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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Derrida / Thinking Paul: On Justice (Paperback)
Jennings, Theodore W., Jr. / Stanford Univ Pr / 2005년 10월
평점 :
테드 제닝스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 정의에 관하여Reading Derrida/Thinking Paul – On Justice> 서평
바울과 데리다 – 두 낯선 이방인의 (불)가능한 만남, 그리고 환대의 공간
변역은 일종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단순히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저히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해낼 수 없는 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텍스트의 해석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넘침 혹은 모자람으로 인해, 번역은 항상 번역가 자신에서 어떤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번역이라는 (불)가능한 작업을 통해, 번역자는 원저자에 대해 가장 충실한 그러나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를 배신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의 모국어로 그가 번역하는 책을 읽게 되는 첫 번째 독자로서, 번역자는 그 동안 자신이 작업한 글에 대한 이해를, 자신이 독해한 글에 대한 이해를 충실하게 전달해야 할 부채를 넘어선 의무를, 어떤 무한에 속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할 때, 항상 자신이 번역한 글에 대한 어떤 글을 내놓는 것은 번역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제닝스가 보여준 우정과 그가 쓴 이 책으로부터 얻은 여러 통찰들에 대한 감사로, 그에 대한 충실성으로 쓰게 된 이 서평의 서두는 한 문학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바울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을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바울에 대한 어떤 오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예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가상적인 것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평범한 사람을 살았다면, 두 여자와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편안한 일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꿈과 같은 상상, 즉 어쩌면 그가 평생토록 원했을지도 모를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예수의 유혹을 말이다. 이 꿈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접어든 예수는 광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자인 양 그가 메시아라고 선포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이 사기꾼은 이 사기와 같은 거짓말에 대해 항의하며 이를 폭로하겠다는 노인 예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시게나. 누가 당신을 믿겠어? 오히려 날 믿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일걸.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니까." 이후 다른 제자들의 회한에 찬 삶의 모습을 대한 예수는 곧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십자가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생을 마감한다. 사실, 예수의 꿈 속에 등장하는 이 사기꾼의 이름은 바로 바울이다. 예수 운동을 종교로 만들고,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여 역사가 증명하는 바 교회가 행한 모든 전횡의 기초를 놓았으며, 교회의 역사를 통해 내성적 죄의식으로 인간 개개인을 번뇌에 빠뜨린 성마르고 자기 분열적인 인물 말이다. 이 논쟁적인 소설은 바울을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인물로 폄하하고 있으며, 이러한 왜곡된 ‘인상’은 단순히 문학적인 허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래로 지속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귀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 르네상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이러한 바울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뒤집는 새로운 기류가 조성되고 있다. 내가 이러한 기류를 통해 재조명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은 약 4년쯤 전의 가을이었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시작했던 세미나에서 함께 읽게 되었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국내 번역: <사도 바울>)이라는 책은 교회 내에 퍼져있는 바울 해석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전통적인 독해방식의 왜곡에서 빠져 나온 바울,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들을 건설하고 그 결속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운동가이자, 정의와 법이 지닌 역설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상가로서의 바울(바디우의 표현에 따를 때 그리스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 바울*), 즉 정치적인 의미를 회복한 바울의 면모를 말이다.
