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의 힘: 독일과 프랑스 융합의 필요성에 대한 한 담론 The Power of the Open: A Discourse on the Necessity of Fusing Germany and France
이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오늘 저녁 여기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정신적인(spiritual) 공동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나는 동시대적인 세계 내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복잡한 만큼이나 중대한 문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어쩌면, 그 효과가 미칠 영향력이 전 세계에 관계되는 이상, 또한 그 현실을 통한 그리고 또한 사유를 통한 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짧은 기간을 두고 중대한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여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우리에게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그저 여느 장소가 아닙니다. ‘여기 이 장소’는 프랑스-독일의 지성적 논쟁에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여기’라는 장소를 단지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특정하게, 라틴 아메리카에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보다 더 특정하게, 아르헨티나라는 의미에서 말합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비범한 지성적이고, 문화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이 있습니다. 영화로부터 철학까지 뻗쳐있고, 연극, 음악 그리고 회화를 포함하는 예술의 그리고 사유의 구체적인 집중(intensity)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늘 저녁에 모인 여러분의 수로 판단할 때, 그러한 열렬함(keenness)은 심지어 프랑스와 독일의 지성적 운명에 대한 담화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나라가 붕괴의 직전에 이르렀던 아르헨티나인들은 심지어 지독한 위기의 시기에 임해서도,터무니없는 고통의 시기에 임해서조차도, 전 세계에, 그들이 창조와 사유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 보아야 할 분투하는 정신적인(spiritual) 저항이 실존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프랑스-독일의 문제, 정치적 건설(구성, construction)의 문제가 됨과 함께, 또한 기본적으로 지성적 저항에 대한, 사유를 통한 저항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만일 독일과 프랑스가 창조와 행동으로 통합을 향해 움직인다면, 유럽의 정신적인 운명은 그 움직임을 지속할 것입니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리고 장소로서, 아르헨티나는, 물론, 유일무이합니다. 그러나, 유일무이함과 동시에, 아르헨티나는 또한 유럽의 정신적인 운명의 후계자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그러므로 바로 그 핵심에 있어 독일과 프랑스에 일어나는 일에 관련됩니다.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하나의 변주곡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나는 한 때 각광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오늘날에는 완전히 잊혀져 버린 텍스트를, 레닌에 의해 쓰여진 텍스트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 텍스트의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의 세가지 원천들과 세 가지 구성요소들The Three Sources and Three Component Parts of Marxism입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 독일의 철학, 프랑스의 혁명적 사유 그리고 영국의 정치 경제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문제를 옆으로 밀어두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봅시다: 이 세 가지 원천들에 대해 우리는 오늘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영국 또는 미국의 경제와 관련하여,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우리는 상당히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문들과 담론들로 인해, 여러분은 경제가 실존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이 세 가지 원천들에 대해, 후자(경제)의 번영은 확인됩니다. 확실히, 오늘날의 지성적 저항의 정신(spirit)은 어느 정도까지는 지구적 경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입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이 영국과 미국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저항의 정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상황에 대한 정말로 하찮고 유럽중심적인 설명방식(version)일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저항의 정신에 대한 문제는 확실히 무엇이 앵글로-색슨적인 경제의 지구적 승리로 환원됨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가를 아는 문제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레닌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됩니다: 위대한 독일 철학의 전통에 대해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사유의 전통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위치되어 있는가? 우리는 앞의 두 원천들에 대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프랑스-독일의 문제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 이 장소입니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moment)가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해주신 프랑스와 독일 대사님들에게, 프랑스와 독일 대사관의 참사관,공사관님들에게, 그리고 괴테 인스티투트와 알리앙스 프랑세즈 관리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어떤 모종의 단편을 만들어 주신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이러한 단편은 광대하고 난해한 건설, 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의 건설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프랑스-독일적 계기가, 그것의 시작, 또는 최소한 그것의 생성에 대한 힌트가, 때때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계기가 세계적인 지성적 저항의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정치를 지탱하고 의식의 황폐화를 촉발하는 순수한 경제의 야만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 계기입니다.
잠시 프랑스-독일적 계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합시다.
