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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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는 묘하게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몇몇 평론에서는 이 책을 SF로 분류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의견이 좀 다르다. 물론 이 책이 제시하는 배경이 현실과는 다른 상황, 즉 장기 공급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클론을 양산하고 이 클론들로 부터(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장기를 공급받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한다는 측면에서 판타지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제시하는 이야기의 전개구조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성장, 생애사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랑을 비롯한 관계의 문제다. 어떠한 팬시한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 그에 따른 상상(그것이 디스토피아가 되었던 꿈과 희망에 기대는 낙관전인 유토피아가 되었던 간에)을 통한 전개는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안에 있는 어떤 기묘한 위화감이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흐르는 기묘한,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이상한 느낌. 배경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마치 그 배경에 대한 상상을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듯 한 추리소설과 같은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런 부분은 소설의 종장에서 헤일셤에 관한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못한 사람들에 대한 취급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러한 위화감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라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던 어린 소녀 캐시와 그녀의 관리자였던 마담의 조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그 노래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설이 말하고 있는 그 장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소녀는 이 노래의 제목으로부터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상황에 대해(장기 기증을 위한 클론들은 , 정말로 소녀적인 상상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빼앗기고 아이가 다른 사람 손에 어딘가로 데려가지는 상황. 그리고 마담은 아마도 헤일셤에서 관리자들이 결국은 키워진(혹은 사육된) 클론들을 기증 센터로 보내야만 하는 상황을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기증, 아니 합법적인 장기 적출을 의무적으로 당해야만 하는 부당한 상황에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클론들의 보다 나은 대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일셤의 존재가 바로 그런 일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주장하는(그리고 실제로 그들 헤일셤 출신자들의 교육과 더 나은 대우를 위해 일하기도 했던) 교장 선생과 마담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러한 제도를 떠받치는(또는 기증을 위한 클론들을 사육하는) 일종의 관리자들이었을 뿐이다.*  캐시와 토미는 마치 이들이 구원자라도 되는 듯, 그들 헤일셤 출신자들 사이에서 돌던 루머를, 마치 풀 한포기라도 잡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하게 된 현실은 냉혹하다고 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듯한 것이었다.

정작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당한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간의 삼각관계, 그리고 헤일셤 출신의 클론 인간들의 울타리 내에서의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 이들의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잠시라도(3년이라는 시간) 기증을 유예하기 위한 교장 선생 그리고 마담과의 만남도 결국에는 이들의 사랑에 대한 문제에서 나오게 된 작은 몸짓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부당하게 비자발적인 장기기증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러 평론에서는 이 소설이 현실에는 없는 장기기증 제도 - 과학 혹은 의학과 조금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SF 운운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 에 대한 문제를,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성장소설의 형태로 잔잔히 다루고 있다는 말을 하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이야 말로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캐시, 토미, 루스 그리고 심지어 그들 보다 한 층위 위에서 전체 문제를 알고 있었던 관리자였던 교장 선생이나 마담까지도, 바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상황 혹은 세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당연히 따라야 했던 것이다.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만일 이 소설이 무언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 문제가 중요성을 인정 받아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인식의 층위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사람들이 정작 그들 자신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동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는, 혹은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바로 자신의 곤경을 드러내고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자신의 상황과 인식이 다른 층위에 있게 되는 문제.(이런 것을 인지 부조화라고 하지 않던가.) 과연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소설을 단순히 '현실에는 없는' 장기기증의 문제를 센세이션을 통하지 않으면서 잔잔히 드러내어 성찰하고 있는 SF 소설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넘어가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 소를 사육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소를 비인간적으로 대우해서 키우든, 아니면 초원에서 풀을 뜯게 하여 키우든, 소가 마지막으로 향하게 되는 곳은 도살장이다. 여기에서는 도살장이 기증센터로 교체될 뿐이다. 물론 고기의 질, 혹은 장기의 질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단지 언어도단일 뿐이다.

** 관건은 바로 이것이다. 소설에서는 어떠한 현실 고발도 없다. 그저 주어진 것에 대한 인정과 과거에 대한 회한만이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현실성도 담보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SF의 장르적 특성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체적 현실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개인의 단독적인 상황(개인적이며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는)의 층위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체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단독적 상황이 주는 위화감을 '잔잔하게' 또는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이 소설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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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 pour etre juste(정의롭기 위해서). 이 “pour(위해서)”의 모호함에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보라. 나는 정의롭게 될 것을 목적으로(in order to be just), 정의롭게 되기 위해(to be just), 정의롭기를 기대하며(with a view to being just)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정의로움에 대해, 정의롭다는 사실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정의롭기 위해, 나는 불의하게 되고 배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의로움(의 사실)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롭기 위해 불의하기(unjust) 때문이다. 나는 정의롭기 위해 언제나 누군가를 배신한다. 나는 언제나 타자를 위해 한 사람을 배신한다. (“용서하기 위해To Forgive”,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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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Derrida / Thinking Paul: On Justice (Paperback)
Jennings, Theodore W., Jr. / Stanford Univ Pr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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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제닝스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 정의에 관하여Reading Derrida/Thinking Paul – On Justice> 서평


바울과 데리다 – 두 낯선 이방인의 (불)가능한 만남, 그리고 환대의 공간


변역은 일종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단순히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저히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해낼 수 없는 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텍스트의 해석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넘침 혹은 모자람으로 인해, 번역은 항상 번역가 자신에서 어떤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번역이라는 (불)가능한 작업을 통해, 번역자는 원저자에 대해 가장 충실한 그러나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를 배신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의 모국어로 그가 번역하는 책을 읽게 되는 첫 번째 독자로서, 번역자는 그 동안 자신이 작업한 글에 대한 이해를, 자신이 독해한 글에 대한 이해를 충실하게 전달해야 할 부채를 넘어선 의무를, 어떤 무한에 속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할 때, 항상 자신이 번역한 글에 대한 어떤 글을 내놓는 것은 번역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제닝스가 보여준 우정과 그가 쓴 이 책으로부터 얻은 여러 통찰들에 대한 감사로, 그에 대한 충실성으로 쓰게 된 이 서평의 서두는 한 문학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바울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을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바울에 대한 어떤 오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예수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가상적인 것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평범한 사람을 살았다면, 두 여자와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편안한 일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꿈과 같은 상상, 즉 어쩌면 그가 평생토록 원했을지도 모를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예수의 유혹을 말이다. 이 꿈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접어든 예수는 광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자인 양 그가 메시아라고 선포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이 사기꾼은 이 사기와 같은 거짓말에 대해 항의하며 이를 폭로하겠다는 노인 예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시게나. 누가 당신을 믿겠어? 오히려 날 믿는 사람들이 당신을 죽일걸.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니까." 이후 다른 제자들의 회한에 찬 삶의 모습을 대한 예수는 곧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십자가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생을 마감한다. 사실, 예수의 꿈 속에 등장하는 이 사기꾼의 이름은 바로 바울이다. 예수 운동을 종교로 만들고,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여 역사가 증명하는 바 교회가 행한 모든 전횡의 기초를 놓았으며, 교회의 역사를 통해 내성적 죄의식으로 인간 개개인을 번뇌에 빠뜨린 성마르고 자기 분열적인 인물 말이다. 이 논쟁적인 소설은 바울을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인물로 폄하하고 있으며, 이러한 왜곡된 ‘인상’은 단순히 문학적인 허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래로 지속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귀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 르네상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이러한 바울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뒤집는 새로운 기류가 조성되고 있다. 내가 이러한 기류를 통해 재조명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은 약 4년쯤 전의 가을이었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시작했던 세미나에서 함께 읽게 되었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국내 번역: <사도 바울>)이라는 책은 교회 내에 퍼져있는 바울 해석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전통적인 독해방식의 왜곡에서 빠져 나온 바울,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들을 건설하고 그 결속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운동가이자, 정의와 법이 지닌 역설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상가로서의 바울(바디우의 표현에 따를 때 그리스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 바울*), 즉 정치적인 의미를 회복한 바울의 면모를 말이다.   

