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역사 - 마음과 심장의 문화사
올레 회스타 지음, 안기순 옮김 / 도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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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의 역사라는 제목을 대하며 이 책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마치 어떤 미지의 세계를 여는 것과 같이 새로운 책을 열때면 언제나 그러듯이 말이다. 마음과 심장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지는 않을까. 책 속에서 아마도 어떤 비교문화사다시 말해 각 문화의 심장에 대한 이해를그리고 시간을 거쳐 내려오는 심장에 대한 이미지와 그에 대해 생각을 살펴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자면, 처음에 '하트'라는 말을 보고 하트의 단순화된 이미지를 떠올리리게 된다. 우리가 흔히 트럼프라고 부르는 서양의 카드에 속한 스페이드클럽다이아몬드하트의 모양들 중의 하나로서의 하트 말이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상상. 하트의 모양이 카드에 그려진 하트 모양을 하게 된 이유나 역사, 어쩌면 그런 약간은 가볍다고도 할만한 미시사적 의미에서의 접근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사뭇 기대와는 다르게 이 책에는 그런 도식화된 하트의 이미지에 관한 설명은 없었다물론 전혀 시시콜콜한 미시사와도 관련이 없었다음, 괜한 헛다리를 짚지 않았나약간은 머쓱해지기는 하지만, 여하튼 아직까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간다.

 

사실 약간의 의학 혹은 생물학적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몸 전체가특히 뇌가심장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뇌는 많은 산소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곳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 뇌가 얼마나 많은 양의 혈액 공급을 요구하는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심장 역시 인간의 뇌를, 다른 몸의 부분들을 유지하기에 적정한 양의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뇌로부터 전기 신호를 받아야만 하며, 그런 의미에서라도 뇌와 심장은 생존을 위해서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관계에 있다.

 

현대인에게는 생각과 같이 인간의 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나, 혹은 열정동정심자비사랑과 같은 마음과 관련한 요소들 역시, 인간의 뇌와 결정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현재와 같은 의학 및 생물학의 발전이 없었던 오래 전에 지나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심장이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했다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인간의 육체에서 뇌라는 부분이 매우 썩기 쉬운 부분인 이유로 어떤 상징성을 지니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며, 인간의 중심에 있는 장기들 중에서도 가슴의 한가운데 있는 심장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인간성의 중심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저자의 말대로 머리는 사실일 뿐이지만 심장은 사실인 동시에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현재와 같은 방식의 심장 혹은 마음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해부학적 혹은 생리학적 지식은 서양의 근대와 근세를 지나면서 발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아주 고대에는 또는 중세에는 그리고 다른 문명과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이해했던 것일까?

 

저자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이집트의 미이라 제조법과 신화들에서그리고 히브리인들의 구약성서에서 먼저 고대 근동 사람들의 심장 혹은 마음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이들의 인식에서 심장은 인간의 고귀함과 이성의 근원으로 그려지며, 따라서 마음 혹은 심장은 신에게 바치거나 (메소포타미아), 부활의 날에 일어날 죽은 자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이집트), 그 능력을 다하여 신을 사랑해야 하는 (히브리인들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런 맥락을 고려하면, 그들이 남겼던 심장을 따르라혀의 말과 일치하도록…’심장(마음)의 소리를 들어라마음을 다하여 네 신을 사랑하라와 같은 교훈적 문구는 바로 그러한 인식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심장 인식은 근동의 이해와는 달랐다이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성에서 분리하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첫걸음을 떼었다디오니소스의 열정과 아폴론의 이성이 분리되었고, 이후 플로티노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 신앙에서 디오니소스의 열정, 다시 말해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혹은 육체적인 열정은 무시되기에 이른다그리고 이런 흐름은 결론적으로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슬람권의 심장(마음) 이해 역시 초기 기독교의 그것과는 달랐다이슬람교의 초기부터 이미 신비주의적 종파인 수피즘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마음과 육체의 수행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이런 전통으로부터의 영향력은 아베로에즈와 아비센나와 같은 아랍사상가들의 저술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중국과 인도 등 동양인들의 마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런 논의는 이 책의 전체의 구성에 있어 사족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사실 아즈텍인들의 심장을 신들에게 바쳐 태양이 계속 떠오르도록 한다는 아즈텍을 비롯한 메소아메리카인들의 심장 인식에 대한 짧은 고찰 역시 같은 인상을 남긴다왜냐하면 이 책이 결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순환적이고 물과 같이 정적인 아시아의 마음 혹은 심장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서구 사상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 잠시 이야기했던 해부학적생리학적 심장 인식은 중세와 르네상스기, 근대를 거치는 동안 이성과 육체의 분리라는 사상의 흐름을 통해 가능해졌던 것이다중세 이후, 형이상학적 흐름에서 인식론으로 사상가들의 관심이 옮겨가는 동안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와 연장된 실체res extansa의 구분은 중세로부터 내려오던 복잡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던 인체 인식으로부터 의사들과 학자들을 해방시켰고 (영혼이 존재하는 곳은 뇌이므로 영혼이 없는 몸은[시체해부해도 좋다동물 역시 마찬가지결론적으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인식의 맥락에서 해부학의 길이 열렸으며, 현재와 같은 인체, 심장 및 뇌에 대한 인식이 도래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라도, 이 책은 단순한 심장에 대한 비교문화사 연구라기 보다는 사실상 서양 철학사의 흐름 내에서 드러나는 마음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부에서는 서양 사상사 공부를 하며 한번쯤은 대해 봤을 법한 이름의 인물들을 대할 수 있다루소헤르더괴테니체비트겐슈타인푸코 등 쟁쟁한 인사들의 사상과 이들의 심장(또는 마음)에 대한 인식이 시대 순으로 인간의 심장 인식의 변천사라는 맥락 가운데 서술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서양 사상사의 맥락에서 인간의 마음 그리고 심장이라는 장기에 관해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는 한 권의 사상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솔직히 개인적으로 바라던 보다 시시콜콜하고 소소한 동서양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마음 혹은 심장에 대한 코드나, 이를 보여주는 형상화된 이미지 및 상징에 대한 서술이 없었다는 것은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다그 외에도 아무리 현대가 결국 서양 문명의 세계화가 진행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서양 사상가들의 사조에 맞추어 합리주의인식론공리주의계몽주의대륙 관념론낭만주의실존주의이후 해체론 순으로, 심장 또는 마음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의 천이를 꿰어 맞추듯 배치하는 구조는 약간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은 어디까지나 서양사를 중심으로 쓰여졌으며, 동양과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인식은 책의 전체적 맥락에서 곁다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쓴 저자의 노력을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다서문에서도 밝히듯, 이런 책을 최대한 주석을 줄여가며 일반인들이 읽을만한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대학시절 탐닉했던 철학사 책에서나 대하던 고대로부터 중세근세근대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철학자들과 그들의 심장 혹은 마음에 대한 사유를 전해 들게 된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마음(심장)에는 이성(머리)이 알지 못하는 논리가 있다. 특히, 예를 들어, 현대와 같이 일반인들의 생활사에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시대에는 이성의 논리 보다는 마음의 논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정치는 이성 보다는 감정과 도덕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저자의 바램처럼 앞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인식에 진실로 발전이 있게 될지 알 수는 없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의 진보는 우리가 이성의 논리를 이해할 때 보다는 이와는 확연히 다른 마음과 감정그리고 도덕성의 논리를 이해할 때 이루어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기 이전에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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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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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

이 담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 국가/정체 514a ~ 515a (박종현 역)



<동굴>이라는 제목. 과연 이 제목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플라톤적인, 특히 정치적 이념들로 가득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작가로부터, 그가 제시한 <동굴>이라는 제목으로부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습게도 사라마구는 독자의 예상을 깨고 플라톤의 비유와는 매우 다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두 인물의 일상적인 삶의 장면으로부터, 도자기공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도시의 외곽에서 그 영향력을 나날이 확장해 나가고 있는 쇼핑 센터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그의 사위 마르살 가초가 함께 장인은 도자기로 구운 그릇과 병을 납품하고, 사위는 출근을 하기 위해 함께 센터로 향하는 장면으로부터 말이다. 


대대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곤경에 처해있다. 어디까지나 상품의 판매를 통한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센터는 시프리아노의 도자기가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납품 계약을 파기한다. 물론 매우 온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와 형식을 통해서. 


시프리아노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위 마르살이 센터에서 직급이 올라가 그와 함께 주거와 복지 혜택이 보장된 센터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총명한 딸 마르타의 도움으로 무언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센터에 납품할 수도 있다. 가령 이국적인 도자기 인형과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상처한 그에게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이사우라 에스투디오사, 아니 이사우라 마드루가와의 사랑의 마주침. 그들과 함께, 그리고 또한 우연히 그가 찾은/그를 찾아온 개 파운드와 함께 자신의 공방을 꾸려나갈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작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마치 깨진 도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 없이 되어 버린 그 자신의 오래된 기술, 그 모든 노력에도 센터의 시장 조사를 통과하지 못한 그와 마르타의 도자기 인형들, 그리고 이어지는 마르살의 진급과 센터의 삶, 사랑하는 이사우라 그리고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파운드와 헤어짐. 이렇듯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마치 자본의 지배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그려진, 모든 향락과 소비가 집합되어 있는, 그러나 갑갑한 센터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굴, 그 예의 철학자의 동굴이라는 것은 소설의 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갑자기 이상한 것이 센터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그런 뜬 소문과 같이. 시프리아노는 그 금지된 곳을 찾아 센터의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결국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사위 마르살과 함께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와 같이 의자에 꽁꽁 묶여 벽을 향해 앉혀져 있는 여섯 구의 시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사우라와 파운드를 포함한 일가족을 데리고 센터와 심지어 자신이 살던 동네 마저도 떠나게 된다.


