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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평점 :
...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
이 담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 국가/정체 514a ~ 515a (박종현 역)
<동굴>이라는 제목. 과연 이 제목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플라톤적인, 특히 정치적 이념들로 가득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작가로부터, 그가 제시한 <동굴>이라는 제목으로부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습게도 사라마구는 독자의 예상을 깨고 플라톤의 비유와는 매우 다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두 인물의 일상적인 삶의 장면으로부터, 도자기공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도시의 외곽에서 그 영향력을 나날이 확장해 나가고 있는 쇼핑 센터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그의 사위 마르살 가초가 함께 장인은 도자기로 구운 그릇과 병을 납품하고, 사위는 출근을 하기 위해 함께 센터로 향하는 장면으로부터 말이다.
대대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곤경에 처해있다. 어디까지나 상품의 판매를 통한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센터는 시프리아노의 도자기가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납품 계약을 파기한다. 물론 매우 온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와 형식을 통해서.
시프리아노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위 마르살이 센터에서 직급이 올라가 그와 함께 주거와 복지 혜택이 보장된 센터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총명한 딸 마르타의 도움으로 무언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센터에 납품할 수도 있다. 가령 이국적인 도자기 인형과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상처한 그에게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이사우라 에스투디오사, 아니 이사우라 마드루가와의 사랑의 마주침. 그들과 함께, 그리고 또한 우연히 그가 찾은/그를 찾아온 개 파운드와 함께 자신의 공방을 꾸려나갈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작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마치 깨진 도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 없이 되어 버린 그 자신의 오래된 기술, 그 모든 노력에도 센터의 시장 조사를 통과하지 못한 그와 마르타의 도자기 인형들, 그리고 이어지는 마르살의 진급과 센터의 삶, 사랑하는 이사우라 그리고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파운드와 헤어짐. 이렇듯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마치 자본의 지배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그려진, 모든 향락과 소비가 집합되어 있는, 그러나 갑갑한 센터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굴, 그 예의 철학자의 동굴이라는 것은 소설의 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갑자기 이상한 것이 센터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그런 뜬 소문과 같이. 시프리아노는 그 금지된 곳을 찾아 센터의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결국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사위 마르살과 함께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와 같이 의자에 꽁꽁 묶여 벽을 향해 앉혀져 있는 여섯 구의 시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사우라와 파운드를 포함한 일가족을 데리고 센터와 심지어 자신이 살던 동네 마저도 떠나게 된다.
간단히 살펴본 이 그냥 그럴 듯한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는 닿는 부분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철학적 성찰도 아니며, 어떤 우화('동굴의 비유')에 대한 우화, 이야기를 이야기로 풀어낸 작업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약간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하자면, 진부한 이야기로. 하지만 이런 배치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주목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1. 전체 보다 큰 부분(의 합)
누군가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는 말을 하면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전체가 그것에 포함된 부분 보다 크다. 어떤 집합을 상정하고 그 집합에 대한 벤다이어 그램 같은 것을 그려본다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 직관적 판단과는 달리, 집합론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원소의 수, 즉 집합의 크기(cardinality)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말이다.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는 국지적인 의미에서 부분이 전체보다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유한 집합의 영역에서라면 아주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다. 원래 {1, 2, 3}이라는 집합이 있다면, 이 집합의 부분 집합들의 합, 즉 멱집합(power set)은 {{}, {1}, {2}, {3}, {1,2}, {2,3},{3,1}, {1,2,3}}으로 원소의 수에 있어(일대 일 대응관계로 볼 때),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크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과 같은 무한 집합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즉 어떤 무한 집합과 이 무한 집합의 부분 집합의 합인 멱집합을 비교하여 각 집합의 원소들의 일대 일 대응관계를 나타낸다면, 무한한 원소들을 가진 두 집합들의 원소의 수는 양쪽 다 무한이니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답을 주는 것은 칸토르의 정리**이며, 이 정리는 무한을 포함하는 전반적인 영역에서 전체보다 부분이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 내에서, 한 사회의 부분들을 통제하는, 혹은 집합 속에서 집합에 불안을 초래하는 공집합을 셈하는, 기제가 셈한 부분 집합들의 합이 그 사회 혹은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국가는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는 국가(state)의 통제를 받는다. 물론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 내에서 거대 집단으로서 사회 내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센터'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사회를 통제하는 상태(state)이며 단지 권력이 국가로부터 자본으로 이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마치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던 노무현의 말처럼 말이다.