[*‘시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poiesis에서 온 것으로 생성을 뜻하는 말인데, 시인이란 표현은 바울이 지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


마침 그 세미나가 진행될 당시 국내에는 여러 권의 바울 관련 서적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국내 인문학 및 신학계의 바울에 대한 관심은 진행형이다. 정치 및 문화 현상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평을 써내고 있는 지젝의 <꼭두각시와 난장이>(국내 번역: <죽은 신을 위하여>), 이탈리아의 미학자이자 발터 벤야민 연구의 권위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신학학자 리차드 호슬리의 <바울과 로마제국>,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유대 종교사가이자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의 강연문 <바울의 정치신학>까지. 말하자면, 우리는 바울 르네상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올해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며 이 글을 통해 소개하려 하는 테드 제닝스의 책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가제)> 또한 바울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 (다시) 생각하기


종래의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 특히 역사적 예수 연구로 인한 바울 오해에 더불어, 이 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오해가 있다. 제닝스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해석 방식을 따르는 고백적인 바울 해석의 전통이 일정 이상 바울의 주된 문제의식을 희석해왔던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요 관심사로 다루고 있는 '정의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의 '올바름' 혹은 의로움으로 환원되었고, 법정적 언어인 정당화(정의로움의 인정) 또는 칭의(dikaiosyne)는 죄의 용서 또는 구속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즉, 이런 해석 방식은 마음의 법과 몸의 법 사이에서 분열되고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어 스스로의 상태를 탄식하는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24절)라는 고백(로마서 7:16-25 참조)에 방점을 찍어, 개인의 죄 사함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 죄로부터 비참에 빠진 개인을 구원하는 메시아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의 전통 속에서 국가에 부역하는 보수적 교회와 교조적 신학이 바울이 정초했던 교회 공동체들에 중요한 가치였던 '정의의 요구', 즉 부당한 폭력에 기초한 제국(또는 오늘날의 국가)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체 건설이라는 보다 중요한 측면을 가려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노력은 오늘날 신학이나 인문학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이 이룩한 메시아적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근래의 바울을 재고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은 사실상 어떤 정치적 차원을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지구적인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여 이에 승리한 전범적인 예를 찾고, 교회 내에 바울이 원래 의도했던 (율)법을 넘어서는 정의라는 주제를 교회 내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차원을 말이다. 이 책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교회 내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고백적 게토(ghetto)로부터’ 바울을 해방시켜, 로마서 고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정의, 바울이 제기하는 역설, 데리다


바울이 제기한 정의의 문제는 어떤 모종의 역설을 전제한다. 즉,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을 통한 칭의 또는 정의로움의 인정은 (율)법 바깥에 있는 것이다(로마서 7:4,6). 그러나 로마서의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어떤 극복해야 할 것이지만, 동시에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제시하는 정의의 문제가 드러내는 고유한 역설의 지점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로마서의 고유한 역설의 지점에서, 분열적인 말하기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바울의 문제가 정의와 법의 역설적 관계를 말하는 데리다의 문제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누구인가? 자끄 데리다는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는 로고스에, 일자적 진리에 문제를 제기하며, 음성 중심주의(phono-centricism)에서 벗어나 에크리튀르(글쓰기, ecriture)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특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다. 여러 사상가들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해, 마치 균열의 지점이 없는 듯 보이는 체계에서 분열의 지점을 드러내고, 닫힌 것을 열어내어 안과 밖을 오염시키며, 이것과 저것의 동시성을 말하는 이 위대한 알제리 출신의 유대인 사상가는,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적 전통 위에 서 있는 철학자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적 독법은 매우 위험한 것이 아닌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해체(deconstruction)라는 방법으로 뒤흔들고, 그 안에 잠재하는 역설을 드러내어 모든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하는 해체라는 방법은 성서를, (율)법을, 더 나아가 정의를, 신적인 정의를, 그리고 결국에는 기독교의 토대, 즉 신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제닝스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성서 속에서 쉽게 간과하여 잊혀지는 문제들이 오히려 해체를 통해 드러나며, 이를 통해 특히 기독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 개인적 차원 내에서 숨겨지고 왜곡되었던 바울을, 그리고 그의 핵심적 문제였던 ‘정의의 요구와 요청’을 수면 위로 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리다에게 있어, 법은 해체가능한 것이지만, 정의는 법의 기원이며 해체불가능한 것이다. 마치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지만, 메시아의 정의는, 더 나아가 신적인 정의는 (율)법의 기초가 되며 영속적인 것처럼 말이다. 90년대 이래로, 이러한 법의 외부로서의 정의,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라는 주제는 데리다의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제닝스의 책은 데리다가 제기하는 정의의 문제와 더불어 이를 둘러싸고 배치되는 선물, 부채를 넘어선 의무, 환대,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 용서 등의 주제들이 오늘날의 바울 해석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을 탐색한다. 


데리다를 통한 바울 독해, 변별점


그러나 데리다를 통해 바울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지점이 있는지에 대해,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통한 바울 해석에 어떤 변별점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데리다가 바울 독해에 대한 책을 쓴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바울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으며, 여러 저술에서 다른 사상가들 – 예를 들어, 니체, 키르케고르, 벤야민 등 – 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데리다가 바울을 다루는 방식은 타인의 바울 해석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한 간접적 접근인데, 어쩌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데리다를 통한 바울 읽기의 변별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략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앞에서 서술한 최근의 바울 재해석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그 한 가지는 벤야민, 타우베스, 아감벤 등이 속한 유대적 전통에서,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을 통해 바울을 읽는 흐름이며, 다른 한 가지는 바디우나 지젝이 라깡 정신분석의 영향력과 공산주의의 재해석이라는 시도를 통해 실행하는 바울에 대한 무신론적이며 내재적인 해석의 흐름이다. 데리다는 고유한 바울 독법으로 인해 이 두 흐름 중 어떤 편에도 배치될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가 바울 해석에 있어서 이 두 흐름의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묘한 인상을 얻게 된다. 데리다의 간접적인 그러나 매우 면밀한 해체적 독해를 통한 바울 해석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다른 사상가들의 해석과 구별되는 지점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글들이 데리다 저작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로 인해 데리다와 바울 사이의 연관을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점인데, 제닝스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단편들을 하나로 묶어 바울의 주제들과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작업을 통해 바울이, 특히 로마서, 관심을 가졌던 문제가 바로 정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


바울과 데리다를 병치시키는 이 책의 작업은 먼저 일종의 예비적인 작업으로 여러 글들에 흩어져 있는 정의와 법에 관한 데리다의 함께 모아낸다.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죽음의 선물> 등의 데리다 텍스트에서 정의와 법의 관계를 해체하는 사유의 단초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의와 법 사이에 모종의 이중적인 구분이 제시된다. 먼저 정의와 법의 관계는 법을 통해 구현되는 정의를 나타내는 법/권리와 구분된다. 그리고 법/권리는 다시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조문들인 법들/권리들과 구분된다.* 이렇듯 데리다에게 있어, 정의는 해체할 수 없는 것인 반면, 법은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체를 통해 구별되는 정의와 법 사이의 구분선은 기껏해야 불안정한 것일 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는 법의 외부이면서도(이질적), 법 안에 함축되며(분리불가능), 그 실현을 위해서는 ‘법의 힘’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구분은 로마서에서도 등장하는데, 말하자면 바울이 신적인 정의, 메시아의 정의와 (율)법 그 자체, 그리고 문자로서의 (율)법, 즉 조문으로 된 법을 말할 때 드러나는 듯 보인다.]


