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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평점 :

꼭 읽어야겠다 맘먹었던 책이다. 문화의 충돌, 난민과 국민 사이의 문제가 어떻게 존재했고, 해결되었는지 궁금해서이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몽족은 고구마 백개쯤 먹은 기분의 답답함을 보일 것이다. 나의 사고도 완전히 서구화되어 있는지 읽는 동안 몽족이 답답했다.
처음 이슬람난민들이 우리 동네에 왔을 때 마찰을 기억한다. 정부에서는 뭐가 두려웠는지 주민공청회나 알림 과정없이 도둑 이주를 시켰다. 금요일 저녁 일간신문 일면에 잠깐 기재된 보도, 월요일 아침 이사. 그런 수순으로... 옆에 버젓히 있는 국제학교를 두고 공립학교로 모든 학생을 강제 전학을 시켰다. 과정과 절차는 반감을 사기 충분했고, 자국민이 더 차별받는 상대적 박탈감에 힘들었다. 그러지만 나라, 공권력이 요구하는 것을 막을 힘이 국민에게는 없다는 것을 실감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이슬람난민들과 지내고 있다. 이후 부정적 내 경험은 한창 마스크를 쓰도록 되어 있던 시점에 마스크없이 아이들 놀이터에 자주 등장하고, 마스크를 안 쓴 이슬람난민 남성이 놀이터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거나, 지인이 본 성당에 주차된 차에서 돈을 훔치려고 문을 열고 다니고, 성당 마당 쉼터에 둔 가방을 뒤지는 이슬람 아이를 만난 걸 들었다. 지인이 신고했을때 경찰에서는 훔침을 당한 당사자가 아니고, 신고시점이 늦어 뭔가를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헤코지를 당하거나, 일이 생겨야만 뭔가를 해줄수 있다는 사후뒷방망이 식의 절차를 들으면서 힘이 빠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아직까지도 한국말이 서툴고, 나이로 바로 해당 학년으로 투입되었지만 아이들이 학습을 따라가기에는 버거움이 크다는 걸 전해 듣고만 있다. 한 아이가 교실을 뛰쳐나가고, 수업이 따라오기 힘든 상황이라 그 반의 다른 아이들이 찾으러 나가고 수업을 못듣기도(그 아이를 찾으러 담임선생님이 부재하셔서) 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여자아이들은 여전히 히잡을 쓰고 다니고, 길에서 지나치다 마주친는 남학생들의 나를 훑는 듯한 시선의 불편함도 생각난다. 이런 불편함을 막는 방법으로 나는 그냥 마주침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이런 생각들이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떠올라서 불편했다. 특히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된 가장 큰 이유, 내가 느꼈던 답답함을 '리아의 나라'를 읽으면서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몽족은 왜 다른 나라에 살러 왔으면서 자신의 삶의 방법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멤돈다.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만 하려고는 것도 오만인게 아닌가? 문화적 충돌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관습을 무조건적으로 고수하려고 해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문제이다. 아이의 발달을 정상으로 하도록 할지 말지의 문제였는데, 약을 제대로 먹이지 않았기때문에 결국 리아는 정상발달에서 지연되고 말았다는 의사의 의견을 보면서 정말 답답했다. 리아의 부모는 진심으로 리아를 사랑했지만, 이런 부모의 태도로 결국 처음 발달검사를 했을 시점은 정상이었지만 점점 더 발달지연되게 만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자기네 신념과 원칙에 산모와 태아의 생활양식을 맞추려는 사람들과의 문제에요. 우리가 보기에 꼭 필요한 게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인 경우 말입니다.
로저 파이프는 신념이나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 몽족이 중시하는 철학을 거스르지 않은 것뿐이었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이말만은 하는 게 좋겠어요. 저는 몽족이 서양 의학의 어떤 부분은 자기네 것보다 낫고 또 아이 목숨이 걸린 이상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프레즈노 촌사람들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인 우스개를 만들어내지요. 스타니슬라오에선 그 대상이 포르투갈 사람들이고 여기선 몽족이에요.... 중략....이들 민족은 제각가 맞춤식 외국인 혐오증을 한바탕 불러일으켰다. '멍청한 몽족 이야기'는 가장 최근의 유행일 뿐이었다.