간단히 살펴본 이 그냥 그럴 듯한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는 닿는 부분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철학적 성찰도 아니며, 어떤 우화('동굴의 비유')에 대한 우화, 이야기를 이야기로 풀어낸 작업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약간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하자면, 진부한 이야기로. 하지만 이런 배치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주목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1. 전체 보다 큰 부분(의 합)


누군가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는 말을 하면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전체가 그것에 포함된 부분 보다 크다. 어떤 집합을 상정하고 그 집합에 대한 벤다이어 그램 같은 것을 그려본다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 직관적 판단과는 달리, 집합론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원소의 수, 즉 집합의 크기(cardinality)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말이다.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는 국지적인 의미에서 부분이 전체보다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유한 집합의 영역에서라면 아주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다. 원래 {1, 2, 3}이라는 집합이 있다면, 이 집합의 부분 집합들의 합, 즉 멱집합(power set)은 {{}, {1}, {2}, {3}, {1,2}, {2,3},{3,1}, {1,2,3}}으로 원소의 수에 있어(일대 일 대응관계로 볼 때),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크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과 같은 무한 집합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즉 어떤 무한 집합과 이 무한 집합의 부분 집합의 합인 멱집합을 비교하여 각 집합의 원소들의 일대 일 대응관계를 나타낸다면, 무한한 원소들을 가진 두 집합들의 원소의 수는 양쪽 다 무한이니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답을 주는 것은 칸토르의 정리**이며, 이 정리는 무한을 포함하는 전반적인 영역에서 전체보다 부분이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 내에서, 한 사회의 부분들을 통제하는, 혹은 집합 속에서 집합에 불안을 초래하는 공집합을 셈하는, 기제가 셈한 부분 집합들의 합이 그 사회 혹은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국가는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는 국가(state)의 통제를 받는다. 물론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 내에서 거대 집단으로서 사회 내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센터'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사회를 통제하는 상태(state)이며 단지 권력이 국가로부터 자본으로 이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마치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던 노무현의 말처럼 말이다. 


2. Que sera, sera.


50년대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해진 이 말은 보통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정도로 번역하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Quel que sera, sera'인 이 경구의 의미는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것으로, 사라마구는 이 말을 여러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 말을 읽을 때, 이것은 마치 예정된 것, 그저 사회의 법칙이나 사회가 굴러가는 관성에 따른,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제는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일가의 행로는 결코 어떤 기존의 상태에 의해 통제된 자리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말을 단순히 어떤 필연으로 읽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어떤 귀결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말은 이념에 관한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 실제로 만일 지금은 없지만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상황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들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화국이나 민주주의라는 정체가 그렇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어떤 집단적 움직임은 없었으며 - 혹은 시도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에 성공한 움직임은 -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결코 당연한 것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어떤 필연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보일 뿐, 인간의 역사는 결코 애초에 정해진 경로가 아니라, 어떤 우연한 실험에 의해, 머리 속에 있는 생각 혹은 이념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계속적인 탐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실험이, 현 상태 또는 과거의 삶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 알고르 일가가 센터를 떠나 과거의 터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것처럼 - 새로운 삶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의 결정적인 장치로서의 '철학자의 동굴'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3. 뒤집어진 '동굴의 비유' - 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닌 익명성의 비유 


잠시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비유가 등장하는 <국가> 7권의 성격에 대해서 말이다. '동굴의 비유'가 제시되는 부분에서 주로 이야기 되는 것은 결국 '선의 이데아'를 깨닫게 되는 어떤 사람, 과거에는 동굴 속에 묶여 다른 죄수들과 함께 벽에 비추어지는 영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살았으나,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외부의 빛과 현실을 보고 동굴로 되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외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플라톤은 이 비유에 이어 철학자가 되기 위한 교육(예비 교육과 변증술)에 대해, 그리고 그가 통치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실무(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학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한 도시를 지배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사라마구가 이 '동굴의 비유'를 전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비유를 뒤집어진 방식으로 전용하고 있는데,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동굴의 비유'가 글에서 등장하는 위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국가> 7권의 도입부에 등장하지만(물론 플라톤의 <국가>의 각 권을 나누는 근거는 없다), 사라마구의 소설에서는 종결부에 등장한다. 둘째, 실재를 대면하게 되는 위치: 플라톤의 비유에서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실재'를 대하게 되는 자리는 동굴 바깥이나, 사라마구의 소설 속에서 어떤 '실재'가 발견되는 곳은 센터의 깊숙한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 속이다. 셋째, 실재를 대면하는 자의 지위: 플라톤의 비유에서 실재를 보게 되는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야할 철학자이지만,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실재를 대면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하고 익명적인' 전직 도공일 뿐이다.   


4. 빠져나감의 이념 - 새로운 것을 향한 방황


결국 관건이 되는 것은 지배자들이 아닌 평범한 자들이 실재를 대할 때 있게 될 일들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 <눈뜬자들의 도시>가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야기일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투표 거부', 그것은 이 소설의 전편인 <눈먼자들의 도시>에 이어지는 상황이다. 바로 국가와 민주주의의 현 상태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이어지는 소설이 말하는 익명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굴>이라는 소설 역시 위에서 언급한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이념으로, 어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빠져나감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동굴'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좀 더 정확히 말해 '동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자에 묶인 채 벽을 보고 앉아있는 시체들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센터'를 떠난 삶으로, 즉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는 탐색으로 이어진다. 분명히 그런 삶은 일종의 정처 없는 방황이다. 현 상태 내에서의 정착도, 혹은 그 이전의 전통적인 삶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것을 위한 탐색. 물론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삶. 하지만 근/현대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모색했던 방황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들, 예를 들면 보편 복지라는 것 역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지금도 세계의 지배적 이념인 주류 경제학의 지식 체계 - 또는 의견의 체계 - 에 따르자면, 복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별적 복지, 시혜적 복지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고정된 지식 혹은 의견의 체계는 동굴 속의 실재와 마주한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보았던 동굴 속의 시체들이 속박되어 있던 의자인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이 <동굴>이라는 우화, '동굴의 비유'를 뒤집어 오늘날의 허구로 다시 쓴 이 새로운 우화는 이런 고정에서, 묶여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을 향해 나가는 것을, 빠져나감의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은, 비록 원래의 비유를 뒤집어 놓은 것일지언정, 여전히 플라톤적인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방식인 의견(doxa)과 단절하고 추론(dianoia)을 거치지 않는 이상 이념 혹은 이데아(idea)에 이를 수 없다는 플라톤의 입장 위에 말이다. 


* 초과점의 정리는 알랭 바디우의 책 <존재와 사건>에서 증명 방식을 정리했음을 밝힌다.  

초과점 정리: 

바디우가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라고 부르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 멱집합을 통해 부분 집합을 셈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디우의 보다 형식적인 증명 방식에 따르면... a의 모든 정상적인 원소들의 집합 c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c={b | b∈a & ~(b∈b)}. (바디우는 자기 귀속이 금지되는 항 또는 원소를 '정상적 원소'라고 명명하며, 자기 귀속이 되는 원소를 '사건적 원소'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집합론 또는 수학적 존재론에서 자기 귀속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 때 정상적인 성질을 가진 모든 원소 b를 a에 분리해 넣게 되면, a의 실존하는 부분을 얻게 된다.(이를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이라고 명명한다.) c가 a에 포함되기 때문에[c⊂a, 왜냐하면 모든 c의 원소가 a에 귀속되기 때문], c는 a의 부분집합들의 집합에 귀속된다[c∈p(a), p는 멱집합(power set)을 의미]. 그런데 c는 a 자체에 귀속되지는 않는다. 만일 c가 a에 귀속된다면(c∈a), c는 정상항이기 때문에[~(c∈c)],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에 귀속되는 것이 되며, 그것은 c 자체가 된다(c∈c). 그러나 문제는 이는 c∈c이면서 동시에 ~(c∈c)가 되기 때문에 모순. 따라서 c는 a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결론. 이것은 결과적으로 언제나 집합 a의 원소가 아닌 p(a)의 원소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귀속과 포함이 항상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시 말해 부분 집합의 합은 원래의 집합 보다 크다. 


** 칸토르의 정리 역시 귀류법을 사용하여 증명하게 되는데, 초과점의 정리와 거의 유사한 방식의 증명법을 따른다.(이 증명법은 위키피디아에서 제시한 세가지 방법 중 한 가지를 정리함.)

칸토르의 정리:

두 집합의 원소의 수가 같다는 것은 어떤 두 집합의 원소가 일대 일 대응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 집합의 영역에서 원집합 A와 멱집합 P(A)의 원소의 수와 A의 원소의 수는 전자가 크거나 또는 같다.(증명은 당연히 멱집합이 크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 같다는 가정에 모순이 있음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A와 P(A)가 같다면 두 집합의 원소들이 일대 일 대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때 f를 일대 일 대응관계의 함수라 하고, A의 멱집합의 원소(A의 부분 집합)인 집합 B가 있다고 하자[B ∈ P(A)]. 이 집합 B는 A에 귀속되는 모든 원소들 중 P(A)와 일대 일 대응 함수 f(x)에 귀속되지 않는 원소들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한다[B = {x∈A | ~(x∈f(x))]. 그런데 A와 P(A)가 일대 일로 대응한다면 f(x) 역시 P(A)의 부분 집합일 수 밖에 없으므로 B와 f(x)는 같아야만 한다. 

이 때 A에 귀속된 원소 x는 f(x)에 귀속되거나 또는 귀속되지 않을 것이다. a) x가 f(x)에 귀속되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B는 f(x)에 귀속되지 않은 원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b) x가 f(x)에 귀속되지 않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x는 B에 귀속되지만 가정에 따라 f(x)에는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f(x)는 B와 같을 수 없으며, 따라서 P(A)는 A보다 크다(또는 원소의 수가 많다). 다시 말해 무한의 영역에서도 부분의 합은 원래의 집합보다 크다.(|A|<|P(A)|)

이것은 칸토르가 제시한 대각선 논법(diagonal argume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대각선 논법의 적용은 여기에서 정리하기 보다는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에 자세한 운용례가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http://en.wikipedia.org/wiki/Cantor%27s_diagonal_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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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제작부터 상영까지 매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사건을 영화적 허구를 통해 그려내는 영화인데다, 법정에서 드러난 재판과정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논란이 대부분 객관성 혹은 순수한 대상성에 얽혀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한 진보 논객으로부터 법원까지 문제를 삼았던 것은 이 영화의 내용이 그 객관성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과연 이 영화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들이 객관적인가 하는 문제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관건이 되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이 객관성 혹은 실체성이라는 영화 자체의 불가능성 - 영화는 예술이며, 예술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 을 우회하여 이 영화에 속한, 그리고 동시에 영화를 넘어서는, 이념에 대해서 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두 주체가, 그리고 정작 주체 없이 어떤 특정한 부분적 주체성만을 지닌 조직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할 것이며, 그리고 영화 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관점에 묶여서 법적, 객관적 실체성만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비판을 살펴볼 것이다.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먼저 법의 실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법의 권위에 대해서 말이다.