나는 역사 전반에 걸쳐 세 가지 종류의 프랑스-독일적 계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계기는 프랑스-독일의 전쟁들입니다. 1815년, 1870년, 1914년, 1940년은 모두 위대한 계기들입니다. ‘위대한’, 즉,가공할만하다는 의미에서 위대한. 1914년의 계기는, 예를 들어, 문자 그대로 20세기를 위한 정초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프랑스와 독일간의 격렬한 싸움이 실질적으로 유럽 문명을 파괴했던 시기(moment)였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싸움이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그리스 문명을 파괴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1914년에 누가 스파르타였고 누가 아테네였는지를 아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 대사님들 앞에서 의견을 개진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여러분이 그런 종류의 프랑스-독일적 계기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영웅적 학살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프랑스-독일의 연결에 대한, 프랑스-독일적 계기는 위대한 상업적, 금융적, 산업적 그리고 농업적 교환을 구성합니다. 이러한 교환은 석탄과 강철로부터 전기제품과 로켓에 이르기까지, 곡물과 맥주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데, 모든 것의 교환이 강력한 금융에 의해 야기되며,우리의 굉장한 단일 통화, 유로의 창안을 향해 작동했던 바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경제를 여러 나라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지는 않지만, 여러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물질적인 교환을 통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만큼이나 병합되어 있는 두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며, 이런 사실은 중요합니다. 우리 독일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어쨌든 상업을 통해 형제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구성적 원천들 중 세번째로 꼽았던 것, 즉 영국과 미국의 정치 경제학과 관련하여, 프랑스와 독일이 이미 모종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독일적 경제 연합체의 매개체가 영어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물질적 기초는 모든 과정에 대해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신성(spirituality)을 창조하지 않으며, 그것은 유럽적 공간의 문화적 일신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만들어내지 않으며,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 지구적 공간의 일신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사유를 위한 새로운 능력에 대한 매개(vehicle)로 작동하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최종적으로, 그러한 물질적 기초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운 언어도 창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이러한 경제적 통합의 언어가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통합의 언어는 일종의 영어적 은어, 영미화된 방언(patois)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쟁과 위대한 물질적 교환에 뒤이어 세 번째 종류의 프랑스-독일적인 계기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교환들은 지성적, 문화적 그리고 주체적 교환들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명료함과 섬세함에 대한 독일적인 숭모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숭모는 괴테로부터 니체와 다른 여러 인물들을 걸쳐 브레히트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독일의 심오함에 대한, 독일의 비전(상상력, 통찰력, vision), 즉 보들레르에게서 관찰 될 수 있으며 여전히 자끄 데리다, 모리스 블랑쇼 등과 같은 우리의 대부분의 최근 사상가들에게 남아있는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그 역사가 종종 시험되거나 또는 기술되어온 바 있는, 그러나 그것의 긴장과 원대함에서 거의 수수께끼와 같은 하나의 검증가능한 프랑스-독일적 공간입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프랑스 문학의 최고봉(chef d’oeuvre)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Rameau’s Nephew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괴테의 독일어 번역으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또한 디드로의 책이 프랑스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던 반면, 그 조카라는 등장인물은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Sprit에서 들뢰즈가 ‘개념적 인물’로 칭하는 것, 즉 보편적인 의식의 인물상에 대한 고유한 이름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2차 대전의 무시무시한 심연 이후로 나치즘에 다양한 방식으로 부역했던 니체, 바그너 그리고 하이데거가 어떻게 프랑스에서 피난처와 제자들을 찾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컨대, 디드로가 프랑스어를 쓰는 독일 저술가가 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독일어를 쓰는 프랑스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정신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국적에 대한 게임에 참가하여 나의 대사님과 영사님들, 알리앙스 프랑세즈 직원들, 그리고 내 자신이 프랑스 남자들과 여자들이기에 명석하고 섬세하다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또는 독일 대사님과 영사님들, 괴테 인스티투트 직원들, 그리고 나의 친구 게르노트 카메케가 독일인들이기에 심오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몽상가들, visionaries)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러한 프랑스-독일적 정신성(spirituality)은, 그것이 수수께끼 내에 실존하며, 또한 교차된 운명들을 용인하기 때문에, 두 민족들에 대한 심리학은 위태로운 기술이며 여러분은 또한 그것이 언제나 반대편으로 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임을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그 이상으로, 새롭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프랑스-독일적 관계들이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물질적 시대로 들어갈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창안과 사유의 연결고리에 대한 변증법이 그 스스로를 전환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경제와 역사의 법을 따라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나의 바램에 따라서 이러한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잠시 전에 회상했던 바 있는, 프랑스-독일 대전들의 시기에 뒤이어, 유럽적 맥락 내에 평화의 반-세기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맥락 또는 테두리(framework)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에 대해 오늘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우리는 유럽이 하나의 필연적인 테두리라는 것을, 우리 역사의 위대한 주어진 것임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유의 새로움(the new)을 찾으며 유럽을 정신적 발명들에 대한 하나의 가능적 틀로서 보게 되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것은 매우 협소한 테두리입니다.