[*‘시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poiesis에서 온 것으로 생성을 뜻하는 말인데, 시인이란 표현은 바울이 지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
마침 그 세미나가 진행될 당시 국내에는 여러 권의 바울 관련 서적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국내 인문학 및 신학계의 바울에 대한 관심은 진행형이다. 정치 및 문화 현상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평을 써내고 있는 지젝의 <꼭두각시와 난장이>(국내 번역: <죽은 신을 위하여>), 이탈리아의 미학자이자 발터 벤야민 연구의 권위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신학학자 리차드 호슬리의 <바울과 로마제국>,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유대 종교사가이자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의 강연문 <바울의 정치신학>까지. 말하자면, 우리는 바울 르네상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올해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며 이 글을 통해 소개하려 하는 테드 제닝스의 책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가제)> 또한 바울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 (다시) 생각하기
종래의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 특히 역사적 예수 연구로 인한 바울 오해에 더불어, 이 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오해가 있다. 제닝스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해석 방식을 따르는 고백적인 바울 해석의 전통이 일정 이상 바울의 주된 문제의식을 희석해왔던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요 관심사로 다루고 있는 '정의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의 '올바름' 혹은 의로움으로 환원되었고, 법정적 언어인 정당화(정의로움의 인정) 또는 칭의(dikaiosyne)는 죄의 용서 또는 구속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즉, 이런 해석 방식은 마음의 법과 몸의 법 사이에서 분열되고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어 스스로의 상태를 탄식하는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24절)라는 고백(로마서 7:16-25 참조)에 방점을 찍어, 개인의 죄 사함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 죄로부터 비참에 빠진 개인을 구원하는 메시아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의 전통 속에서 국가에 부역하는 보수적 교회와 교조적 신학이 바울이 정초했던 교회 공동체들에 중요한 가치였던 '정의의 요구', 즉 부당한 폭력에 기초한 제국(또는 오늘날의 국가)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체 건설이라는 보다 중요한 측면을 가려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노력은 오늘날 신학이나 인문학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이 이룩한 메시아적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근래의 바울을 재고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은 사실상 어떤 정치적 차원을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지구적인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여 이에 승리한 전범적인 예를 찾고, 교회 내에 바울이 원래 의도했던 (율)법을 넘어서는 정의라는 주제를 교회 내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차원을 말이다. 이 책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교회 내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고백적 게토(ghetto)로부터’ 바울을 해방시켜, 로마서 고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정의, 바울이 제기하는 역설, 데리다
바울이 제기한 정의의 문제는 어떤 모종의 역설을 전제한다. 즉,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을 통한 칭의 또는 정의로움의 인정은 (율)법 바깥에 있는 것이다(로마서 7:4,6). 그러나 로마서의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어떤 극복해야 할 것이지만, 동시에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제시하는 정의의 문제가 드러내는 고유한 역설의 지점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로마서의 고유한 역설의 지점에서, 분열적인 말하기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바울의 문제가 정의와 법의 역설적 관계를 말하는 데리다의 문제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누구인가? 자끄 데리다는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는 로고스에, 일자적 진리에 문제를 제기하며, 음성 중심주의(phono-centricism)에서 벗어나 에크리튀르(글쓰기, ecriture)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특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다. 여러 사상가들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해, 마치 균열의 지점이 없는 듯 보이는 체계에서 분열의 지점을 드러내고, 닫힌 것을 열어내어 안과 밖을 오염시키며, 이것과 저것의 동시성을 말하는 이 위대한 알제리 출신의 유대인 사상가는,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적 전통 위에 서 있는 철학자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적 독법은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닌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해체(deconstruction)라는 방법으로 뒤흔들고, 그 안에 잠재하는 역설을 드러내어 모든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하는 해체라는 방법은 성서를, (율)법을, 더 나아가 정의를, 신적인 정의를, 그리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토대, 즉 신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제닝스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성서 속에서 쉽게 간과하여 잊혀지는 문제들이 오히려 해체를 통해 드러나며, 이를 통해 특히 기독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 개인적 차원 내에서 숨겨지고 왜곡되었던 바울을, 그리고 그의 핵심적 문제였던 ‘정의의 요구와 요청’을 수면 위로 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리다에게 있어, 법은 해체가능한 것이지만, 정의는 법의 기원이며 해체불가능한 것이다. 마치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지만, 메시아의 정의는, 더 나아가 신적인 정의는 (율)법의 기초가 되며 영속적인 것처럼 말이다. 90년대 이래로, 이러한 법의 외부로서의 정의,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라는 주제는 데리다의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제닝스의 책은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의 문제와 더불어 이를 둘러싸고 배치되는 선물, 부채를 넘어선 의무, 환대,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 용서 등의 주제들이 오늘날의 바울 해석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을 탐색한다.
