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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인간 - 개정증보판
박정민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9월
평점 :
저자가 몇년간에 걸쳐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다듬어 낸 책이었다. 역시나 글솜씨가 부럽다. 최근 장기하씨도 그러고 박정민씨의 산문집까지 읽고나니 책 제목마냥 내가 언제 가장 쓸만한 인간이었음을 느꼈을까 생각해보며 비슷한 글 한꼭지를 써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게 한두번이 아니었던지라 이번엔 나도 하나 써봐야겠다고 결심! 그런데 마땅한게 없다. 주제와 플롯이 중요하다는데 깊게 생각할 여력도 능력도 없고 일단 만만한게 누구나 그렇듯 재미없는 군대이야기라 이 때의 기억을 반추해보며 끄적여보는 걸로 갈음해볼까 한다. 사실은 주제선택에 있어 마침 보았던 방송프로그램에서의 이장면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군입대를 신경도 안쓰고 펑펑 놀다가 뒤늦게 카투사를 알게 되었으나 영어 점수가 터무니 없이, 하지만 너무 솔직하게 나와서 포기, 해군이나 공군은 생각도 안하고 있다가 나온 입대 영장에는 10월 4일 306보충대로 올라고 쓰여있었다. (인구가 줄어서 인지 현재는 없어졌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각종 특기병들로 많이 차출된다던데 306 보충대는 나처럼 특별한 기술이 있는것도, 체격도 보통인 사람들이 근처 사단으로 배치받아 일반 보병으로 대부분 배치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군복을 포함해 각종 보급품을 지급받고 며칠간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배치받은 곳은 경기도 어딘가 위치한 모사단 신병교육대.
남들과 더불어 그곳에서 6주간 기초훈련을 마칠무렵 갑자기 잠들기전 조교의 호출로인해 사무실로 불려가 뜬금없는 면접을 보게 되었고, 결과를 듣지 못하고 있다가 훈련소 마지막날 교육을 마치고 같이 훈련받은 동기들 모두가 경기도 및 강원도 곳곳에 흩어진 예하부대로 흩어질 즈음 나는 마지막까지 내무실에 남아있었다. 그렇다, 설마 나를 조교로?는 물론 아니었고 정훈병으로 차출된 것이었다. 당시는 정훈병이 뭔지도 몰랐는데 정치 훈육병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라는 설명을 면접관이셨던 정훈장교분께 듣고 살짝 설레었던 느낌이 기억난다. 어쨌건 '착하게 생겼다고' 뽑힌 나는 이후 남들이 들으면 편한 일들'만' 도맡아 하게 되는데...
내 임무는 매일 아침 남들보다 15분 먼저 일어나 기상나팔 방송을 틀고, 국방일보를 가지러 본부대를 다녀오고, 칼럼을 스크랩하고 휴가복귀자들이 반입하는 도서를 검열하고 '검토필' 도장을 찍어주는 일이었는데 정기적으로 보급되던 군중문고를 가장 먼저 받아 읽어볼 수 있었던게 가장 큰 보람이기도 했다. 당시 사상서도 금서였던 지라 누군가로부터 압수했던 체게바라 평전을 정훈실 귀퉁이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읽어봤는데 오히려 내가 이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까지 챙겨볼 정도로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종종 행정병 업무도 병행하며 무난한 군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날 당시 막 보급되고 있었던 군정보화 사업에 힘입어 만들어진 부대내 PC실을 컴퓨터 좀 만진다는 이유로 인터넷 조교라는 새로운 보직을 맡게 되며 관리하게 된다. 병장들만을 대상으로 운영하면서 전역전까지 인터넷 정보검색사 자격증을 손에 쥐어주는 것을 목표로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당시는 사이버방이라는 용어가 없었고 나는 인터넷 조교로서의 자격을 위해 순식간에 정보검색사 2급과 1급 자격증을 땄다. 물론 온라인 시험으로만 주어지는 민간자격증이었고 지금은 온국민의 사이버 전사화로 인해 완전히 사장되었다.)