1. 법의 권위 - 권위의 근원과 두 엉덩이


권위라는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법원과 재판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실제로 김교수가 석궁을 가지고 민사 소송 과정에서 심리를 주재했던 재판장을 찾아갔던 행동은 즉시 법원에 의해 석궁 테러로, 법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김교수의 행동 - 물론 매우 잘못된 - 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거 및 법조문의 해석에 관한 재판부의 태도는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법원과 재판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일견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둘은 다르다는 것이다. 권위, 특히 법의 권위는 정당성이라는 토대를 가진다. 법이 정당하게 적용될 때, 법이 정의롭게, 모든 사람에게 다른 기준 없이 평등하게 적용될 때 법은 권위를 지닌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권위주의란 별다른 근거나 정당성이 없이도 권위를 주장하고 이러한 권위를 그대로 이어가려는 태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김교수의 행동에는 문제가 있었다. 먼저 자신의 해고복직 문제에 관한 민사 재판을 주재했던 재판장(박판사)을 찾아간 문제가 그렇다. 그것도 석궁을 들고. 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 법적으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석궁을 의도적으로 발사했는가 아니면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인가, 발사된 석궁이 정말로 피해자(박판사)에게 맞았는가 아닌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문제로 피해자가 증거를 조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들이다. 법에 권위가 주어지는 것은 어떤 확정적인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며, 그로 인해 바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 공정한 방식으로 당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문제가 될 사안을 따질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기 때문이다(소송법이나 증거법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런 과정이 적절하게, 아니 적법하게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의문이다. 바로 여기가 그 권위주의라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법은 공정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법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렇기에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의 이념이 아닌가. 이런 공정함과 평등함이 보장되지 않는 법집행 혹은 명령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법을 특정한 방식으로(법원과 재판관들의 관습에 따라), 특정한 부분에 그것도 법원의 권위주의라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법의 집행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법을 벗어난 주권자의 위치에, 왕의 위치에 스스로를 올려놓게 된다. 역설적인 위치, 법 안에 있는, 그러나 동시에 법을 벗어나 관습적 권위에 의탁하는 왕과 같은, 법의 왕과 같은 위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둘이라는 것, 두 엉덩이, 즉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법 피해자 김교수의 엉덩이(참고로 이것은 실체와는 상관없는 영화적 창작)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권위주의라는 옷이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그것과도 같은 법원의 엉덩이가 말이다.  


2. 두 꼴통 보수 - 법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꼴통과 권위주의에 집착하는 꼴통  


다시 흥미로운 것은 김교수가 자신을 꼴통 보수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법을, 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적용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에 반해 법원의 태도는 어떤가. 그들 역시 보수적이다. 법을 집행되던 방식으로, 이전의 움직임과 법체계의 거대한 중량에 따라 관성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어떤 둘을 발견하게 된다. 법으로부터 분기한 둘, 법의 아름다움, 무모순성에 집착하여 법이 법문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꼴통, 그리고 법 자체의 권위가 아닌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권위에, 법의 공정함과 평등함에 근거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관성에 집착하는 꼴통을 말이다. 


이 둘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둘 다 꼴통이고, 각자의 방식에 따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보수다. 하지만 두 꼴통들, 혹은 괴물들은 완전히 다른 것을 향해 움직인다.

 

a) 우선 법의 아름다움, 무모순성을 주장하는 꼴통. 김교수는 법의 바깥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수학과도 같은 법의 정교함을 극한으로 추구할 때 그가 부딪히게 되는 것은 법의 경계, 그 유한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무한이 아닌가. 단순히 어떤 경계에 무한하게 가까워지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서 법의 정신을, 법이라는 유한의 체계로는 한정할 수 없는 정의, 평등을 추구하는 움직임, 어찌 보면 그가 취한 경로는 바로 이런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박변호사와의 접견에서 말하는 그대로 그는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b) 법 자체의 권위가 아닌 법집행자의 권위를 주장하는 꼴통. 사실 이 꼴통이란 어느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법원이란 조직은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을 지키려 한다. 마치 고대 근동의 거대한 신상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하는, 아니 그 신상이 서 있는 토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주체는 없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는, 어떤 지형을 지키고 있는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직 혹은 이들에게는 오로지 어떤 주체성만이, 법원의 권위주의를, 아무런 법을 권위의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판단과 명령을 유일한 권위의 근거로 하는 태도를 신성화하는, 어떤 특정한 이권을 위한 태도만이 있을 뿐이다. 


3. 객관적 사실성인가 아니면 진실성인가.


이런 정황에서 볼 때, 한 대표적 진보 논객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사실성 혹은 객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틀 속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의 체계, 지식, 확고하게 자리가 고정된 배치물들의 미로에서 길을 잃게 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법의 적용, 법적 정의의 실현이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적 허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지점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와 영화를 어떤 객관적인 혹은 경험적 사실의 관점에서 봐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사안을 호도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김교수가 석궁을 가지고 그가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판사를 찾아가, 그와 실랑이를 벌인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의 결과에 대해 그는 그에 응당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잘못을 판단하는 과정이 공정하게 법에 따라 진행되었는지는 다른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문제는 현재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몇년 전부터 -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사법 개혁의 문제와 맞물린다. 판사 및 검사 조직이 사법 연수원이라는 단일 교육 기관을 통해 배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법조계 내부의 패거리주의나 연공서열에 따른 조직 문화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최근 들어 붉어져 나온 정치적 발언을 한 판사들에 대한 인사 불이익이나, 검사 출신 비리 변호사 비호, 한 판사에 의해 사법연수원 후배 검사에게 전해진 기소청탁 의혹 등이 이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 영화가 드러내는 공정한 법집행을 가장한 인치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런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이념을, 우리가 결여하고 있기에 더욱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정의라는 이념을, 영화적 허구를 통해 드러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사실과 100% 같다거나, 혹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다. 진실 혹은 진리는 사실과는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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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내가 국가를 통해 선취했던그리고 그것들이 플라톤 텍스트의 연속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할철학자에 관한 언표들에 관한 검토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1. <<지혜(Sophia)에 대한 욕망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인 자들>>(V, 475b).

 

이 첫 번째 정의는 3가지 고찰을 이끌어 낸다.

a) 어원학적인 고찰

철학(philosophie), 즉 애-(philo-sophia, -)는 지혜를 애호하는 사람을 요구한다그런데그런 정의에서지혜는 철학과 동일한 것으로 주어지지 않으나철학자는 지혜를 욕망하는 긴장의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그 언표는 우리에게 철학이 하나의 합목적성을하나의 목표를 추구하지 않으며그렇기는커녕 철학적 합목적성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의 너머에 위치함을 지시한다그럼에도철학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전체화라는 개념이 수반되는데그 지혜에 대한 욕망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전체로 말해지기 때문이다전체성과 관련되는 것은 무엇인가우선적으로 철학은 왜 전체를 만드는 것으로 제시되어야만 하는가?

b) 합목적성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결과로서의 철학지혜

짛예에 대한 욕망이 완전한 어떤 것에 결부되어야만 하는 이상관건이 되는 <<전체성>>에 관한 두 가지 가설들이 배제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유의하자그것은 세계의 전체성즉 있는 그대로의 것의 전체성도철학을 그 자체의 백과사전적 판본 내에서 동요하게 할 가능한 지식들의 전체성도 또한 아니다.철학은 그러한 전체성들의 일자도 타자도 아니지만그 결과가 지혜라고 불리는 이상그 결과는 완전한 결과로 제시되어야 한다.

c) 철학은 그 패러다임이 에로스(eros)라고 명명된 주체적 관여의 조건들 아래 있다.    

이 주체적 관여는 어쨌든 역설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실제로 욕망들이 응축되는 에피뛰미아(epithumia강한 욕망)가 영혼의 플라톤적 삼등분에서 가장 기저에 있는 부분이다감각적인 것에 관해 직접적으로 표명된 것으로서의 욕망이 지정되는 것은 바로 그 장소다그와 같이프쉬케(psuche,정신)에 대한 이론화를 통해 비난 받은 휘브리스(hubris오만)로서의 욕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소환된다게다가 플라톤은 에로스에 의해 지배되는 주체적 관여의 조건 하에 철학을 위치시키는 주체적 긴장 내에서 어떤 다른 욕망의 형상 – 욕망은 지혜에 대한 사랑 보다 더 강하게 울린다 – 을 다시 펼쳐놓는다요약하자면철학이 욕망에 의해 표출된 주체적 관여의 조건 아래 완전한 결과를 요구하는 한그것은 결과에다시 말해명백히 철학을 가로지르는(trans-philosophique)지혜라는 결과에 관련된다.

 

2. <<진리에 대한 숙고(관조, contemplation)를 좋아하는 자들>>(V <s>476d</s> 475e)

*진리를 바라보기를또는박종현 번역에 따를 때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철학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475e. 476d에서는 아름다운 것 자체와 그것에 관여하는 것들에 관해그리고 잠에서 깬 상태와 꿈꾸는 자들의 상태그리고 이들의 사고의 구분이 앎 또는 인식(gnome)과 의견(doxa)에 대해 논의하고 있음.