데리다를 통한 바울 독해, 변별점
그러나 데리다를 통해 바울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지점이 있는지에 대해,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통한 바울 해석에 어떤 변별점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데리다가 바울 독해에 대한 책을 쓴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바울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으며, 여러 저술에서 다른 사상가들 – 예를 들어, 니체, 키르케고르, 벤야민 등 – 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데리다가 바울을 다루는 방식은 타인의 바울 해석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한 간접적 접근인데, 어쩌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데리다를 통한 바울 읽기의 변별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략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앞에서 서술한 최근의 바울 재해석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그 한 가지는 벤야민, 타우베스, 아감벤 등이 속한 유대적 전통에서,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을 통해 바울을 읽는 흐름이며, 다른 한 가지는 바디우나 지젝이 라깡 정신분석의 영향력과 공산주의의 재해석이라는 시도를 통해 실행하는 바울에 대한 무신론적이며 내재적인 해석의 흐름이다. 데리다는 고유한 바울 독법으로 인해 이 두 흐름 중 어떤 편에도 배치될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가 바울 해석에 있어서 이 두 흐름의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묘한 인상을 얻게 된다. 데리다의 간접적인 그러나 매우 면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한 바울 해석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다른 사상가들의 해석과 구별되는 지점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데리다 저작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로 인해 데리다와 바울 사이의 연관을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점인데, 제닝스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단편들을 하나로 묶어 바울의 주제들과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작업을 통해 바울이, 특히 로마서, 관심을 가졌던 문제가 바로 정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
바울과 데리다를 병치시키는 이 책의 작업은 먼저 일종의 예비적인 작업으로 여러 글들에 흩어져 있는 정의와 법에 관한 데리다의 함께 모아낸다.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죽음의 선물> 등의 데리다 텍스트에서 정의와 법의 관계를 해체하는 사유의 단초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의와 법 사이에 모종의 이중적인 구분이 제시된다. 먼저 정의와 법의 관계는 법을 통해 구현되는 정의를 나타내는 법/권리와 구분된다. 그리고 법/권리는 다시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조문들인 법들/권리들과 구분된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있어, 정의는 해체할 수 없는 것인 반면, 법은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체를 통해 구별되는 정의와 법 사이의 구분선은 기껏해야 불안정한 것일 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는 법의 외부이면서도(이질적), 법 안에 함축되며(분리불가능), 그 실현을 위해서는 ‘법의 힘’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구분은 로마서에서도 등장하는데, 말하자면 바울이 신적인 정의, 메시아의 정의와 (율)법 그 자체, 그리고 문자로서의 (율)법, 즉 조문으로 된 법을 말할 때 드러나는 듯 보인다.]
이 단계에서 이 책이 데리다의 사유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가 지닌 어떤 부정적인 성격이다. 정의는 결코 어떤 긍정으로, 말하자면 고전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말하는 “각자에게 마땅히 줄 것을 준다”는 규정에 의해서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이것은 오히려 법 혹은 권리로 환원된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벌을 받을 사람에게는 벌을, 상을 받을 사람에게는 상을 준다는 징벌적/보상적 정의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배적 정의 또한 그런 긍정을 통한 규정의 형식을 띄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의 정의는 어떤 순환을, 계산이 가능한 주고 받음을, 예를 들어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하는 ‘번민-복수-번민’의 악순환과 같은 교환과 순환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정의는 이러한 계산적이며 교환적인 경제의 순환을 단절하는 선물과 같은 것이며, 한편으로 이러한 선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이러한 문제들은 데리다의 저작 <환대에 대하여>에서 한꺼번에 응축되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일종의 (불)가능성이며, 종말론적 차원에 있는 것,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자면 장래(future, futur)와 구분되는 도래할-것(to-come, l’avenir),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 밖에 없다.