첫째로, 유럽은 세계 내에 우리의 지성적 저항을 통해 상당한 수의 지지자들을 제쳐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인들은, 최소한 우리가 유럽적 테두리를 경제적 지리학이라는 유일한 측면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해한다면, EU 회원국 후보로 선언할 수 있는 많은 권리들을 – 적어도 우리의 터키인 친구들만큼이나 많은 권리들을 – 가지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유럽은 시장 역학에 전제적인 방식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극심한 복잡성의 관료적 구조물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오늘날의 유럽적 테두리에는 진정한 대중적 충동이 없다는 것, 즉 주체적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유럽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계 내에서 객관적인 무게(중요성, weight)를 가지지만, 유럽의 주체적 무게는 그 힘의 비축분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주체성입니다. 지금, 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하는, 성장하는 구조 내에 있는 그러한 주체성의 부재 – 그러한 주체성의 부재는 세계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황과 대면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의 투쟁이 없는 시기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하나의 새로운 독일의 구성과 같은 장벽의 붕괴로부터의 비범한 결과들의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 이후에,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하나의 세계로서 기능하는 어떤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요?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프랑스적 고전주의에 특징적인 아이러니한 표현을 빌어, 내가 ‘때때로 상당히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할 그런 헤게모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오래된 국가들이 또한 한 때 경험했고, 그로부터 권력의 일부를 끌어왔던 전쟁, 내전, 극심한 노동, 빈곤, 전제정치, 그리고 자연의 황폐화와 같은 끔찍한 노고, 지독한 시험을 통해 서서히 힘을 얻어가는 어떤 위대한 인간적 집단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국, 인도, 여러분의 이웃 브라질,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은 이러한 위대한 국가들은 현재 많은 고난을 견뎌내고 있고, 떠오르고 있으며,여전히 반쯤 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인들과 같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유럽 국가들은 어떤 것입니까? 이러한 세계의 새로운 형상 내에서 주체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의 역할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역사적 기능일까요?
나는 확신합니다. 만일 사유를 통한 우리의 실존이, 우리의 정신적 실존이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것에,힘, 노력 그리고 분투를 통해 태어나고 있는 탈-서구적 세계(후기-서구적 세계, post-Occidental world)에 부합한다면, 하나의 창조적 몸짓, 즉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다시 취하여 일으키는 몸짓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하나의 현저한 새로움이, 우리의 주체성을 촉발하며 무엇보다 새로운 가능한 것들을 창안하는 그러한 역사적 결정들 중의 하나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나는 확신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과 프랑스의 하나의 새로운 연합체로의 병합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국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병합의 너머에서, 우리는 국가라는 오래된 형식 이상의, 그 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병합이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해봅시다.
그렇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에 대한 일종의 물질적이고 지성적인 통합이 오늘날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계기가 다가오고 있거나, 또는 이미 도래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사유해야만 합니다: 독일과 프랑스, 또는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라 불리는 것은 단지 서로를 향해 걸음을 떼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가 되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께 나의 철학적 소원을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프랑스와 독일이 언젠가, 세계 앞에서, 하나의 단일한 힘 이외의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잠시 후에, 나는 그런 힘이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 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결코 닫힘의 또는 그 자체로의 물러남의 힘이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열려있는 어떤 것의 힘, 그 스스로를 모두에게 제시하는 어떤 것의 힘이어야만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무엇이 프랑스입니까? 잠시 프랑스의 사라짐(!)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독일-프랑스적 열림으로의 사라짐 이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입니다. 내가 상당히 젊었을 때, 내 스승들 중 한 명인 루이 알튀쎄는 내게 말했습니다: ‘프랑스는 그 과도하게 오랜 역사에 의해 짖눌린 나라다.’ 나는 그 당시에 그가 옳다고 생각했고, 오늘날 더더욱이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프랑스에는 매우 늙어버린 어떤 사람처럼 프랑스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모종의 과도하게 평온한 확실성이 있을 정도의 장구한 역사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종종 그 확실성의 범위와 평온함으로 다른 국가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프랑스는 존재하며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프랑스는 그러한 생존이 진정하게 실존인지에 대해 충분히 스스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종종 세계의 눈에 프랑스가 일군의 추상적 원칙들을 구체화한다고 비췰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프랑스가 구체적인 원칙들을 망각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프랑스는 힘이 빠져버린 영광과 같으며, 그러한 지쳐버린 영광은 비밀스럽게 하나의 새로운 탄생을 열망합니다.