 

철학은 우애사랑그리고 욕망으로 은유를 이루는 주체적 긴장이며언제까지나 그것을 지식의 배치로 환원됨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진리(aletheia)라는 주제는 철학에 대한 거의 모든 플라톤적 정의들을 조직하는 주제다따라서철학은 전적인 지혜에 대한 욕망인 동시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그렇다면지혜와 진리의 절합이란 무엇인가?

진리는 극성화(polarisation)dml 입장에서 철학의 의미를 전달하는 범주로 작용합니다철학에 관련된 극의 개념은 진리이며결과적으로 그것의 개념은 지혜다진리는 철학에 있어 역사를 가로지르는 범주이며그것의 출현에 단독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이것은 지혜에 있어서는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니다실제로예를 들어종교적 유형의 지식들이 있다회의주의적인 철학자들마저도 진리라는 범주에 관해 단독화된다심지어 진리의 부정을 논변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자들까지도 말이다.

진리에 대한 숙고(관조, contemplation), 그러나 어떤 유형의 단독화를 통한 숙고인가실재적인 진리들즉 생산물들(유적인 절차들)에 관해서철학은 이 진리들의 기반이 되는 진리를 증언하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한다다시 말해 철학은 결국 언제나 진리의 진리를상황 가운데즉 가산적 무한(셀 수 있는 무한, l’infini denombrable) 가운데 있는 식별불가능한 것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철학은 어떤 하나의 진리가 참된 것으로 드러남을 확인해내는 것이다진리라는 철학적 담론의 독창적인 범주는 주어진 것들의생산된 진리들과 철학에 외부적인 것들의배치에 관련되지 않으며철학은 진리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참된 것을 드러낸다.

어원학적으로숙고의 어근은 떼오레인(theorein), 즉 보다(voir)이며다시 이로부터 떼오리아(theoria), 즉 이론(theorie)이 유래된다진리에 대한 숙고그것은 진리의 진리를 바라보는 것이며,철학자들은 진리에 관해 이론화하기를 사랑하는 자들다시 말해 참된 것을 바라봄(le voir du vrai)을 또는 참된 것의 드러남을 바라보는 것(le voir de l’averer du vrai)즉 철학을 통해 진리가 둘의 힘에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념의 드러남을 바라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철학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의 활동(action)이 아니라하나의 전망(비전, vision), 떼오레인(theorein), 즉 참된 것의 드러남을 바라봄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전망이다진리에 관계된 전망으로서의 철학은 따라서 가장 강한 의미를 제시하는데말하자면 진리들의 드러남(l’averer de la verites)을 바라봄에 대한 이 관계는 단지 생산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과학과 테크네(techne기술)는 아름답고 참된 것을 생산하지만 철학의 외부즉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달리 말해서진리들을 생산하는 단독적인 실천들에 의해 주어진 채로고유하게 철학적인 본질은,참된 것으로서의 진리들을 바라보지 않는 진리들의 생산자들의 역으로진리들의 드러남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그러므로 철학은 활동즉 진리들의 탄생이 아니라그것들의 확인의 전망 가운데 존재함에 있다.

 

3.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의 실존을 식별하고 그 아름다움과 그것에 관여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알아볼 수 있는 자들>>(V476d).

 

아가똔(agathon)이라는 그리스어 단어에 아름다운 것참된 것 그리고 좋은 것올바른 것 사이의 일치가 있다이와 같이철학은 진리에 관한 것과 동일한 실천을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되풀이한다우리는 여기에서 철학을 진리의 드러남을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그리고 이념들에 대한 그 이론이 체계적인 조직화일 수 밖에 없다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을 다시 발견한다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우리에게 진리의 진리에 대한 바라봄(vision)이 또한 아름다움 그 자체의 정의임을 지시한다말하자면 그 비전(vision)은 진리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동시적으로 포괄한다는 것이다철학은 따라서 그것의 대상에 관해 철저하게 자율적이지 않으며그것이 아닌 것에즉 생산된 진리들 또는 아름다운 것들에 종속된다철학은 통속적인 플라톤주의 해석에서와 같이 진리 또는 아름다운 것의 추상적 전망이 아니라,진리들과 아름다운 것들의 마주침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진리들의 참된 것을 바라봄을 통해 완성된다.

일자와 다수 가운데 고정된 채로철학은 다수적 진리들에서 발견되며 진리들 내에서 결과적인 것인 그러한 진리의 일자를 구성한다진리들이라는 다수와 드러나는 진리들의 확인이라는 일자는일반적으로각각의 철학이 진리들의 단독적인 제시들에 따른 유대를 맺고 푸는 철학적 담론들의 고유한 매듭을 구성한다.

 

4. <<삶이 깨어있음(upar)이며 꿈꾸는 것(onar)이 아닌 자>>(V 476d).

 

그 실존적인 정식은 우리에게 철학을 그것의 삶의 요소에서 구별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플라톤에게 있어철학적인 삶은 단적으로 삶(꿈꾸는 상태로 남아있는)에 관해 깨어있는 것이다철학은 깨어있는 것이며 꿈꾸는 것이 아닌 것즉 현재의 삶이 아닌 삶일 것이며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본질적인 꿈에 관해 깨어있는 상태에 머무르는 삶일 것이다철학자는 <<꿈으로서의 삶>>에서 깨어난 자다.  

우리는 그로부터 삶에 관한 첫 번째 철학적 논쟁을 보게 되는데그것은 이어지는 대안에 관해 초래되는 것이다말하자면철학과 삶의 화해인가 아니면 이 둘의 근본적인 구별인가삶은 실존적인 직접성(무매개성, immediatete내에 있는 것즉 철학에 동질적이지 않은 것인가삶의 문제에 관련된 철학의 이 역사를 가로지르는 분쟁은 원래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것이다그 점에 관해아리스토텔레스는 곧바로 플라톤의 반대편에 선다요컨대그는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제대로 살아야 한다(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il faut bien vivre)! 스승의 본을 따른 엄격한 합리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아리스토텔레스는 어쨌든 그의 범주들이 삶에 최대한 근접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리고보다 근래에 와서는니체로부터 들뢰즈에 이르기까지이 질문은 바로 삶(생명, la vie)에 내재적인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즉 철학이 깨어남이 되도록 하는그러나 삶으로서의 삶의 역동성(la dynamique)에 관한 깨어남이 되도록 하는다시 말해 니체가 플라톤에 대해 말할 것처럼철학이 더 이상 삶을 병들게 하는 사유가 아니도록 하는 문제일 것이다.

 

5. << 언제나 그 자체에 관해 동일하게 있는 그러한 사물들 자체를 숙고(관조)하는 자들>>(V 479e).

 

이제 그 자체에 대한 동일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도록 하자철학이 타자에 관해 동일자가 근본적인 우위에 있음을 숙고하는 것에서 말이다그 자체가 아닌 것으로의 변화(devenir)를 생성과 부패의 등재부에 속하는 것으로 부차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리스적 철학의 의지에 본질적인 성향이다만일 플라톤이,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에 맞서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즉 타자(l’Autre)의 존재를 도입한다면타자에 관한 동일자(le Meme)의 우위는 근본적으로 플라톤주의에 그리고 이와 함께 고전적인 그리스 철학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동일자의 우위를 둘러싼 그리스 철학의 표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던진다훨씬 오랜 기원을 가진 유대적 전통의 견지에서타자와의 시원적인 마주침을 통해 효과를 얻는 의미의 전환을 제시한다삶의 문제에 관해서와 같이동일자의 타자에 관한 우위를 고려할 것인 것 아닌가는 레비나스에 의해 정당하게 지적된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결정으로 남는다.

 

이 논점은 두 가지 논점을 향해 열린다:

존재론적 논점(타자는 있는가?)

동일성에 대한 잠재적으로 본래적인 타자성의 선행 관한 윤리적-존재론적 논점

그 분리된 논쟁은 이 때 윤리가 실존하는지를 아는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철학적 논쟁을 열게 된다레비나스는 윤리적으로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우위를 등재하는데실제로 그는 그리스 철학이 실제로 취한 존재의 문제로부터 타자의 문제에 이르는 경로가 올바른 경로라고 주장한다법이 동일자의 규정 하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언제나 타자성을 타자의 우위 아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반대로만일 플라톤 동일자의 우선성을 주장한다면그것은 철학이 진리의 드러남을 관건으로 하며진리들 가운데 주어지는 내부-본체적인(intra-substantiel) 것의 관할 하에 위치되기 때문이다동일자의 관할은 원리즉 아르케(arche)에서드러남에 대한 바라봄(vision)에서말하자면 바라봄의 단일성인 동일자의 우위에서 유래된다달리 말해진리들이 있기 때문에 타자가 있으며따라서 타자들과는 다른 진리들이 있다그로부터 동일자의 우위와 철학이 진리들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이의 깊은 유대가 직조되는데진리들에 맞추어지지 않기에철학은 타자들과 본래적으로 다른 것이다다시 말해서만일 철학의 편극적인 범주가 진리라면필연적으로 철학은 결과적으로 타자에 관한 동일자의 절대적 지배(souverainete)를 제시하는 것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타자의 본래적인 우월성을 긍정한다면우리는 철학에 그것이 진리의 드러남의 확인이라는 철저히 다른 기능을 할당하는 것이며달리 말해본질적으로 철학을 그 무게 중심이 다른 것으로서의 타자의 수용인 윤리로소피아(sophia지혜)로 정의하는 것이다그렇게 함으로써우리는 그와 같이 철학의 윤리적 본질을 예-정했다(a pre-determine). 윤리는 타자의 절대적인 타자성의 돌출에 대한 – 동일자에 대해 보존된 것의 형상 내에서의 – 우대인 것이다그러나 만일반대로철학이 있는 그대로의 참된 것 – 참된 것의 드러남 – 을 사유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며 이 때그리고 이 때로부터동일자의 규정을 지배한다면윤리는 하나의 사유가 아니며달리 말해 그것은 실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플라톤은 우리에게 진리의 드러남에 대한 바라봄을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 언제나 동일한 것과따라서 영원성 –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기독교적인 공명을 통해 파악되어서는 안 되는 말 – ,관계된다는 것을 말한다영원성그것은 실체즉 우시아(ousia)이며그것의 존재의 확고부동함(permanence) 내에서 안정화되는따라서 시간이라는 범주에 무관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그가 동일자라는 범주의 도입을 통해 규정하는 시간의 문제에 관해 플라톤은 이와 같이 단언한다.

