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오늘 우리는 내가 국가를 통해 선취했던, 그리고 그것들이 플라톤 텍스트의 연속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할, 철학자에 관한 언표들에 관한 검토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1. <<지혜(Sophia)에 대한 욕망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인 자들>>(V, 475b).
이 첫 번째 정의는 3가지 고찰을 이끌어 낸다.
a) 어원학적인 고찰
철학(philosophie), 즉 애-지(philo-sophia, 愛-知)는 지혜를 애호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정의에서, 지혜는 철학과 동일한 것으로 주어지지 않으나, 철학자는 지혜를 욕망하는 긴장의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그 언표는 우리에게 철학이 하나의 합목적성을,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렇기는커녕 철학적 합목적성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의 너머에 위치함을 지시한다. 그럼에도, 철학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전체화라는 개념이 수반되는데, 그 지혜에 대한 욕망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전체성과 관련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철학은 왜 전체를 만드는 것으로 제시되어야만 하는가?
b) 합목적성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결과로서의 철학: 지혜
짛예에 대한 욕망이 완전한 어떤 것에 결부되어야만 하는 이상, 관건이 되는 <<전체성>>에 관한 두 가지 가설들이 배제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유의하자. 그것은 세계의 전체성, 즉 있는 그대로의 것의 전체성도, 철학을 그 자체의 백과사전적 판본 내에서 동요하게 할 가능한 지식들의 전체성도 또한 아니다.철학은 그러한 전체성들의 일자도 타자도 아니지만, 그 결과가 지혜라고 불리는 이상, 그 결과는 완전한 결과로 제시되어야 한다.
c) 철학은 그 패러다임이 에로스(eros)라고 명명된 주체적 관여의 조건들 아래 있다.
이 주체적 관여는 어쨌든 역설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실제로 욕망들이 응축되는 에피뛰미아(epithumia, 강한 욕망)가 영혼의 플라톤적 삼등분에서 가장 기저에 있는 부분이다. 감각적인 것에 관해 직접적으로 표명된 것으로서의 욕망이 지정되는 것은 바로 그 장소다. 그와 같이, 프쉬케(psuche,혼, 정신)에 대한 이론화를 통해 비난 받은 휘브리스(hubris, 오만)로서의 욕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소환된다. 게다가 플라톤은 에로스에 의해 지배되는 주체적 관여의 조건 하에 철학을 위치시키는 주체적 긴장 내에서 어떤 다른 욕망의 형상 – 욕망은 지혜에 대한 사랑 보다 더 강하게 울린다 – 을 다시 펼쳐놓는다. 요약하자면, 철학이 욕망에 의해 표출된 주체적 관여의 조건 아래 완전한 결과를 요구하는 한, 그것은 결과에, 다시 말해, 명백히 철학을 가로지르는(trans-philosophique)지혜라는 결과에 관련된다.
2. <<진리에 대한 숙고(관조, contemplation)를 좋아하는 자들>>(V <s>476d</s> 475e)
*진리를 바라보기를, 또는, 박종현 번역에 따를 때,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철학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475e. 476d에서는 아름다운 것 자체와 그것에 관여하는 것들에 관해, 그리고 잠에서 깬 상태와 꿈꾸는 자들의 상태, 그리고 이들의 사고의 구분이 앎 또는 인식(gnome)과 의견(doxa)에 대해 논의하고 있음.
철학은 우애, 사랑, 그리고 욕망으로 은유를 이루는 주체적 긴장이며, 언제까지나 그것을 지식의 배치로 환원됨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 진리(aletheia)라는 주제는 철학에 대한 거의 모든 플라톤적 정의들을 조직하는 주제다. 따라서, 철학은 전적인 지혜에 대한 욕망인 동시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지혜와 진리의 절합이란 무엇인가?
- 진리는 극성화(polarisation)dml 입장에서 철학의 의미를 전달하는 범주로 작용합니다. 철학에 관련된 극의 개념은 진리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의 개념은 지혜다. 진리는 철학에 있어 역사를 가로지르는 범주이며, 그것의 출현에 단독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혜에 있어서는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예를 들어, 종교적 유형의 지식들이 있다. 회의주의적인 철학자들마저도 진리라는 범주에 관해 단독화된다. 심지어 진리의 부정을 논변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자들까지도 말이다.
