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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 갈망, 관찰, 거주의 글쓰기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3년 2월
평점 :

나는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
글쓰기에 관한 책이란 오해를 했다는게 가장 크겠다.
이 책은 절대 글쓰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내가 어려워하는 영역의 책이었다. 수전 손택의 책을 그렇게 그렇게나 힘들게 읽어놓고 난 왜 이 책을 선택했던걸까?
그렇다. 이책은 에세이인척하는 철학책이다. 고백하자면 난 철학책이 안 맞다. 철학적 사유가 안되는 사람이다. T.T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그와 같은 종의 고래는 단 한 마리뿐일 수도 있다.
52헤르츠 주파수의 울음소리를 내는 고래, 단 한마리뿐인 것으로 추정되는 고래 이 글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냉전이 끝나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수중음향장치 추적 시스템이 '살아 숨 쉬는 동물을 추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9.11이후 연구비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전 생각했어요. 여기 그가 있어. 말을 하고 있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어. 노래하고 있어. 이해하는 사람은 없지만, 듣는 사람이 있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그도 알 거야. 반드시 느낄 거야.
에세이는 사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짚어내는 작가의 능력에 따라 읽는 이에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52헤르츠 주파수의 울음소리는 내는 고래가 더 이상 그 주파수를 내지 못하고, 연구도 더 할 수 없고, 존재의 유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한가지 사실에 엮인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모아서 써 내려가는 것. 그것이 에세이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 같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외로운지, 무엇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느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부재의 이야기들은 실재하는 현실만큼이나 충만하게 우리를 정의한다.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 그 전생을 찾아 나선 아이와 부모, 전생을 정리하고 이생을 살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어려운 삶의 방향. 내가 만일 전생을 기억한다면...유난히 버라이어티한 꿈을 매일매일 꾸는 나는 가끔 내가 메타버스같이 다른 차원의 나이거나 전생의 삶을 사는건 아닐까? 생각해본적이 있다. 하지만 늘 단편적이고, 알다시피 꿈의 유효기간은 보통 일어나서 잠깐인 경우가 많으므로 일상을 사는 동안은 잊게 된다. 하지만 계속 그 전생이 기억나고 내 삶의 한 조각이 되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것이기 이전에 타인의 것이었음을 시하함으로써 고유한 자아를 교환 가능한 존재로 대체하면서도, 극히 평범한 일들에 평범하지 않은 설명을 덧씌운다. 이런 이야기는 일상의 경험을 이채로운 실존적 현상의 징후로 둔갑시킨다.
환생은 그저 상상속의 일로 느껴진다. 하지만..어느 누군가 죽을병에 걸렸거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되기도 한다. "네 이야기 덕분에 죽는 게 겁나지 않아"라고 하듯이.
-우리는 빛을 향해 걷는다. 우리는 안전하다. 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살아간다. 더는 살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돌아온다. 더는 돌아올 수 없을 때까지.
일상이라는 삶의 이름에, 죽음뒤까지 이어지는 연속성을 부여하게 되는 환생.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므로 이 역시 믿기 힘들지만, 사실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환생을 위해 현생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지금에 충실할 때 환생의 어느 시점에서 고리를 끊을 수도 있고. 그 생애서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는 글을 전혀 쓰지 않을 작정이었음에도 결국 40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다. 그는 노동을 해본 적 없지만, 자신이 노동을 좋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에이지는 언어의 실패와 그 필연적인 왜곡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사진을 언급하면서 사진이란 "절대적이고 건조한 진실 외에는 그 무엇도 기록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사진 역시 허상에 불과하다. 모든 사진은 프레임 짜기와 선택으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에이지의 유산은 허무감의 숭고한 표현 이상이다. 그가 남긴 유산은 저널리즘에 대한 회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의 유산은 회의를 다룰 언어를 찾아 그 언어로 저널리즘을 다시 쓰는 것, 자기 심문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진정성을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어려워서 글을 읽는데 이해가 안되는 사실에 좌절했다. 이렇게 이해가 안 될 수가.하며 말이다.
작가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자료를 모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분석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태기도 하면서 글을 써내려갔다.
작가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자료를 모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분석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태기도 하면서 글을 써내려갔다. 단편적 사고 이상의 무언가를 논리적인 비약없이 써 내려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지라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내 것에 감탄해마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읽는 책들과 결이 다른 것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