이것은 우리를 시간에 관한 세 번째 철학적 논쟁으로그리고 영원성에 관한 한 테제로 인도한다실제로나는 동시대적인 철학의 과제들이그리고 따라서 하나의 반-소피스트적 과제가오늘날 사라져버린 영원성의 문제를 재건하는 것이다확실히영원성이 소멸될 때철학 역시 그렇게 되며철학은 그 고유한 종말을 선고받게 된다그것은 어쨌든 영원성의 측면에서 시간을 사유하고자 하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던 헤겔로부터 유래한다헤겔은 시간의 현존재(l’etre-la)의 절대성 내에서 참된 것의 진리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다헤겔은 영원성을 시간의 중심에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시간이 영원성이 실현되는 고유한 양식이다라는 것을 드러낸다그러나 영원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궁극적인 시도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밖에는 더 이상 사유할 수 없는 개념의 시간화(temporalisation) 속에 동시대의 철학을 빠뜨린다헤겔의 시간 개념에 관해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의 견지에서 시간을 사유하지만이미 소멸된 철학의 공간 내에즉 형이상학의 해체의 공간 내에또한 그가 진정한 시간성(temporalite)의 본질을즉 현존재의 유한성을 사유하는 개념이 없는 시간의 거기 있음(l’etre la)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시의 공간 내에그는 낭만주의자로 남게 된다우리의 전략적 목표들 중 하나는 근대적 시간()에 관한 하이데거의 역사적 조합에 대한 분석이 될 것이다반대로만일 철학이 지속된다면영원한 진리는 있을 수 있으며그렇지 않다면 진리는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영원성은 시간의 반대가 아니라진리와 동일자 사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유형의 유대라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과학예술사랑정치라는 유적인 절차들은 역사적인 그리고 사건적인 시간 내에 진리들을 생산하며철학은 그 절차들을 <<영원한 것의 측면>>에서 검토한다그 절차들을 그것들의 영원한 부분에 관해 심문한다 –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심문이 철학으로 정의된다철학은 진리들의 동일성을즉 참된 것의 참된 본질을 결정하며결과적으로 이 철학적 규정은 영원성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그러나 하나의 영원한 진리는 사건적이기에 생산되는 것이며진리는 내게 있어플라톤의 그것과는 달리시간성에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예를 들어대체로 나는 푸코가 철학자였는지 아니면 역사가였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다.하지만푸코가 행하는 담론적 지형들로서의 역사-횡단적인(trans-historique) 도식들을 통한즉 엄밀한 의미에서 속박 없는사슬이 풀린역사적 이성들을 통한 역사성의 재구축은 분명히 그의 저작에 영원성을 지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주체 범주의 소거를 통한 푸코적 실증주의의 문제는 바로 그 범주를 마침내 윤리의 관점으로부터 재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랭보는시인으로서오히려 파멸의 지평에서 영원성을 재발견했다고 말했다<<그것이 회복된다무엇이영원성태양과 가버린 바다>>이러한 회복의 실현즉 철학자의 언어를 통한 영원성의 문제의 재구성이 필요하며나는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6.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전적으로 열중하는 자들그들을 의견의 친구들(philo-doxa)이 아니라 철학자들(--자들, philo-sophia)이라고 불러야만 한다>>(V 480a).

 

우리는 거기에서 철학자들(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philosophes)과 의견을 사랑하는 자들(philodoxes)사이에서진리의 드러남을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를 사랑하는 자들과 의견들을 선호하는 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플라톤적 대립을 보게 된다무엇이 매우 정확하게 그것을 의미하는가오늘날 독사(doxa,의견)는 질문서의 격자들을조사원들이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격자들을 가로지르는 여론 조사들이다그 조사는 따라서 등재의 대상이 되는 무의식적 재현들의 체계다-주체적(a-subjective) 재현의 체계,즉 여론 조사는 결코 의견의 주체를 참조하지 않는다우리가 붙잡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것 가운데 있는그러나 결코 우리가 주체적 원천이 될 수 없는 재현들의 상태즉 의견은 정황의 상태를 반영한다.어쨌든 거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제시된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는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아닌데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가지고우리 각자가 의견을 말하지만플라톤은 당신들의 의견들이 하나의 주체적 짜임으로 변화되어 사유의 상대자로 기능하게 될 바로 그 때 그 의견들에 우호적이어야 한다거나그렇지 않다면 그 우애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여론 조사는 공적인 의견의 상태를 시험하며조사원은 우리에게 그 의견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조사원은 당신들에게 왜 로카르와 그의 정부가 호감이 간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는다그는 당신들에게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도록 요구한다그 조사는 무-주체적인 이항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따라서 플라톤주의를 통해 대상이 제한된 단절의 지점은 의견과의 단절이 아니라 의견에 대한 사랑과의 단절이다의견들이 있고의견들의 분배가 있으며(찬성 또는 반대로의), 의견들의 주체화가 있다(의견-사랑[philo-doxa]). 그리고 철학은 다른 주체적 짜임을 제시하며따라서 지혜-사랑(philo-sophia) 대 의견-사랑(philo-doxa)은 더 적은 소피아(sophia대 독사(doxa)이다.

철학자는 정황의 상태즉 그에게도 또한 의견이 있는 것에 관한 상태로서의 의견에 대립하지 않는데,왜냐하면 그는 의견이 사랑할 수 ㅇ벗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그리고 플라톤은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의견을 사랑하게 됨을 추구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왜냐하면 소피스트들이 그런기술(techne)의 스승들로 통했기 때문이다말하자면그들은 의견들에 대한 사랑을 철학적 모방을 통해 조직했기 때문이다소피스트들은 철학자의 마스크를 쓰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 philosophe)와 의견을 사랑하는 자(philodoxe) 사이에서 눈이 멀어버린 연극 무대 위에서 철학적 모방을 연기하며의견을 만듦으로써 철학을 그들에게 끌어간다이 연극은 눈 먼 무대 위에서 연기되는데,왜냐하면 모든 시대에예를 들어 오늘날과 같이우리는 소피스트들의 복권에 조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만일 철학이 순전하게 의견들을 폐기하려 했다면그것은 실재를 생산하는 기계즉 테러(Terreur,공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철학은 의견들에 대한 사랑을 폐기하려 하는데왜냐하면 의견들에 대한 사랑은 철학이 사유의 주체적 성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그것이 바로 철학이 그것을 하나의 의견으로 대하기 바라는 소피스트들의 소멸의 의지에 속박되어 있는 이유인 것이다이와 같이,의견을 사랑하는 자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의 영원한 분쟁은 의견과 진리 또는 의견과 과학 사이에서는 야만적으로 전개되지 않지만의견에 대한 사랑/진리에 대한 사랑의 대립을 둘러싸고는 폭력적인 양상을 띄고 펼쳐지며회의주의적 철학자들즉 소피스트가 아니라 영원성을 사유하는 철학자들과 관련된 난점에 있어 철학자를 소피스트로부터 구분하는 진리들이 있는가 아닌가라는 실재를 결정하는 문제에 관해 더욱 명백한 방식으로 귀착된다.

 

이제부터는 여기에서 얻은 것을 요약해보자.

철학은 하나의 떼오레인(theorein)즉 참의 드러남에 대한 바라봄을 사랑하는 가운데 포착되는 전망이다.

철학은 세 가지 논쟁들을 보존한다삶과 관련하여윤리의 문제적 실존에 관련하여영원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시간과 관련하여.

철학은 사유의 주체적 성향으로서의 그것의 전개를 방해하는 의견들에 대한 사랑에 맞서 싸우며철학은 또한 철학을 다른 의견들 중 가운데 하나의 의견으로 대하기 바라는 소피스트들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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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의 힘독일과 프랑스 융합의 필요성에 대한 한 담론 The Power of the Open: A Discourse on the Necessity of Fusing Germany and France

 