2. Que sera, sera.
50년대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해진 이 말은 보통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정도로 번역하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Quel que sera, sera'인 이 경구의 의미는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것으로, 사라마구는 이 말을 여러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 말을 읽을 때, 이것은 마치 예정된 것, 그저 사회의 법칙이나 사회가 굴러가는 관성에 따른,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제는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일가의 행로는 결코 어떤 기존의 상태에 의해 통제된 자리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말을 단순히 어떤 필연으로 읽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어떤 귀결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말은 이념에 관한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 실제로 만일 지금은 없지만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상황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들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화국이나 민주주의라는 정체가 그렇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어떤 집단적 움직임은 없었으며 - 혹은 시도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에 성공한 움직임은 -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결코 당연한 것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어떤 필연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보일 뿐, 인간의 역사는 결코 애초에 정해진 경로가 아니라, 어떤 우연한 실험에 의해, 머리 속에 있는 생각 혹은 이념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계속적인 탐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실험이, 현 상태 또는 과거의 삶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 알고르 일가가 센터를 떠나 과거의 터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것처럼 - 새로운 삶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의 결정적인 장치로서의 '철학자의 동굴'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3. 뒤집어진 '동굴의 비유' - 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닌 익명성의 비유
잠시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비유가 등장하는 <국가> 7권의 성격에 대해서 말이다. '동굴의 비유'가 제시되는 부분에서 주로 이야기 되는 것은 결국 '선의 이데아'를 깨닫게 되는 어떤 사람, 과거에는 동굴 속에 묶여 다른 죄수들과 함께 벽에 비추어지는 영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살았으나,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외부의 빛과 현실을 보고 동굴로 되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외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플라톤은 이 비유에 이어 철학자가 되기 위한 교육(예비 교육과 변증술)에 대해, 그리고 그가 통치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실무(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학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한 도시를 지배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사라마구가 이 '동굴의 비유'를 전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비유를 뒤집어진 방식으로 전용하고 있는데,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동굴의 비유'가 글에서 등장하는 위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국가> 7권의 도입부에 등장하지만(물론 플라톤의 <국가>의 각 권을 나누는 근거는 없다), 사라마구의 소설에서는 종결부에 등장한다. 둘째, 실재를 대면하게 되는 위치: 플라톤의 비유에서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실재'를 대하게 되는 자리는 동굴 바깥이나, 사라마구의 소설 속에서 어떤 '실재'가 발견되는 곳은 센터의 깊숙한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 속이다. 셋째, 실재를 대면하는 자의 지위: 플라톤의 비유에서 실재를 보게 되는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야할 철학자이지만,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실재를 대면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하고 익명적인' 전직 도공일 뿐이다.
4. 빠져나감의 이념 - 새로운 것을 향한 방황
결국 관건이 되는 것은 지배자들이 아닌 평범한 자들이 실재를 대할 때 있게 될 일들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 <눈뜬자들의 도시>가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야기일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투표 거부', 그것은 이 소설의 전편인 <눈먼자들의 도시>에 이어지는 상황이다. 바로 국가와 민주주의의 현 상태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이어지는 소설이 말하는 익명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굴>이라는 소설 역시 위에서 언급한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이념으로, 어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빠져나감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동굴'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좀 더 정확히 말해 '동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자에 묶인 채 벽을 보고 앉아있는 시체들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센터'를 떠난 삶으로, 즉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는 탐색으로 이어진다. 분명히 그런 삶은 일종의 정처 없는 방황이다. 현 상태 내에서의 정착도, 혹은 그 이전의 전통적인 삶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것을 위한 탐색. 물론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삶. 하지만 근/현대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모색했던 방황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들, 예를 들면 보편 복지라는 것 역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지금도 세계의 지배적 이념인 주류 경제학의 지식 체계 - 또는 의견의 체계 - 에 따르자면, 복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별적 복지, 시혜적 복지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고정된 지식 혹은 의견의 체계는 동굴 속의 실재와 마주한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보았던 동굴 속의 시체들이 속박되어 있던 의자인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이 <동굴>이라는 우화, '동굴의 비유'를 뒤집어 오늘날의 허구로 다시 쓴 이 새로운 우화는 이런 고정에서, 묶여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을 향해 나가는 것을, 빠져나감의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은, 비록 원래의 비유를 뒤집어 놓은 것일지언정, 여전히 플라톤적인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방식인 의견(doxa)과 단절하고 추론(dianoia)을 거치지 않는 이상 이념 혹은 이데아(idea)에 이를 수 없다는 플라톤의 입장 위에 말이다.