이 단계에서 이 책이 데리다의 사유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가 지닌 어떤 부정적인 성격이다. 정의는 결코 어떤 긍정으로, 말하자면 고전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말하는 “각자에게 마땅히 줄 것을 준다”는 규정에 의해서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이것은 오히려 법 혹은 권리로 환원된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벌을 받을 사람에게는 벌을, 상을 받을 사람에게는 상을 준다는 징벌적/보상적 정의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배적 정의 또한 그런 긍정을 통한 규정의 형식을 띄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의 정의는 어떤 순환을, 계산이 가능한 주고 받음을, 예를 들어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하는 ‘번민-복수-번민’의 악순환과 같은 교환과 순환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정의는 이러한 계산적이며 교환적인 경제의 순환을 단절하는 선물과 같은 것이며, 한편으로 이러한 선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이러한 문제들은 데리다의 저작 <환대에 대하여>에서 한꺼번에 응축되어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일종의 (불)가능성이며, 종말론적 차원에 있는 것, 데리다의 용어로 말하자면 장래(future, futur)와 구분되는 도래할-것(to-come, l’avenir),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 밖에 없다.  


폭력과 십자가, 벤야민의 첫 번째 이름과 발터의 마지막 이름, 메시아적인 것


바울과 데리다는, 어떤 힘 또는 폭력, 즉 ‘법의 힘’이라는 주제를 통해 정의가 법의 너머에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제닝스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이름을 사용한 미드라쉬적(midrashic) 견해를 개진하는데, 이것은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보여주었던 벤야민의 (첫 번째) 이름 ‘발터’가 힘 또는 폭력이라는 독일어 단어 게발트(Gewalt)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장난에 대한 대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발터의 마지막 이름(성)인 벤야민이라는 이름은 성서상에 기록된 어떤 특정한 폭력에, 즉 야곱의 아들 벤야민이 태어날 때 어머니 라헬이 죽었던 일, 사사기에 기록된 벤야민 지파 지역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인 ‘기브아의 분노’, 무엇보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바울이 경험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에 관련되며(여기에서 바울이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을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 ‘폭력’을 통해 바울과 데리다는 접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데리다에게 있어 이 폭력이란 주제는 어떤 실제적인 사건(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을 통한 것이 아닌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에 대한 해체적 독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법의 힘>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이 제시한 정초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사이의 구분에 주목한다. 새로운 법을 제안하거나 만들어내기 위한 폭력과 법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법 질서의 집행자들이 드러내는 폭력, 말하자면 법의 임의적 폭력이란 바로 법 질서를 중지시키는 총파업 – 벤야민이 제시하는 국가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정초하는 정치적 총파업이건 혹은 국가 지배 자체를 폐지하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건 어느 쪽에 상관 없이(둘 사이의 구분이 불안정하기에) – 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가, 국가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그 ‘무한하게’ 초과적인 폭력을 드러내는 양상을 나타낸다. 

 

데리다와 달리 바울은 어떤 사건을 통해 법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다. 사울(바울의 원래 이름)은 길리기아 지방의 타르수스(다소)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이며 바리새인이자 존경 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다마스커스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신비한 만남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을 믿게 된 후,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스스로 메시아가 (이방인을 위해) 보낸 사도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아 예수는 십자가로 처형된 자다. 이 처형은 당시 지중해를 연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 장악하여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 제국과 로마로부터 공인된 종교의 지위를 승인 받은 유대교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된 모종의 공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볼 때,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의 정의는 (율)법 바깥에 있는 것이며, 바울의 비판의 칼날은 로마서에서 로마법과 유대교 율법 양자 모두를 향한다.


여기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벤야민에게서 유래한 ‘위대한 범죄자’의 형상이다. 대중의 지지를 얻고 사랑을 받는 이 사람의 매력은 부당한 법의 바깥에 서 있다는 점인데, 이런 특성은 적극적으로 법 바깥에 서 있었으며, 십자가형을 통해 법의 부당한 폭력을 폭로했던 메시아 예수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법적 질서의, 국가 질서의 최종적인 폭력 수단인 사형 제도, 여기에서 법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는 심지어 이러한 죽음의 체제, 즉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특성까지도 지니는 자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의뢰인을 구하기 위해 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이 범죄자와 변호사의 형상이 겹쳐져 나타나는 메시아를 통해 법의 무한히 초과적인 폭력은 해체의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정의는 법의 ‘강한 힘’이 아니라 어떤 ‘약한 힘’에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 법적 질서 앞의 무력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 그리고 데리다가 벤야민으로부터 끌어오는 ‘메시아적인 것’, 법 바깥의 그리고 법의 너머에 있는 정의란 바로 그런 약함으로부터 드러난다.* 

[* 이 ‘약한 힘’, ‘메시아적인 것’은 실제로 로마 제국 내에서, 폭력적인 저항이 아닌 어떤 방관자적 저항을, 메시아를 기다림을 지속했던 바울 공동체의 종말론적 성격과 궤를 같이 한다.]  


선물로서의 정의


그렇다면 정의는 분명히 법 바깥에, 법의 너머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법의 질서, 교환과 순환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보상적/보복적 정의가 아니며, 심지어 분배적 정의도 아니다. 제닝스는 정의가 부정을 통해서 밖에 드러날 수 없는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의 선물이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선물은 불가능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받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받은 이후에 무언가 답례를 해야만 한다는 긴장이 생긴다면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어떤 부담, 또는 기껏해야 되갚아야 할 교환물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런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선물 역시 주는 사람 스스로가 얻게 되는 자신의 선함에 대한 자기 만족이 뒤따른다면, 이것 역시 선물을 준 것이 아니라 증여물과 자기 만족을 교환한 셈이 된다. 진정한 선물이 가능하려면,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러한 교환의 경제*를, 순환의 법(칙)을 중단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로마서가 말하는 정의 또는 칭의(정의로움의 인정) 역시 그런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행위나 어떤 자격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은혜 또는 선물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 economy 또는 경제라는 말을 어원학적으로 분석할 때 나타나는 -nomy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경제 자체가 일종의 법(칙)이다.]


부채를 넘어선 의무, 믿음의 순종, 메시아의 법, 환대, 서로에 대한 환영, 정치


그러나 선물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정의가 선물과 같이 값없이, 상환의 책임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정의가 어떤 법을 통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메시아를 따르는, 메시아에 충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 법은 이전의 (율)법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 새로운 법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데리다의 “부채를 넘어선 의무”(이것은 로마서에서도 나타나는 듯 보인다)와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는 “믿음의 순종”, “메시아의 법”이라는 주제들이다. 