이 강연을 시작하면서나는 오늘 저녁 여기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정신적인(spiritual) 공동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왜 그럴까요왜냐하면 나는 동시대적인 세계 내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복잡한 만큼이나 중대한 문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물론그것은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그러나 그 문제가 어쩌면그 효과가 미칠 영향력이 전 세계에 관계되는 이상또한 그 현실을 통한 그리고 또한 사유를 통한 힘에 대해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짧은 기간을 두고 중대한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여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우리에게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그저 여느 장소가 아닙니다여기 이 장소는 프랑스-독일의 지성적 논쟁에 매우 중요합니다나는 여기라는 장소를 단지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보다 특정하게라틴 아메리카에 있다는 의미에서그리고 그 보다 더 특정하게아르헨티나라는 의미에서 말합니다여기에는 상당히 비범한 지성적이고문화적이며창조적인 활동이 있습니다영화로부터 철학까지 뻗쳐있고연극음악 그리고 회화를 포함하는 예술의 그리고 사유의 구체적인 집중(intensity)이 있습니다그리고 여기 오늘 저녁에 모인 여러분의 수로 판단할 때그러한 열렬함(keenness)은 심지어 프랑스와 독일의 지성적 운명에 대한 담화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나라가 붕괴의 직전에 이르렀던 아르헨티나인들은 심지어 지독한 위기의 시기에 임해서도,터무니없는 고통의 시기에 임해서조차도전 세계에그들이 창조와 사유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여기에 모든 사람이 보아야 할 분투하는 정신적인(spiritual) 저항이 실존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프랑스-독일의 문제정치적 건설(구성, construction)의 문제가 됨과 함께또한 기본적으로 지성적 저항에 대한사유를 통한 저항의 문제입니다실제로만일 독일과 프랑스가 창조와 행동으로 통합을 향해 움직인다면유럽의 정신적인 운명은 그 움직임을 지속할 것입니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리고 장소로서아르헨티나는물론유일무이합니다그러나유일무이함과 동시에아르헨티나는 또한 유럽의 정신적인 운명의 후계자입니다아르헨티나는 그러므로 바로 그 핵심에 있어 독일과 프랑스에 일어나는 일에 관련됩니다.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하나의 변주곡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나는 한 때 각광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오늘날에는 완전히 잊혀져 버린 텍스트를레닌에 의해 쓰여진 텍스트를 사용할 것입니다그 텍스트의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의 세가지 원천들과 세 가지 구성요소들The Three Sources and Three Component Parts of Marxism입니다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 독일의 철학프랑스의 혁명적 사유 그리고 영국의 정치 경제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문제를 옆으로 밀어두고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봅시다이 세 가지 원천들에 대해 우리는 오늘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영국 또는 미국의 경제와 관련하여여러분이 알고 있듯이우리는 상당히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확실히신문들과 담론들로 인해여러분은 경제가 실존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그렇다면,이 세 가지 원천들에 대해후자(경제)의 번영은 확인됩니다확실히오늘날의 지성적 저항의 정신(spirit)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구적 경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입니다나는 이러한 정신이 영국과 미국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저항의 정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그런 이야기는 상황에 대한 정말로 하찮고 유럽중심적인 설명방식(version)일 것입니다오히려 오늘날의 저항의 정신에 대한 문제는 확실히 무엇이 앵글로-색슨적인 경제의 지구적 승리로 환원됨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가를 아는 문제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따라서우리가 레닌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됩니다위대한 독일 철학의 전통에 대해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사유의 전통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위치되어 있는가우리는 앞의 두 원천들에 대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의심의 여지 없이프랑스-독일의 문제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 이 장소입니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moment)가 있고그래야만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해주신 프랑스와 독일 대사님들에게프랑스와 독일 대사관의 참사관,공사관님들에게그리고 괴테 인스티투트와 알리앙스 프랑세즈 관리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여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어떤 모종의 단편을 만들어 주신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이러한 단편은 광대하고 난해한 건설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의 건설의 일부입니다이러한 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가그것의 시작또는 최소한 그것의 생성에 대한 힌트가, 때때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계기가 세계적인 지성적 저항의 계기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전쟁의 정치를 지탱하고 의식의 황폐화를 촉발하는 순수한 경제의 야만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 계기입니다.


잠시 프랑스-독일적 계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합시다.

  

나는 역사 전반에 걸쳐 세 가지 종류의 프랑스-독일적 계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첫 번째 계기는 프랑스-독일의 전쟁들입니다. 1815, 1870, 1914, 1940년은 모두 위대한 계기들입니다위대한,가공할만하다는 의미에서 위대한. 1914년의 계기는예를 들어문자 그대로 20세기를 위한 정초적인 사건이었습니다그것은 그 동안 프랑스와 독일간의 격렬한 싸움이 실질적으로 유럽 문명을 파괴했던 시기(moment)였습니다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싸움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그리스 문명을 파괴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입니다나는 1914년에 누가 스파르타였고 누가 아테네였는지를 아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 대사님들 앞에서 의견을 개진하지 않겠습니다그것은 말하자면여러분이 그런 종류의 프랑스-독일적 계기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영웅적 학살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프랑스-독일의 연결에 대한프랑스-독일적 계기는 위대한 상업적금융적산업적 그리고 농업적 교환을 구성합니다이러한 교환은 석탄과 강철로부터 전기제품과 로켓에 이르기까지곡물과 맥주는 말할 것도 없이모든 것을 포함하는데모든 것의 교환이 강력한 금융에 의해 야기되며,우리의 굉장한 단일 통화유로의 창안을 향해 작동했던 바 있습니다비록 우리가 경제를 여러 나라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지는 않지만여러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물질적인 교환을 통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만큼이나 병합되어 있는 두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며이런 사실은 중요합니다우리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어쨌든 상업을 통해 형제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레닌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구성적 원천들 중 세번째로 꼽았던 것즉 영국과 미국의 정치 경제학과 관련하여프랑스와 독일이 이미 모종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따라서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독일적 경제 연합체의 매개체가 영어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물질적 기초는 모든 과정에 대해 필수적이지만그것은 새로운 정신성(spirituality)을 창조하지 않으며그것은 유럽적 공간의 문화적 일신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만들어내지 않으며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전 지구적 공간의 일신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사유를 위한 새로운 능력에 대한 매개(vehicle)로 작동하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최종적으로그러한 물질적 기초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운 언어도 창안하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증거는 이러한 경제적 통합의 언어가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그러한 통합의 언어는 일종의 영어적 은어영미화된 방언(patois)라는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전쟁과 위대한 물질적 교환에 뒤이어 세 번째 종류의 프랑스-독일적인 계기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이러한 교환들은 지성적문화적 그리고 주체적 교환들입니다이러한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명료함과 섬세함에 대한 독일적인 숭모에 대한 것입니다이러한 숭모는 괴테로부터 니체와 다른 여러 인물들을 걸쳐 브레히트에까지 이릅니다그러나 그것은 또한 독일의 심오함에 대한독일의 비전(상상력통찰력, vision), 즉 보들레르에게서 관찰 될 수 있으며 여전히 자끄 데리다모리스 블랑쇼 등과 같은 우리의 대부분의 최근 사상가들에게 남아있는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이것은 여기에서 그 역사가 종종 시험되거나 또는 기술되어온 바 있는그러나 그것의 긴장과 원대함에서 거의 수수께끼와 같은 하나의 검증가능한 프랑스-독일적 공간입니다.


우리는예를 들어프랑스 문학의 최고봉(chef doeuvre)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Rameaus Nephew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괴테의 독일어 번역으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우리는 또한 디드로의 책이 프랑스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던 반면그 조카라는 등장인물은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Sprit에서 들뢰즈가 개념적 인물로 칭하는 것즉 보편적인 의식의 인물상에 대한 고유한 이름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2차 대전의 무시무시한 심연 이후로 나치즘에 다양한 방식으로 부역했던 니체바그너 그리고 하이데거가 어떻게 프랑스에서 피난처와 제자들을 찾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그들은요컨대디드로가 프랑스어를 쓰는 독일 저술가가 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독일어를 쓰는 프랑스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되었던 것입니다여기에 바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정신적 역사가 있습니다그렇다면 나는 국적에 대한 게임에 참가하여 나의 대사님과 영사님들알리앙스 프랑세즈 직원들그리고 내 자신이 프랑스 남자들과 여자들이기에 명석하고 섬세하다고 말하려는 것일까요또는 독일 대사님과 영사님들괴테 인스티투트 직원들그리고 나의 친구 게르노트 카메케가 독일인들이기에 심오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몽상가들, visionaries)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러한 프랑스-독일적 정신성(spirituality)그것이 수수께끼 내에 실존하며또한 교차된 운명들을 용인하기 때문에두 민족들에 대한 심리학은 위태로운 기술이며 여러분은 또한 그것이 언제나 반대편으로 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임을 잘 알 것입니다하지만나는 상황이그 이상으로새롭다고 생각합니다나는 프랑스-독일적 관계들이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물질적 시대로 들어갈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따라서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창안과 사유의 연결고리에 대한 변증법이 그 스스로를 전환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나는 경제와 역사의 법을 따라서가 아니라면적어도 나의 바램에 따라서 이러한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여러분은내가 잠시 전에 회상했던 바 있는프랑스-독일 대전들의 시기에 뒤이어유럽적 맥락 내에 평화의 반-세기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맥락 또는 테두리(framework)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중요합니다우리는 이러한 구조에 대해 오늘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우리는 유럽이 하나의 필연적인 테두리라는 것을우리 역사의 위대한 주어진 것임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사유의 새로움(the new)을 찾으며 유럽을 정신적 발명들에 대한 하나의 가능적 틀로서 보게 되는 우리들에게 있어그것은 매우 협소한 테두리입니다.


첫째로유럽은 세계 내에 우리의 지성적 저항을 통해 상당한 수의 지지자들을 제쳐두고 있습니다예를 들어아르헨티나인들은최소한 우리가 유럽적 테두리를 경제적 지리학이라는 유일한 측면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해한다면, EU 회원국 후보로 선언할 수 있는 많은 권리들을  적어도 우리의 터키인 친구들만큼이나 많은 권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유럽은 시장 역학에 전제적인 방식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극심한 복잡성의 관료적 구조물에 편입되어 있습니다그러나 결국 우리는 오늘날의 유럽적 테두리에는 진정한 대중적 충동이 없다는 것즉 주체적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유럽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계 내에서 객관적인 무게(중요성, weight)를 가지지만유럽의 주체적 무게는 그 힘의 비축분에 미치지 못합니다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주체성입니다지금이 앞으로 나아가는발전하는성장하는 구조 내에 있는 그러한 주체성의 부재  그러한 주체성의 부재는 세계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황과 대면하게 됩니다.


오늘날우리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의 투쟁이 없는 시기에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하나의 새로운 독일의 구성과 같은 장벽의 붕괴로부터의 비범한 결과들의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그 모든 것 이후에무엇이 남아있을까요하나의 세계로서 기능하는 어떤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요?


한편으로우리에게는 미국의 헤게모니가프랑스적 고전주의에 특징적인 아이러니한 표현을 빌어내가 때때로 상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할 그런 헤게모니가 있습니다그리고다른 한편으로우리에게는우리의 오래된 국가들이 또한 한 때 경험했고그로부터 권력의 일부를 끌어왔던 전쟁내전, 극심한 노동빈곤전제정치그리고 자연의 황폐화와 같은 끔찍한 노고지독한 시험을 통해 서서히 힘을 얻어가는 어떤 위대한 인간적 집단들이 있습니다그렇습니다중국인도여러분의 이웃 브라질,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은 이러한 위대한 국가들은 현재 많은 고난을 견뎌내고 있고떠오르고 있으며,여전히 반쯤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인들과 같이 일어서고 있습니다그래서우리는 무엇입니까우리 유럽 국가들은 어떤 것입니까이러한 세계의 새로운 형상 내에서 주체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무엇일까요무엇이 우리의 역할입니까무엇이 우리의 역사적 기능일까요?