과수 농장을 사려던 방 파오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난민들이 몰려들지도 모른다는 군민들의 불안을 군 감사위원회가 발아들인 것도 있고...중략...난민이 제한된 복지 서비스를 바닥내다, 난민 학생들로 학교 과밀, 주정부 빈약한 난민 예산 지원에 감사위원회 분개, 난민 지원에 더 많은 예산 필요....중략...몽족이 오기 전까지는 그나만 견딜만했다. 몽족이 몰려든 것은 마침 전국적인 경기 후퇴와 더불어 연방정부 및 주정부의 복지 예산 삭감과 시기적으로 겹쳤다. 현재 머세드군의 몽족 가운데 79퍼센트가 생활보호대상자로, 군 내 다른 주민들의 경우 18퍼센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의사 로버트 스몰과 나누었던 대활르 떠올렸다. " 저와 제 친구들은 몽족이 여기로 몰려들기 시작할 때 몹시 화가 났어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요. 우리 정부는 아무 조언도 동의 도 구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을 떠맡겨 버렸어요. 왜 우리가 그들을 특별 대우해줘야 합니까? 제가 아는 젊은 아일랜드인 친구는 미국에 와서 교육받고 일하고 싶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몽족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들어 그냥 정착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들은 생활보호대상자라는 게 부끄러운 일인 줄도 몰라요. 여기 와서 그냥 행복한 거지요."
제가 보기에 몽족에 대한 머세드 주민들의 반응은 인종주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배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파도에 대한 불안감 문제인 것 같아요.
이곳의 몽족은 자신들이 미국에 맞서 싸운 게 아니라 미국을 '위해'싸웠다고 설명하느라 거듭거듭 애를 먹는다.
1994년 프레즈노에서는 몽족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시위를 벌였다.그들 중 다수는 전직 군인으로, 매주 공공 근로를 열여섯 시간씩 해야 한다는 새로운 규정에 대해 '노예 노종'이라면 반발한 것이었다. 아직도 '약속(CIA가 해주기로 한 보상)'을 믿는 나이 많은 몽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조건 없는 원조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복무에 대해 미국인들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국인들은 돈을 받는 그들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로 상대가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두 사람 다 미국인들이 일하지 않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이슬람난민들은 첫번째 처와 아이들만 데리고 왔다고 하며 다른 처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얘기가 있다. 현재 와 있는 가족들 중 아이들 수가 상당하다. 보통 한집에 아이들이 4명은 되는 듯한데 더 데려오다니....이들에게는 집이 주어졌고 매달 정착비가 몇 백씩 나온다고 한다. 그 돈은 어디서 오는걸까? 내가 낸 세금이다. 나는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세금도 낸다. 그러나 정부에서 더 받는게 있는가? 글쎄다. 나는 이 모든 머세드 군민들의 우려나 생각을 대부분 공감한다. 난민들이 정착하는 지역에 문제들은 비슷비슷하고, 그것을 그 지역 이기주의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런 심정일 때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니에요. 문화장벽이 견고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되, 제가 원하는 바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경우엔 완전한 성공보다는 작은 성공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걸 리아에게 배웠죠. 그게 아주 힘든 일인데 그래도 노력해야죠.리아는 저를 덜 고지식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지지요. 우리가 미국이 아니라 라오스에 계속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랬다면 리아가 절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 의사들은, 그 대단하신 분들은 정말이지 아는 게 많긴 하지만 리아한테 무슨 실수를 했을 거에요. 약을 잘 못 줘서 애를 이 지경으로만든 거죠. 우리가 라오스에 살고 있었다면, 리아를 이렇게 만든 게 '다'라면 우리는 숲에서 약초를 구해 먹였을 거예요. 그러면 리아는 나았을 것이고 하다못해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건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고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었으니 이제 우리 약으로 애를 낫게 할 수가 없어요. 리 부부가 라오스를 떠나지 안았더라면 리아는 계속되는 대발작으로 영아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의학은 리아의 목숨을 지키기도 하고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어느 쪽이 리아의 가족에게 더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항경련제 처방에 대한 리 부부의 불이행, 위탁 가정, 치명적인 신경 장애)설명한 다음, 지난 일이지만 리아의 소아과 의사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첫째, '이행'이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형편없는 표현이에요. 도덕적인 위계를 암시하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장군의 명령이 아니라 대화거든요. 둘째, 강제의 모델을 찾기보다는 중재의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몽족 사회의 일원을 찾거나 의료인류학자를 찾아 중재를 구할 수 있거든요. 단 중재란 이혼 과정 같아서 양측이 다양보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정한 다음에 나머지는 전부 기꺼이 타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이 케이스에선 몽족 환자와 그 가족의 문화가 대단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의학이라는 문화도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문화가 나름의 취미나 정서나 편향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문화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나는 종종 언어평가때 외국인(그나마 말이 통하는 조선족이면 다행, 전혀 한국말을 못해 통역이 와야하는 경우도 있음)에게 질문을 하다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령 이런 문항이 있는데 '잼잼이나 곤지곤지 같은 손놀이를 할 수 있나요?'(정확하지 않지만 이런 내용임) 이건 우리 문화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거치는 의사소통 양식 중 하나인데 이게 외국인에게도 항상 적용된다고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분명 비슷한 것도 있지만 전혀 다른 기저를 가질때도 있고, 자신이 속한 문화만의 고유한 특징은 의사소통에 반드시 포함될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생과사를 오가는 긴급한 의료행위가 아니니 이런 생각에서 머무는 것이겠지만, 살아있음, 생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의료행위와 혼을 우선으로 여기는 두 문화의 충돌에서 간극이 줄어들 수 있는게 과연 있을까 싶다.