폭력과 십자가, 벤야민의 첫 번째 이름과 발터의 마지막 이름, 메시아적인 것
바울과 데리다는, 어떤 힘 또는 폭력, 즉 ‘법의 힘’이라는 주제를 통해 정의가 법의 너머에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제닝스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름을 사용한 미드라쉬적(midrashic) 견해를 개진하는데, 이것은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보여주었던 벤야민의 (첫 번째) 이름 ‘발터’가 힘 또는 폭력이라는 독일어 단어 게발트(Gewalt)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장난에 대한 대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발터의 마지막 이름(성)인 벤야민이라는 이름은 성서상에 기록된 어떤 특정한 폭력에, 즉 야곱의 아들 벤야민이 태어날 때 어머니 라헬이 죽었던 일, 사사기에 기록된 벤야민 지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인 ‘기브아의 분노’, 무엇보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바울이 경험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에 관련되며(여기에서 바울이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을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 ‘폭력’을 통해 바울과 데리다는 접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데리다에게 있어 이 폭력이란 주제는 어떤 실제적인 사건(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을 통한 것이 아닌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에 대한 해체적 독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법의 힘>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이 제시한 정초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사이의 구분에 주목한다. 새로운 법을 제안하거나 만들어내기 위한 폭력과 법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법 질서의 집행자들이 드러내는 폭력, 말하자면 법의 임의적 폭력이란 바로 법 질서를 중지시키는 총파업 – 벤야민이 제시하는 국가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정초하는 정치적 총파업이건 혹은 국가 지배 자체를 폐지하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건 어느 쪽에 상관 없이(둘 사이의 구분이 불안정하기에) – 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가, 국가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그 ‘무한하게’ 초과적인 폭력을 드러내는 양상을 나타낸다.
데리다와 달리 바울은 어떤 사건을 통해 법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다. 사울(바울의 원래 이름)은 길리기아 지방의 타르수스(다소)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이며 바리새인이자 존경 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다마스커스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신비한 만남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을 믿게 된 후,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스스로 메시아가 (이방인을 위해) 보낸 사도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아 예수는 십자가로 처형된 자다. 이 처형은 당시 지중해를 연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장악하여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 제국과 로마로부터 공인된 종교의 지위를 승인 받은 유대교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된 모종의 공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볼 때,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의 정의는 (율)법 바깥에 있는 것이며, 바울의 비판의 칼날은 로마서에서 로마법과 유대교 율법 양자 모두를 향한다.
여기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벤야민에게서 유래한 ‘위대한 범죄자’의 형상이다. 대중의 지지를 얻고 사랑을 받는 이 사람의 매력은 부당한 법의 바깥에 서 있다는 점인데, 이런 특성은 적극적으로 법 바깥에 서 있었으며, 십자가형을 통해 법의 부당한 폭력을 폭로했던 메시아 예수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법적 질서의, 국가 질서의 최종적인 폭력 수단인 사형 제도, 여기에서 법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는 심지어 이러한 죽음의 체제, 즉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특성까지도 지니는 자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의뢰인을 구하기 위해 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이 범죄자와 변호사의 형상이 겹쳐져 나타나는 메시아를 통해 법의 무한히 초과적인 폭력은 해체의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정의는 법의 ‘강한 힘’이 아니라 어떤 ‘약한 힘’에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 법적 질서 앞의 무력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 그리고 데리다가 벤야민으로부터 끌어오는 ‘메시아적인 것’, 법 바깥의 그리고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란 바로 그런 약함으로부터 드러난다.*
[* 이 ‘약한 힘’, ‘메시아적인 것’은 실제로 로마 제국 내에서, 폭력적인 저항이 아닌 어떤 방관자적 저항을, 메시아를 기다림을 지속했던 바울 공동체의 종말론적 성격과 궤를 같이 한다.]
선물로서의 정의
그렇다면 정의는 분명히 법 바깥에, 법의 너머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법의 질서, 교환과 순환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보상적/보복적 정의가 아니며, 심지어 분배적 정의도 아니다. 제닝스는 정의가 부정을 통해서 밖에 드러날 수 없는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의 선물이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선물은 불가능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받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받은 이후에 무언가 답례를 해야만 한다는 긴장이 생긴다면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어떤 부담, 또는 기껏해야 되갚아야 할 교환물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런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선물 역시 주는 사람 스스로가 얻게 되는 자신의 선함에 대한 자기 만족이 뒤따른다면, 이것 역시 선물을 준 것이 아니라 증여물과 자기 만족을 교환한 셈이 된다. 진정한 선물이 가능하려면,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러한 교환의 경제*를, 순환의 법(칙)을 중단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로마서가 말하는 정의 또는 칭의(정의로움의 인정) 역시 그런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행위나 어떤 자격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은혜 또는 선물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 economy 또는 경제라는 말을 어원학적으로 분석할 때 나타나는 -nomy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경제 자체가 일종의 법(칙)이다.]