나는 확신합니다만일 사유를 통한 우리의 실존이우리의 정신적 실존이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것에,노력 그리고 분투를 통해 태어나고 있는 탈-서구적 세계(후기-서구적 세계, post-Occidental world)에 부합한다면하나의 창조적 몸짓즉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다시 취하여 일으키는 몸짓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하나의 현저한 새로움이우리의 주체성을 촉발하며 무엇보다 새로운 가능한 것들을 창안하는 그러한 역사적 결정들 중의 하나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나는 확신합니다이러한 결정은 독일과 프랑스의 하나의 새로운 연합체로의 병합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나는 하나의 새로운 국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는데왜냐하면 이러한 병합의 너머에서우리는 국가라는 오래된 형식 이상의그 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병합이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렇습니다독일과 프랑스에 대한 일종의 물질적이고 지성적인 통합이 오늘날의 과제인 것입니다그러한 계기가 다가오고 있거나또는 이미 도래했으며그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사유해야만 합니다독일과 프랑스또는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라 불리는 것은 단지 서로를 향해 걸음을 떼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독일과 프랑스는 서로가 되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께 나의 철학적 소원을 말하겠습니다그것은 프랑스와 독일이 언젠가세계 앞에서하나의 단일한 힘 이외의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잠시 후에나는 그런 힘이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 할 것입니다내가 보기에그것은 결코 닫힘의 또는 그 자체로의 물러남의 힘이어서는 안 되며그것은 열려있는 어떤 것의 힘그 스스로를 모두에게 제시하는 어떤 것의 힘이어야만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무엇이 프랑스입니까잠시 프랑스의 사라짐(!)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독일-프랑스적 열림으로의 사라짐 이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입니다내가 상당히 젊었을 때내 스승들 중 한 명인 루이 알튀쎄는 내게 말했습니다프랑스는 그 과도하게 오랜 역사에 의해 짖눌린 나라다. 나는 그 당시에 그가 옳다고 생각했고, 오늘날 더더욱이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프랑스에는 매우 늙어버린 어떤 사람처럼 프랑스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모종의 과도하게 평온한 확실성이 있을 정도의 장구한 역사가 있습니다프랑스는 종종 그 확실성의 범위와 평온함으로 다른 국가들을 불편하게 합니다프랑스는 존재하며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그러나 아마도 프랑스는 그러한 생존이 진정하게 실존인지에 대해 충분히 스스로 질문하지 않습니다프랑스는 종종 세계의 눈에 프랑스가 일군의 추상적 원칙들을 구체화한다고 비췰 것이라고 믿지만그러나 프랑스가 구체적인 원칙들을 망각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프랑스는 힘이 빠져버린 영광과 같으며그러한 지쳐버린 영광은 비밀스럽게 하나의 새로운 탄생을 열망합니다.


나는 쾌히 프랑스를 오르세나라는 이름의 도시에 비교할 것인데이 도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여러분들 중 일부는 알고 있을 쥘리앙 그락의 시르트의 해안(Le Rivage des Sytrtes)이라는 제목의 매우 아름다운 책에 나오는 도시입니다시르트의 해안에서쥘리앙 그락은 훌륭하게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 내에서 참고 있는그러나 실제로는 조용하게 침략파괴 그리고 최후를 바라는 한 잠자는 도시를 제시합니다무언가 새로운 것이 마침내 일어나기를 바라는심지어 그 새로운 무언가가 끔찍한 것이라 할지라도심지어 그 새로운 무언가가 죽음이라 할지라도오르세나가 전쟁으로 들어서게 되는 음모를 꾸몄던 늙은 다니엘로가이미 전쟁에서 질 것을 알면서마침내 말하는 것과 같이해변에서 썩고 있는 보트,누구라도 그것을 파도로 밀어 넣는 자( 그것을 잃어버림에 대해서는 태연하지만결코 그것의 목적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을 욕망하는 것이 나의 오래된 골족의 나라(Gallic country)를 파도로 밀어 넣기를 욕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야만 할까요프랑스의 경우는 틀림없이 덜 낭만적이고그것의 안정성은 보다 촌스러운 것입니다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본성에 속하는 것입니다약간은 하찮은 표현을 사용해봅시다혹자는 프랑스에 대해 그가 어떤 열매에 대해서나 말할 법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여전히 좋은 열매지만 어느정도는 너무 익었다고.


이제 독일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대사님내가 독일에 대해 외부인으로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독일은 영원히 그 정체성에 대한 고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나라입니다이것이 아마도 독일이 오늘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공유하는 유사점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뇌입니다독일은 영속적으로명시적으로또는 비밀스럽게, 스스로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나라입니다너무나도 독일인다운 사상가인 하이데거가 주체는 그것에 대해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의 존재인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독일은 그것이 독일의 문제인 그런 나라입니다그리고 그것이 독일이 프랑스의 정반대인 이유입니다프랑스는 독일이 불확실한 것만큼이나 그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프랑스가 제시하고단언하고실존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확신합니다.


독일은 언제나 상반되는 두 역사적 실존의 형식들 사이에서 주저했고동요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편으로 독일이 공국들로 나뉘어 있었던 반면다른 위대한 유럽 국가들은 중앙화로 나아가고 있었던 그런 시기에 있어서의 일종의 하위-실존(sub-existence)을, 그리고 또한의심의 여지 없이그 기나긴 냉전 시기 동안두 독일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반에서가장 훌륭한 두 학생들로 행동해야만 했던 그 시기의 하위-실존을 발견합니다그리고 다른 한편으로우리는 예를 들어 독일이 스스로 새로운 그리스인 것처럼 사유했던 시기와 같은 독일의 신화적인 초-실존(super-existence)을, 또는 그 보다 한층 더 심한 것으로독일이 1000년 제국(Thousand-Year Reich)의 창설을 선포하고그 시도를 통해 유럽 전체를 황폐화시켰던 그 시기의 초-실존을 발견합니다.

 

만일 프랑스가 하나의 기진맥진한 영광이라면나는 서슴없이 독일은 하나의 닳고닳아 버린 질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하위-실존 그리고 초-실존 사이에서 너무나 많이 변화함으로 인해 닳아빠져 버린 그런 질문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술어들을 교환하고그렇게 함을 통해피곤함과 고뇌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가 도래했다고 믿습니다프랑스가 스스로를 억제하여 독일에 그 역사적 확실성이라는 선물을 주도록 합시다독일이 스스로를 억제하여 프랑스에 절제된(disciplined) 고민이라는 독일의 천재성을 주도록 합시다그 자체로우리는 우선 명백하게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집합의 건설에 착수하게 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사유의 새로운 변증법이라는 지지대를 만들어냄에 대한 것입니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나는 어떠한 현실적인 주체적 영향력도 없는 이질적인 유럽이 우리의 세계와 그 세계를 위협하는 가공할 전개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확실하게 필요한 이러한 건설은 본질적으로 다른 단편들을 함께 연결하겠지만그 단편들의 내재성 또는 지성적 견고함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그리고 프랑스와 프랑스인들 그리고 독일과 독일인들이 그렇게 되었던 바 있는 사태(정황, things)  오랜 피곤함의 형상들과 오래된 닳아빠진 질문들이라는  가 이 과제와 동등하지 않습니다우리들창설되고 있는 가공할 세계의 동시대인들인 우리들은 주체적으로 비활성적이며 무기력한 관료제적 공간의 건설과 그 덕목들이 소진되어버린 민족국가적 영광을 위한 향수 사이에서의 진자 운동에 종언을 고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내가 말하고자 하는그런데 내가 그 경로를 알지 못하는 결단그러나 그것이 와야만 함을 알고 있는 그러한 결단  프랑스-독일 통합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위한 결단  은 하나의 정당한 결단입니다그것은 어떠한 건설(구성, construction)에도 반하지 않으며완전히 반대로새로운 가능적인 것의 의미를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내가 여기에서 프랑스와 독일을 함께 묶음을 통해 실질적인 힘을 획득함에 대해 말할 때나는 하나의 새로운 국경하나의 새로운 울타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나는 하나의 자기-충족적인 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나는 하나의 새로운 형상에 대해초국가적이지만 동시에 긍정적인(적극적인, affirmative) 하나의 창안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즉도래할 세계 내에서 열려있게 될 어떤 것의 형상삶과 같이 모든 것에 대해 열려있는 어떤 것의 형상입니다하나의 열려있는 새로움하나의 연합체그러나 그 자체의 열림(ouverture)에 대해 드러난 연합체인 것입니다.


위대한 독일 시인이자 또한 어느 정도는 프랑스인이기도 한 릴케는 두이노 비가Duino Elegies의 여덟 번째 편에서 열림에 대해 훌륭하게 말했던 바 있습니다그래서우리가 프랑스-독일적 계기의 창조에 기여하는 이곳 아르헨티나에 있음으로나는 우리를 오늘 여기에서 연합시킨 세 언어들  시가 원래 쓰여진 언어인 독일어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번역  을 통해 릴케의 여덟 번째 비가의 도입부를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내게 이 프랑스-독일적 건설의 시적인 계기를 허락해 주십시오그리고 우선독일어로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여덟 번째 비가를 읽는 장면을그리고 스페인어로의 동시 통역을 상상해야 한다.)

 

Mit allen Augen sieht die Kreatur

das Offene. Nur unsere Augen sind

wie umgekehrt und ganz um sie gestellt

als Fallen, rings um ihren freien Ausgang.

Was draussen ist, wir wissen aus des Tiers

Antliz allein; denn schon das fruhe Kind

Wenden wir um und zwingens, dass es ruckwarts

Gestaltung sehe, nicht das Offne, das

Im Tiergesicht so tief ist. Frei von Tod.

Ihn sehen wir allein; das freie Tier

Hat seinen Untergang stets hinter sich

Und vor sich Gott, und wenn es geht, so gehts

In Ewigkeit, so wie die Brunnen gehen.

Wir haben nie, nicht einen einzigen Tag,

den reinen Raum vor uns, in den die Blumen

unendlich aufgehn. Immer ist das Welt

und niemals Nirgends ohne Nicht:

das Reine, Unuberwachte, das man atmet und

unendlich weids und nicht begehrt. Als Kind

verliert sich eins stillen an dies und wird

geruttelt.