이제 하늘로 통하는 문은 치 넹 말고는 열 수가 없다...중략...리아의 치유 의식을 거행하기로 한 치 넹은 자신의 무구인 칼과 징과 딸랑이와 방울을 가져왔다. 날 수 있는 말도 가져왔다.
리아의 부모가 누구보다 리아를 사랑하고 잘 보살폈다는 것을 알겠다. 하지만 폐혈증때문에 결국 더 큰 신경발작이 일어났고, 결국엔 더 지연된 발달을 경험했다는 것을 의학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는가는 모르겠다. 식물인간 상태로 통상적인 삶의 시간 (6개월가량 이나 사망하거나 대게 5년 안에 사망하지만... 리아는 그들보다 5배 이상 더 긴 시간만큼 리아를 집에서 보살펴왔고, 15주년 기념판이 나오는 시점까지도 살아 있다고 한다. 치 넹의 굿을 하는 건 리아의 회복이 아니라 리아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기를 바래서며,
거기 사람들에게 이런 얘길 했어요. 이 분야에서 일하기 전에는 부모님이 리아 때문에 겪는 모든 좌절이 의사들 잘못인 줄 알았다고요. 집에서 날마다 본 게 부모님이 리아를 낫게 하려고 뭐든 하려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여기서 일하면서부터는 그 누구 탓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리아의 형제자매들은 잘 교육 받고 성실함으로 7남매들이 모두 어엿한 미국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 [리아의 나라]는 1990년대에 쓰인 1980년대에 관한 책이다. 여전히 몽족 미국인들은 여러 본질적인 측면에서 몽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가장 중요한 때인 탄생, 결혼, 사망의 시기에는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전통의식을 행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계미국인, 제일교포, 조선족,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인은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유지하고 또는 적응하며 살고 있을까? 저자가 몽족들에게 가장 흔히 듣는 불만은 미국을 떠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덜 무지하기를 바라며,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다 부상 당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고 한다. 나는 늘 이 부분에서 밸이 꼬인다. 나한테 해준 거였냐고 되묻고 싶기도하고, 그걸 왜 내가 갚아야 하는거냐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왜 방식을 안 바꾸는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하는 말도 이어서 떠오른다. 그들이 100%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삶에 불편한 조각으로 남아있지 않아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결국 리아의 형제자매들도 미국사회에 적응했기 때문에 그들 본성(성실함과 따뜻함)이 더 빛나게 되었고, 우리가 말하는 사회일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내 주변에 살고 있는 난민들이 어떻게 이 사회에 적응할지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문화적 충돌없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될지는 정말 미지수며, 양쪽 모두 희생이 필요할거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나의 방어적인 태도가 일방적인 편견에 기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분명 몇가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불편함들이 경험했으므로) 문화간의 만남은 그만큰 쉬운일이 아니고, 그런 간극을 줄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며, 님비네 하는 말로 해당 지역에 대해서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거기다 데려다 준 국가도 역할을 분명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몽족도 미국에서 그런 문화적 충돌이 아닌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은 오지체험이나 여행지에서 만난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때는 그 어떤 문화보다 따뜻하고 순수하게 보여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당황스러움, 고통, 또는 그 다른 형태의 불편함이 시간이 흘러 그나마 희석된 것이지 모두 완전하게 봉합된건 아니니라. 그걸 지금 경험하고 있는 나는 조금 더 현명하게 서로가 덜 상처입을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지만...참 어려운일이란 걸 다시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