부채를 넘어선 의무, 믿음의 순종, 메시아의 법, 환대, 서로에 대한 환영, 정치
그러나 선물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정의가 선물과 같이 값없이, 상환의 책임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정의가 어떤 법을 통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메시아를 따르는, 메시아에 충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 법은 이전의 (율)법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 새로운 법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데리다의 “부채를 넘어선 의무”(이것은 로마서에서도 나타나는 듯 보인다)와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는 “믿음의 순종”, “메시아의 법”이라는 주제들이다.
이런 새로운 규범을 매개하는 것은 사랑인데, 이 책은 바울이 예수의 이중적 사랑의 규범(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단일한 사랑의 규범(이웃 사랑)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신에게 돌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제에, 사랑을 교환하는 순환의 법에 돌아감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러한 사랑의 교환경제가 드러내는 순환을 단절하여, 신에게 받은 사랑을 신에게 돌리거나 또는 내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돌린다면, 여기에서 더 이상 교환 경제 혹은 법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를 따르는 공동체 내에서, 정의는 이웃과의 관계를, 즉 “메시아의 법”을 통한 사랑이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의 “믿음의 순종”을, “메시아의 충실성”을 나누어 가진 충실한 자들의 이웃 사랑, 서로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책이 데리다의 “환대”라는 주제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환영”이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규범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데리다는 특히 환대와 연관 지어 앞에서 다룬 문제들에 대해, 정의와 법, 법/권리 그리고 법들/권리들, 의무/부채, 선물 등에서 드러나는 역설적인 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윤리라는 차원이 더해진다. 환대 혹은 바울의 주제로 말할 때 “메시아적 환영”은 타자에게 내 집의 문을 열어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는 윤리 또는 규범이다. 바울이 “메시아가 여러분을 환영하신 것 같이[받아들이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환영하여서[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로마서 15:7)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때 데리다의 환대와 바울의 환영은 어떤 정치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데리다의 경우, 환대는 유럽의 증가하는 폐쇄성에 맞서는 사유의 길에서 사유되었는데, 이를 위해 외국인에 대한 환대와 난민을 위한 어떤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사유를,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 바 있다. 바울의 경우 역시, 그가 로마 제국에 맞서는 일종의 새로운 정치체의 창안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추구한 새로운 정치체는 제국의 질서를 전복하거나 이를 개혁하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법 외부에 위치한 (메시아적) 정의를 현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였다.
용서 –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용서, 정의를 위한 용서, 이중적 용서
용서라는 주제 역시 서로에 대한 환영이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이 용서라는 주제는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바울의 칭의라는 주제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통한 속죄와 동일시 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용서 혹은 개인적 차원의 속죄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정의의 대체물로 작동해왔고, 그로 인해 신학의, 특히 바울의 정치적 차원이 가려져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용서라는 주제를 어떻게 생각했고, 또 데리다를 통해 어떻게 이 용서라는 주제에 대한 오해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먼저 이 책은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용서란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변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용서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용서할만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으로 용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선물과 같이 주어지는 것이며, 정상적인 지식의 체계를, 정상적인 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와 선물은 같은 것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것, 장차 도래할 것에 관계되는 반면, 용서할 수 있는 과오가 이미 지나간 것,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용서는 과거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달리, 바울은 용서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로마서에서, 서로에 대한 ‘용서’로 번역되는 유일한 단어인 aphiein은 바울이 스스로 쓴 말이 아니라 시편의 인용구 속에 들어있는 것이며, 이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의 강조점은 용서가 아니라 축복에 찍힌다. 그리고 ‘용서하라’로 번역되는 다른 말은 은혜나 자비를 뜻하는 charis에 어원을 둔 charizomein인데, 이 말은 용서하라는 의미 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자비로 대하고 환영해 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용서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데리다와 바울의 교차의 지점은 없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데리다를 통한 바울 읽기는 적어도 용서에 관한 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닝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용서를 통한 바울과 데리다의 연결이 아니라, 데리다의 용서/선물을 전유하여 (일정 이상의 해석적 폭력을 무릅쓰고서라도) 바울과 관련된 용서에 대한 오독을, 용서의 개인화를, 더 나아가 사유화를, 정의를 폐기하는 사유화된 용서를, 특히 이런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던 로마서 7장 해석을 개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데리다로부터 정의가 지닌 또 다른 역설을 끌어온다. 데리다는 “용서하기 위해”라는 글에서, 정의와 위증(배신)의 딜레마에 빠진 자신에 대해 말하는데, 그 딜레마란 정의롭기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정의롭기 위해 용서를 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제닝스는 데리다가 제시하는 이 정의와 위증의 역설의 상황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타자,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는 정의롭고자 하지만 타자를 배신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번민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증오하는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5). “나는 옳은 것을 바랄 수 있으나, 그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18b-19) 이러한 구성적인 딜레마, 또는 이중구속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용서가 필요하다.