주
* 초과점의 정리는 알랭 바디우의 책 <존재와 사건>에서 증명 방식을 정리했음을 밝힌다.
초과점 정리:
바디우가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라고 부르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 멱집합을 통해 부분 집합을 셈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디우의 보다 형식적인 증명 방식에 따르면... a의 모든 정상적인 원소들의 집합 c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c={b | b∈a & ~(b∈b)}. (바디우는 자기 귀속이 금지되는 항 또는 원소를 '정상적 원소'라고 명명하며, 자기 귀속이 되는 원소를 '사건적 원소'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집합론 또는 수학적 존재론에서 자기 귀속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 때 정상적인 성질을 가진 모든 원소 b를 a에 분리해 넣게 되면, a의 실존하는 부분을 얻게 된다.(이를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이라고 명명한다.) c가 a에 포함되기 때문에[c⊂a, 왜냐하면 모든 c의 원소가 a에 귀속되기 때문], c는 a의 부분집합들의 집합에 귀속된다[c∈p(a), p는 멱집합(power set)을 의미]. 그런데 c는 a 자체에 귀속되지는 않는다. 만일 c가 a에 귀속된다면(c∈a), c는 정상항이기 때문에[~(c∈c)],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에 귀속되는 것이 되며, 그것은 c 자체가 된다(c∈c). 그러나 문제는 이는 c∈c이면서 동시에 ~(c∈c)가 되기 때문에 모순. 따라서 c는 a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결론. 이것은 결과적으로 언제나 집합 a의 원소가 아닌 p(a)의 원소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귀속과 포함이 항상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시 말해 부분 집합의 합은 원래의 집합 보다 크다.
** 칸토르의 정리 역시 귀류법을 사용하여 증명하게 되는데, 초과점의 정리와 거의 유사한 방식의 증명법을 따른다.(이 증명법은 위키피디아에서 제시한 세가지 방법 중 한 가지를 정리함.)
칸토르의 정리:
두 집합의 원소의 수가 같다는 것은 어떤 두 집합의 원소가 일대 일 대응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 집합의 영역에서 원집합 A와 멱집합 P(A)의 원소의 수와 A의 원소의 수는 전자가 크거나 또는 같다.(증명은 당연히 멱집합이 크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 같다는 가정에 모순이 있음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A와 P(A)가 같다면 두 집합의 원소들이 일대 일 대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때 f를 일대 일 대응관계의 함수라 하고, A의 멱집합의 원소(A의 부분 집합)인 집합 B가 있다고 하자[B ∈ P(A)]. 이 집합 B는 A에 귀속되는 모든 원소들 중 P(A)와 일대 일 대응 함수 f(x)에 귀속되지 않는 원소들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한다[B = {x∈A | ~(x∈f(x))]. 그런데 A와 P(A)가 일대 일로 대응한다면 f(x) 역시 P(A)의 부분 집합일 수 밖에 없으므로 B와 f(x)는 같아야만 한다.
이 때 A에 귀속된 원소 x는 f(x)에 귀속되거나 또는 귀속되지 않을 것이다. a) x가 f(x)에 귀속되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B는 f(x)에 귀속되지 않은 원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b) x가 f(x)에 귀속되지 않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x는 B에 귀속되지만 가정에 따라 f(x)에는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f(x)는 B와 같을 수 없으며, 따라서 P(A)는 A보다 크다(또는 원소의 수가 많다). 다시 말해 무한의 영역에서도 부분의 합은 원래의 집합보다 크다.(|A|<|P(A)|)
이것은 칸토르가 제시한 대각선 논법(diagonal argume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대각선 논법의 적용은 여기에서 정리하기 보다는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에 자세한 운용례가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http://en.wikipedia.org/wiki/Cantor%27s_diagonal_argu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