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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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한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말일까, 사랑한다는 말일까, 잊겠다는 말일까. 이해, 사랑, 망각이라는 세단어가 이 책의 각 파트에서 다루고 있는 관점이다. 독일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용서에 대한 감정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고 본문에서는 범죄 상황 및 아우슈비츠 유대인 말살사건을 다루며 용서라는게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은 각자가 다르겠으나 원망과 용서파트를 보면서는 전에봤던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라는 소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화된 전도연 주연의 밀양이 떠올랐다. 아들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종교의 힘입어 사랑으로 어렵게 용서하려 했으나 이미 자신은 신에게 용서받았다는 말에 충격받아 미쳐버리는 스토리 속에서 용서라는게 죄사함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이고 누가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해와 용서와의 관계도 나오는데 화해이후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은 용서해도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라는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죄에 따른 형벌을 치루는 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지만 용서를 받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문장이다. 죄사함의 영역은 사적구제를 금지하고 있기에 국가의 영역이지만 용서는 당사자만이 할수 있기 때문이다. 죄값을 치룬다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응당한 처벌을 받는다, 행위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다는 뜻이니 하다못해 형사상 벌금형을 받았거나 민사상 배상금을 지불했더라도 용서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당사자에게 따로 용서를 받는 것을 강제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원하지 않을테니(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 드문경우가 발생했을때 저 위의 문장이 회자되게 되는 듯하다. 그러니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마지막 챕터에서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는데(정확히 써야 할것 같아 찾아보니 이 두단어를 구분해서 쓰는것이 맞는듯) 일본의 만행을 용서하는 것은 정부를 포함한 제3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과거의 무능한 정부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와의 인터뷰는 읽는 것 만으로도 먹먹해졌다. 조두순의 출소를 앞두고 시끄러운 가운데 자크 데리다, 한나 아렌트, 니체 등의 인용문들과 더불어 용서라는,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던 단어 하나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책이었다.


주제랑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눈에 띄는 문장 몇개를 옮겨보자면


- 조건이 최적이고 장애물이 없을 때만 자신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절대 우리는 자율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하엘 파우엔


- 물건 그 자체가 영혼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에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자기자신의 일부를 준다는 의미가 된다. - 마르셀 모스


- 용서는 망각의 기술이다. - 토마스 마호

> 그러고보면 만약 용서를 하기 위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택할까. 정신이 무너지는걸 막아 이성을 지키게만들고 복수의 충동을 막아주긴할 듯.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 용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용서를 하기위해 기억을 지웠으니 용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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