나는 쾌히 프랑스를 오르세나라는 이름의 도시에 비교할 것인데, 이 도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여러분들 중 일부는 알고 있을 쥘리앙 그락의 시르트의 해안(Le Rivage des Sytrtes)이라는 제목의 매우 아름다운 책에 나오는 도시입니다. 시르트의 해안에서, 쥘리앙 그락은 훌륭하게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 내에서 참고 있는, 그러나 실제로는 조용하게 침략, 파괴 그리고 최후를 바라는 한 잠자는 도시를 제시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마침내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지어 그 새로운 무언가가 끔찍한 것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그 새로운 무언가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오르세나가 전쟁으로 들어서게 되는 음모를 꾸몄던 늙은 다니엘로가, 이미 전쟁에서 질 것을 알면서, 마침내 말하는 것과 같이: ‘해변에서 썩고 있는 보트,누구라도 그것을 파도로 밀어 넣는 자(는) … 그것을 잃어버림에 대해서는 태연하지만, 결코 그것의 목적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을 욕망하는 것이 나의 오래된 골족의 나라(Gallic country)를 파도로 밀어 넣기를 욕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야만 할까요? 아! 프랑스의 경우는 틀림없이 덜 낭만적이고, 그것의 안정성은 보다 촌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본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약간은 하찮은 표현을 사용해봅시다. 혹자는 프랑스에 대해 그가 어떤 열매에 대해서나 말할 법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좋은 열매지만 어느정도는 너무 익었다고.
이제 독일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대사님, 내가 독일에 대해 외부인으로서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독일은 영원히 그 정체성에 대한 고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독일이 오늘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공유하는 유사점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뇌입니다. 독일은 영속적으로, 명시적으로, 또는 비밀스럽게, 스스로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나라입니다. 너무나도 독일인다운 사상가인 하이데거가 주체는 그것에 대해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의 존재인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독일은 그것이 독일의 문제인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독일이 프랑스의 정반대인 이유입니다. 프랑스는 독일이 불확실한 것만큼이나 그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프랑스가 제시하고, 단언하고, 실존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확신합니다.
독일은 언제나 상반되는 두 역사적 실존의 형식들 사이에서 주저했고, 동요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편으로 독일이 공국들로 나뉘어 있었던 반면, 다른 위대한 유럽 국가들은 중앙화로 나아가고 있었던 그런 시기에 있어서의 일종의 하위-실존(sub-existence)을, 그리고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그 기나긴 냉전 시기 동안, 두 독일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반에서, 가장 훌륭한 두 학생들로 행동해야만 했던 그 시기의 하위-실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독일이 스스로 새로운 그리스인 것처럼 사유했던 시기와 같은 독일의 신화적인 초-실존(super-existence)을, 또는 그 보다 한층 더 심한 것으로, 독일이 1000년 제국(Thousand-Year Reich)의 창설을 선포하고, 그 시도를 통해 유럽 전체를 황폐화시켰던 그 시기의 초-실존을 발견합니다.