제닝스에 따르면, 바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정의, 이중구속, 이중적 용서의 시퀀스가 진행된다. 먼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과 같은 일반 사면이 주어지고, 이에 의해 정의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여기에서, 정의에, 메시아적 정의에, 신적인 정의에 충실한 자들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져야만 하는 역설이 뒤따르게 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메시아의 정의에 충실한 자들을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두 번째 용서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선물/용서의 이중항에서 용서는 과거에, 선물은 도래할 것 또는 미래에 관련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적 순서와는 상관 없이, 선후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즉, 미래와 관련된 선물이 우선적으로 주어져 정의의 공간을 열고, 과거와의 관계에 관련된 용서가 후행적으로 주어져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져야만 하는 역설을 풀어낸다. 여기에는 어떤 메시아적인 것의 시간성이 연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미래 완료 혹은 전미래 시제다. 미래가 과거에 선행하고, 과거가 미래에 후행하는 이런 불가능한 것의 시제, 아직 오지 않았으며 약속과 같이 주어지는 도래할 것의 시제, 바로 그런 것이 이 미래 완료 또는 전미래 시제가 지닌 성격인데, 우리가 아는 그대로, 정의는, 메시아의 정의는, 신적인 정의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결어 - 신학과 인문학의 서로에 대한 초청, 환영
마지막으로 약간은 뜬금 없는 동어 반복적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기 위해 데리다를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데리다를 읽기 위해 바울을 생각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철학 및 인문학을 연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에 대한 답은 타우베스가 그의 강연록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했던 말로 대답될 듯 하다. 타우베스는 철학과에 최소한 세 명의 신학교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약 해석학, 구약 해석학, 조직 신학을 가르칠 교수들이 말이다. 오늘날 철학 및 인문학을 연구하는데 신학이나 성서에 대한 지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지만, 이는 오해의 소산일 뿐이다. 동양 철학이나 역사라면 아니겠지만, 어쨌든 서구 철학 및 인문학의 역사 내에 기독교 신학과 성서는 뿌리깊게 배어들어 있다. 어쩌면 철학과 신학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이 책의 작업이 바로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공간을, 정의의 도상에 선 두 낯선 이방인의 마주침의 공간을, 서로에 대한 환대의 공간을 열어낸다. 이 데리다의 사유를 통한 바울의 재사유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데리다가 정의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성찰을 쓰기를 통해 펼쳐내는 철학자라는 것을, 그리고 바울이, 특히 로마서의 바울이 정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상가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상가의 마주침에만 제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며, 신학과 철학, 철학과 신학이라는 두 이질적인 학문간의 마주침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테드 제닝스의 책 중에서 <예수가 사랑한 남자>는 작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이 책은 곧 편집작업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테드 제닝스의 책 중에는 이 책 외에도 십자가의 신학을 중심으로 정치신학을 전개하는 <속죄의 전환: 십자가의 정치신학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그리고 로마서를 정치신학적으로 다룬 강해집이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