이런 새로운 규범을 매개하는 것은 사랑인데, 이 책은 바울이 예수의 이중적 사랑의 규범(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단일한 사랑의 규범(이웃 사랑)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신에게 돌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제에, 사랑을 교환하는 순환의 법에 돌아감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러한 사랑의 교환경제가 드러내는 순환을 단절하여, 신에게 받은 사랑을 신에게 돌리거나 또는 내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돌린다면, 여기에서 더 이상 교환 경제 혹은 법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메시아를 따르는 공동체 내에서, 정의는 이웃과의 관계를, 즉 “메시아의 법”을 통한 사랑이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의 “믿음의 순종”을, “메시아의 충실성”을 나누어 가진 충실한 자들의 이웃 사랑, 서로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책이 데리다의 “환대”라는 주제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환영”이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규범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데리다는 특히 환대와 연관 지어 앞에서 다룬 문제들에 대해, 정의와 법, 법/권리 그리고 법들/권리들, 의무/부채, 선물 등에서 드러나는 역설적인 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윤리라는 차원이 더해진다. 환대 혹은 바울의 주제로 말할 때 “메시아적 환영”은 타자에게 내 집의 문을 열어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는 윤리 또는 규범이다. 바울이 “메시아가 여러분을 환영하신 것 같이[받아들이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환영하여서[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로마서 15:7)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때 데리다의 환대와 바울의 환영은 어떤 정치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데리다의 경우, 환대는 유럽의 증가하는 폐쇄성에 맞서는 사유의 길에서 사유되었는데, 이를 위해 외국인에 대한 환대와 난민을 위한 어떤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사유를,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 바 있다. 바울의 경우 역시, 그가 로마 제국에 맞서는 일종의 새로운 정치체의 창안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추구한 새로운 정치체는 제국의 질서를 전복하거나 이를 개혁하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법 외부에 위치한 (메시아적) 정의를 현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였다.   


용서 –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용서, 정의를 위한 용서, 이중적 용서


용서라는 주제 역시 서로에 대한 환영이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이 용서라는 주제는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바울의 칭의라는 주제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통한 속죄와 동일시 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용서 혹은 개인적 차원의 속죄가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정의의 대체물로 작동해왔고, 그로 인해 신학의, 특히 바울의 정치적 차원이 가려져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용서라는 주제를 어떻게 생각했고, 또 데리다를 통해 어떻게 이 용서라는 주제에 대한 오해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먼저 이 책은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데리다에게 있어, 용서란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변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용서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용서할만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으로 용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선물과 같이 주어지는 것이며, 정상적인 지식의 체계를, 정상적인 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와 선물은 같은 것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것, 장차 도래할 것에 관계되는 반면, 용서할 수 있는 과오가 이미 지나간 것, 과거에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용서는 과거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달리, 바울은 용서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로마서에서, 서로에 대한 ‘용서’로 번역되는 유일한 단어인 aphiein은 바울이 스스로 쓴 말이 아니라 시편의 인용구 속에 들어있는 것이며, 이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의 강조점은 용서가 아니라 축복에 찍힌다. 그리고 ‘용서하라’로 번역되는 다른 말은 은혜나 자비를 뜻하는 charis에 어원을 둔 charizomein인데, 이 말은 용서하라는 의미 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자비로 대하고 환영해 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용서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데리다와 바울의 교차의 지점은 없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데리다를 통한 바울 읽기는 적어도 용서에 관한 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닝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용서를 통한 바울과 데리다의 연결이 아니라, 데리다의 용서/선물을 전유하여 (일정 이상의 해석적 폭력을 무릅쓰고서라도) 바울과 관련된 용서에 대한 오독을, 용서의 개인화를, 더 나아가 사유화를, 정의를 폐기하는 사유화된 용서를, 특히 이런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던 로마서 7장 해석을 개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데리다로부터 정의가 지닌 또 다른 역설을 끌어온다. 데리다는 “용서하기 위해”라는 글에서, 정의와 위증(배신)의 딜레마에 빠진 자신에 대해 말하는데, 그 딜레마란 정의롭기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정의롭기 위해 용서를 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제닝스는 데리다가 제시하는 이 정의와 위증의 역설의 상황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타자,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는 정의롭고자 하지만 타자를 배신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번민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증오하는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5). “나는 옳은 것을 바랄 수 있으나, 그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18b-19) 이러한 구성적인 딜레마, 또는 이중구속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용서가 필요하다.


제닝스에 따르면, 바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정의, 이중구속, 이중적 용서의 시퀀스가 진행된다. 먼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과 같은 일반 사면이 주어지고, 이에 의해 정의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여기에서, 정의에, 메시아적 정의에, 신적인 정의에 충실한 자들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져야만 하는 역설이 뒤따르게 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메시아의 정의에 충실한 자들을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두 번째 용서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선물/용서의 이중항에서 용서는 과거에, 선물은 도래할 것 또는 미래에 관련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적 순서와는 상관 없이, 선후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즉, 미래와 관련된 선물이 우선적으로 주어져 정의의 공간을 열고, 과거와의 관계에 관련된 용서가 후행적으로 주어져 정의롭기 위해 불의해져야만 하는 역설을 풀어낸다. 여기에는 어떤 메시아적인 것의 시간성이 연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미래 완료 혹은 전미래 시제다. 미래가 과거에 선행하고, 과거가 미래에 후행하는 이런 불가능한 것의 시제, 아직 오지 않았으며 약속과 같이 주어지는 도래할 것의 시제, 바로 그런 것이 이 미래 완료 또는 전미래 시제가 지닌 성격인데, 우리가 아는 그대로, 정의는, 메시아의 정의는, 신적인 정의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결어 - 신학과 인문학의 서로에 대한 초청, 환영


마지막으로 약간은 뜬금 없는 동어 반복적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기 위해 데리다를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데리다를 읽기 위해 바울을 생각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철학 및 인문학을 연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에 대한 답은 타우베스가 그의 강연록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했던 말로 대답될 듯 하다. 타우베스는 철학과에 최소한 세 명의 신학교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약 해석학, 구약 해석학, 조직 신학을 가르칠 교수들이 말이다. 오늘날 철학 및 인문학을 연구하는데 신학이나 성서에 대한 지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지만, 이는 오해의 소산일 뿐이다. 동양 철학이나 역사라면 아니겠지만, 어쨌든 서구 철학 및 인문학의 역사 내에 기독교 신학과 성서는 뿌리깊게 배어들어 있다. 어쩌면 철학과 신학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이 책의 작업이 바로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공간을, 정의의 도상에 선 두 낯선 이방인의 마주침의 공간을, 서로에 대한 환대의 공간을 열어낸다. 이 데리다의 사유를 통한 바울의 재사유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데리다가 정의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성찰을 쓰기를 통해 펼쳐내는 철학자라는 것을, 그리고 바울이, 특히 로마서의 바울이 정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상가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상가의 마주침에만 제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며, 신학과 철학, 철학과 신학이라는 두 이질적인 학문간의 마주침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테드 제닝스의 책 중에서 <예수가 사랑한 남자>는 작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이 책은 곧 편집작업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테드 제닝스의 책 중에는 이 책 외에도 십자가의 신학을 중심으로 정치신학을 전개하는 <속죄의 전환: 십자가의 정치신학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그리고 로마서를 정치신학적으로 다룬 강해집이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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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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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이레가 지나서, 홍수가 땅을 뒤덮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

이렇게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다.

-  <성서>, 창세기 7장


세 가지 목소리로 연주되는 종말의 카논(canon)


홍수, '물 없는' 홍수, 그것은 어떤 환경적 종말의 다른 이름이다. 표지 그림에서처럼 동물과 인간이 떠다니고 자동차와 건물이 잠기는 그런 홍수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홍수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는 이 소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성부의 주제의  윤창과 하나의 바소 콘티뉴오(basso continuo, 순환통주)가 표현해내는 하나의 완전한 바로크 스타일의 카논과 같이 어떤 종말과 남은 자들의 시작을 연주하고 있다. 종결부에 가까운 어느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과 이후의 시점으로 향하는 시간 그리고 두 다른 시점의 목소리들의 전개, 그리고 어떤 시간의 전개를 마치 베이스 성부와 같이 규칙적으로 얽히고 풀리는 두 성부의 진행을 떠받치는 종교적 담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카논의 구조를 띈다.     