진리에 대한 숙고(관조, contemplation), 그러나 어떤 유형의 단독화를 통한 숙고인가? 실재적인 진리들, 즉 생산물들(유적인 절차들)에 관해서, 철학은 이 진리들의 기반이 되는 진리를 증언하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결국 언제나 진리의 진리를, 상황 가운데, 즉 가산적 무한(셀 수 있는 무한, l’infini denombrable) 가운데 있는 식별불가능한 것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철학은 어떤 하나의 진리가 참된 것으로 드러남을 확인해내는 것이다. 진리라는 철학적 담론의 독창적인 범주는 주어진 것들의, 생산된 진리들과 철학에 외부적인 것들의, 배치에 관련되지 않으며, 철학은 진리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참된 것을 드러낸다.
- 어원학적으로, 숙고의 어근은 떼오레인(theorein), 즉 보다(voir)이며, 다시 이로부터 떼오리아(theoria), 즉 이론(theorie)이 유래된다. 진리에 대한 숙고, 그것은 진리의 진리를 바라보는 것이며,철학자들은 진리에 관해 이론화하기를 사랑하는 자들, 다시 말해 참된 것을 바라봄(le voir du vrai)을 또는 참된 것의 드러남을 바라보는 것(le voir de l’averer du vrai)을, 즉 철학을 통해 진리가 둘의 힘에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념의 드러남을 바라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 철학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의 활동(action)이 아니라, 하나의 전망(비전, vision), 떼오레인(theorein), 즉 참된 것의 드러남을 바라봄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전망이다. 진리에 관계된 전망으로서의 철학은 따라서 가장 강한 의미를 제시하는데, 말하자면 진리들의 드러남(l’averer de la verites)을 바라봄에 대한 이 관계는 단지 생산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과 테크네(techne, 기술)는 아름답고 참된 것을 생산하지만 철학의 외부, 즉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달리 말해서, 진리들을 생산하는 단독적인 실천들에 의해 주어진 채로, 고유하게 철학적인 본질은,참된 것으로서의 진리들을 바라보지 않는 진리들의 생산자들의 역으로, 진리들의 드러남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활동, 즉 진리들의 탄생이 아니라, 그것들의 확인의 전망 가운데 존재함에 있다.
3.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의 실존을 식별하고 그 아름다움과 그것에 관여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알아볼 수 있는 자들>>(V476d).
아가똔(agathon)이라는 그리스어 단어에 아름다운 것, 참된 것 그리고 좋은 것, 올바른 것 사이의 일치가 있다. 이와 같이, 철학은 진리에 관한 것과 동일한 실천을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되풀이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철학을 진리의 드러남을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 그리고 이념들에 대한 그 이론이 체계적인 조직화일 수 밖에 없다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을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우리에게 진리의 진리에 대한 바라봄(vision)이 또한 아름다움 그 자체의 정의임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그 비전(vision)은 진리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동시적으로 포괄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따라서 그것의 대상에 관해 철저하게 자율적이지 않으며, 그것이 아닌 것에, 즉 생산된 진리들 또는 아름다운 것들에 종속된다. 철학은 통속적인 플라톤주의 해석에서와 같이 진리 또는 아름다운 것의 추상적 전망이 아니라,진리들과 아름다운 것들의 마주침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진리들의 참된 것을 바라봄을 통해 완성된다.
일자와 다수 가운데 고정된 채로, 철학은 다수적 진리들에서 발견되며 진리들 내에서 결과적인 것인 그러한 진리의 일자를 구성한다. 진리들이라는 다수와 드러나는 진리들의 확인이라는 일자는, 일반적으로, 각각의 철학이 진리들의 단독적인 제시들에 따른 유대를 맺고 푸는 철학적 담론들의 고유한 매듭을 구성한다.
4. <<삶이 깨어있음(upar)이며 꿈꾸는 것(onar)이 아닌 자>>(V 476d).
그 실존적인 정식은 우리에게 철학을 그것의 삶의 요소에서 구별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적인 삶은 단적으로 삶(꿈꾸는 상태로 남아있는)에 관해 깨어있는 것이다. 철학은 깨어있는 것이며 꿈꾸는 것이 아닌 것, 즉 현재의 삶이 아닌 삶일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본질적인 꿈에 관해 깨어있는 상태에 머무르는 삶일 것이다. 철학자는 <<꿈으로서의 삶>>에서 깨어난 자다.
