 먹는 게 좋은 거라고 해줬다. 천사다.

“너는 전생에 소였을 거야. 그래서 나를 부를때도 엄마라고 안 부르고 음메~ 음메~ 하고 부르잖아.”

욕인지 아닌지 뭔가 찜찜한 엄마의 말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게으름만 뚝뚝 떨었던 그때를 떠올려보니, 무지몽매했던 내가 어느새 다 커서 사람의 형태를 하고는 부모님께 착착 부닐면서 지내는 막냉이로 자란 게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몇 해 전, 인생 처음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었을 때 나는 다른 것보다도 엄마가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그런 내게 직장 상사가 진심을 담아 한마디 해 주셨다.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에 견뎌내실 거다.”

그랬다.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에 견뎌냈다.

푸구이의 아내 ‘자전’도 마찬가지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안 했을 그녀가, 조상이 물려준 재산 하나 지키지 못하고 제 손으로 날려 먹고 망아지 날뛰듯 했던 푸구이와 삼순구식 하는 형편에 늘 사로잠을 자면서도, 앓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중심을 잡고 길을 닦아 나갔다.
곰처럼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말이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 딸 ‘펑샤’와 아들 ‘유칭’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자전이 있었기에, 지금의 푸구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더는 생에 미련은 없고 쇠심줄같이 질긴 자신의 목숨을 원망해보지만, 인명은 재천이라 하니 눈 떠지면 늙은 소 데리고 뙤약볕 내리쬐는 밭으로 나가 일하다, 쉬다, 일하다, 쉬다를 반복하며 삶을 ‘다시’ 따라가는 푸구이의 신세가 가련하다. 그러니 젊은 시절의 잘못을 탓하지만도 못하겠다.

내 손등, 내 뺨의 흉터와 통증 따위에는 무뎌지고, 과거의 고달픈 기억쯤이야 한 걸음 물러나 관망하며 볼 수 있을 정도가 돼 버린 푸구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일상을 보내다가도 피식하고 웃게 하는 재미도 담겼고, 어쩌면 삶에서 가장 익숙한 것이 ‘버티는 것’이었을지 모를 그의 애달픈 상황에 착잡도 했지만, 다 읽고 나니 묘하게 마음의 정화를 일으켰다.

그렇기에 시간이 쌓이고 쌓여도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위화의 글이, 귀를 기울이는 모든 이들을 향해 흐르는가 보다.

더운 여름의 어느 날,
누군가의 희로애락이 담긴 인생 이야기를 묵독하며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쉬엄쉬엄 읽으니, 얼음 한 덩이 띄운 찻물로 데워진 몸을 식혀주는 기분이다.

위화의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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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7-31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리 주연의 영화도 수작입니다.

곰돌이 2025-08-01 05:38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는 푸구이가 그림자 연극을 하네요? 평샤와 유칭이 나오는 장면은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잉크냄새님 덕분에 볼 영화가 하나 더 늘었으니 주말에 고스란히 여운을 이어나가 볼게요. :)

2025-08-03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8-0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