만일 프랑스가 하나의 기진맥진한 영광이라면, 나는 서슴없이 독일은 하나의 닳고닳아 버린 질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위-실존 그리고 초-실존 사이에서 너무나 많이 변화함으로 인해 닳아빠져 버린 그런 질문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술어들을 교환하고, 그렇게 함을 통해, 피곤함과 고뇌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가 도래했다고 믿습니다. 프랑스가 스스로를 억제하여 독일에 그 역사적 확실성이라는 선물을 주도록 합시다. 독일이 스스로를 억제하여 프랑스에 절제된(disciplined) 고민이라는 독일의 천재성을 주도록 합시다. 그 자체로, 우리는 우선 명백하게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집합의 건설에 착수하게 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사유의 새로운 변증법이라는 지지대를 만들어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떠한 현실적인 주체적 영향력도 없는 이질적인 유럽이 우리의 세계와 그 세계를 위협하는 가공할 전개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필요한 이러한 건설은 본질적으로 다른 단편들을 함께 연결하겠지만, 그 단편들의 내재성 또는 지성적 견고함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프랑스인들 그리고 독일과 독일인들이 그렇게 되었던 바 있는 사태(정황, things) – 오랜 피곤함의 형상들과 오래된 닳아빠진 질문들이라는 – 가 이 과제와 동등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창설되고 있는 가공할 세계의 동시대인들인 우리들은 주체적으로 비활성적이며 무기력한 관료제적 공간의 건설과 그 덕목들이 소진되어버린 민족국가적 영광을 위한 향수 사이에서의 진자 운동에 종언을 고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런데 내가 그 경로를 알지 못하는 결단, 그러나 그것이 와야만 함을 알고 있는 그러한 결단 – 프랑스-독일 통합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위한 결단 – 은 하나의 정당한 결단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건설(구성, construction)에도 반하지 않으며, 완전히 반대로, 새로운 가능적인 것의 의미를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프랑스와 독일을 함께 묶음을 통해 실질적인 힘을 획득함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하나의 새로운 국경, 하나의 새로운 울타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나는 하나의 자기-충족적인 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형상에 대해, 초국가적이지만 동시에 긍정적인(적극적인, affirmative) 하나의 창안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즉, 도래할 세계 내에서 열려있게 될 어떤 것의 형상, 삶과 같이 모든 것에 대해 열려있는 어떤 것의 형상입니다. 하나의 열려있는 새로움, 하나의 연합체, 그러나 그 자체의 열림(ouverture)에 대해 드러난 연합체인 것입니다.
위대한 독일 시인이자 또한 어느 정도는 프랑스인이기도 한 릴케는 두이노 비가Duino Elegies의 여덟 번째 편에서 열림에 대해 훌륭하게 말했던 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프랑스-독일적 계기의 창조에 기여하는 이곳 아르헨티나에 있음으로, 나는 우리를 오늘 여기에서 연합시킨 세 언어들 – 시가 원래 쓰여진 언어인 독일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번역 – 을 통해 릴케의 여덟 번째 비가의 도입부를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이 프랑스-독일적 건설의 시적인 계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선, 독일어로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여덟 번째 비가를 읽는 장면을, 그리고 스페인어로의 동시 통역을 상상해야 한다.)
Mit allen Augen sieht die Kreatur
das Offene. Nur unsere Augen sind
wie umgekehrt und ganz um sie gestellt
als Fallen, rings um ihren freien Ausgang.
Was draussen ist, wir wissen aus des Tiers
Antliz allein; denn schon das fruhe Kind
Wenden wir um und zwingens, dass es ruckwarts
Gestaltung sehe, nicht das Offne, das
Im Tiergesicht so tief ist. Frei von Tod.
Ihn sehen wir allein; das freie Tier
Hat seinen Untergang stets hinter sich
Und vor sich Gott, und wenn es geht, so geht’s
In Ewigkeit, so wie die Brunnen gehen.
Wir haben nie, nicht einen einzigen Tag,
den reinen Raum vor uns, in den die Blumen
unendlich aufgehn. Immer ist das Welt
und niemals Nirgends ohne Nicht:
das Reine, Unuberwachte, das man atmet und
unendlich weids und nicht begehrt. Als Kind
verliert sich eins stillen an dies und wird
geruttelt.
내 차례입니다. 나는 막시민느의 번역을 제공할 것인데, 다소 원래 텍스트에서 제거된 부분이 있지만,그래도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Tous les regards, detout ce qui vit, regardent vers l’ouvert.
Seuls nos yeux, comme tournes a l’envers, tel un circle de
pieges, empechent toute issue.
L’au-dela du cercle, nous ne le connaissons
qu'a travers le regard des betes.
Car des la plus tendre enfance, nous orientons le petit
d'homme vers les ombres derriere lui, et non vers l’ouvert,
si profond dans l’expression des betes.
Liberes, sans la mort.
Ah, elle! Nous ne voyons qu’elle!
La bete libre a toujours sa perte derriere elle:
devant elle, Dieu. Ainsi lorsqu’elle va, c’est en tout eternite,
comme vont les sources.
Nous jamais nous n’avons, pas un seul jour, devant nous
le pur et simple espace
dans lequel les fleurs ne cessent de s’epanouir.