지금은 군인들이 이메일도 주고 받고 휴대폰 반입도 되는것 같지만 당시는 MP3 반입도 PC방에서도 웹서핑만 가능하고 보안떄문에 로그인도 원칙적으로 절대 허락되지 않았던시기다.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당연히 부대내에서 인터넷을 할수 있다는게 흔치 않은 일이었던 데다가 병장만 출입이 가능했기에 이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나는 소위 몰래 로그인좀 시켜달라는 외압아닌 외압을 받기도 했으며 정보검색사 시험을 대신 봐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덕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정훈병으로서의 주중 일과가 끝나면 잠겨있던 PC방을 열고 각 중대 병장들의 비호아래(?) 각종 일과에서 제외되기도 했으니 소위 꿀보직으로 인식되어 시기아닌 시기를 받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몇개월 후에는 '착하게 생긴' 너가 적격이라며 기독교 군종병을 추가로 하게 되어 일요일만 되면 부대내 신자들을 데리고 매주 교회를 가서 반나절을 보내고 와야했다. 서울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였는지, 훈련병들과 함께였기에 나눠주고 남는 초코파이는 원없이 먹어볼 수 있었고 근처 교회에서 위문공연이나 협찬이 오는 경우도 많아 자주 햄버거도 먹을 수 있어 행복했었다.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PC방 오픈해달라는 요구에(주말에는 종일 개방이었다.) 주중은 물론 주말까지 내무생활을 거의 못해 축구한번 해본적이 없었긴 했지만.
아무튼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반년정도나 지났을까 어느덧 나도 루틴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나는 불현듯 매일밤 10시에 틀어주는 취침나팔 소리 이후 인기가요를 한곡씩 틀어주면 어떨까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가 관리하던 PC방에서 당시 인기를 모으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OO뮤직으로 음악을 재생하며 내가 관리하던 더블데크 카셋트에 녹음을 해놓으면 취침나팔 소리에 이어 틀어주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사전승인을 받았는지 사후승인을 받았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일단 저질러놓고 정훈장교의 허락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행하는데 희열을 느끼는 타입이랄까. 다행히도 특별히 문제될만한 일이 아니었고 몇몇 분들에게는 칭찬도 받았던것 같은데 초반에는 내 취향의 유행곡 중심으로만 틀다가 나중에는 알음알음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기도 했다.
특이했던건 당시 신병교육대에서는 매일밤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경계근무를 설때 훈련병들을 두명씩 데리고 나가며 경계근무 요령을 알려주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군생활 하신 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같이 나가는 선후임과는 싫든 좋은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나는 나랑 같이 나갔던 훈련병들과 90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당연히 훈련병들은 대부분 얼어있고 내가 질문을 던지는 쪽이었다.) 마치 라디오 인터뷰 후에 신청곡을 틀어주는 것 마냥 좋아하는 노래를 알려주면 내일 밤에 들려주겠다며 훈훈한 마무리를 하곤 했으니 나름 사고없는 군생활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은 주제넘는 생각도 든다.
신청곡이 없던 어느날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10시에 여느때와 같이 취침나팔 방송을 하고 나서 가요 한곡을 재생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있어 일직사관실로 불려가는 일이 생겼다. 들어가자마자 지금 노래 뭐냐고 버럭, 당장 끄라고 버럭. 하긴 재생버튼을 누르고 끝날때까지 방송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조금 떨리긴 했다. 그 노래는 재생시간도 당시 가요로서는 물론 지금도 꽤나 긴 12분짜리 노래였는데 패닉과 삐삐밴드가 함께부른 노래의 제목은 무려 '불면증'이었다. 무려 12분이나 되는 긴 시간인건 차치하고서라도 노래 후반부는 안그래도 싱숭생숭할 훈련병들의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 가능성이 다분했기에 당시 왜 그랬는지 나도 이해못할 일이긴 했다.(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들어보시라.) 이 이후로 하마트면 DJ 생활을 청산할 뻔 했으나 장점이 더 많았던지라 다행히 잘 넘어가긴 했고 내겐 하루를 마감하는 나름의 힐링시간이었으며 간혹 훈련병들의 감사인사를 받으면 더욱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그 이후에도 나름 책임감있게 군생활은 성실히 했는지 당시 부산아시안게임 당시에는 자원봉사자로 선발되어 중동의 모나라 선수단 서포터로서 활동할 기회까지 얻게 되어 부산에 몇개월간 파견을 나가있기도 했는데 당시 몇명 받지 못했던 봉사단 표창장도 받았고(이때도 나름 재밌는 일이 많았는데 글이 너무 길어졌다.), 제대할때는 행정보급관님께 수고했다며, 밥이라도 사먹으라며 소정의 금일봉도 받기도 했으니 (당시에는 얼떨떨하게 받았는데 아르바이트비는 통장으로 받았었고 괴외비 말고 처음 받아보는 봉투라 감동이었다는.) 군생활 동안 '착하게 봐주셨던' 분들의 기대에 나름의 방식으로 부응한,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적어도 '쓸 만한 인간'이었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