먼저 두 목소리의 주인은 이야기를 주로 끌어나가는 토비와 렌이다. 공적인 것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으로 설정된 세계 내에서, 모친의 병으로 인해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게 되어, 평민촌의 험악한 삶으로 자신을 던져넣고, 그 속에서 발버둥치다 에덴의 정원사들의 종교 집단에 가입하게 된 토비, 그리고 자본에 의해 선택받은 삶으로부터 어머니 루선의 외도와 그에 이은 도피를 따라 같은 집단에 들어오게 된 렌, 이들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물 없는' 홍수를 각자의 위치에서 - 토비는 블랑코라는 폭력배를 피해 숨어든 새론당신 스파에 마련한 은신처에서, 렌은 루선을 피해 취직할 수 밖에 없었던 비늘클럽의 격리실에서 -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여기에서 물 없는 홍수란 국가와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기업들만이 남은 디스토피아적 설정의 어떤 미래적 세계 내에서 자본에 의한 공공연한 생물학적 기술의 남용의 결과로 도래하는 인간 종의 멸종에 가까운 절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라는 책 속에서 이야기 되는 홍수와 같은, 그러나 그와는 달리 물 없이 도래하는 홍수(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그들 각각의 기억을 통해 디스토피아적 사회와 이로부터 도피한 '에덴의 정원사' 집단에서의 생활의 면면이, 때로 시차를 두고, 또는 때로 겹쳐지면서 이어진다.*


[* 토비의 삶은 3인칭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렌의 삶은 1인칭으로 전개되는데, 이런 시점의 변동은 어떤 특정한 효과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토비는 사회적인 관계로 인해 정원사들의 집단에 가입한 경우이며 어떤 객관적이고 단단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반면 렌의 경우, 정원사 집단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개인적 관계로 인한 것이며, 이에 더해 사춘기 시기의 동요가 함께 더해져, 그녀는 일정 이상 주관적인 방식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토비의 3인칭 시점과 렌의 1인칭 시점의 서술은 이를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내는 효과를 가진다.]     


이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이 어떤 장르적 음악과도 같은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떠받치는 저음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담화, 즉 정원사 집단의 지도자 아담 1의 설교다. 종교, 자본에 대한 저항, 환경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보존이 혼합된 이 설교자의 담화는 환경 운동가 및 저술가들 - 예를 들어,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 혹은 어머니와 같은 것으로 그려내는 <가이아> 이론의 러브록이나 DDT 피해를 비판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저술하여 환경 운동의 선구자가 된 레이철 칼슨 - 을 성인으로 삼는 기념일들로 하여 의례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어쨌든 이 성인들의 축일은 시간의 흐름의 기준이 되고, 이들의 축일에 맞추어 행해지는 지도자 아담 1의 혼합적 신학의 담화 - 기독교적 종교와 자연 또는 환경이 혼합되어 일종의 자연으로서의 신을 그려내는 - 는 이 매우 그럴 법한 허구를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풀어내고 있는 카논의 구조에서 그 기반이 되는 순환통주의 역할을 담당한다.  


어쨌든 창세기에 서술된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을, 인간들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한 신, 그에게 선택받은 의로운 자 노아, 그가 신의 명령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드는 커다란 배, 그 배에 실린 동물들, 40일간의 비와 터져나오는 땅 속의 물, 아라랏 산 위에 안착한 배, 그리고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서의 무지개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같이, 이 공상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나 디스토피아 소설(distopia novel)이 아닌 사변적 허구(speculative fiction, [*역자는 이 문구를 '사색소설'이라고 번역])는 - 작가의 말에 따를 때 - 어떤 파국과 그 파국에서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일종의 종말론적 배치로부터 우리는 어떤 정치적 차원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희구했던 종말론적 종교운동의 궤적이 항상 현실 정치와의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토비와 렌,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정원사들 모두가 처해 있는 허구적 현 상태(status quo)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국가의 소멸과 기업의 사회 지배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다. 군과 치안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체보안회사, 주택 조합과 생물 과학 연구를 독점하고 있는 건강현인 조합, 쾌락적 욕구 충족을 자본화하는 섹스 마트 등으로 구성된 이 사회의 가장 높은 위계를 점하고 있는 대자본들은 배제된 자들을 양산하여, 평민촌이라고 불리는 울타리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homo homini lupus(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라는 홉스의 격언을 연상케 하는 삶, 공적인 것이 소멸되어 버린 사회 내에서,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는다(예를 들어, 시크릿 버거에서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패티).


공적인 것이 사라져버린 이 디스토피아적 배치 내에서, 이러한 자본의 지배는 기술을 통해 진행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어떤 기술적 왜곡을 보게 된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지식의 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이며 과정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치 내에서, 과학이 행하는 작업에 찍히는 방점은 더 이상 모든 인간을 위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기술들을 개발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시장의 약육강식적 경쟁구도 속에서 특정한 인간의 지배적 우위를 지키는 기술적 봉사에 찍힌다. 정원사들은 바로 이런 배경으로부터 등장한다. 물 없는 홍수를 기다리며 모든 기술적 지배에 저항하는 공동체는 한 때 이 체제를 위해 봉사하던 과학자들이다.    


어쨌든 이 전직 과학자들이 어떤 이유로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들을 기술적 생산도구로 종속시키고 있던 자본의 장치에 대해 이들이 반감을 품었고, 그래서 그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정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추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이 굳이 종교에, 특히 터무니 없는 종말론에 대해 연관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과연 자본의 지배라는 절대적인 것이 물 없는 홍수라는 필연적인 - 하지만 동시에 우연적인 - 장치를 통해 사라진 세계 내에서(여기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것의 자리를 어떤 환경적 담론과 종교적인 것의 혼합적 형상이 채우고 들어온 세계 내에서, 과연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환경 혹은 자연과 신의 융합, 신의 자연화, 혹은 자연의 신격화에서 말이다. 문제는 인간의 역사(history)가 결코 어떤 순수한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 오염된 배경 속에서도 생존해왔다는 점이다. 인간 종 혹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든 오염된  혹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여(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육식을 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history)를 이어왔으며, 또한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문제는 결국 오늘날의 환경 담론이 지닌 어떤 회고적, 낭만적 성향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말하자면 과거의 세계 혹은 지구는 오늘날과 달리 오염되지 않았다던가, 인간이 신과 같은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더 이상 옛날과 같지 않으니, 이제라도 전통적인 삶으로 되돌아가 자연이 인간의 오염을 스스로 정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류의 태도에 말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뿐이다. 마치 원래 어떤 순수한 것(에덴 동산)이 있었고, 인간은 그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런 방식의 회귀의 욕구. 그런 절대적인 것(자본의 지배)을 다른 절대적인 것(신-자연)으로 대체한 세계 내에 남겨진 인간들은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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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의 경로는 부정 또는 재앙에 대한 탐구의 경로이며나는 간단한 문제에 관한 숙고를 통해 그 탐구를 진행하고자 한다철학자란 무엇인가이 문제는달리 제기될 때이러한 심문이 관건이 된다철학자들이 있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조건들은 무엇인가달리 말해서그 문제는 텍스트로부터 철학 또는 철학자들의 과거 또는 현재의 실존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함을 통해 이 문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자문하는 것이다철학자가 실존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준들은 어떤 것들인가그렇다면 부정적인 길을 통해 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1. 철학자는 사유의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의 실존은 예술가로서의 예술가의 결정을 기입하는 그의 작업물들에 의해 확인된다예술가의 실존은 작업물과 예술적 활동을 사유로 인정하며그 자체를 활동하는 사유의 실존으로 제시한다반대로철학은 본질적으로 활동하는 사유로 인식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직업이 없었으며실업자다.