우리는 그로부터 삶에 관한 첫 번째 철학적 논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어지는 대안에 관해 초래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과 삶의 화해인가 아니면 이 둘의 근본적인 구별인가? 삶은 실존적인 직접성(무매개성, immediatete) 내에 있는 것, 즉 철학에 동질적이지 않은 것인가? 삶의 문제에 관련된 철학의 이 역사를 가로지르는 분쟁은 원래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 점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곧바로 플라톤의 반대편에 선다. 요컨대, 그는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il faut bien vivre)! 스승의 본을 따른 엄격한 합리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쨌든 그의 범주들이 삶에 최대한 근접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래에 와서는, 니체로부터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이 질문은 바로 삶(생명, la vie)에 내재적인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 즉 철학이 깨어남이 되도록 하는, 그러나 삶으로서의 삶의 역동성(la dynamique)에 관한 깨어남이 되도록 하는, 다시 말해 니체가 플라톤에 대해 말할 것처럼, 철학이 더 이상 삶을 병들게 하는 사유가 아니도록 하는 문제일 것이다.
5. << 언제나 그 자체에 관해 동일하게 있는 그러한 사물들 자체를 숙고(관조)하는 자들>>(V 479e).
이제 그 자체에 대한 동일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도록 하자. 철학이 타자에 관해 동일자가 근본적인 우위에 있음을 숙고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 자체가 아닌 것으로의 변화(devenir)를 생성과 부패의 등재부에 속하는 것으로 부차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리스적 철학의 의지에 본질적인 성향이다. 만일 플라톤이,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즉 타자(l’Autre)의 존재를 도입한다면, 타자에 관한 동일자(le Meme)의 우위는 근본적으로 플라톤주의에 그리고 이와 함께 고전적인 그리스 철학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동일자의 우위를 둘러싼 그리스 철학의 표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던진다. 훨씬 오랜 기원을 가진 유대적 전통의 견지에서, 타자와의 시원적인 마주침을 통해 효과를 얻는 의미의 전환을 제시한다. 삶의 문제에 관해서와 같이, 동일자의 타자에 관한 우위를 고려할 것인 것 아닌가는 레비나스에 의해 정당하게 지적된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결정으로 남는다.
이 논점은 두 가지 논점을 향해 열린다:
- 존재론적 논점(타자는 있는가?)
- 동일성에 대한 잠재적으로 본래적인 타자성의 선행 관한 윤리적-존재론적 논점
그 분리된 논쟁은 이 때 윤리가 실존하는지를 아는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철학적 논쟁을 열게 된다. 레비나스는 윤리적으로 동일자에 대한 타자의 우위를 등재하는데, 실제로 그는 그리스 철학이 실제로 취한 존재의 문제로부터 타자의 문제에 이르는 경로가 올바른 경로라고 주장한다. 법이 동일자의 규정 하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언제나 타자성을 타자의 우위 아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일 플라톤 동일자의 우선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철학이 진리의 드러남을 관건으로 하며, 진리들 가운데 주어지는 내부-본체적인(intra-substantiel) 것의 관할 하에 위치되기 때문이다. 동일자의 관할은 원리, 즉 아르케(arche)에서, 드러남에 대한 바라봄(vision)에서, 말하자면 바라봄의 단일성인 동일자의 우위에서 유래된다. 달리 말해, 진리들이 있기 때문에 타자가 있으며, 따라서 타자들과는 다른 진리들이 있다. 그로부터 동일자의 우위와 철학이 진리들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이의 깊은 유대가 직조되는데, 진리들에 맞추어지지 않기에, 철학은 타자들과 본래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철학의 편극적인 범주가 진리라면, 필연적으로 철학은 결과적으로 타자에 관한 동일자의 절대적 지배(souverainete)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타자의 본래적인 우월성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철학에 그것이 진리의 드러남의 확인이라는 철저히 다른 기능을 할당하는 것이며, 달리 말해, 본질적으로 철학을 그 무게 중심이 다른 것으로서의 타자의 수용인 윤리로, 소피아(sophia, 지혜)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와 같이 철학의 윤리적 본질을 예-정했다(a pre-determine). 즉, 윤리는 타자의 절대적인 타자성의 돌출에 대한 – 동일자에 대해 보존된 것의 형상 내에서의 – 우대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반대로, 철학이 있는 그대로의 참된 것 – 참된 것의 드러남 – 을 사유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며 이 때, 그리고 이 때로부터, 동일자의 규정을 지배한다면, 윤리는 하나의 사유가 아니며, 달리 말해 그것은 실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은 우리에게 진리의 드러남에 대한 바라봄을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 언제나 동일한 것과, 따라서 영원성 –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기독교적인 공명을 통해 파악되어서는 안 되는 말 – 과,관계된다는 것을 말한다. 영원성, 그것은 실체, 즉 우시아(ousia)이며, 그것의 존재의 확고부동함(permanence) 내에서 안정화되는, 따라서 시간이라는 범주에 무관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가 동일자라는 범주의 도입을 통해 규정하는 시간의 문제에 관해 플라톤은 이와 같이 단언한다.