C’est encore et toujours le monde :
Jamais ce nulle part ou le neant n’existe pas,
ou la purete, sans regard sur elle-meme, se respire et se
connait, a l’infini, sans l’ombre d’une convoitise.
Voici qu’un enfant s’y perd dans le silence :
Il s’en trouve bouleverse.
피조물은 모든 눈으로 열림을 바라본다.
우리의 눈만이 뒤집힌 듯 덫으로 친 원처럼 모든 길을 막는다.
원의 저편(L’au-dela du cercle), 우리는 그것을
짐승들의 시선을 통해 알 뿐이다.
아이의 가장 어린 시절로부터, 우리는 그 인간의 작음을 그의 뒤편의 음영으로 향하게 하고, 열림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짐승들의 표정 속에 너무나 깊음에도.
죽음 없이 자유로운.
아, 죽음! 우리는 그것만을 볼 뿐이다!
자유로운 짐승은 언제나 뒤에 그것(죽음, 소멸, mort)의 상실을 두며,
그 앞에, 신을 둔다. 그래서 그것이 갈 때에는, 영원으로 향한다.
샘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결코 단 하루도 우리 앞에
순수하고 단순한 공간을 두지 못한다.
그 안에서 꽃들이 피기를 멈추지 않는.
언제나 세계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부분, 결코 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음이 실존하지 않는, 순수함이, 그 스스로에 대한 지배 없이, 끝없이(무한하게, a l'infini), 갈망의 그림자 없이, 호흡되고 알려지는.
여기에서 한 아이가 은밀히 길을 잃는다:
그는 당황한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릴케가 ‘열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비가에서 그는 시적으로 그것에 세 가지 형상들을 귀속시킵니다. 이 세 형상들은 그에게 있어 세계의 닫힘으로부터 빼내어진 것에 대한 세 가지 결정적인 예시들입니다. 그 열림은, 과거와 같이, 언제나 우리 뒤에 있는, 그리고 있지 않은, 그것에 자유롭게 내맡겨진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세계의 두터운 구조물과 같이, 언제나 우리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가지 예시들은 짐승, 아이 그리고 연인입니다. 짐승, 아이 그리고 연인은 릴케의 비가의, 프랑스어로도 시를 썼던 이 위대한 독일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운동을 조직하는 위대한 형상들입니다.
릴케의 시가 언젠가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으로부터 내가 도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지침으로서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이러한 병합은 그렇게 새로운 국가 또는 새로운 산업 – 분명히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 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 새로운 짐승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짐승으로부터 시작해봅시다. 새로운 역사적 짐승, 정확하게 하나의 민족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민족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은 민족국가와 오래된 민족적 전통들의 완전한 폐기 사이에 위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국가는 아니겠지만, 국가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화되지 않을 것이지만, 반-세계화되지도(anti-globalized)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독창적인 집합일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창조물일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를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 들뢰즈는 두 개의 매우 다른, 매우 이질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서로에게 접합하여, 서로에게 들어맞게 될 때, 어떻게 우리가 하나 또는 다른 하나도 아닌 둘의 괴물(monster)을 얻게 되는지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오늘 밤,나는 우리가 마침내 전 세계에 대해 운명지어진, 전 세계에 대해 열려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괴물을 만들어낼 과제에 착수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아이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아이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교육해야만 할, 스스로 자라나야만 할, 그 스스로를 키워야만 할 어떤 것을 다루고 있기에, 과거의 훈육(discipline)에, 너무나 많은 질문들로 닳아버린 독일적인 과거의 훈육에, 또는 너무나 많은 확실성들에 의해 지쳐버린 프랑스적인 과거의 훈육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을 어떤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우리 모임의 개최국과는 달리 오래된 나라들로부터 왔습니다. 이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아이의 형상이며, 열심히 물장구를 치지만 피곤하지 않은 역사의 유아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나라들로부터 왔지만, 어쩌면 우리를 함께 합침으로써, 우리의 위대한 시대들을 합침으로써, 우리는 이 늙은 사람 내부에 내포된 아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흐름을 뒤로 돌려, 우리는 우리를 압도하는 그 위대한 역사적 짖눌림을 순진하고 창조적인 어떤 것으로 전환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이 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짐승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아이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민족들간의 하나의 새로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민족들은, 몇몇 영광스러운 예외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서로를 무시할 것을, 너무나 많이, 서로에게 무관심할 것을 고집합니다. 