견유학자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매우 전형적인 일화들을 제기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자유로운 인간은 의 지복(beatitude, 완전한 행복)의 매개체 안에 그 자신이 수용된 사람이다스피노자는 윤리학(l’Ethique, 에티카)의 저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거기 있음(il y a)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보여준 사람이다말하자면그 거기 있음의 실존은 하나의 조건이거나 또는 그 저술의 결과지만그 실존은 기하학적 방식의(more geometrico증명을 통한 본질적인 방식으로 주장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우리가 진정한 문제들 – 의학역학윤리수학 – 에 전념할 수 있도록형이상항의 문제들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저술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들은 결국 철학자로서의 실존이 그들의 철학적 저술의 실존 안에 구속되어 있는 범위 내에서만 말할 뿐이다철학적 저술은 더 나은 것에 봉사하겠지만 우연히 실존한다는 측면으로부터 추론된 저술 작업으로 되돌아 가도록 방임된다그리고 철학자는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계획하는 동시에그 이상적인 목표에 관련하여 그의 작업을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따라서 본질로부터철학은 일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현재플라톤은 우리에게 철학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철학적 본성(철학자들의 본성)은 언제나 있는 그리고 생성과 퇴락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그 실체(우시아[ousia], 언제나 있는 영원한 존재자)를 그들에게 밝히는 이 과학science(mathesis, 보편학수학)을 언제나 사랑한다>>(VI, 485 b) 우시아ousia와 마떼시스mathesis의 프랑스어 번역에 관한 해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일반적으로우리는 에피스테메episteme마떼마mathema마떼마타mathemata라는 말들을 science(지식과학)로 번역한다나는 에피스테메를 과학(science)으로즉 테크네와 대립하는 가능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번역한다테크네가 단순히 기술과는 다른 것을 반향하는 맥락에서우리는 테크네를 지식(savoir) 또는 전문지식(savoir faire)으로 번역하여과학과 지식 사이에 대립관계를 도입할 것이다.

나는 마떼마mathema를 수학소(matheme)로 번역할 것인데이 말은 어떤 지식에 대한 설명을 통한 에피스테메를 지시하며따라서 전문지식으로부터 드러난 것이다

마떼마타ta mathemata(수학)는 과학으로 번역할 것인데이것은 남김 없이 전달가능한 지식으로 드러나는 과학이다.

우시아ousia는 사유가 토 온to on(존재자들)’과 토 이네to einai(존재)’ 사이에 배치되는 불확정된 상관관계 내에서 부여되는 존재의 등재 항목이다.

그리스어 어휘의 다른 한 극단에서우시아플라톤에게 있어에이도스eidos인데즉 이념(이데아idea)의 가능한 검증을 통한 그것의 결정의 분할에 의한 존재인 것이다우시아는 에이도스에 따른 드러남 가운데 있는 존재이며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어 번역상의 동요가 정당화된다즉 본질[essence](에이도스에 의한 결정으로부터 드러난 우시아)로서든또는 실체[기체, subsistance](에이도스의 이편에 있는 것즉 결정 아래에 자리잡은 것의 이편에 있는 것으로서의 우시아)로서든 어느 편이라도 말이다.

해설 끝.

 

이러한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보다 자세히 검토해보자플라톤은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철학적 본성(phusis)>>이 있다고달리 말하자면철학자는 단독적인 결정으로서 현시된다언제나 그의 존재 가운에 있는 것에 대한즉 언제나 있는 존재자로서의 우시아에 대한 해명을 유일하게 허용하는 수학소(matheme)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 <<언제나 사랑한다>> – 철학적 본성을 결정해 보고자 하는 본성의 형성을 통해 제시되는 그러한 결정으로서 말이다철학자는 여기에서 어떤 고유한 주체적 긴장 아래 놓인 주체의 특정한 형상으로 파악된다이러한 철학자의 주체성은 테크네의 외양을 띈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편학(수학, mathesis)에 사로잡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에 있음이 지시된다보편학(알게 되기를 욕망하는 행위)은 그 언제나 지속하는 본질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어떤 바라봄(theoria) – 어떤 실행이 아닌 – 에만 관련되는 사랑을 그 대상으로 설정한다철학은 예술이 아니며 – 생산을 위해 일하는 사유가 아니며 – 철학자는 예술가즉 사유의 예술가가 아니다그가 예술가가 될 때철학자는 철학자로서의 그가 될 수 없는데왜냐하면 그와 예술의 관계에는 간격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즉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라는 탁월한 기교가 될 장식적인 성향에 비추어볼 때 말이다.

 

2. 철학자는 정치가즉 사유의 전략가인가?

 

철학자의 개입은 상황에 개입하는 노선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정치가를 신호하는데그 노선은 상황의 역사성으로부터 진리를 만든다(또는 만든다). 정치가는 절대적 필요성이라는 원소를 통해 상황의 가능성들에 대해 언표하는 자다철학자는 스스로에게 그런 성향을 부과하는가플라톤에게 있어상황은 원칙(arche)의 그것이며명령의 입장이다정치는 원칙의 문제인데마키아벨리가 의미하는 군주(le Prince)와 군주정을 초래하게 될 것을 원칙을 통해 이해하도록 하자정치는 원칙의 우두머리(prince)이며또한 군주정즉 주권을 정초하고 설정하는 어떤 것이다주체적으로정치가(le politique)는 상황의 원칙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도시 내적으로(공적인 책무또는 도시를 방위하는(군사적 전략그런 의미에서 말이다하지만플라톤에 따르면철학자는 그 스스로가 정치적 상황의 원칙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탱할 수 없다. <<자네는 정치 권력에 대한 무시를 포함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삶과 다른 삶을 아는가?>>(VII 521 b).실존을 통해 파악되는 진정한 철학자의 삶은 정치적 명령들에 대한 무시를 함축한다그의 삶은 유일하게 실존적 확정으로서의 모든 철학적 명령으로부터만 감산되는 것이 아니며 – 따라서 철학자는 정치가가 아니며 – 그 보다는 오히려 정치가가 그러한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그의 철학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이 테제는 철학자-왕이라는 플라톤적 테제와 모순되는 듯 보인다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주요한 모순 – 국가의 열쇠가 되는 – 인데왜냐하면 정치가가 철학자의 상황을 배제하는 철학자-왕의 상황이라는 서로를 배제하는 두 욕망들에 개입하는 이상전개하기 매우 까다로운 규범성에 따라정치가는 철학자를 강제하거나 또는 그가 철학자가 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철학자라는 이름에 합당한 철학자에게 있어 정치의 실행은 강제된 매듭인데만일 정치가 상황의 원칙(arche)이라면철학자는 정치가가 아닌 동시에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식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철학자는 과학적 담론으로부터 식별가능한가?