이것은 우리를 시간에 관한 세 번째 철학적 논쟁으로, 그리고 영원성에 관한 한 테제로 인도한다. 실제로, 나는 동시대적인 철학의 과제들이, 그리고 따라서 하나의 반-소피스트적 과제가, 오늘날 사라져버린 영원성의 문제를 재건하는 것이다. 확실히, 영원성이 소멸될 때, 철학 역시 그렇게 되며, 철학은 그 고유한 종말을 선고받게 된다. 그것은 어쨌든 영원성의 측면에서 시간을 사유하고자 하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던 헤겔로부터 유래한다. 헤겔은 시간의 현존재(l’etre-la)의 절대성 내에서 참된 것의 진리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다. 헤겔은 영원성을 시간의 중심에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간이 영원성이 실현되는 고유한 양식이다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원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궁극적인 시도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밖에는 더 이상 사유할 수 없는 개념의 시간화(temporalisation) 속에 동시대의 철학을 빠뜨린다. 헤겔의 시간 개념에 관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견지에서 시간을 사유하지만, 이미 소멸된 철학의 공간 내에, 즉 형이상학의 해체의 공간 내에, 또한 그가 진정한 시간성(temporalite)의 본질을, 즉 현존재의 유한성을 사유하는 개념이 없는 시간의 거기 있음(l’etre la)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시의 공간 내에, 그는 낭만주의자로 남게 된다. 우리의 전략적 목표들 중 하나는 근대적 시간(들)에 관한 하이데거의 역사적 조합에 대한 분석이 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철학이 지속된다면, 영원한 진리는 있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진리는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원성은 시간의 반대가 아니라, 진리와 동일자 사이에 있는 어떤 특정한 유형의 유대라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과학, 예술, 사랑, 정치라는 유적인 절차들은 역사적인 그리고 사건적인 시간 내에 진리들을 생산하며, 철학은 그 절차들을 <<영원한 것의 측면>>에서 검토한다. 즉, 그 절차들을 그것들의 영원한 부분에 관해 심문한다 –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심문이 철학으로 정의된다. 철학은 진리들의 동일성을, 즉 참된 것의 참된 본질을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이 철학적 규정은 영원성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영원한 진리는 사건적이기에 생산되는 것이며, 진리는 내게 있어, 플라톤의 그것과는 달리, 시간성에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예를 들어, 대체로 나는 푸코가 철학자였는지 아니면 역사가였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다.하지만, 푸코가 행하는 담론적 지형들로서의 역사-횡단적인(trans-historique) 도식들을 통한, 즉 엄밀한 의미에서 속박 없는, 사슬이 풀린, 역사적 이성들을 통한 역사성의 재구축은 분명히 그의 저작에 영원성을 지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체 범주의 소거를 통한 푸코적 실증주의의 문제는 바로 그 범주를 마침내 윤리의 관점으로부터 재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랭보는, 시인으로서, 오히려 파멸의 지평에서 영원성을 재발견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회복된다, 무엇이? 영원성. 태양과 가버린 바다>>. 이러한 회복의 실현, 즉 철학자의 언어를 통한 영원성의 문제의 재구성이 필요하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6.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전적으로 열중하는 자들, 그들을 의견의 친구들(philo-doxa)이 아니라 철학자들(애-지愛-知자들, philo-sophia)이라고 불러야만 한다>>(V 480a).