이런 류의 결정은 민족들간의 유대들과 우정에 관해 단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해내지 못할 뿐입니다. 사랑과 우정의 문제들을 통해, 한 민족이 동일한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차이 내에서 사는지 아니면 무-차이의 결정 내에서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병합의 결정으로, 어떤 것은 심대하게 동요되고, 붕괴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자(the same)’라는 것을 알 것이며, 이 동일자의 요소를 배우고 살아가는 것에 대처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연습은 두 민족들이 서로에게 관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짐승, 새로운 아이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모든 것들이 큰 장벽 뒤에 갇혀있습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지구의 표면 위에 있는, 특히 유럽의 표면 위에 있는 단순한 흔적[trace]입니다. 내가 꿈꾸는 이 프랑스-독일적 연합체는 그어지게 될 선과 같은 것이며, 지어지게 될 요새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 선을 가로지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선을 지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또한 그것을 보아야만 하며, 그것의 새로운 실재를 통해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은 하나의 기입, 하나의 흔적, 사유의 장소에 대한 흔적이라는 것을, 우리의 의견 불일치와 일치를, ‘aufheben’의 의미에서, ‘surmonter’의 의미에서 지양(sublate)하는 흔적이라는 것을, 우리의 의견 일치들을 통해 닳아빠진 것, 그리고 우리의 의견 불일치를 통해 시대에 뒤쳐진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흔적의 관념, 두 민족들과 그들의 상반된 역사들과 술어들을 감싸게 될 새로운 선에 대한 관념은 자연스럽게 나로 하여금 그것이 우리의 주위에서 열게 될 정의의 어루만짐과 같은 어떤 것이리라 생각하게 합니다. 게다가, 여러분이 단지 부분적으로 들었을 뿐인 여덟 번째 비가에서, 릴케는 그 열림의 형상들 중 하나인 그 짐승에 대해, 그것이 ‘무한하며, 이해할 수 없고, 내성적이지 않으며, 순수하다’고,그것이 이런 측면에서, 열림에 관련하여, ‘원의 저편(au-dela du cercle)’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명백히, 나는 브레히트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희곡작품인 코카서스의 백색 원The Caucasian Chalk Circle이라 불리는 브레히트의 위대한 희곡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브레히트 또한 약간은 프랑스인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독일인 친구 여러분, 내게 이 이어지는 부가적인 이야기들을 허용해주십시오. 이것들은 단지 우리의 병합에 대해 예비적인 것일 뿐입니다. 브레히트는 만일 여러분이 그의 초창기 연극 작품들 중 하나인 도시들의 정글 안에서In the Jungle of Cities의 텍스트를 보게 된다면, 랭보의 전체 구절들이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마치 그 구절들이 그것을 통해 태어난 것처럼, 독일어의 신선함 속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어느정도는 프랑스 사람인 것입니다. 젊은 브레히트는 절대적으로 랭보라는 인물에 매료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그는 자신의 글쓰기 전형이 프랑스의 18 세기의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프랑스의 17세기 글쓰기가 어떠한 독일인도 결코 파악할 수 없는 투명성과 생동감을 생산했다는 것이 하나의 오래된 독일적 관념입니다. 하지만, 우리 프랑스인들, 우리는 영원히 우리에 대해서는 접근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는 사변적인 독일의 깊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제안은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교환하자는, 그 모든 것을 융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료한 프랑스적 빠름에 독일적 깊이를 도입하고, 독일적 기강(discipline)에 프랑스적 비평의 쾌활함을 도입할 것입니다. 그런 이후, 어떤 신비로운 변형적 화학작용을 통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두 대사님들이 서로에게 융합될 것이고, 세계 도처에 알리알스 프랑코-알르망드(Alliances Franco-allemandes)들이,괴테-디드로 인스티투트(Goethe-Diderot Instituts)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진정한 유럽적 흔적, 또는 유럽이 이 흔적과 이 열림에 대해 배치할 수 있는 어떤 것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하나의 새로운 코카서스의 백색 원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원인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한, 단호하게, 궁극적으로 정신적인(spiritual) 행동을 통해, 그것을 생산하기를, 나는 바랍니다. 확실하지만 우호적인 하나의 정신적인 몸짓을, 우리가 프랑스-독일적인 백색 원의 흔적을 유럽 안에서 요청할 수 있게 될 그러한 몸짓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