 

내 차례입니다나는 막시민느의 번역을 제공할 것인데다소 원래 텍스트에서 제거된 부분이 있지만,그래도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Tous les regards, detout ce qui vit, regardent vers louvert.

Seuls nos yeux, comme tournea lenvers, tel un circle de

pieges, empechent toute issue.

Lau-dela du cercle, nous ne le connaissons

qu'a travers le regard des betes.

Car des la plus tendre enfance, nous orientons le petit

d'homme vers les ombres derriere lui, et non vers louvert,

si profond dans lexpression des betes.

Liberes, sans la mort.

Ah, elle! Nous ne voyons quelle!

La bete libre a toujours sa perte derriere elle:

devant elle, Dieu. Ainsi lorsquelle va, cest en tout eternite,

comme vont les sources.

Nous jamais nous navons, pas un seul jour, devant nous

le pur et simple espace

dans lequel les fleurs ne cessent de sepanouir.

Cest encore et toujours le monde :

Jamais ce nulle part ou le neant nexiste pas,

ou la purete, sans regard sur elle-meme, se respire et se

connait, a linfini, sans lombre dune convoitise.

Voici quun enfant sy perd dans le silence :

Il sen trouve bouleverse.

 

피조물은 모든 눈으로 열림을 바라본다.

우리의 눈만이 뒤집힌 듯 덫으로 친 원처럼 모든 길을 막는다.

원의 저편(Lau-dela du cercle), 우리는 그것을

짐승들의 시선을 통해 알 뿐이다.

아이의 가장 어린 시절로부터우리는 그 인간의 작음을 그의 뒤편의 음영으로 향하게 하고열림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짐승들의 표정 속에 너무나 깊음에도.

죽음 없이 자유로운.

죽음우리는 그것만을 볼 뿐이다!

자유로운 짐승은 언제나 뒤에 그것(죽음소멸, mort)의 상실을 두며,

그 앞에신을 둔다그래서 그것이 갈 때에는영원으로 향한다.

샘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결코 단 하루도 우리 앞에

순수하고 단순한 공간을 두지 못한다.

그 안에서 꽃들이 피기를 멈추지 않는.

언제나 세계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부분결코 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음이 실존하지 않는순수함이그 스스로에 대한 지배 없이끝없이(무한하게a l'infini), 갈망의 그림자 없이호흡되고 알려지는.

여기에서 한 아이가 은밀히 길을 잃는다:

그는 당황한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릴케가 열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이 비가에서 그는 시적으로 그것에 세 가지 형상들을 귀속시킵니다이 세 형상들은 그에게 있어 세계의 닫힘으로부터 빼내어진 것에 대한 세 가지 결정적인 예시들입니다그 열림은과거와 같이언제나 우리 뒤에 있는그리고 있지 않은그것에 자유롭게 내맡겨진 공간입니다그리고 그것은 언제나세계의 두터운 구조물과 같이언제나 우리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이 세가지 예시들은 짐승아이 그리고 연인입니다짐승아이 그리고 연인은 릴케의 비가의프랑스어로도 시를 썼던 이 위대한 독일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운동을 조직하는 위대한 형상들입니다.


릴케의 시가 언젠가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으로부터 내가 도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지침으로서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이러한 병합은 그렇게 새로운 국가 또는 새로운 산업  분명히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아이새로운 짐승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짐승으로부터 시작해봅시다새로운 역사적 짐승정확하게 하나의 민족은 아니겠지만하나의 민족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그것은 민족국가와 오래된 민족적 전통들의 완전한 폐기 사이에 위치되어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정확하게 국가는 아니겠지만국가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닐 것입니다그것은 세계화되지 않을 것이지만-세계화되지도(anti-globalized)않을 것입니다그것은 독창적인 집합일 것이며따라서 하나의 창조물일 것입니다이 지점에서우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를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질 들뢰즈는 두 개의 매우 다른매우 이질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서로에게 접합하여서로에게 들어맞게 될 때어떻게 우리가 하나 또는 다른 하나도 아닌 둘의 괴물(monster)을 얻게 되는지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여러분 앞에서 오늘 밤,나는 우리가 마침내 전 세계에 대해 운명지어진전 세계에 대해 열려있는프랑스와 독일의 괴물을 만들어낼 과제에 착수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아이도 그렇습니다새로운 아이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교육해야만 할스스로 자라나야만 할그 스스로를 키워야만 할 어떤 것을 다루고 있기에과거의 훈육(discipline)너무나 많은 질문들로 닳아버린 독일적인 과거의 훈육에, 또는 너무나 많은 확실성들에 의해 지쳐버린 프랑스적인 과거의 훈육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을 어떤 것이기 때문에새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우리 모임의 개최국과는 달리 오래된 나라들로부터 왔습니다이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아이의 형상이며열심히 물장구를 치지만 피곤하지 않은 역사의 유아기에 있습니다우리는 오래된 나라들로부터 왔지만어쩌면 우리를 함께 합침으로써우리의 위대한 시대들을 합침으로써우리는 이 늙은 사람 내부에 내포된 아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시간의 흐름을 뒤로 돌려우리는 우리를 압도하는 그 위대한 역사적 짖눌림을 순진하고 창조적인 어떤 것으로 전환할 것입니다나는 진정으로 이 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이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짐승일 수 있는 것과 같이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아이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그것은 민족들간의 하나의 새로운 사랑일 수 있습니다오늘날 민족들은몇몇 영광스러운 예외들에도 불구하고대체로 서로를 무시할 것을너무나 많이서로에게 무관심할 것을 고집합니다이런 류의 결정은 민족들간의 유대들과 우정에 관해 단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해내지 못할 뿐입니다사랑과 우정의 문제들을 통해한 민족이 동일한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차이 내에서 사는지 아니면 무-차이의 결정 내에서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병합의 결정으로어떤 것은 심대하게 동요되고붕괴될 것입니다우리는 우리가 동일자(the same)라는 것을 알 것이며이 동일자의 요소를 배우고 살아가는 것에 대처해야만 할 것입니다이러한 사랑의 연습은 두 민족들이 서로에게 관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이러한 새로운 짐승새로운 아이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이 모든 것들이 큰 장벽 뒤에 갇혀있습니다오히려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지구의 표면 위에 있는특히 유럽의 표면 위에 있는 단순한 흔적[trace]입니다내가 꿈꾸는 이 프랑스-독일적 연합체는 그어지게 될 선과 같은 것이며지어지게 될 요새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모든 사람이 그 선을 가로지를 수 있고모든 사람들이 선을 지울 수 있습니다하지만모든 사람이 또한 그것을 보아야만 하며그것의 새로운 실재를 통해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모든 사람이 그것은 하나의 기입하나의 흔적사유의 장소에 대한 흔적이라는 것을우리의 의견 불일치와 일치를aufheben의 의미에서surmonter의 의미에서 지양(sublate)하는 흔적이라는 것을우리의 의견 일치들을 통해 닳아빠진 것그리고 우리의 의견 불일치를 통해 시대에 뒤쳐진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흔적의 관념두 민족들과 그들의 상반된 역사들과 술어들을 감싸게 될 새로운 선에 대한 관념은 자연스럽게 나로 하여금 그것이 우리의 주위에서 열게 될 정의의 어루만짐과 같은 어떤 것이리라 생각하게 합니다게다가여러분이 단지 부분적으로 들었을 뿐인 여덟 번째 비가에서릴케는 그 열림의 형상들 중 하나인 그 짐승에 대해그것이 무한하며이해할 수 없고내성적이지 않으며순수하다,그것이 이런 측면에서열림에 관련하여원의 저편(au-dela du cercle)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명백히나는 브레히트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정의에 대한 희곡작품인 코카서스의 백색 원The Caucasian Chalk Circle이라 불리는 브레히트의 위대한 희곡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브레히트 또한 약간은 프랑스인입니다나의 친애하는 독일인 친구 여러분내게 이 이어지는 부가적인 이야기들을 허용해주십시오이것들은 단지 우리의 병합에 대해 예비적인 것일 뿐입니다브레히트는 만일 여러분이 그의 초창기 연극 작품들 중 하나인 도시들의 정글 안에서In the Jungle of Cities의 텍스트를 보게 된다면랭보의 전체 구절들이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마치 그 구절들이 그것을 통해 태어난 것처럼독일어의 신선함 속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느정도는 프랑스 사람인 것입니다젊은 브레히트는 절대적으로 랭보라는 인물에 매료되었습니다여러 차례 그는 자신의 글쓰기 전형이 프랑스의 18 세기의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게다가,프랑스의 17세기 글쓰기가 어떠한 독일인도 결코 파악할 수 없는 투명성과 생동감을 생산했다는 것이 하나의 오래된 독일적 관념입니다하지만우리 프랑스인들우리는 영원히 우리에 대해서는 접근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는 사변적인 독일의 깊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제안은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교환하자는그 모든 것을 융합하자는 것입니다우리는 명료한 프랑스적 빠름에 독일적 깊이를 도입하고, 독일적 기강(discipline)에 프랑스적 비평의 쾌활함을 도입할 것입니다그런 이후어떤 신비로운 변형적 화학작용을 통해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두 대사님들이 서로에게 융합될 것이고세계 도처에 알리알스 프랑코-알르망드(Alliances Franco-allemandes)들이,괴테-디드로 인스티투트(Goethe-Diderot Instituts)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그것은 하나의 진정한 유럽적 흔적또는 유럽이 이 흔적과 이 열림에 대해 배치할 수 있는 어떤 것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그것은 전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하나의 새로운 코카서스의 백색 원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우리가어떠한 원인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한, 단호하게궁극적으로 정신적인(spiritual) 행동을 통해, 그것을 생산하기를나는 바랍니다확실하지만 우호적인 하나의 정신적인 몸짓을우리가 프랑스-독일적인 백색 원의 흔적을 유럽 안에서 요청할 수 있게 될 그러한 몸짓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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