우리는 거기에서 철학자들(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philosophes)과 의견을 사랑하는 자들(philodoxes)사이에서, 진리의 드러남을,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를 사랑하는 자들과 의견들을 선호하는 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플라톤적 대립을 보게 된다. 무엇이 매우 정확하게 그것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독사(doxa,의견)는 질문서의 격자들을, 조사원들이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격자들을 가로지르는 여론 조사들이다. 그 조사는 따라서 등재의 대상이 되는 무의식적 재현들의 체계다. 무-주체적(a-subjective) 재현의 체계,즉 여론 조사는 결코 의견의 주체를 참조하지 않는다. 우리가 붙잡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것 가운데 있는, 그러나 결코 우리가 주체적 원천이 될 수 없는 재현들의 상태, 즉 의견은 정황의 상태를 반영한다.어쨌든 거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제시된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는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가지고, 우리 각자가 의견을 말하지만, 플라톤은 당신들의 의견들이 하나의 주체적 짜임으로 변화되어 사유의 상대자로 기능하게 될 바로 그 때 그 의견들에 우호적이어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우애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여론 조사는 공적인 의견의 상태를 시험하며, 조사원은 우리에게 그 의견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조사원은 당신들에게 왜 로카르와 그의 정부가 호감이 간다고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는 당신들에게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도록 요구한다. 그 조사는 무-주체적인 이항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플라톤주의를 통해 대상이 제한된 단절의 지점은 의견과의 단절이 아니라 의견에 대한 사랑과의 단절이다. 의견들이 있고, 의견들의 분배가 있으며(찬성 또는 반대로의), 의견들의 주체화가 있다(의견-사랑[philo-doxa]). 그리고 철학은 다른 주체적 짜임을 제시하며, 따라서 지혜-사랑(philo-sophia) 대 의견-사랑(philo-doxa)은 더 적은 소피아(sophia) 대 독사(doxa)이다.
철학자는 정황의 상태, 즉 그에게도 또한 의견이 있는 것에 관한 상태로서의 의견에 대립하지 않는데,왜냐하면 그는 의견이 사랑할 수 ㅇ벗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의견을 사랑하게 됨을 추구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소피스트들이 그런기술(techne)의 스승들로 통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견들에 대한 사랑을 철학적 모방을 통해 조직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의 마스크를 쓰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 philosophe)와 의견을 사랑하는 자(philodoxe) 사이에서 눈이 멀어버린 연극 무대 위에서 철학적 모방을 연기하며, 의견을 만듦으로써 철학을 그들에게 끌어간다. 이 연극은 눈 먼 무대 위에서 연기되는데,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예를 들어 오늘날과 같이, 우리는 소피스트들의 복권에 조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이 순전하게 의견들을 폐기하려 했다면, 그것은 실재를 생산하는 기계, 즉 테러(Terreur,공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은 의견들에 대한 사랑을 폐기하려 하는데, 왜냐하면 의견들에 대한 사랑은 철학이 사유의 주체적 성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그것을 하나의 의견으로 대하기 바라는 소피스트들의 소멸의 의지에 속박되어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와 같이,의견을 사랑하는 자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의 영원한 분쟁은 의견과 진리 또는 의견과 과학 사이에서는 야만적으로 전개되지 않지만, 의견에 대한 사랑/진리에 대한 사랑의 대립을 둘러싸고는 폭력적인 양상을 띄고 펼쳐지며, 회의주의적 철학자들, 즉 소피스트가 아니라 영원성을 사유하는 철학자들과 관련된 난점에 있어 철학자를 소피스트로부터 구분하는 진리들이 있는가 아닌가라는 실재를 결정하는 문제에 관해 더욱 명백한 방식으로 귀착된다.
이제부터는 여기에서 얻은 것을 요약해보자.
- 철학은 하나의 떼오레인(theorein), 즉 참의 드러남에 대한 바라봄을 사랑하는 가운데 포착되는 전망이다.
- 철학은 세 가지 논쟁들을 보존한다: 삶과 관련하여, 윤리의 문제적 실존에 관련하여, 영원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시간과 관련하여.
- 철학은 사유의 주체적 성향으로서의 그것의 전개를 방해하는 의견들에 대한 사랑에 맞서 싸우며, 철학은 또한 철학을 다른 의견들 중 가운데 하나의 의견으로 대하기 바라는 소피스트들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강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