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제작부터 상영까지 매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사건을 영화적 허구를 통해 그려내는 영화인데다, 법정에서 드러난 재판과정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논란이 대부분 객관성 혹은 순수한 대상성에 얽혀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한 진보 논객으로부터 법원까지 문제를 삼았던 것은 이 영화의 내용이 그 객관성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과연 이 영화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들이 객관적인가 하는 문제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관건이 되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이 객관성 혹은 실체성이라는 영화 자체의 불가능성 - 영화는 예술이며, 예술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 을 우회하여 이 영화에 속한, 그리고 동시에 영화를 넘어서는, 이념에 대해서 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두 주체가, 그리고 정작 주체 없이 어떤 특정한 부분적 주체성만을 지닌 조직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할 것이며, 그리고 영화 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관점에 묶여서 법적, 객관적 실체성만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비판을 살펴볼 것이다.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먼저 법의 실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바로 법의 권위에 대해서 말이다.
1. 법의 권위 - 권위의 근원과 두 엉덩이
권위라는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법원과 재판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실제로 김교수가 석궁을 가지고 민사 소송 과정에서 심리를 주재했던 재판장을 찾아갔던 행동은 즉시 법원에 의해 석궁 테러로, 법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김교수의 행동 - 물론 매우 잘못된 - 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거 및 법조문의 해석에 관한 재판부의 태도는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법원과 재판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일견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둘은 다르다는 것이다. 권위, 특히 법의 권위는 정당성이라는 토대를 가진다. 법이 정당하게 적용될 때, 법이 정의롭게, 모든 사람에게 다른 기준 없이 평등하게 적용될 때 법은 권위를 지닌다. 하지만 권위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권위주의란 별다른 근거나 정당성이 없이도 권위를 주장하고 이러한 권위를 그대로 이어가려는 태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김교수의 행동에는 문제가 있었다. 먼저 자신의 해고복직 문제에 관한 민사 재판을 주재했던 재판장(박판사)을 찾아간 문제가 그렇다. 그것도 석궁을 들고. 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 법적으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석궁을 의도적으로 발사했는가 아니면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인가, 발사된 석궁이 정말로 피해자(박판사)에게 맞았는가 아닌가,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문제로 피해자가 증거를 조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들이다. 법에 권위가 주어지는 것은 어떤 확정적인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며, 그로 인해 바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 공정한 방식으로 당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문제가 될 사안을 따질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기 때문이다(소송법이나 증거법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런 과정이 적절하게, 아니 적법하게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의문이다. 바로 여기가 그 권위주의라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법은 공정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법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렇기에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의 이념이 아닌가. 이런 공정함과 평등함이 보장되지 않는 법집행 혹은 명령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법을 특정한 방식으로(법원과 재판관들의 관습에 따라), 특정한 부분에 그것도 법원의 권위주의라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방식으로 적용할 때, 법의 집행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법을 벗어난 주권자의 위치에, 왕의 위치에 스스로를 올려놓게 된다. 역설적인 위치, 법 안에 있는, 그러나 동시에 법을 벗어나 관습적 권위에 의탁하는 왕과 같은, 법의 왕과 같은 위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둘이라는 것, 두 엉덩이, 즉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법 피해자 김교수의 엉덩이(참고로 이것은 실체와는 상관없는 영화적 창작)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권위주의라는 옷이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그것과도 같은 법원의 엉덩이가 말이다.
2. 두 꼴통 보수 - 법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꼴통과 권위주의에 집착하는 꼴통
다시 흥미로운 것은 김교수가 자신을 꼴통 보수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법을, 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적용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에 반해 법원의 태도는 어떤가. 그들 역시 보수적이다. 법을 집행되던 방식으로, 이전의 움직임과 법체계의 거대한 중량에 따라 관성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어떤 둘을 발견하게 된다. 법으로부터 분기한 둘, 법의 아름다움, 무모순성에 집착하여 법이 법문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꼴통, 그리고 법 자체의 권위가 아닌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권위에, 법의 공정함과 평등함에 근거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관성에 집착하는 꼴통을 말이다.
이 둘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단 둘 다 꼴통이고, 각자의 방식에 따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보수다. 하지만 두 꼴통들, 혹은 괴물들은 완전히 다른 것을 향해 움직인다.
a) 우선 법의 아름다움, 무모순성을 주장하는 꼴통. 김교수는 법의 바깥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수학과도 같은 법의 정교함을 극한으로 추구할 때 그가 부딪히게 되는 것은 법의 경계, 그 유한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무한이 아닌가. 단순히 어떤 경계에 무한하게 가까워지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서 법의 정신을, 법이라는 유한의 체계로는 한정할 수 없는 정의, 평등을 추구하는 움직임, 어찌 보면 그가 취한 경로는 바로 이런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박변호사와의 접견에서 말하는 그대로 그는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b) 법 자체의 권위가 아닌 법집행자의 권위를 주장하는 꼴통. 사실 이 꼴통이란 어느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법원이란 조직은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을 지키려 한다. 마치 고대 근동의 거대한 신상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하는, 아니 그 신상이 서 있는 토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주체는 없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는, 어떤 지형을 지키고 있는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직 혹은 이들에게는 오로지 어떤 주체성만이, 법원의 권위주의를, 아무런 법을 권위의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판단과 명령을 유일한 권위의 근거로 하는 태도를 신성화하는, 어떤 특정한 이권을 위한 태도만이 있을 뿐이다.
3. 객관적 사실성인가 아니면 진실성인가.
이런 정황에서 볼 때, 한 대표적 진보 논객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사실성 혹은 객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틀 속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의 체계, 지식, 확고하게 자리가 고정된 배치물들의 미로에서 길을 잃게 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법의 적용, 법적 정의의 실현이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적 허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지점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와 영화를 어떤 객관적인 혹은 경험적 사실의 관점에서 봐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사안을 호도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김교수가 석궁을 가지고 그가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판사를 찾아가, 그와 실랑이를 벌인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의 결과에 대해 그는 그에 응당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잘못을 판단하는 과정이 공정하게 법에 따라 진행되었는지는 다른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문제는 현재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몇년 전부터 -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사법 개혁의 문제와 맞물린다. 판사 및 검사 조직이 사법 연수원이라는 단일 교육 기관을 통해 배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법조계 내부의 패거리주의나 연공서열에 따른 조직 문화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최근 들어 붉어져 나온 정치적 발언을 한 판사들에 대한 인사 불이익이나, 검사 출신 비리 변호사 비호, 한 판사에 의해 사법연수원 후배 검사에게 전해진 기소청탁 의혹 등이 이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 영화가 드러내는 공정한 법집행을 가장한 인치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런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이념을, 우리가 결여하고 있기에 더욱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정의라는 이념을, 영화적 허구를 통해 드러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사실과 100% 같다거나, 혹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다. 진실 혹은 진리는 사실과는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