 

그리고 우선적으로과학적인 것의 실존을 증언하는 자는 무엇인가주체로서의 과학자에 의해 증언되는 실존은 예술가의 실존이나 정치가의 실존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과학자는 우선적인 의미에서 저술 작업들을 생산하지 않으며상황적인 궤적들과 관련되지도 않는다만일 그 실존이 축적가능한 언표들 – 이론들과학자들로부터 발견된 법칙들 – 을 통해 증언된다고 말한다면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왜냐하면 이 언표들은 사용가능한 모든 문집을 통해그것을 언술하는 자의 언표를 무관하게(중립적으로만드는 합의적 작업을 통해 직접적으로 재개되기 때문이다하지만과학자의 실존을 증언하는 유일한 것은 고유한 이름들이다탈레스(Thales) 또는 푸리에(Fourier)의 정리를 말할 때우리는 고유한 이름의 개념들을 표출할 뿐이며 다음과 같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과학자들이 있다는 것과학은 명백히 과학자들의 고유한 이름으로부터 그들 스스로가 기술적으로 벗어나는 언표들을 드러내지만그 이름들이즉 그 언표들에 관련된 고유한 이름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오는 축적가능한 언표들의 항구적인 보충물이 남겨진다비록 그 언표들의 축적가능한 성격이 그 언표들을 그것들 각각의 이름에 고유한 것과 무관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게다가정말로 탈레스가 그 언표의 이름을 산출한 정리의 창안자인가를 아는 것과는 상관 없이그 언표는 탈레스라는 고유한 이름 아래 과학적으로 실존한다.

철학에 있어서도 그러한가별로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철학에서 고유한 이름은 데카르트주의칸트주의와 같은 단독적인 형용사화를 통해 찍혀 나오지만그러한 형용사화는 철학이 축적적인 언표들의 형상 내에서 제시될 수 없다는 사실로 귀착된다. <<나는 생각하며따라서 존재한다>>는 언표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cogito)라기 보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인데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객관화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그의 코기토인지를 자문하는 일을 피한다오히려그것은 바로 탈레스의결정적으로 탈레스에 의해 발견된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탈레스의 이름 아래 등재된 정리이다.* 또한 <<나는 생각하며따라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언표는있는 그대로진정하고 검증가능한 언표들의 자료집에 통합될 수 없는데왜냐하면 그것의 주체적 색인이 그 언표에 관해 그 학자의 고유한 이름에 의해 고정된 순전한 보충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철학의 최초의 언표들은 고유한 이름들의 놀라운 순수성을 지탱하지 않으며그 언표들의 고유한 셈을 위해서나독립적으로 그 언표들을 단언한 자에 대해 기능하지 않는다철학적 언표는 언제나 그것의 생성에 있어 이중적 시련을즉 반박과 변용이라는 시련을그 언표가 철학의 역사적 생성을 가로지른다는 것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중적 양상을 경험하게 된다.

[*탈레스의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명제에서 물이란 세계를 감싸 안고 흐르는 근원의 강 오케아노스와 신들이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강 스튁스를 말하는데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탈레스가 말하는 물이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즉 사유다다시 말해 존재의 근원은 사유라는 것이다.]

 

a)     반박의 시련

 

<순수이성비판>의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들Des paralogismes de la raison pure이라는 장(순수 이성의 변증적 추론에 대한 [순수이성비판] 2선험적 변증Dialectique Transcendantale, 2)에서칸트는 코기토를 반박하고 있는데이것은 내가 칸트주의를 통해 실행하는 데카르트적 언표에 대한 반박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하는 존재라는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 이성에 대한 과학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선험적 심리학(psycholgie transcendentale)의 네 가지 오류추리로부터우리는 그것에 전적으로 내용이 비어있는 그 자체로서의 단적인 재현 이외에 다른 토대를 부여할 수 없다내게 있어그것이 개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리고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인식일 뿐인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말이다 <<내게 있어>>로부터이 생각하는 <<>> 또는 사물(Ding)로부터우리는 하나의 생각하는 선험적 주체 = X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 재현될 수 없으며그것은 우리가 결코별개로최소 개념을 가질 수 없는 이 주체를 인식하는 술어들인 생각들로부터 인한 것이다.>>

존재에 대한 동일한 지점에 대해나라는 지점에 대해데카르트가 분명한 그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개념에 대한 언표를 정립하는 지점에서칸트는 개념이 없는 비어있는 기능을 본다이와 같이 엄격한 반론을 통해 뒤집어져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적 언표는 칸트적 언표에 관해 적합한 철학적 궤적으로 존속한다코기토는 그것의 반박과 변용의 연속 내에서그리고 따라서 달리 실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으로부터의 축적가능하지 않은 변형들 내에서계속 철학적 가치를 지니는데이것은 어떠한 철학도 결코 그 언표들을 통해 요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철학적 언표는 그것의 다양한 반박들 – 동일한 반박을 통해 유지된 – 을 가로질러 유지되는 가치를 지니며그 언표는 전적으로 저자나 맥락에 봉합된 채로 남는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언표는 데카르트의 언표지만그 가치와 지정 사이에는 가장 낮은 층위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달리 말해그의 언표들이 그 주체의 고유한 이름으로서의 색인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리되지 않는다면한 철학자를 그의 언표들에 할당할 수 없지 않겠는가?

 

b)    변용의 시련

 

라깡은 응축(condensation)과 전위(deplacement)라는 프로이트적 개념들에 적용된 근대적 언어학(쏘쉬르야콥슨)에 비추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다시 읽은 이후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l’Instance de la Lettre dans l’Inconscient에서 다음과 같이 쓸 것이다. <<… 바로 이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나는 청중을 잠시 당황시킬 수 있었다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 말해야만 할 것은 이것이다내가 나의 생각의 장난감인 그곳에서나는 존재하지 않으며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에크리Ecrits p517).  

라깡의 조작(operation)은 데카르트의 언표를 탈국지화한다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생각하는-존재의 국지화 그 자체로서의 나는 그것을 분리로 겪으며그 국지화의 단위였던 나는 존재의 장소와 사유의 장소 사이에 위치한 간극의 지점이 된다엄격한 의미에서라깡은 코기토를 배제한다그는 코기토에 간극의 구조를 도입하거나 또는 주체로서의 나를 쓰러뜨린다그러나 철학적 언표를 그러한 변용의 반복에 종속시키는 것그것은 실제로 그에게 큰 가치를 승인하여라깡이 데카르트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단언했던 이유를 설명한다다시 말해그는프로이트적 발견 이후에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버리고자 하는 동시에 무의식의 주체가 과학의 주체즉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지탱했다고 주장했다그로부터 데카르트는 그 언표 가운데 제시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나는 생각하며따라서 존재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유는 유일하게 그 언표의 저편즉 반박 – 칸트의 비우기 – 과 변용 – 라깡의 버리기 – 의 연속적 횡단을 통해 그 공존(coexistence)을 정초하는 그 저편에서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는 변용과 반박을 가로질러 영속하는 그 언표들(고유한 이름의 전횡에 종속된)의 축적가능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기에철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결론철학은 언명하는(enonciative) 또는 규칙을 정하는(legiferante) 사유가 아니다따라서 과학은또한 예술이나 정치도우리가 철학의 고유한 이름에 점으로 표시되도록 하는 것을 알도록 허락하지 않는다그렇다면 철학자는 무엇인가?

 

철학자는 실존하는 어떤 사람인가플라톤에게 있어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의 기능에 대한 문제다철학자는 특정한 방식을 사랑하는 자일 터인데왜냐하면 그 실존을 어떤 강화의 체제 내에서 확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주장할 것이다사랑 안에서타자의 시험에 놓인 한 개인은 – 그러나 우리는 둘을 말할 것이며그것이 덜 까다롭다 – 이미 되어 있게 될그리고 강화된 실존에 의해 나타나게 될 주체가 된다그런 의미에서철학이라는 우리가 되어 있을 어떤 사람으로서의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 philo-sophia – 회복시키는 어떤 분명한 강렬함(intensite)의 체제 내에는 사랑이 있었다사랑은 철학자-주체(le sujet-philosophe)에게 관건이 되는 결정적으로 확정하는데 있어 주형이 된다철학자들에게는 그 실존을 강화하는데 봉사하는 이 사랑의 특정성을 지시할 책임이 있다철학적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구분(sexuation)에서 빠져나온 둘이다성차는 그 자체로 승인된 실재이나철학자로서의 철학자는 오로지 긴 시간을 둔 효과에 집착하는 채로 지속할 수 밖에 없다철학적 성향에 의해 요구되는 둘은 하나로부터 소급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임에 틀림없으며그러한 소급적 주체는 하나의 화신즉 언제나 성구분의 둘을 반영하는 어떤 것에 대해 순전히 우연적인 변형이 아니기 때문이다플라톤은 종종 에로스(eros)의 문제에 대해 말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반박할 것이지만그는 연속적으로 어떤 한 가지에 대해 말하기를 지속하는데그것은 철학적 정체성 내에서 요구되며 연루되는 사랑이 둘을즉 동일자의 법(le loi du Meme) 아래 정립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둘을승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그러한 둘의 실재라는 바위는 동일자의 등재 하에서 그것을 사유하는 능력에 대한 난관이며철학의 책무는 바로 그로부터 동일자의 올바름(droits)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인데결국 이 책무는 성구분에 걸려 좌초하게 된다그러한 좌초 – 성구분에 크게 관련된 – 는 끊임 없이 반복되는데실제로 이 성구분의 장소에서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의 관계는 가볍게 여겨진다사랑은 분명히 철학자를 식별하는 원칙이지만동일자의 올바름은 보존되며따라서 성구분이 억제되는조건 하에 있다그런 지점으로부터, <<아프로디시아(aphrodisiac)>>로서의 사랑성적인 쾌락으로서의 사랑은 결코 완전히 무시되지 않으며우리는 그 힘을 인정한다. <<그런데 자네는 관능적인 사랑의 쾌락 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것을 아는가저는 모르겠습니다게다가 그보다 더 광적인 것도 없지요>>.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반대로진정한 사랑은 지혜와 척도로 질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인가확실히 그렇습니다따라서 결코 광적인 것도 무절제로 나타나는 것도 진정한 사랑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네그럴 수 없지요>>(III, 403 a).

그러므로 사랑이 철학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는 이 둘의 최대 강도(intensite)의 원칙이 어떤 특정한 체제 하에 붙잡혀 있을 경우즉 동일자의 법 아래 붙잡혀 있을 경우로 국한된다달리 말하자면이 최대의 강도는 있는 그대로 지속되지만그 자체로부터 분리되는데즉 그 무매개성(immediatete직접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성구분의 둘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그 자체로부터 분리된 강렬함(intensite), 즉 감각적인 것 내에서 강렬함이 그 자체를 증언하지 않기에 보존된 사랑동일자의 올바름을 지탱하는 이 강렬함이 은폐된 오르또스-에로스(orthos-eros), 올바른 사랑은 일종의 탈-강화(desintensification) 가운데 강렬하게 지속된다달리 말해철학적 사랑은 성구분의 둘이라는 우연적인 강도를 폐기하는 본질적인 강렬함을 통해 확산하거나 확산되어야만 한다철학은 성을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즉 성구분의 둘의 주위를 맴도는 그 무질서한 우연성에 비추어 본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 <<올바른 사랑은 절제와 척도를 통해 질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III 403 a). 이 잣대(aune)라는 말은 보수적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강화된 강렬함의 엄밀한 형상 아래 이해해야만 한다만일 이 형상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면철학적 사랑즉 오르또스 에로스(orthos eros)는 그것의 명백하게 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분리된다그것은 이어지는 가설로 열린다사랑과 성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언제나 실존한다면이 둘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이 사랑의 강렬함은 분리되어 있음에도 있으며동일자의 표지 하에 사랑을 지킨다만일 우리가 끝까지 이 가설을 지지한다면실존의 강화와 관련된 철학자의 식별은 사랑과 성구분 사이의 비본질적 유대라는 가설 아래 실행된다플라톤이 보기에사랑에는 동일자의 논리에 연결될 수 있으며 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빼내어진 보편성의 요소가 있다철학자는 이 사랑의 잠재적인 보편성 내에서 정립되는 것을 추구한다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우연성에 의해 나타내지지 않는 항들을 통해 실존의 강렬함이라는 원칙을 추구한다철학적 활동은 원래 개념적 체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보편적인 것으로 통하는 것인데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강렬한(intense) 보편성에 의해 흔적이 남겨진(empreinte) 주체적 성향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감산된 채로철학자는 성구분의 법칙 아래 놓인 실존의 공통적인 활동 가운데 있는데실제로 그는 대상 없는 욕망에 의해 또는 성을 넘어선 사랑에 의해 파악되기에 이른다플라톤에 따를 때철학은 대상 없는 욕망이 철학자를 식별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어떤 것을 통해 실존할 때에만 실존한다철학적 사랑은 사랑 없는 사랑이다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주제가 반복된다삶은 철학자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데왜냐하면 실제로만일 대상 없는 욕망이 실존한다면구속하는 것으로서의 삶은 대상의 법칙 아래 놓인 욕망에 의해또는 성구분의 법칙 아래 놓인 사랑에 의해 부여되기 때문이다바로 자신의 삶을 넘어서 죽음을 길들인다고 말해지며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 삶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하지만삶이 철학자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idee)그가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철학자가 되는데 이르기까지이러한 죽음의 해소에 대한 동물적 하부구조와 같이 일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는데이것은 그가 대상 없는 욕망 또는 보편적인 사랑으로 실존하기 때문이다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즉 보편적인 것의 강렬함 가운데 놓인 철학자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으며실제로 죽음은 사유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그런 것처럼죽음이 사유 안으로 들어온다면,그것은 개념으로서 들어오는 것이며달리 말해철학자는 이미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진정으로 철학이 대상 없는 욕망에 의해 지탱된다면철학은 죽음에 관한 사유 – 그것이 신학자의 문제인 이상철학의 문제가 아닌 – 라는 문제를 탈구시키는데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있어 그 문제는 실존적인 해석학에 의해 제한되는 유일하게 진정한 지점이기 때문이다철학자가 치러야만 할 대가그것은 삶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우연적인 강도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철학자는 실존의 그물에 걸린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보편적인 강렬함 또는 대상 없는 욕망이라는 가설 아래 형성된 철학자의 성향으로 인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사람으로서 확인된다철학자는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작용하는 신화 또는 종교에 호소하는 수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에도 죽음으로부터 빠져 나온다그러한 철학의 정의로 인도하는 것대상 없는 욕망 또는 실존을 강화하는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가설 아래철학은 신화적인 또는 종교적인 이야기의 중단이라는 요소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강의에서 얻은 것을 요약해보다.

철학은 작업하는 사유가 아니며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예술적 활동이다철학적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집의 실존과 철학자의 식별 사이의 유대는 외재적 질서에 속한다.

철학은 개입하는 사유가 아니며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상황에 관련성이 있는 정치다.

철학은 법을 제정하는 사유가 아니며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과학즉 고유한 이름들에 의해 열린 체계를 통해 재발견된 축적가능하고 반복가능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철학은 강화하는 또는 실존적인 사유가 아니며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둘의 원칙으로서의 사랑이다그러나 그러한 강렬함을 억제하고자 시도하는 한철학은 무매개적으로 둘의 표지 아래 배치되는데왜냐하면 철학적 욕망이 대상 없는 사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다시 말해그것은 그 자체에 기초하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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